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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28일 편집 정 진완
이번 주말이면 전대원이 눈사태를 맞았던 1971년 서울공대산악부 동계한라산 원정 50주년이 됩니다. 당시 제가 컬러 사진을 촬영해서 슬라이드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유학간 후에 필름의 행방이 묘연하다가 이번에 찾아서 사진관에서 스캔하여 영상파일을 만들었습니다. 사진은 슬라이드용인 Kodak Ektachrome 필름을 사용해서 Contax 카메라로 촬영했습니다. 공식 등반기는 1971년에 서울공대학보에 게재되었고 이번에 사진을 공유하면서 사진 설명과 함께 가지고 있던 등반 후 메모를 참고해서 기억나는 개인적인 경험을 회고 형식으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오래 전 일이라 어떤 사진은 촬영한 날짜가 기억나지 않는데 사진 순서는 정확합니다.
등반대 구성
3학년: 김부경, 김태환, 김필원, 이거상 (리더)
2학년: 강현태, 정진완, 최해욱
1학년: 김광배, 김기복, 문태성, 홍윤식
일별 경유지는 공격조 기준인데 후반부 일정에는 전체 대원이 같이 이동했습니다.
1971년 1월 29일 목포 → 제주시
사진1 목포 유달산을 뒤로하고
1월 30일 제주시 → 산천단 → 관음사 → 표고밭
사진2 대절한 마이크로버스로 산천단에 도착
사진2의 아랫부분에 있는 배낭에 매달려 있는 설피가 그 겨울에 자체 제작한 설피다. 그 때 산악부에서 가지고 있던 나무
프레임의 설피도 있었는데 숫자가 부족해서 사진의 설피를 새로 제작했다. 알루미늄 관을 U 자형으로 구부려서 2개를 타원형으로 연결하고 관에 여러 개의 구멍을 뚫어서 슬링으로 정구 라켓 같이 엮은 후 신발을 묶을 수 있게 만들었다. 면적은 알루미늄 설피가 나무 설피보다 더 컸다. 그런데 사용 경험이 없어서 어떤 설피가 성능이 좋은지 몰랐다.
지난 해의 동계 설악산 등반에서는 강추위였지만 눈이 거의 없어서 설피를 사용하지 않았고 러셀도 필요 없어서 첫날 후에 공격조와 지원조의 분리를 없애고 식량 박스들을 모두 나누어서 지고 등반했다.
서울 근교 산들은 눈이 별로 없었는데 백운대에 가서 눈이 가장 많이 쌓인 곳을 찾아서 2가지 설피를 실험해 본 결과
알루미늄 설피가 나무 설피보다 더 성능이 좋았다. 그래서 알루미늄 설피를 몇 개 더 만들어서 한라산에서 사용했다.
사진3 산천단에서 관음사 가는 도중
사진4 가운데 평평한 고원이 개미등이고 그 왼쪽이 탐라계곡
사진5 다른 산에 비해서는 눈이 많지만 아직 산기슭이라 그리 많지 않음
사진6 관음사의 설경
사진7 관음사를 지나서 표고밭 초입
1월 31일 표고밭 → 탐라계곡 입구 → 탐라계곡 하반부 캠프1
사진8 표고밭 민가에서 숙박한 공격조
사진9 표고밭 민가를 떠나서
사진10 표고밭의 설경
사진11 표고밭에서 탐라계곡 가는 도중
사진12 탐라계곡 초입에서 설피 착용
표고밭을 지나면 개미등으로 가는 등산로와 탐라계곡이 교차하게 된다. 표고밭까지는 눈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개미등으로 가는 등산로를 벗어나서 탐라계곡으로 들어가니 적설량이 딴판이다. 허벅지까지 빠지더니 곧 허리까지 빠지며 가만히 있으면 더 빠진다. 설피를 착용해도 무릎까지 빠진다. 여기부터 공격조는 설피를 착용하고 선두가 러셀하기 시작했다.
큰 짐을 지고 깊은 눈을 러셀하는 것은 매우 피곤한 작업이었고 선두가 20분 이상 러셀하기 어려웠다. 10~15분 간격으로 선두를 바꾸며 한시간에 300~400m 정도 전진했다.
사진13 계곡에 쌓인 눈을 러셀하며 전진
사진14 흑백사진 같은 설경을 보며 잠시 휴식
사진15 탐라계곡을 올라오는 지원조
사진16 탐라계곡 하반부의 캠프1
탐라계곡 하반부에서 눈 위에 캠프1을 설치했다. 지원조는 식량 박스들을 캠프1에 운반해 놓고 표고밭으로 돌아갔다. 동계 등반의 일상대로 오후4시 이전에 운행을 정지하고 일찍 저녁을 해먹었다. 잘 준비를 마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영혼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거대한 자연에 둘러 쌓인 인간의 미약함이 영혼의 세계를 갈구하는 것인가 보다. 우리 3명의 조그마한 텐트를 둘러싼 설산에 깃든 눈의 정령은 무언 중의 대화를 우리의 영혼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2월 1일 캠프1 → 제1폭포 → 제2폭포 위의 캠프2
사진17 멀리 보이는 폭포가 탐라계곡의 4개 폭포들 중 가장 난관인 제2폭포
사진18 제2폭포 아래서 루트 파인딩
한라산의 특성 상 계곡물이 암반으로 스며 들어가서 대부분의 계곡이 폭우가 올 때만 수량이 많고 겨울에는 폭포의 수량이 적어서 빙폭이 형성되지 않아 빙벽 등반으로 폭포를 오를 수 없다. 탐라계곡에는 4개의 폭포가 있는데 그 중에 제2폭포가 상당히 커서 높이가 50m 정도며 직벽에 있는 고드름 폭포라 우회해야 하는데 폭포 아래의 양쪽 사면이 급경사여서 등반의 난이도가 높았다. 제1폭포는 제2폭포에서 약 100m 전에 있는데 올라가며 오른쪽의 사면에 있어서 아래로 통과하면 되었다. 제2폭포 아래 도착해서 루트 파인딩을 한 결과 오른쪽의 60도 정도의 설벽을 직등하고 그 위의 짧은 직벽을 나무를 이용해 오른 후 설사면을 30m 정도 트래버스하여 제2폭 위로 나가는 경로를 택했다.
설벽 등반 경험이 전혀 없었는데 졸업하신 선배에게 말로 배운 방법으로 연습없이 최초의 실전을 하게 되었다. 가파른 설사면에서 양손으로 스키 스톡을 수평으로 위로 치켜들었다가 앞의 사면에 내려치고 스톡을 잡은 채로 턱걸이를 하며 오르면 되었다. 표면에 신설이 쌓였지만 약간 습설이라 감촉도 좋았고 20~30m의 급사면을 빠르게 오를 수 있었다. 제2폭 위에 도착한 후 경로에 고정자일을 설치했다.
사진19 눈의 세계에서
사진20 폭포 위에서 아래를 보며
사진20이 이번 원정의 마지막 컬러 사진이다. 카메라에 필름이 몇 장 남아있었지만 기상 악화로 촬영할 기회가 적었고 등정 등 주요 장면을 위하여 몇 장 남겨 놓았는데 결과적으로 마지막 사진이 되었다. 카메라가 여러 대 있었으면 추가로 흑백 필름을 사용해도 귀중한 사진이 되었을텐데 아쉽다.
시간도 늦고 가까운 거리에 좋은 캠프 사이트도 없어서 제2폭포 위에 캠프2를 설치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둠 속에서 발치가 찬물에 젖어와서 깼다. 랜턴을 켜보니 새벽 3시가 좀 넘었고 외부 기온으로 차가워진 윔퍼텐트 내피에 몇 시간 동안의 호흡에서 나온 습기가 하얗게 서리의 얇은 막으로 얼어붙은 후에 미세한 눈발이 되어 내려와서 텐트 바닥에 떨어지며 물방울이 되어서 매트리스 위에 있는 상체는 좀 낫고 텐트 바닥 위에 있는 슬리핑백의 발치부터 젖어오는 것이었다.
설악산이나 지리산은 추워서 이런 일이 없었는데 한라산은 덜 춥고 더 습해서 그런 것 같다. 나중에 들어보니 다른 텐트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방수 매트리스를 사용하면 상체는 좀 나았다. 준비할 때 매트리스가 없는 대원들은 새로 만들었는데 압축 스폰지를 크게 잘라서 식량 박스 포장용의 두꺼운 비닐로 포장해서 모양은 볼품 없지만 크고 쿠션도 좋고 완전 방수였다. 장비점에서 파는 헝겊 커버의 매트리스는 물난리에 속수무책이었다.
용진각에 도착할 때까지 텐트에서 매일 밤 이런 물에 젖는 문제가 있었으며 한참 곤하게 잘 새벽
3~4시부터 물을 피하며 자다 깨다 해서 컨디션에 적지 않은 영향이 있었다.
2월 2일 캠프2 → 제3폭포 → 제4폭포 위의 캠프3
온 세상이 하야니 거리 측정과 지형 판별이 어려웠다. 제3폭포까지는 1km 정도인데 양쪽 사면이 위험한 눈사태 지역이고 여기저기 눈사태난 자국이 있었다. 전진하며 보는 사면마다 눈이 이빨을 드러내고 위협하고 있었다. 눈사태에는 크게 두가지 종류가 있는데 신설이 많을 때 표면에 쌓인 눈이 쏟아져 내리는 산설 (散雪 loose snow) 눈사태와 여러 층으로 쌓인 눈이 무너지며 떨어지는 판 (板 slab) 눈사태가 있다. 판 눈사태가 대규모 눈사태이고 위력이 크다.
제3폭포는 제2폭포보다 더 우회해야 하는데 적설상태나 그 밖의 여건이 좋아 제2폭포보다 쉽게 우회했고 제4폭포는 경사 45~50도에 높이 15m 정도로 쉽게 직등했다. 날씨는 상당히 악화되어 계속 눈보라가 쳤다. 점심 식사 중에 눈이 왔는데 설편이 아니고 공 모양에 조그만 뿔 같은 것이 뒤덮인 눈이 쏟아졌다. 1시간 동안 8cm 정도의 눈이 쌓여서 배낭들과 꺼내 놓은 물건들을 깨끗하게 덮어버렸다.
오후 2시반쯤 공격조는 제4폭포 위의 캠프3 사이트에 도착했다. 지원조에게 식량을 올려놓고 캠프2 사이트로 내려가서 캠핑하라는 리더의 전언을 전달하러 내려갔는데 혼자 가자니 주위가 더 적막했다. 제3폭포와 제4폭포 사이는 악천후로 낮인데도 어두컴컴했고 올라올 때 넓게 다진 길은 자취도 없이 눈에 묻혀서 올 때의 짐작으로 다시 러셀을 하며 내려갔다. 제3폭포 근처에 있으려니 했던 지원조를 한참 더 내려가서 제2폭포 위의 캠프2 사이트에서 만났다. 3시간에 올라온 거리를 50분에 내려갔다. 지원조는 캠프2 사이트에서 점식 식사 준비 중에 좀 큰 산설 눈사태가 일어나서 모두 허리까지 눈에 잠겼고 앉아있던 한 대원은 머리 끝까지 잠겼으며 눈에 묻힌 장비들을 찾는데 오래 걸렸다고 했다. 눈사태 지역에서 지원조가 캠핑하면 위험할 것 같아서 식량을 중간에 남겨놓고 지원조 모두와 함께 캠프3으로 올라갔다.
2월 3일 제3캠프 → 용진각
아침을 먹고 짐을 싸며 처음으로 우리 등반대의 조난 가능성에 대한 방송을 라디오로 들었다. 러셀을 하며 용진각으로 전진했다. 며칠 전부터 눈이 즐겁기 보다 지겨웠고 자주 산설 눈사태가 내려왔으며 설사면을 보면 여기 저기서 눈사태가 날 것 같아 스트레스를 주었다. 탐라계곡 상반부는 고도가 높아서 적설량이 많으며 웬만한 나무는 전부 눈에 묻혀서 눈만 쌓인 곳은 설피가 먹히는데 나무 위로 눈이 덮인 곳은 성기게 눈이 쌓여 설피를 신고도 허리까지 빠졌다. 계곡 바닥은 시냇물과 큰 바위들 위에 눈이 덮여 일종의 크레바스를 이루어서 사면의 중앙부를 러셀하며 가야했다.
공격조는 오후 2시반경에 용진각에 도착했고 지원조를 지원하러 나갔다가 전원 해질 무렵에 용진각에 들어왔다. 용진각은 백록담 계곡에서 정상을 보고 왼쪽 사면의 해발 1500미터에 가운데 굴뚝이 있는 원형 시멘트 대피소인데 밖으로 열리는 쇠문이 밖에 높게 쌓인 눈 때문에 조금 밖에
열리지
않아 비집고 들어가야 했고 안에서 보니 3개의 창문은 월동 준비로 모두 판자로 막아 놓았다.
라디오에서는 계속 우리 등반대를 수색하고 있다는 뉴스 나왔다. 다음은 1971년 2월3일에 제주신문에 실린 기사이다.
“지난달 30일 눈 덮인 한라산 등반 길에 오른 서울 공대생 12명이 5일이 지난 3일 정오 현재 소식이 끊겨 안전이 걱정된다. 서울공대 산악대원 12명은 지난달 30일 관음사를 출발 탐라계곡을 따라 5일 하산 예정으로 정상 정복에 나섰는데 그후 계속 눈이 내려 용진각에는 적설량이 350cm나 되는데도 소식이 전혀 없다.”
기사 중 대원 12명은 11명의 오류였다. 원래 12명 예정이었다가 1명이 참가 못해서 11명이 되었는데 등반 계획서에 있던 12명을 인용했다. 나중에 들으니 서울에서는 동아일보에 서울공대 산악부 한라산 등반대가 조난한 것 같다는 기사가 처음 나간 후 알려졌다고 한다.
2월 4일 용진각
공격조는 정상 정찰을 했고 지원조는 탐라계곡에 두고 온 식량을 용진각으로 운반했다. 공격조는 점심 식사 후 정상으로 향했는데 안개가 심하고 심설에서 길을 찾기 어려워서 어느 정도 전진하다가 조난을 피하기 위해 돌아섰다. 올라가다가 안개가 잠시 거쳐서 보니 높은 설사면에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10m ~ 20m 높이의 병풍과 같은 암봉군이 있고 여기저기 침엽수가 있는 낫 설은 광경이 나왔고 그곳을 오른쪽으로 트래버스 해서 조금 올라가니 허허벌판이 나와서 엉뚱한 곳에서 헤매는 것 같았고 허허벌판에 잘못 들어가면 완전히 방향을 잃을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백록담 계곡의 왼쪽 사면으로 너무 올라간 듯하다.
모든 대원과 식량이 용진각에 모였고 튼튼한 대피소에서 숙박하게 되어 분위기가 좋았다. 해 질 무렵 용진각 바깥 사면에 길로 쌓인 눈에서 눈을 뭉치기도 하고 설동을 만들기도 하다가 리더가 1학년은 전원 3학년과 함께 설동에서 숙박하도록 하고 어두워지며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모두 용진각으로 들어왔다. 나도 설동이 그럴 듯하면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지금도 생생한 극저음의 우루룽 소리가 순간적으로 들리더니 쾅 소리와 함께 모든 촛불이 꺼지며 암흑 속에 눈 폭풍이 불어 닥쳤다. 시멘트 천장이 무너져 떨어지고 있는지 알았고 뿌리는 차가운 눈 속에서 숨이 가빠졌고 곧 숨이 막히겠구나 생각되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온몸을 휘몰아치던 극심한 눈 보라가 잦아들고 어둠 속에 침묵이 흘렀다. 점호를 부르고 플래쉬를 밝혀보니 전대원이 무사했다. 눈은 판자를 댄 창문들을 부수며 들어왔고 밖으로 조금 열리는 철문을 안으로 크게 휘며 쏟아져 들어왔다. 용진각 위의 왕관릉 사면에서 발생한 본격적인 판 (slab) 눈사태였다.
용진각 내부에는 공간의 절반 정도에 설사면과 같이 경사지게 눈이 쌓였으며 용진각이 매몰되어 외부와는
단절되었다. 눈이 대원들의 무릎에서 목 정도 쌓여 있었는데 눈이 굳어져서 혼자 빠져 나올 수 없었다. 피켈로 주위의 굳은 눈을 파내서 빼내야 했다. 눈사태가 끝날 때 눈이 굳어지는 것이 눈폭풍과 함께 판 눈사태의 대표적 위험성이다. 그래서 눈사태를 만나면 눈보라가 칠 때 배영과 같은 헤엄을 눈 속에서 쳐서 끝나기 전에 눈 표면으로 탈출해야 한다. 눈사태가 끝났을 때 표면으로 나오지 못하면 굳은 눈 속에서 움지기지도 못하고 질식사하게 된다.
거의 모든 장비와 식량이 눈 속에 묻혔다. 스키는 커서 노출되었고 다행히 피켈을 바로 찾았다. 우선 피켈로 대원들을 눈속에서 하나씩 꺼내고 다음으로 일부는 피켈로 굳은 눈을 블록 모양으로 만든 다음 스키로 떠서 주변에 쌓으며 묻힌 장비와 식량을 발굴했고 일부는 스키로 사면의 반대 방향에 있는 창문에서 45도 경사로 환기구를 뚫었다. 몇 시간 후 당장 사용할 장비와 식량을 찾고 약 4m 길이의 환기구를 뚫어서 사태를 일단 수습했다. 이럴 때 필요했던 삽은 설동 안에 두고 와서 사용을 못했다.
대규모 눈사태를 맞고 11명의 전대원이 무사했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외부에서 이정도의 눈사태를 맞았으면 생존 가망이 없다. 눈사태가 조금 일찍 났으면 여럿이 외부에 있었고 취침 중에 났으면 많은 대원들은 설동 안에서 눈사태를 맞았을 것이다. 사태는 일단 수습했지만 모두 심신이 지쳐 있었다. 어떤 대원은 유서를 썼다고 한다. 다른 대원들도 모두 마음 속으로 유사시에 가족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생각했을 것이다.
2월 5일 용진각
아침부터 눈에 묻힌 물품들을 발굴했다. 아침에 라디오에서 박정희 대통령께서 한라산에서 조난한 서울공대 학생들을 반드시 구조하라고 지시했다고 하고 미군 산악스키부대를 헬기로 용진각에 투하한다고 했다. 분위기는 어젯밤 보다 나아졌고 미군을 만나는 것에 대비해 영어회화 연습도 했다. 악천후로 구조대가 못 오면 식량은 충분하니 개미등 코스로 하산을 고려했다.
오후에 라디오를 들으니 계획이 변경되었는지 제주도의 구조대가 개미등 코스로 전진하고 있다고 했다. 저녁 6시반 경 구조대가 도착했다. 구조대는 적십자 산악안전대원 3명과 경찰 1명으로 구성되었다. 경찰의 무전기로 우리의 소식은 곧 전국에 알려졌다. 산악안전대원들의 말투는 진솔했고 태도는 정중해서 우리와 대화가 잘 되었다. 구조대에 의하면 최 난코스인 개미목 윗쪽의 삼각봉 트래버스 부분에 이미 눈사태가 나 있어서 눈이 안정되어 예정보다 빨리 왔다고 한다. 아마도 폭설이 불안정하게 쌓인 삼각봉의 눈사태가 왕관릉의 눈사태를 유발했을 것이다.
2월 6일 용진각 → 개미등 → 제주시 → 서울
새벽 4시반에 기상해서 하산 준비를 서둘렀다. 짐은 남겨두고 몸만 갈지 모른다고 해서 스톰파카 주머니에 잔뜩 소품들을 넣었는데 다행이 배낭도 가져갈 수 있다고 해서 가져갈 짐을 모두 챙겼다. 눈사태에 묻힌 용진각을 뒤로하고 위협적인 삼각봉을 트래버스해서 광활한 개미등으로 나가니 짙은 안개로 시야가 10~30m로 방향을 잡기 어려웠다. 산악안전대원 중 과묵하던 한 분이 적설기 한라산을 100회 정도 등반했다는
실력파이고 눈 덮인 개미등에서 10m 주위를 보면 위치를 파악할 정도여서 안내를 잘 했다.
개미등 거의 끝나는 위치에 헬기가 2대 와서 11명의 대원들은 분승했다. 안타깝게도 자리가 없어서 구조대는 작별하고 걸어서 하산하게 되었다. 경찰이 하산에 사용하게 내 설피를 달라고 해서 벗어주었다. 헬기에 탑승하자 조종사가 배 고프냐며 간식을 건네 주었다. 아마 며칠 굶은 조난자들로 알았던 모양이다.
제주시에 헬기로 도착해서 제주 경찰서에 가서 경찰 서장님을 접견했다. 서장님은 점잖게 이야기했는데 여러 군데서 만난 하급 경찰관들과 공무원들은 입산 금지를 어기고 입산해서 많은 사람들을 고생시켰다고 질책했다. 제주시를 관광하며 대원들을 기다릴 예정이셨던 이영배 지도교수님은 조난 가능성이 처음 보도될 즈음에 경찰에 검거되어 그동안 많은 고생과 걱정을 하신 것 같으며 우리를 만나자 피곤한 모습으로 이렇게 무사하니 되었다고 하셨다.
C54 공군 수송기를 탑승하기 위해 공군 비행장으로 갔다. 거기서 출발 전에 모든 대원이 기립해서 성함은 기억 안 나는데 비행장의 책임자이신 듯한 멋진 탁대령님의 기억에 남는 말씀을 들었다. 여러분은 이번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텐데 앞으로 인생에 더 힘들은 많은 난관들이 닥쳐올 것이며 모두를 용감하고 지혜롭게 극복해야 한다는 요지였다. 수송기로 김포 공항에 도착하여 대기하던 서울공대 버스를 타고 서울대 종로구 캠퍼스로 이동하여 총장실에서 총장님과 공대학장님을 접견하고 학교 의무실에서 간단한 건강진단 후 해산하여 모두 집으로 향했다.
후기
그 후 여러 매체들의 기자들과 인터뷰가 있었고 몇 대원들이 MBC TV 아침 방송에 출연했다. 등산복 차림으로 오라고 해서 모두 스톰파카를 입고 나갔고 아나운서가 사전 대담에서 당시에 여러가지 나쁜 뉴스들이 있는 중에 우리가 한라산에서 조난했을 것이라는 국민의 불안 속에서 폭설을 헤쳐 나와 이렇게 건강하게 생환했다는 밝은 면을 보여주자고 하여 모두 명랑하게 이야기를 했다. 짐작은 했지만 돌아와서 보고 들은 바로 많은 분들이 우리의 안전을 걱정했고 여러 산악 그룹에서 구조를 위한 의논과 준비를 했다. 염려해 주셨던 가족, 친지, 정부 인사, 기관 임직원, 산악계 선후배와 동료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린다.
대원들에게는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힘들었으며 한라산의 설경 속에서 생과사를 넘나 들은 평생 잊지 못할 등반이 될 것이다. 지금도 한 겨울이면 눈 덮인 탐라계곡의 인적 없는 숲 속에서 눈의 정령이 빛을 발하며 떠다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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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주인으로 제주 한라산을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사진 중에 표고밭에서 찍은 사진과 산천단 사진 얻을 수 있는지요.
표고밭 사진이 없어 자료를 찾다 우연히 27임반 고씨 표고밭 사진을 보고 글을 남깁니다....도와주시면 감사하겠고 출처는 밝혀 이용하겠습니다.
연락되신다면 메일로 부탁드립니다.hsangbong@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