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해운대(海雲臺)
해운대구 중동 일대의 수려한 사빈해안과 배후의 송림, 동백나무 자생지로 유명한 육계도인 동백섬 등이 조화를 이룬 절경지로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다. 해운대란 이름은 신라 말 대문호인 최치원 선생이 지금의 동백섬 일대를 거닐다가 이곳의 절경에 심취하여 동백섬(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6호) 남쪽 암벽에 자신의 자인 해운(海雲)을 따서 “해운대(海雲臺)”라는 세 글자를 새긴 데서[해운대 석각(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5호)]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옛 문헌인『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1513)』동래현 고적조에 해운대는 “현(縣)의 동쪽 18리인데 산 절벽이 있어 바다 가운데로 들어와 누에 머리와 같고 그 위는 모두 동백, 두충, 송삼(松杉) 등의 나무가 사시사철 울창하고, 낙엽이 쌓여 지나가는 말발굽에 밟히는 것이 3, 4치나 된다. 남쪽으로 대마도를 바라보며 심히 가깝다……”라고 하였다. 예로부터 지리적으로 살기 좋은 고장을 삼포지향(三抱之鄕)이라 하였는데, 해운대는 온천을 더한 사포지향(四抱之鄕 ; 산, 강, 바다, 온천)의 경승지로 손색이 없다. 이러한 빼어난 자연경관을 아울러『해운대팔경(海雲臺八景)』이라 불렀는데, 첫째는 「해운대상(海雲臺上)」으로 해운대 위에서 바라보는 경관이고요, 둘째는「오륙귀범(五六歸帆)」으로 오륙도 앞에서 고깃배들이 돌아오는 한적한 풍경, 셋째는「양운폭포(養雲瀑布)」로 해운대 주산인 장산계곡에 있는 폭포, 넷째는「구남온천(龜南溫泉)」으로 해운대 온천을 말한다.
다섯째는「봉대점화(烽臺點火)」로 간비오산(干飛烏山)의 봉수대에서 피어오른 봉화가 화산을 연상케 하는 광경, 여섯째는「우산낙조(牛山落照)」로 서산으로 지는 저녁놀의 아름다움, 일곱째는「장지유천(·旨流川)」으로 장지천에 늘어선 버드나무의 우거진 풍경, 여덟째는「춘천약어(春川躍漁)」로 밝은 달밤에 춘천에 고기가 뛰는 광경을 말한다. 해운대는 예로부터 경승지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대한팔경 중의 하나인 “해운대의 일출”은 동백섬, 송림공원, 해수욕장과 어우러져 우리나라 최고의 관광 휴양지요. 부산의 대표적인 경승지 가운데 하나이다.
2. 신선대 신선대(神仙臺,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9호)는 남구 용호동 산 185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기장군 일광면 달음산에서 시작한 금련산맥은 장산·금련산에 이어져 황령산에서 뻗어 나온 봉래산 산등성이가 부산만에 몰입하는 우암반도의 남단에 해당된다. 신선대의 해안선 지질 구성은 화산암질로 오랜 세월 동안 파도의 침식작용에 의해 발달된 해식애와 해식동으로 절경을 이루고 있다. 지척의 오륙도와 함께 부산 제일의 절경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신선대는 용당동 해안선의 왼쪽 해안에 위치한 바닷가 절벽과 산 정상부분을 총칭하여 부른다. 신선대 주변의 산세가 못을 둘러싼 용의 형상과 같다고 하여 이 일대를 용당(龍塘)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속설에 의하면, 신라 말 대문호인 최치원 선생이 신선이 되어 이곳에서 노닐었다 하며, 산 정상에 있는 무제등 이란 큰 바위에는 신선의 발자국과 신선이 탄 백마의 발자취가 있다는데서 지명이 유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동래군지(東萊郡誌, 1937)』고적조에 신선대는 “군(郡)의 남쪽 30리 부산의 동쪽에 있으며, 산 정상에는 최천학(崔天學)의 무덤이 있고, 그 아래에는 오륙도가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옛날 이곳에서 신선들이 노는 풍악소리가 들려 왔다고 하며 주위는 울창한 송림이 우거져 있어 경관이 빼어나다. 이곳에서 자생하는 식물은 봄보리수나무 등 상록화엽수와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등의 낙엽활엽수가 숲을 이루고 있고, 메비둘기, 떼까치, 황금새 등의 많은 새들이 날아들고 있다. 광복 이후 협소하나 수려한 모래사장과 주변의 아름다운 해안의 절경 때문에 해수욕장으로 활용되다가, 이곳 일부가 부산항 관문으로서 군사상 요충지로 지정되어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휴식공간으로 개방되어 많은 시민들이 즐겨 찾고 있다. 신선대 정상에서 바라다 보이는 확 트인 대양의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면 가슴까지 맑아져 마치 신선이 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또한 바로 지척에는 우리 부산의 상징이요 부산항의 파수꾼인 오륙도가 자리잡고 있다. 또한 맑은 날 정상에서 수평선 저 멀리 바다 위에 떠있는 대마도를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부산의 대표적인 경승지 가운데 하나이다.
3. 몰운대
몰운대(沒雲臺,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7호)는 사하구 다대동 산 114번지 일대로 16세기까지만 해도 ‘몰운도(沒雲島)’라는 섬이었으나, 낙동강 상류에서 운반된 토사의 퇴적으로 다대포와 연결된 전형적인 육계도(陸繫島)이다. 몰운대 일대의 해안선은 파도의 침식으로 인한 해식애와 해식동의 발달로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배후에는 낙동강 물에 실려 내려 온 모래로 수려한 사빈해안을 이루어 해수욕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빼어난 경승지이다. 몰운대란 지명 유래는 낙동강 하구에 안개와 구름이 끼는 날에는 이 일대가 구름속에 섬이 잠겨 보이지 않는다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이곳몰운대의 지형은 학이 날아가는 형상을 하고 있어,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이 많이 찾아 그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詩)들이『동래부지(1740)』에 전하고 있다. 몰운대는 넓은 의미로 몰운산에 옮겨져 있는 다대포객사 남쪽 300m 지점으로 바다의 경관과 쥐섬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 몰운대이다. 몰운대에서 동쪽 1,000m 지점 모자섬을 바라볼 수 있는 이곳을 화손대(花孫臺)라 부른다. 몰운대에는 예로부터 낙동강 물길을 따라 흘러내린 모래와 흙으로 강과 바다 사이에 형성된 삼각주인 대마등도 등이 서북쪽에, 부산의 맨 끝에 해당하는 남형제도·북형제도 등이 남쪽바다에 바라다 보이며, 주변의 쥐섬·모자섬·자섬 등의 섬들이 몰운대의 풍경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한다. 다대지역의 빼어난 자연경관을 아울러『다대팔경(多大八景)』이라 불렀는데, 이중 몰운대의 절경으로「몰운관해(沒雲觀海」로 몰운대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아름다운 경관.「화손낙조(花孫落照)」로 화손대에 깔려드는 저녁노을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노래했듯이 경치가 뛰어나다. 이곳 수목의 주종은 해송이지만, 상록활엽수 등 90여종이 자생하고 여러 새들이 서식하고 있다. 몰운대는 임진왜란 당시 큰 승리를 거두었던 부산포해전(음 1592. 9. 1)에서 이순신 장군의 우부장으로 활약한 녹도만호 정운 장군이 선봉에서 끝까지 적선을 쳐부수다가 순절한 사적지로 유명하다. 이곳은 한때 군사작전 보호지역으로 사람의 출입이 통제되었으나, 지금은 개방되어 시민들의 산책 휴식공간과 산책코스로 활용되고 있다. 다대포해수욕장에서는 매년 8월초 “국제락페스티발”이 열려 젊음의 열기가 무더위를 잠재울 정도로 열광적이다.
4. 태종대
태종대(太宗臺,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8호)는 영도구 동삼동 산 29-1번지 일대로, 해안선은 파도에 의한 침식작용으로 형성된 해식애와 해식동, 울창한 난대림과 굽이치는 창파가 어울려 절경을 이루는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특히 영도등대 아래에 발달한 융기파식대인 바위의 괴석들은 태종대를 대표하는 명소로 그 형성시기는 약 12만년전 신생대 제4기 최종 간빙기에 해당된다. 태종대는 세계 3대 미항의 하나인 이탈리아 나폴리항의 카프리섬을 연상케 할 정도로 빼어난 경관을 간직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옛 문헌인『동래부지(東萊府誌, 1740)』산천조에 태종대는 “동래부 남쪽 30리 절영도 동쪽 바닷물이 돌아가는데 서쪽에 돌다리가 하나 있어 놀이 오는 사람들이 겨우 통할 수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 태종 무열왕이 삼국통일의 대업을 성취한 후 전국의 명승지를 탐방하던 중 이곳에 들러 궁인들과 함께 울창한 수림과 수려한 해안절경에 심취되어 잠시 머물며 활을 쏜 곳이라고 하여 태종대라 이름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가뭄이 있을 때에는 음력 5월 초열흘날 동래부사가 이곳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낸 곳으로도 유명하다. 태종대의 전망대에서는 해안 절벽에 부딪치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저 멀리 대마도를 조망할 수 있어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이 많이 찾았다. 1607년(선조 40)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통신부사(逋信副使) 경섬(慶暹)의『해사록(海·錄)』과『동래부지(1740)』에는 태종대의 밤바다 풍경을 노래한 시(詩)들이 전해오고 있다. 한편, 이곳에는 난대계 상록활엽수인 후박나무, 참식나무, 해송 등 약 120여종이 자생하고, 숲 속에는 노루, 산토끼, 다람쥐 등 사람과 친숙한 동물들이 살고있다. 등대 오른편의 평평한 바위는 옛날 신선들이 이곳에 내려와 놀았다 하여 신선바위라 부르고, 이 신선바위 오른쪽에는 왜구에 끌려간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던 여인이 돌로 변하였다는 망부석이 자리잡고 있다. 망부석 뒤편에 우뚝 솟아 있는 태운암은 그 모양이 기묘하고 괴상하여 신선바위와 더불어 천혜의 아름다운 경관을 두루 갖춘 태종대를 대표한 절경 중의 하나이다.
5. 의상대 의상대(義相臺)는 의상대사와 관련이 깊은 유적으로,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범어사와 연관이 깊다. 범어사(梵魚寺)는 1600여 년의 세월동안 민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담당해 온 한국 불교의 태동과 발전, 그리고 미래를 한 눈에 조감할 수 있는 천년 고찰이다. 범어사 입구의 노송과 비석군(碑石群)을 지나면 일주문(一柱門,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이 다가선다. 기둥이 일직선상의 한 줄로 늘어서 있어 일주문이라고 한다. 이는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의 길을 들어서는 첫 관문을 의미한다. 의상대는 원효암(元曉庵)에서 왼편 길을 따라 50m쯤 오르다 보면, 경사진 사면에 타원형 화강암 바위에 “의상대”라고 행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범어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위태로운 나라의 안녕을 위해 이곳에서 동해를 바라보며 국태민안을 기도했던 성스러운 자리이다. 또한 의상대사가 금정산에서 해탈의 깨달음을 위해 수도하던 석대(石臺)가 바로 의상대이다. 이곳에서 남해를 바라보는 절경을「의상망해(義相望海)」라고 불러『금정팔경(金井八景)』중 하나로 이름한다. 옛 문헌인『동래부지(東萊府誌, 1740)』고적조에 의상대는 “금정산 산정의 일출을 보는 곳”이라고 하였다. 이곳에는 역대 동래부사들이 즐겨 찾아 절경을 노래한 한시(漢詩)들이『동래부지』에 전해 오고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남으로는 저 멀리 남해 바다의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고, 북으로 금정산의 주봉인 고당봉이 지켜보고 있는 최고의 전망대이다. 의상대는 꽤나 넓은 반석((盤石·磐石)이 널려 있고, 바로 밑에는 천 길의 벼랑을 이룬 절벽요새로 자연이 빚은 천하의 절경이 아닐 수 없다. 여기 의상대는 천년전 금정산의 절경인 석대위에 의상대사가 섰던 천고(千古)의 경승지이다. 절벽 위 석대(石臺)에서 솔바람 마시며 자지도 먹지도 않고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께 발원을 올리는 의상대사의 무릎 꿇고 합장한 모습은 금정산이 불국정토(佛國淨土)의 유서 깊은 도랑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6 강선대 강선대(降仙臺)는 사상구 덕포동 579, 712번지 일대에 두 개의 바위로 형성된 독산(獨山)으로, 그 위에 고목(古木)이 우거져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당산(堂山)이 있다. 당산이 있는 곳을 강선대라 전하는데 도로의 동쪽에 있는 것은 하강선대, 서쪽에 있는 것을 상강선대라고 부른다. 이곳 강선대에서는 매년 음력 11월 1일이면 신선이 하강하여 목욕을 하고 쉬어 갔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강선대의 암대(岩臺)는 아득한 옛날 물 속에 있었으나 융기작용으로 육지가 되었다. 그러나 신선이 내려와서 목욕을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이 전설이 생길 무렵에는 강선대가 섬이었거나, 주위에 맑은 물이 흐르면서 생겨난 연못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선은 불노불사(不老不死) 바람과 구름을 따라 땅을 밟지 않고 자유롭게 공중을 노닐며, 구슬소반의 이슬을 마시고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옷자락을 날리며 절경이나 명산에서 노닌다고 한다. 강선대를 신선과 연계시킨 것은 경치가 그 만큼 아름다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한다. 강선대가 위치한 이곳은 낙동강 제방을 쌓기 전까지는 배가 드나드는 포구(덕포)로, 주변에는 마을이 있었고, 주민들은 농업과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여 왔으며, 마을 앞 강 이름을 흑룡강(黑龍江)이라고 불렀다. 고로(故老)들은 아직도 상강선대 쪽을 상리(上里), 하강선대 쪽을 하리(下里)라고 부르고 있으나, 지금은 주택지로 변하여 옛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이곳에 사는 주민들조차도 이곳이 포구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강선대는 상·하강선대가 있으며, 큰 암석이 있어 그 사이로 고목의 숲이 우거져 있고, 두 곳에 수령이 300년이 된 느티나무는 당산나무로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관리하고 있다. 상강선대 당산을 할배당산, 하강선대 당산을 할매당산이라 하며, 진선회(津船會) 회원들이 매년 음력 12월 1일 밤 자정에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곳 당산은 1700년경 마을의 풍년과 안녕을 빌기 위하여 세웠다고 전하나 그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당집은 덕포동의 상징이자, 자랑할 만한 경승지이다. 상강선대는 도시화 이후에도 잘 정화 관리되고 있어 도심속의 소공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부산에는 이곳 외에도 강선대가 몇 군데 더 있다고 한다.
7 겸효대 겸효대(謙孝臺)는 연제구 연산동 산38-1번지 일대로 배산성지(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4호)와 아름다운 경치가 있었던 곳이다. 지금도 주변의 산세가 아름다워 생활의 활력을 되찾는 도심속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옛 문헌인『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1513)』고적조에 겸효대는 “동래현(東萊縣) 남쪽 5리에 있다 하고 선인인 김겸효(金謙孝)가 노닐 던 바 있어 그리 이름하였다.”라고 하였다. 또한『동래부지(1740)』산천조에는 “척산을 배산(盃山)이라고도 한다. 동래부의 남쪽 5리에 있는데 위에 겸효대(謙孝臺)가 있다”라고 하였다. 또한『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 1832)』고적조에는 “동래부의 남쪽 5리에 있고 황령산에서 이어진 곳에 겸효대가 있다”라고 하였다. 겸효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한 시(詩)가『동래부지』,『동국여지승람』등에 전해지고 있다. 겸효대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고려 때 좌사대부 정추(鄭樞)가 1366년(공민왕 15)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신돈(辛旽)을 탄핵했다가 살해될 뻔 했으나, 이색(李穡)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동래현령으로 좌천되어 부임하면서 부터이다. 동래현령이었던 정추는 선인이라 일컬어진 김겸효와는 친한 사이었던 것 같다. 그는 동래현령으로 있으면서 배산 위에서 신선처럼 사는 김겸효를 자주 만나 가슴 터 놓는 교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겸효대 주변은 아름다운 절경과 이곳에서 확 트인 해운대 앞바다를 바라다보는 경관에 시인·묵객들이 유상처로 많이 찾았던 것 같다. 겸효대가 있었던 위치가 지금은 막연하게 배산 위라고 했으나, 실제로 가능한 곳은 여러 곳으로 보인다. 겸효대가 있었던 주변에는 삼한시대 옛 지명인 거칠산국(居漆山國)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배산성지가 있다. 성은 배산의 허리 부분과 정상에 각각 성을 쌓은 쌍가락지 모양의 이중성(二重城)으로서 토성이다. 현재는 토성의 기초 부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최근에는 배산 동남쪽 끝자락인 옛 부산국군통합병원 자리에서 신라시대 동래군의 치소(治所)였던 고읍성터 유적의 발굴로 주변지역을 공원으로 조성하여 시민휴식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8 오륜대 오륜대(五倫臺)는 금정구 오륜동의 회동수원지 부근 아름다운 경치를 일컫는다. 산과 새, 바위의 조화로 병풍을 이룬 기장군 철마면의 개좌산을 비롯하여 사방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는 골짜기에 봉황과 백구가 날아 올 듯이 경관이 빼어나다 하여 ‘오륜대’라고 하였다 한다. 지금은 그 옛날 노래하던 새들과 시인·묵객들은 간 곳 없고, 미나리밭과 따사롭게 반짝이는 회동수원지만 옛 정취를 느끼게 할 뿐이다. 옛 문헌인『동래부지(東萊府誌, 1740)』고적조에 오륜대는 “동래부의 동쪽 사천(絲川)에 있고, 대에서 4~5보 가량으로 시내[溪]에 접하고 암석이 기이하며 아름답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대(臺) 부근에 사는 사람이 오륜(五倫)을 갖추었기에 이를 기려 이름했다”고 전한다. 또한『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 1832)』고적조에는 “동래부(東萊府)의 북쪽 15리에 있는데 천암(川岩)이 기이하여 옛날 5인의 노인이 지팡이를 꽂고 유상하였다고 하여 이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륜대는 1946년 회동수원지가 만들어져 오륜대라 이름했던 옛 풍치는 물속으로 잠겨버리고, 호수를 곁들인 새로운 풍경이 생기면서 또 다른 명소로 각광 받게 되었다. 1967년 회동수원지 확장공사로 당시의 마을은 철거되었고, 1971년 극심한 가뭄으로 바닥이 드러나면서 고분군이 발견되어 석실묘, 옹관묘, 철제품 등 귀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곳에 회동수원지가 생기면서 오륜동에는 잉어회, 향어회, 오리고기, 꿩고기, 민물고기 매운탕 등의 음식점이 생겨 많은 시민들이 찾고 있다. 호수 주변에는 산책을 할 수 있는 산책로가 있어 휴식공간으로 많은 시민들이 찾고 있다. 옛 경치의 일부가 물 속에 잠겼지만 지금도 호수에 투영된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할 정도의 절경을 이룬다. 오늘날 이곳에는 오륜동마을까지 마을버스가 운행되고 있지만 교통은 불편하다. 수원지 주변의 넓은 지역이 상수원보호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개발이 제한되어 있다. 오륜대 인근에는 19세기 후반 조선정부의 천주교박해 때 수영성 장대(현 수영구 광안4동)에서 처형된 부산지역 천주교 순교자들의 무덤과 천주교순교자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기대 이기대(二妓臺)는 남구 용호3동 산 1번지 해안일대로, 기장군 일광면 달음산(587.5m)에서 시작한 장산·금련산·황령산에서 뻗어 동쪽 바닷가 끝에 있으며, 해안절벽이 기암괴석으로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한다. 이기대는 바다에 접한 암반이 비스듬한 경사로 기울어져 바다로 빠져드는 자리이다. 이곳은 산을 따라 해안선 2㎞ 정도가 바다와 이어져 있어, 바위반석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경관과 밀려드는 파도를 바라보는 경치가 빼어나다. 이곳에서는 동해안 일출과 월출을 맞을 수 있어 여기에 서면 마치 신선이 된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이며, 배를 타고 바다에서 바라다보는 해안 경관 또한 일품으로 색다른 감회를 느낄 수 있다. 이기대라는 이름 유래는『내영지(萊營誌, 1850)』산천조에 “본영(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에서 남쪽 15리에 있다. 위에 두 기생의 무덤이 있다”라고 한데서 이기대(二妓臺)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향토사학자 최한복(1895~1968, 수영출신)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수영성을 함락시키고 경치가 좋은 이곳에서 베푼 축하잔치에 수영 기녀 두 사람이 참석하여 왜장(倭將)에게 술을 잔뜩 권하고, 술 취한 왜장과 함께 물속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 두 기생(妓生)의 무덤을 썼다’고 하여 의기대(義妓臺)가 맞는 이름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고 구전(口傳)으로 전할 뿐이다. 이기대는 그 동안 군사작전지역으로 통제되어 오다가 1993년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곳은 도심지에서는 보기 힘든 울창한 숲과 동식물이 많이 서식하는 청정지역으로 남아 있다. 이기대는 자동차의 증가로 인한 매연에 찌든 혼잡한 도시와 청정무구한 수평선의 풍경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야누스 같은 조망대이기도 하다. 이기대 인근의 백운포(白雲浦) 매립지에서는 주말마다 형형색색의 패러글라이딩 날개들이 바다와 하늘을 수놓는 장관을 연출해 또 다른 볼거리를 연출한다. 지금은 신선대를 잇는 해안도로의 개통으로 기암절벽과 경관을 끼고 있어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로 각광 받고 있다. 시랑대 시랑대(侍郞臺)는 기장군 기장읍 시랑리 동암마을 남쪽 해변에 있는 암대(岩臺)로 예로부터 기장 제일의 명승지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은 용녀(龍女)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으로 예로부터 원앙대(鴛鴦臺)라 불리었다. 이곳은 오색 찬란한 원앙새 같은 비오리(기러기목 오리과의 새)가 원앙대 아래 출렁이는 파도를 타고 큰 무리를 짓고 까마귀 떼처럼 무리를 지어 날아다닌다 하여 비오포(飛鳥浦)라 고 하였다. 1733년(영조 9년) 권적이 이조참의(吏曹參議)에서 좌천되어 기장현감으로 부임하여 원앙대의 경치를 보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다고 전하는데, 파도가 흰 거품을 물고 밀려올 때마다 조개들과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아낙네들이 쌀 씻는 소리와 같고, 그 위를 나는 비오리의 군무는 오색찬란하며, 노송 우거진 절벽을 찾은 달빛은 과히 인간세상에서 보기 드문 절경인지라, 권적은 속인들이 부르던 원앙대를 자신의 벼슬인 시랑을 따 ‘시랑대’라 하고 세 글자를 바위에 새기고 시(詩)를 남겼다. 시랑대의 경치가 얼마나 절경을 이루었으면 멀리 중국에서도 해동국(海東國) 조선의 시랑대를 못보고 죽으면 한이 된다 했다고 한다. 고종 31년(1894) 기장군수 홍문관 교리 손경현(孫庚鉉)이 이곳에 놀러와서 ‘학사암(學士)’이라 명명하기도 하였다. 또한 월천선생(新澳, 1714~1786)은『시랑대기』에서 “기암괴석이 첩첩이 쌓여 마치 긴 칼을 세운 듯,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절경...... 높아진 파도는 암벽을 천갈래 만갈래 솟아 흐르면서 분수가 되어 옥처럼 반짝인다”고 감탄하며,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고 전한다. 시랑대에는 많은 한시(漢詩)가 새겨져 있었으나, 지금은 겨우 두 수의 시문(詩文)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고, 나머지는 최근에 거의 파손되었다. 1960년대 들어 구들장용으로 시랑대의 바위를 마구 훼손하여 안타깝고 아쉬움이 남는다. 시랑대 동북쪽에 있는 기우암(祈雨岩)에서는 가뭄 때에 기우제(祈雨祭)를, 그 북쪽 바위에 각자(刻字)되어 있는 ‘제룡단(祭龍壇)’에서는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풍어제(豊漁祭)를 올렸다고 한다. 시랑대 부근에는 용궁사라는 사찰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삼성대 삼성대(三聖臺)는 기장군 일광면 삼성리 삼성마을 남쪽에 있는 해변일대를 일컫는다. 지금은 바닷가 백사장 한 가운데 있는 언덕진 곳으로 삼성대 보다 일광해수욕장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옛 문헌인『기장현읍지(機張縣邑誌, 1899) 명승조에 삼성대는 “군(郡)에서 동쪽 10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차성가(車城歌, 1860)』에는 “삼성대 좋은 약수 만병회춘 화전이요”라고 약수터에 대한 내용만 소개하고 있다. 삼성대의 이름 유래는 세분의 성인이 이곳에 와서 경치를 즐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하는데, 삼성이란 첫째로, 삼성교(三聖敎)에서 모시는 환인천제, 환웅대왕, 단군왕검의 세분 성인이라는 설. 둘째로, 신라의 원효대사(元大師), 의상대사(義湘大師), 윤필 선생(尹弼先生)이라는 설. 셋째는 고려말기 세분의 성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의 세 분을 칭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 가지의 주장들은 그럴 듯한 해석은 될 수 있으나, 아무런 근거가 없고, 이곳 기장지역의 지리적 자연환경과는 맞지 않는 가설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삼성대란 이름은 어디서 유래된 것일까? 그것은 샘섟대라는 옛 이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샘은 남쪽에 있는 약수 샘을 말함이고, 섟은 배를 매어두는 곳을 말한다. 샘섟대를 이곳 방언으로 세성대라 불렀다. 이 샘은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닷가에 있어 희귀하고,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물이 풍부하게 솟아 보약처럼 귀중하다 한다. 그리하여 이곳을 샘이 있는 섟이라 불렀는데, 이는 이 지방의 방언으로 세성이라 불렀던 것 같다. 세성은 한자 표기로 井泊인데 소리나는 데로 삼성대(三聖臺)로 불리게 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한 것 같다. 갯가를 천대하던 조선시대에 묘하게 성인 성(聖)자를 썼던 것으로 보아 옛날 이곳에 펼쳐져 있는 백사장과 해송 사이로 넘실거리는 파도는 신선이나 성인들이 노닐만한 아름다운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해송과 백사장이 많이 사라져 옛 정취만 못해도 강송정과 남쪽 백사장에는 해송림이 남아 있다. 황학대 황학대(黃鶴臺)는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두호마을에 있는 황색바위가 길게 바다에 돌출 된 곳을 말한다. 남쪽 암벽에는 기장출신 진사 방치주(方致周)의 친필인 ‘황학대’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황학대의 이름 유래는 이곳 지형이 꼭 황학이 나래를 펼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데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수년 전까지만 해도 백사장과 해송림이 펼쳐 있었으며, 뒤쪽으로 죽성리 왜성(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8호)이, 북쪽에는 용두대가 이어진 해안의 절경지이다. 황학대는 고산 윤선도가 기장에서 7년 간의 긴 유배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견회요와 우휴요’ 등 주옥같은 시 여섯 수를 남긴 것 역시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윤선도는 정철·박인로와 함께 조선시대 가사문학(歌辭文學)의 최고봉을 이룬다. 윤선도는 1616년(광해군 8) 전횡을 일삼던 영의정 등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이 화가 되어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가, 1618년 기장으로 이배(移配) 되었다. 유배생활 중 백사장 건너 수십 그루의 노송이 있는 송도를 ‘황학대’라 이름짓고 매일 찾았다 한다. 황학대는 중국의 유명한 이태백·도연명 등 많은 시객(詩客)들이 찾아 놀던 양자강 하류에 있는 황학루(黃鶴樓)의 경치에 비교하기도 한다. 고산은 신선이 황학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곳에서 갈매기와 파도소리를 벗삼아 한 많은 시름을 달래곤 했다. 이곳에 유배 중 많은 서적들을 어렵게 구해 탐독했으며, 마을 뒷산에 올라 약초를 캐어 병마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보살피곤 했는데, 이곳 사람들은 고산을 한양에서 온 의원님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당시 이곳에는 초가 몇 채가 있었고, 죽성천의 맑은 강물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아름다운 백사장이 있었다. 인근 부엉산에서 들려오는 부엉이 울음소리는 낯선 땅에 유배된 고산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했으리라. 『차성가(車城歌, 1860)』에는 “두호에 닻을 놓고 왜선창에 줄을 맨다. 황학대 어디메뇨 백운이 우유하다”라고 하여 이곳이 경승지임을 알리고 있다. 이곳은 신라시대 토성(土城)이 강어귀를 따라 비탈진 곳에 축성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이곳에 두모포진(수군진영)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후에 지금의 동구 수정동 부근으로 옮겼다. 마을 뒷산에는 봉수대가 있었다. 자성대 부산진지성(부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은 동구 범일동 670-5번지 일대로, 오늘날 좌천동 증산(甑山)에 있었던 부산진성(釜山鎭城)인 본성(本城)에 대한 지성(支城)으로 오늘날 자성대에 있었던 성을 말한다. 자성대(子城臺)라는 이름은 부산진성을 모성(母城)이라고 하고 그 자식인 자성(子城)이라는 뜻으로 말하였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절경지로 이해하고 있으니, 이는 당시 영가대 부근의 경승지로 이해하였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성의 일부분은 1593년(선조 26) 일본군 장수 모리휘원(毛利輝元) 부자(父子)에 의해 쌓은 성이다. 성의 명칭은 여러 가지로 불려졌으나, 1597년(선조 30) 일본군 장수 소서행장이 주둔하였다고 하여 소서성이라고 하였고, 또한 환산성이라고도 한다. 원래 이 왜성이 축조되기 전에 우리의 성이 있었다고 한다. 즉 임진왜란 전 부산포에는 내성(內城)·외성(外城)이 있었는데 내성인 본성은 오늘날 정공단이 있는 일대를 중심으로 뒷산인 증산을 둘러싸고 있었던 성이고, 자성대는 그 외성으로서 쌓여져 있었던 것인데, 이 성을 임진왜란 때 왜군이 왜성으로 개수(改修)하였다는 것이다. 그 뒤 조선정부에서는 자성대를 중심으로 부산진성을 쌓고 4대문을 축조하여 관위를 정비하였다. 이때 만든 진성은 둘레가 1,689척 높이 13척이었고, 동문을 건춘문(建春門), 서문을 금첩관(金疊門), 남문을 종남문(鍾南門), 북문을 구장루(龜藏樓)라 하였다. 그 외에는 공진관(객사), 검소루, 진남정, 목장창(동쪽 10리), 대치창(동쪽 5리), 석포창(동쪽 45리) 등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성은 철거되었고, 자성대 부근의 바다는 매축으로 인해 옛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지금도 왜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성지는 2단이며, 성곽이 남아 있는 것은 최고 10m에 최저 1.50m이다. 1974~75년 정화공사 시행하여 동문·서문·장대를 신축하여 동문을 건춘문, 서문을 금첩관, 자성대 위의 장대는 진남대라 하고 각각 편액을 달았다. 또한 1975년 9월에는 동문 주위의 성곽을 개축하였다. 자성대에는 임진란에 참가한 명장 천만리(천만리)의 후손이 세운 천장군기념비가 남아 있고, 동쪽 산중턱에는 최영장군 비각이 보존되어 있다. 적선대 적선대(謫仙臺)는 기장군 기장읍 연화리 서암마을 동쪽에 있는 대(臺)로 읍파정(波亭)터라 부르고 있다. 옛날 이곳에는 해송이 우거져 있어 일출이 신비롭고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곳은 신선이 죄를 짓고 귀양와서 기거했던 곳이라 전한다. 예로부터 적선대는 원앙대(시랑대)·삼성대·황학대와 더불어 기장의 4대 경승지로 손꼽혔을 정도로 그 경치가 수려하여 다른 지역의 해안 절경과는 또 다른 경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차성가(車城歌, 1860)』에는 “적선대 있건마는 기경선 어디간고 죽도에 우는 대는 죽지사(竹枝詞) 노래던가 읍파정(波亭) 잠깐 올라 선두포 굽어보니…”라고 한 것을 볼 때 백여 년 전만 해도 이곳에 읍파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용두대 용두대(龍頭臺)는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해안에 있는 야산으로, 기장의 경승지 중의 하나이다. 바다에 접한 야산의 정상에 올라서서 사방을 바라보면, 이곳은 경관이 좋아서가 아니라 지관들이 풍수를 보아서 명당이라 하였다. 옛 문헌인『기장현읍지(機張縣邑誌)』명승조에 용두대는 “현(縣)의 동쪽 8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용두대의 이름 유래는 정상의 모습이 용머리처럼 생겼다고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용두대의 지맥을 보면, 용의 머리에 붙은 용의 목 부분이 잘록하여 두 사람이 함께 걷기가 어려우며 양면이 날카롭게 생겼다. 용의 허리는 완만하게 세번 굽어지고, 꼬리는 뚜렷이 한쪽으로 뻗어 있어 한 마리의 용이 바다에 떠 있는 형국(形局)이다. 이 지방의 풍수가들은 ‘황룡부해지형(黃龍浮海之形)이라 하여, 좌에 유온천(有溫泉) 하고, 용의 여의주처럼 용두대 앞 바다에는 큰 바위가 줄지어 서 있다’고 한다. 용두대 앞에 있는 큰바위는 옛날 어사(御使)가 이곳에서 놀았다 하여 어사암(御使岩)이라고 하였다. 또한 바위의 모양이 매처럼 생겼다는 응암(應岩)이 주변의 해안 경치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절경을 이룬다.
소학대 소학대(巢鶴臺)는 기장군 정관면 매학리에 있는 매바우라 불리는 거대한 암산을 말한다. 100여 척의 층암이 깎아 세운 듯 우뚝 솟아 있고, 정상은 편편한 대를 이루고 있다. 이곳은 백운산의 주봉인 망월산(望月山)이다. 백운산은 기장의 주산으로 항상 흰 구름 속에 잠겨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소학대의 동쪽에 있었던 망일암(望日庵)은 법당에서 바라보는 동해의 수평선 저 멀리서 붉은 해가 솟아오르는 일출 광경을 방안에서 볼 수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이곳에서 바라보는 달은 맑고 밝아 망월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옛날 사람들은 명일암에서 바라보는 동해의 해 뜨는 장엄한 일출경과 반짝이는 별과 밝은 달을 바라보았던 망월경(望月景), 그리고 기장현의 제일 가람이었던 선여사(仙餘寺)에서 들려오는「연사모종(煙寺暮鐘)」의 승경(勝景)을 듣고서 이곳 소학대에 신선들이 살고 있었다 하여 동해의 봉래산(蓬萊山)이라고 하였다.
동·서장대 동래읍성(東萊邑城)에는 오늘날의 동래 명륜동 뒷산인 복호산(伏虎山) 정상에 서장대(西將臺)를 두었고, 이 서장에 맞서는 장대로 안락동 충렬사 뒷산인 망월산(望月山) 정상에 동장대(東將臺)를 두었다. 오늘날의 동래읍성은 1731년(영조 7)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나라의 관문이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종전의 성보다 훨씬 규모가 큰 읍성을 쌓았다. 이 성이 현재 그 흔적이 남아 있는 읍성의 기원이다. 동래읍성에는 동문·서문·남문·암문(暗門, 북문)이 있고, 각 문에는 문루가 있었는데, 동문을 지희루(志喜樓), 서문을 심성루(心性樓), 남문을 무루(舞憂樓), 암문(暗門 )을 은일루(隱一樓)라 하였다. 그리고 장대는 성(城)·보(堡)·둔(屯)·수(戍) 등의 동·서(東·西)에 쌓아 올린 장수의 지휘대를 말한다. 이 장대에서는 지휘자가 깃발이나 나발로 그 신호를 전달하였다. 지금의 서장대는 1979년에서 1981년 사이 세 차례에 걸친 성곽과 장대의 복원 보수 때 복원되었다가, 2002년 화재로 인하여 전소된 이후 2003년에 다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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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은산 원문보기 글쓴이: 조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