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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와 꽁트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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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관련 자료 스크랩 독도 강치의 증언 - 1905년 일제의 독도 침탈 비사
작가李芝山 추천 0 조회 737 12.02.08 11:39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역사스페셜]

독도 강치의 증언 - 1905년 일제의 독도 침탈 비사

 

 

 

한반도의 동쪽 끝 땅 독도. 이곳 북서쪽 방향으로 널찍한 바위가 있다. 물 위로 드러난 표면적이 약 3300제곱미터로 약 1000여 평. 마치 평지처럼 넓고 평평하다. 이 바위는 오랫동안 가제바위라고 불리워 왔다.

 

오병훈 독도관리사무소

“물골 뒤쪽, 서 있는 곳이 큰 가제바위입니다. 유래가 옛날에 강치들이 여기서 많이 서식을 하면서…”

 

 

가제는 강치의 옛말로 바다사자 과에 속하는 포유동물이다. 독도는 동해 일대에 살던 강치의 대규모 서식지였다. 그러나 지금은 사라진 강치. 사람보다 먼저 이 땅에 살았던 강치는 독도 침탈의 역사를 지켜본 목격자이자, 희생자였다.

 

이곳은 한반도 동쪽 끝에 위치한 우리 땅 독도입니다. 평화로워 보이지만 일본의 집요한 영유권 주장으로 긴장이 끝이질 않는 곳이죠. 이곳에 일본의 독도침탈역사를 직접 보고 겪은 또 하나의 증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독도 강치. 바로 바다사자였습니다. 이곳은 한 때 바다사자의 대규모 서식지였습니다. 하지만 보시는 것처럼 오늘 날엔 단 한 마리의 바다사자도 찾아볼 수가 없게 됐는데요. 대체 어찌된 일일까요?

 

동도와 서도. 두 개의 봉우리와 수십 개의 암초로 이루어진 섬 독도. 서도 뒤 물골 옆에 위치한 작은 동굴에서 대규모 유골이 발견됐다. 뼈의 형태로 보아 포유류의 사체가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홍희득 독도관리사무소

“뼈가 계속 나오는 군요.”

“이게 세월이 흐르면서 퇴적작용이 많이 되어서 많이 묻혀 있는 것 같습니다.”

“파면 팔수록 계속 나오는 군요.”

 

 

독도에 살았던 강치들의 뼈다.

 

한상훈 박사 / 국립생물자원관

“이 뼈 같은 경우는 발가락의 마디마디를 형성하는 뼈고요. 여기 또 아래쪽에 큰 넓은 뼈가 있는데 이 뼈는 이제 어깨 부위의 연결되는 견갑골과 같은 뼈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바다사자들이 죽었다든지 혹은 어떤 사고로 인해 그런 사체들이 파도에 의해서 모여가지고 물결에 밀려와 해식동굴 안쪽으로 축적된 것입니다.”

 

 

지금 독도엔 단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은 강치. 그 강치가 일본 시마네 현에 있다. 새끼를 둔 암컷 한마디와 함께 붙잡힌 수컷. 대왕이라고 불리우던 독도 강치의 우두머리였다.

 

오하다 준지 / 산베자연관

“현제 수컷 중에서 세계 최고급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그게 바로 이것입니다.”

 

 

독도 강치는 왜 일본 땅의 박제로 남아 있는 것일까? 해부학 전공으로 강치를 연구하고 있는 이노우에 타카오 교수는 귀중한 자료를 입수했다. 1938년 한 일본인이 촬영한 독도 동영상이다. 흑백으로 찍힌 화면 속엔 70여 년 전 독도가 생생하다. 그런데 바위 위에서 뭔가가 꿈틀대고 있다. 사진과 박제로만 남아 있던 독도 강치다.

 

이노우에 타카오 교수 / 돗토리대학 의학부

“그 전까지 강치를 찍은 몇몇 스틸 사진은 남아 있었습니다만 움직이는 영상은 최초로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이 영상을 보면 강치의 생태를 알 수 있습니다.”

 

70여 년 전 이 가제바위는 이름 그대로 강치의 쉼터였다.

 

“전에 멸종 시뮬레이션을 실시한 적이 있는데요. 대략 몇 마리를 포획해 몇 마리가 줄어들었는지를 바탕으로 추정해 보면 정확한 수치까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만, 약 수만 마리의 강치가 그곳(독도)에서 서식했다고 생각됩니다.”

 

독도는 동해 일대 강치들의 최대 서식지였다. 강치는 넓은 가제바위 위에서 새기를 낳고 바다 속 암초 지대에서 사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상훈 박사

“동해는 아주 수심이 몇 천 킬로미터 정도의 깊은 바다인데 보통 어패류들이 모여들 수 있는 곳은 적어도 해면 아래로 수십 미터 깊이에 해산물이 풍부하고 어패류가 많이 서식합니다. 그런 곳에 바다사자가 독도를 선호했던 하나의 증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본 시마네 현 북쪽 50km에 위치한 오키 섬. 시내 곳곳에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오키 향토관엔 1930~40년대 독도를 오가며 강치를 잡았던 일본 어부들의 사진이 있다. 일본인들은 총과 그물을 이용해 강치를 잡았다. 기름은 연료로 고기는 비료로 쓰고 어린 강치들은 서커스용으로 팔았다. 가죽은 사치품을 만드는데 썼다. 강치가죽은 소가죽보다 질기고 튼튼해 고급 가방과 군용 배낭의 재료로 사용했다.

 

도리히 미츠무히 / 오키 자연관

“가방입니다. 메이지 43(1910)년에 런던에서 개최된 영일박람회에 전시하여 상을 받은 가방입니다.”

 

 

당시 강치 가죽은 소가죽보다 더 비싼 값을 받을 정도로 인기였다. 영일박람회 입상의 주역들이 함께 한 사진. 그 줄에서 나카이 요자부로(1864~1934)는 가죽을 공급한 어부였다. 그는 일본 정부의 허가 아래 다케시마라는 이름에 어렵회사를 차려 독도에서의 강치 어업을 독점했다. 일본에서 그는 어업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1980년 일본에서 이를 전면 부정하는 책이 발간됐다. 지금은 고인이 된 작가 이즈미 마사히코의 책 독도비사. 이 책에서 작가는 나카이 요자부로를 바다의 약탈자라고 표현했다. 그가 강치의 천국이었던 독도에서 무자비한 살육을 저질렀다고 폭로하고 있다.

 

"아직 젖을 떼지 못한 새끼들도 잔인하게 때려 죽였으며 암컷은 그물로 잡았고 몸집이 큰 강치는 총으로 사살했다."

 

 

"리앙쿠르섬(독도) 주변이 황색으로 뿌옇게 변했다고 하니 이미 어로의 영역을 넘은 광기의 살육이 아닐 수 없다."

 

 

통계에 따르면 실제 독도에서의 강치 포획 수는 1900년대 초반에 급증했다가 점차 감소해 멸종에 이르고 만다.

 

한상훈 박사

“바사사자의 멸종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게 단도직입적(單刀直入的)으로 말씀드리면 1904년부터 일본인이 들어가서 매년 수천마리씩 포획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고…….”

사토 히도시 / 시마네 현 야생생물연구회

“일본의 민간업자들이 다케시마(독도)로 건너가 총 1만 마리 이상 어획한 기간은 고작 5년에서 7년 사이였습니다. 매년 수천 마리씩 잡은 탓에 개체수가 급격히 감소했다는 사실은 자명합니다.”

 

독도를 터전으로 살아가던 동해의 강치. 강치는 1900년대의 중반 일본 어부의 손에 무차별 학살돼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곳은 지금도 독도 강치의 유골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는 독도의 한 동굴입니다. 앞서 보신 것처럼 독도 강치는 나카이 요자부로와 같은 일본 어민들의 남획으로 멸종을 맞게 되는데요. 우린 이 남획이 시작된 1905년을 전후한 이 시기에 주목을 하게 됩니다. 바로 이 1905년에 일본은 일방적으로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편입 시켜버렸습니다. 독도 강치의 멸종사와 일본의 독도 침탈사는 그 맥을 함께 합니다.

 

 

일본 시마네현청. 청사 앞에 전광판을 설치해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광고를 하고 있다. 시마네현은 홍보영상을 제작 상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 홍보물엔 독도에서 강치를 잡는 일본 어부들이 등장한다. 강치 잡이와 독도 영유권 주장.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1905년 독도 편입을 결의한 일본 내각의 결정문. 여기에도 한 어부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는 나카이 요자부로. 독도 강치를 멸종시킨 장본인으로 지목됐던 바로 그 어부다. 일본 내각은 나카이 요자부로가 1903년부터 2년 동안 독도에서 강치 사냥을 한 것이 국제법상 점령으로 인정된다며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고 죽도 즉 다케시마라고 명명했다.

 

 

이 일은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것일까? 1904년 일본 정부에 어부 나카이 요자부로의 청원이 제출된다. 그런데 그 내용이 이례적이다. 일개 어부가 영토 편입을 요구했던 것이다. 일본인이지만 학자로의 양심을 지켜온 나이토 세이츄 교수. 독도 문제 전문가로 그는 당시 일본의 독도 편입에 모종의 음모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나이토 세이츄 명예교수 / 시마네대학

“그것은 거짓이지요. 나카이 요자부로가 (독도)에 이주했다고 (각의 결정문에) 적혀 있습니다. 독도에 이주했다고요? 얼토당토 않죠.”

 

 

나카이가 1910년 직접 집필해 오키 도청에 제출한 사업보고서. 여기서 그는 애초에 독도가 한국 땅이라고 생각했다고 기록했다. 당시 일본의 관청에서 펴낸 지도를 보면 독도에 관한 일본인들의 인식이 드러난다. 오키 섬만을 일본 영토로 포함하고 있을 뿐 독도는 아예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일본인을 위한 한국 가이드북의 성격을 띠고 있는 당시의 책들도 독도를 한국 영토로 정확히 명시하고 있다. 독도는 행정구역상 강원도에 속한다는 사실까지 밝혀 놓았다.

 

나이토 세이츄 명예교수

“(당시 독도를) 한국에서는 양코도, 오키도 사람들은 리양코도라고 불렀는데요. 그러한 책들은 공통적으로 리양코도는 한국의 강원도 울릉도에 부속되어 있는 섬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발행된 그런 책 안에 ‘한국령’이라고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당연히 이는 당시 사람들에게 독도는 일본 영토가 아니라 한국 영토라는 인식을 심어주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조선으로부터 독도 어업 독점권을 얻기 위해 먼저 도쿄에 온 나카이 요자부로는 정부 관리들을 만나면서 생각이 바뀐다. 당시 농상무성 수산 국장에게서 독도가 한국령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귀띔을 들은데 이어 그의 소개로 만난 해군성 수로부장은 한발 더 나아가 그에게 독도는 주인 없는 땅이라고 확신을 심어주었다.

 

"기모쓰게 장군이 내리신 단정에 힘입어 이 섬이 전혀 소속된 곳이 없는 섬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결국 정부 관리들의 사주에 넘어간 나카이 요자부로는 내무성에 독도편입 청원서를 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내무성 담당자가 청원을 기각한다.

 

"시국이 시국이니만큼(러일전쟁 중) 한국 영토일지도 모르는 일개 황폐한 불모의 암초를 취하여 주위에서 지켜보고 있는 여러 나라들로부터 우리나라(일본)가 한국을 병합하려는 야심이 있다는 의심만 살 뿐이므로……."

 

 

그것은 태정관지령문 때문이었다. 메이지 시대에 국정 최고 기관이었던 태정관은 1877년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님을 내무성에 통보한 바 있다. 당시 지령을 받은 내무성은 약도까지 첨부해 울릉도와 독도를 오키 섬과 구분했다.

 

김병렬 교수 / 국방대학원

“죽도 외 1도라고 해서 분명하게, 지금은 일본사람들이 독도를 죽도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 때에는 울릉도를 죽도라 불렀지요. 죽도 외 1도라는 의미는 죽도와 송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죽도는 울릉도, 송도는 그 때 일본사람들이 독도를 부르던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분명하게 지금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다 라는 것을 본문과 지령문에서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무성의 이런 견해는 당시 외부성 정무국장 야마다 엔지로의 말에 압도되고 만다.

 

"'외교에 있어 내무성 같은 곳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 부디 신속하게 청원서를 외무성으로 보내게 하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그는 왜 이런 주장을 했을까? 울릉도에 위치한 석포 일출 전망대. 1905년 일본군이 세운 망루가 있던 이곳에선 동해 앞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일본 해군은 러일전쟁을 위해 이곳에 망루와 막사 등을 설치하고 대대병력을 주둔시켰다. 러시아 발틱 함대는 당시 세계 최강이었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진격해 오는 발틱 함대에겐 기습 공격만이 유일한 대응책이었다. 그래서 일본군에게 독도는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다.

 

호사카 유지 교수 / 세종대 교양학부

“발틱 함대라든가 그런 러시아 함대를 감시하기 위한 망루를 만들 수 있는 섬이 필요했습니다. 사실 섬으로 이용을 해서 일본 해군은 발틱 함대를 이겼습니다. 처음엔 대마도, 그 다음엔 울릉도에서 승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발틱 함대를 격파한 장소가 독도였습니다.”

 

 

일본은 독도가 한국령임을 알면서도 러일전쟁을 틈타 몰래 일본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영토편입 청원을 한 어부 나카이 요자부로에게 곧바로 독도에 대한 어업 독점권을 주었다. 나카이 요자부로는 강치 번식기 독도에 임시 막사를 세우고 강치를 닥치는 대로 잡아들었다.

 

박병섭 대표 / 독도문제연구네트

“그런 나카이(요자부로)의 목적과 일본제국주의의 팽창주의 목적이 딱 맞아떨어져 리앙코도(독도)가 일본으로 편입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독도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첫 번째 희생물이었던 것이다.

 

결국 일본은 일개 어부를 사주해서 독도를 자국 영토에 편입시킨 셈입니다. 1905년을 전후해서 한 강치잡이 어부가 임시로 이곳 독도를 드나든 것을 두고 일본은 그때까지 주인이 없던 섬이었던 독도를 일본이 실질적으로 지배한 증거가 된다고 항변하고 있는 것이죠. 그야말로 민관합작의 제국주의적 침탈입니다. 헌데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일본은 조선이 그때까지 독도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고 주장을 하고 있는데요. 과연 그럴까요.

 

 

다도해 최남단에 위치한 섬 거문도. 이곳 사람들은 예로부터 어업과 함께 한반도 서해안과 동해안을 오가며 무역을 해 왔다. 이들은 수 백 년 전부터 울릉도까지도 왕래했다. 당시부터 전해 내려오는 뱃노래.

 

정경용 / 거문도 뱃노래 보존회

"골골 마다 돈부 심어

울고 간다 울릉도야

에헤헤 술 - 비"

 

울릉도를 가기 위해 칡넝쿨 꼬아 배를 맬 술비를 만들면서 불렀던 노래다.

 

이귀순 / 거문도 뱃노래 보존회 회장

“가까운 섬들은 전부 주민들이 찼고 자기들의 텃새라고 할까, 이것 때문에 못가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것이 없는 곳을 찾아서 울릉도까지 갔다는 거예요.”

 

 

환경이 척박한 거문도의 어민들은 울릉도를 오가며 생활의 필요한 물자를 얻어 온 경험을 갖고 있다.

 

 

노간주나무를 비롯한 울릉도 나무는 나무줄기가 몹시 질기고 탄력이 있어 집을 짓거나 다양한 생활용품에 활용됐다. 울릉도에도 거문도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조선 조정의 울릉도에 대한 공도 정책에도 불구하고 거문도 사람들이 울릉도를 오간 것이다. 울릉도 나무로 만든 손때 묻은 홍두깨. 얼마 전 거문도 주민이 기증한 것이다.

 

이승진 관장 / 울릉도 독도 박물관

“울릉도의 구석구석의 지명에서 남쪽지방, 호남지역 방언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통해 울릉도의 역사는 지속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울릉도 서면 태하리 학포. 해안 암벽에 글이 새겨져 있다. 1882년 고종이 보낸 수토사 이규원이 새긴 글이다. 울릉도를 돌아본 그는 본국인 140여명을 만났다. 그중 가장 많은 사람이 전라도 출신이었다. 거문도 사람들은 한반도 주변을 따라 북상하는 해류와 계절풍을 이용해 배를 타고 거제도와 부산을 거쳐 울릉도로 갔다.

 

김윤배 박사 / 포스텍 해양대학원

“우리 선조들은 바람이라든가 해류라든가 이것을 이용해 배를 조운하는 실력이 매우 뛰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시 우리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연안의 조류라든가 해류에 대한 영향을 깊이 있게 파악하고 있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런 후손들이 거문도에서 대한해협을 거쳐서 동해 울릉도까지 간다는 건 그런 역사적인 사실로 볼 때 당연한 일로 짐작이 됩니다.”

 

 

그들은 울릉도까지만 갔을까? 어업사를 연구하고 있는 김수희 교수(영남대 독도연구소)는 최근 1960년대 초 발간된 한 신문에서 중요한 증언을 발견했다. 독도에 뗏목을 타고 건너갔다는 한 거제도 주민의 증언. 독도는 주인 없는 섬이었다는 일본의 주장을 반증할 또 하나의 근거다.

 

 

“독도에 대한 부분, 이 부분인데, ‘김노인이 20세 1895년 되던 여름철에 천석짜리 무역선 5·6척이 원산을 거쳐 울릉도에 도착하여 그 울창한 나무들을 찍어 뗏목을 지었다.’

 

 

김윤삼씨는 울릉도까지는 천석짜리 배를 타고 갔지만 울릉도에서 독도까지는 뗏목을 타고 왕래했다고 증언했다. 독도까지의 거리는 200리. 현재 측량된 거리 87.4km와 거의 일치한다. 그는 독도까지 이틀 걸렸다고 말했다. 이는 지난 1988년 7월에 있었던 독도 뗏목탐사대의 항해 결과와 비슷하다. 당시 울릉도에서 출발해 74시간 만에 독도에 도착했던 탐사대. 대원들은 탐사를 마친 후 바람을 잘 타면 이틀만에도 도착하리라 예측했었다.

 

김수희 박사

“미역을 따고 전복을 채취하려면 뗏목 배가 필요합니다. 뗏목 배로 가서 수면 아래에 있는 미역과 전복을 딴 후 말려서 뗏목 배에 싣고 (다시) 울릉도로 오는 것이 더 합리적인 이야기죠. 이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독도에 들어갔다는 증거와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윤삼씨는 독도에서 가제 즉 강치를 잡았다고 증언했다. 이 기사가 사실이라면 나카이 요자부로가 강치를 잡기 위해 독도에 들어간 시점인 1903년은 훨씬 앞선다. 제작진은 김윤삼씨의 후손을 수소문했다. 거제도에 사는 손녀 김갑림씨 내외는 할아버지 살아생전 독도 강치 잡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김충현 / 김윤삼의 손녀 사위

“그때 할아버지께서 울릉도 가서 그 (강치) 고기를 독도 가서 잡아오면 한국 사람들은 돈을 주고 먹을 만한 여유가 없고 일본사람들은 그렇게 좋아하더랍니다. 그 고기를 특히나 그 고기의 성기는 아주 그때 뭐 비싼 값으로 일본사람들한테 팔았다고 그런 말을 들었었는데 그런 것들 때문에 울릉도에 가서 독도까지 가지 않았나...”

 

 

신문가사가 맞는지 그의 족보를 찾아 출생년도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출생년도는 안 적여 있었지만 신문에 나온 이름은 그의 호적상 이름과 다름을 알 수 있었다. 호적상 이름을 갖고 면사무소 제적부에서 출생년도를 확인했다. 신문기사처럼 그가 20세 되던 해인 1895년에 독도에 갔다는 증언은 신빙성이 있을까? 개국 485년은 1876년. 김윤삼 씨가 독도에 간 1895년은 그가 만 19세 되던 해로 기사의 내용과 일치한다. 그는 강치를 멸종시킨 일본어부 나카이 요자부로가 독도에서 강치잡이를 시작한 1903년보다 최소한 8년 전에 독도를 오갔던 것이다.

 

 

그가 독도에 마지막으로 간 해는 1904년이었다. 당시 세상이 어수선해서 그 후로는 독도에 가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김수희 박사

“1904년에는 독도에 가지 못했다고 증언을 합니다. 1904년이 어떤 시기냐면 러일전쟁이 일어나서 일본이 해안 봉쇄령을 내립니다. 그런 것으로 볼 때 증언이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 이거죠.”

 

 

독도는 일찍부터 울릉도의 부속 도서로 인식 관리되고 있었다. 지난 9월 23일 오후 2시 촬영 팀은 울릉도에서 눈에 보이는 독도를 촬영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다시 같은 위치를 찾았다. 독도가 더 선명하게 보인다(2011. 9. 24.). 서도 옆 탄건봉까지 보인다. 1년에 40일 정도 울릉도 곳곳에선 독도를 볼 수 있다. 하지만 독도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의 섬인 오끼에선 독도가 전혀 보이질 않는다. 울릉도와 독도간 거리에 두 배나 되기 때문이다. 거문도 사람들의 말처럼 울릉도에선 독도의 위치를 눈으로 가늠하면 건너는 것이 가능하다. 독도는 오랜 기간 우리 조상들이 눈으로 직접 보며 왕래하던 울릉도의 부속 도서 였던 것이다.

 

 

이곳은 독도 동도 중턱입니다. 지금 제 뒤로 서북 방면의 멀리 섬이 하나 보이는데요. 바로 울릉도입니다. 방금 앞서 보인 것처럼 오늘 같은 날씨에는 울릉도에서도 이곳 독도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이미 약 6백 년 전 세종실록지리지에선 날씨가 청명하면 두 섬이 서로 바라볼 수 있다고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랜 세월 울릉도의 부속 섬이었던 독도를 일본은 주인이 없는 땅. 즉 무주지로 규정을 하고 1905년 시마네현에 일방적으로 편입시켜 버립니다. 자 이 과정에선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함께 보시죠.

 

 

섬 전체가 화산지형으로 풍부한 원시림과 수산 자원을 가진 울릉도. 울릉도는 자원이 풍부해 오래 동안 왜구를 비롯한 일본인들의 침탈을 받아왔다. 울릉도 도동리엔 일본인이 지은 집이 남아 있다. 당시 희귀목이었던 솔송나무 규목 등을 재료로 지은 일본 전통 가옥이다.

 

이상인 / 전 울릉도 문화원장

“이 집은 사카모토 나이지란 일본인이 1910년도에 설립했습니다. 그의 직업은 벌목, 사채업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조선 정부의 공도 정책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울릉도에 침입해 자원을 약탈해 갔다. 보다 못한 고종은 1881년 수토사 이규원을 보내 울릉도의 상황을 알아보게 했다. 수토사 이규원은 일본인이 나무를 베어 해안에 쌓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보고 했다. 울릉도에 자원을 훔쳐가려는 일본 선박의 출입이 끊이지 않고 있고 일본이 이 섬에 눈독을 들이고 있어 대책이 필요하다고 보고 했다. 조선정부는 일본 외무성에 울릉도에 대한 도항을 금지할 것을 요청했다. 1883년 3월 일본의 태정관은 자국민들의 울릉도 출입을 금지시켰다.

 

박병섭 대표

“1870년대의 울릉도 침탈은 조선정부가 이를 알아채고 일본정부에 항의하여 일본정부는 선박을 울릉도에 파견하여 일본인들 모두 태워 철수시켰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일본인들의 침입은 끊이지 않았다. 대한제국은 적극적인 개발정책으로 전환하면서 1900년 마침내 칙령(제41호)을 반포한다.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해 행정구역을 개편했다. 울도군의 관할 지역 또한 명확히 했다. 울릉 전도와 죽도, 석도. 석도 즉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명확히 한 것이다. 울릉도 바로 옆엔 관음도와 죽도. 두 개의 부속 섬이 있다. 이 중 죽도는 칙령 41호의 죽도와 일치한다. 일본은 석도가 나머지 한 섬. 즉 관음도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관음도와 울릉도의 거리는 불과 100m. 이런 까닭에 관음도는 섬의 목덜미라는 뜻에 도항이라 했고 일제강점기부터 관음도라는 명칭으로 불리웠다. 남은 부속 섬은 울릉도에서 약 87km 떨어진 독도뿐이다.

 

 

고종은 칙령 41호를 통해 울릉도와 죽도, 그리고 동쪽 끝 섬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임을 분명히 했다. 그렇다면 대한제국은 왜 독도를 예전부터 부르던 우산도라 표기하지 않고 석도라고 했을까? 두 개의 암석 봉우리와 수십 개의 암초로 이루어진 섬 독도. 한국지명총람에 의하면 한반도 주변엔 이런 돌섬이 여럿 있는데 한국인은 이런 섬들을 석도, 독도, 혹은 독섬으로 섞어 불러왔다. 이는 돌을 독이라고 부르던 전라도 방언에서 유래한다. 전라도에선 독섬을 그 뜻을 취해 한자로는 석도라 표기했고 독이라는 음을 취하고 이를 다시 한자로 고독할 독자를 써서 독도라 부르기도 한 것이다.

 

 

얼마 전 열린 한 토론회(2011. 9. 11.). 측량 상의 석도 표기에 대해 기존의 해석을 보강한 주목할 만한 주장이 나왔다. 서양에서는 당시 독도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1849년 동해에 나타난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호. 독도를 처음 본 프랑스 인들은 이 작은 돌섬을 자신들의 배 이름을 따 리앙쿠르 락스 즉 리앙쿠르 바위라고 표기했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서양인들의 표기를 따라 당시 지도에 독도를 리앙코르 석이라는 명칭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리앙쿠르 석도도 대한제국의 우산도임을 세계에 국제법상 명확히 알리기 위하여 우산도라고 하는 국내 명칭보다는 (국제적인 용어인) 리앙쿠르 석도(Rocks)의 의미를 포함하는 명칭인 석도로 표기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여기엔 주목할 점이 또 하나 있다. 대한제국은 칙령 반포를 준비하기 위해 국제조사단을 조직해 울릉도를 사전 조사했다. 그런데 이들 중엔 서양인 라포트와 함께 부산 일본 영사관 부영사인 아카사카가 있었다.

 

신용하 명예교수

“일본 공사관은 이 칙령 제 41호 제정을 위한 우용정 단장의 국제조사단에 부산영사관의 부영사 아카스카를 참가시켜서 별도의 조사보고서를 받고 또 공동조사보고도 제출했고 현지조사까지 했으므로 이 칙령 제 41호의 개정 과정과 관보에의 게재도 잘 알고 정독하여 검토했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본은 1900년 대한제국이 칙령을 반포한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어부가 독도에서 강치를 잡을 것을 국제법상 점령했다고 규정하면서 독도를 일방적으로 편입한 것이다. 그것은 명백한 침략 행위였다.

 

박병섭 대표

“독도는 대한제국의 관할 하에 있었으므로 결코 무주지가 아니었던 겁니다. 그래서 일본의 독도 편입은 한국에 대한 침략 행위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에 대한 정부 차원에 대한 고시조차 않았다. 그들이 한 일은 지방 신문에 작게 공고를 낸 것이 전부였다. 대한제국의 독도에 일본영토 편입사실이 알려진 것은 이듬해 3월이었다. 시마네현 지사 등 소위 독도시찰단이 독도를 거쳐 울릉도에 도착해 울릉 군수에게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말한 것이다.

 

 

당시 울도 군수 심흥택이 올린 보고서는 대한제국이 독도에 대한 분명한 영유의식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호사카 유지 교수

“1905년의 독도편입은 1904년에 맺어진 한일 기본조약 속의 ‘대한제국의 영토를 확실하게 일본은 보존하겠다(제 3조)’라는 조항에 완전히 위배되는 행위였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었던 일본은 비밀리에 독도를 편입시킨 것이고 그리고 대세가 바뀐 을사늑약 이후에는 공개적으로 ‘독도는 일본의 영토다’ 이런 식으로 대한제국에 말도 했고 행동도 했습니다.”

 

이후 대한 제국은 일본의 실질적인 대응을 할 수 없었다. 당시 조선엔 통감부가 설치돼 사실상 식민지배가 실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도의 강치들도 기억 속에서 잊혀 갔다. 주인 잃은 땅에서 일본인들에게 무참히 학살당했던 독도 강치. 침탈의 역사를 두 눈으로 보고 겪으며 이 바다에서 사라져 간 것이다.

 

1905년 한 강치잡이 어부의 청원을 빌미로 이루어진 일본의 독도 편입과정은 당시 일본제국주의의 야만성과 부도덕성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일본은 여전히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며 제2의 독도 침탈을 노리는 모습입니다. 일본은 부도덕한 과거를 청산하는 차원에서 독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일본제국주의 총칼에 무참히 살육당한 독도 강치들은 비록 지금 모두 사라졌지만 그 수난의 역사는 여전히 남아서 일본의 독도 편입은 강탈이었노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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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2.09 17:55

    첫댓글 아, 역사스페셜 잘만들었군요. 작가 이지산님도 수고했구요.

  • 작성자 12.02.10 13:10

    감사합니다.좋은 오후되세요

  • 12.03.01 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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