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과학으로 본 인문학>-제8강
칼럼니스트
고리들(본명:고영훈)
<내 아이를 위한 두뇌사용설명서> 저자
학교에서 절대로 해줄 수 없는 교육 (엄마의 자기계발과
부모와의 열린 대화)
교육은 지식과 기술과 지혜를 가르쳐 인격과 자격을 길러준다는 사전적
의미가 있다. 사람을 사람답게 살도록 돕는 것이 교육이다. 사람다운 사람이란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이성에 따라 관계를
생각하고 행동하는 존재이다. 자신의 감정대로 행동하지 않고 해야 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계획하고 분별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시키는 것이
교육의 목표이다. 교육을 지식과 지혜로 구분해보면 지식은 뭔가 알고 있는 것이고 지혜는 뭘 알아야 하는지에 밝은 것이다. 지혜는 모든 상황에서의
선택 능력이다. 뭔가를 선택하는 것은 지식을 바탕으로 창의성을 발휘해야만 가능하다. 지혜란 지식을 활용하여 변해가는 환경 속에서 사물의 이치와
가치를 감지하고 자기행동의 반응을 예측하는 능력을 말한다. 생선을 잡아주지 말고 생선 잡는 방법, 보관법, 요리법을 가르쳐 주는 이유는 응용력이
강한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혜는 기본적인 지식을 갖춘 이가 강한 감정적 의지를 갖고 직접적인 세상과 부딪치는 체험으로
열린다. 단순히 쌓여있는 간접지식이 정서와 동기부여를 만나서 실천으로 경험할 때 지혜가 열린다. 학교와 가정의 교육을 구분해보면 학교는 지식,
가정은 지혜를 담당한다. 지혜의 가장 많은 부분은 창의성과 만족지연능력이 차지하는데 다음의 학교에서 하기 힘든 교육들을 보면 왜 가정에서 지혜가
전수되는지 알 수 있다.
학교에서 해주기 어려운 교육이나 체험들은 부모나 같이 사는
친척들이 오래 함께해야 하는 것들이다. 교실 수업과 체험학습이나 수학여행 등으로 채워질 수 없는 것들을 나열해보면, 3세 7세 사이의 기간에
이루어지는 체험, 10세 이후 굶어보는 체험과 극심한 노동과 운동, 10년 20년의 과정으로 한 사람이 발전해가는 모습 보여주기, 밤을 새면서
책읽기에 몰입하는 모습 보여주기, 정감이 넘치는 대화, 실수나 실패를 감싸주는 절대적 인정행동 등이다.
요즘 한 자녀가 많다보니 3세에서 7세 사이에는 과잉보호가
이루어진다. 지하철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 엄마는 아이에게 넘어지면 다친다며 손잡이를 잡으라고 강조한다. 그렇게 아이는 두발로 중심을 잡는
경험을 못한다. 3세와 7세 사이에는 탐색행동과 놀이와 장난을 통해서 두뇌와 도파민회로를 발달시키는데 탐색과 장난을 치는 행동들은 거의 감각을
느끼거나 새로운 운동의 방식인데 이 과정은 늘 다치는 위험이 따른다. 이때 할아버지가 돌본다면 아이를 비교적 자유롭게 두는데 젊은 친엄마는
아이가 조금이라도 위험해 보이면 아이를 안아버리거나 행동에 주의를 준다. 그렇게 아이는 다치지 않게 되고 감각적 체험의 폭이 줄어든다. 친엄마는
음식도 규칙적으로 잘 차려주려 한다. 배가 고픈 상태에서 먹어야 도파민회로가 튼튼해지는데 아이들은 배고플 틈이 없다. 그래서 3세에서 7세
사이에는 안전하고 넓은 환경에서의 방목이 창의성에 중요하며 계모처럼 관리를 느긋하게 하는 친모가 되어야 아이의 두뇌는 더 잘 발달한다. 그래서
뛰면 안 되는 아파트의 환경은 창의성에 매우 나쁘다. 3세~7세 시기를 너무 잘 보살피는 엄마와 보내면 아이는 감각경험이 줄어들고 안전과 규칙에
물들어서 사고의 폭이 좁아진다. 10세 경의 굶는 체험과 심한 운동을 참는 체험도 가족이 해야 오해가 없다. 만일 유치원과 학교에서 아이들을
배가 고프게 하거나 심한 육체적 체험을 하게 한다면 고발을 당하므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 10세 경에 가족들이 함께 해야 하는 힘든 노동에
참여한 아이들은 인내심과 끈기가 좋아지는데 이런 노동을 학교가 시키면 아동노동착취가 되어버려서 시도하지 않는다. 늘 일감이 있는 농촌이나 공장의
환경에서 어른들의 노동 강도에 가깝도록 부모를 돕는 체험이 자수성가에 매우 도움이 된다. 양아버지의 차고에서 자동차 수리를 돕던 ‘스티브
잡스’도 어려서 육체적인 노동을 했다. 하지만 남들이 자기 아이에게 이렇게 장시간 노동을 시키면 참을 부모가 없다. 그래서 더욱 학교에서도 해줄
수 없다.
한 사람이 꾸준한 노력으로 10년 20년에 걸쳐서 발전해가는
모습은 주로 함께 사는 부모가 보여줄 일이다. 아이들이 밤을 새서 책을 읽는 주경야독을 하는 모습을 자기 집 말고 어디서 볼 수 있겠는가.
고아원에서는 시간이 되면 불을 끄고 자라고 한다. 어쩌다 새벽에 악몽으로 잠이 깬 아이가 엄마를 찾을 때 약한 조명 아래서 책을 보다가 아이를
안아주는 그런 장면을 누가 대신 보여주겠는가. 부모가 공부와 사랑에 빠진 모습을 못 보여줄 바에는 기숙사로 보내야 아이들은 가끔 밤에 이불
속에서 책을 보는 공부의 독종에게 자극을 받는다.
정감이 넘치는 대화는 10대들의 정서와 사고력을 만드는데,
10대들은 호감과 비호감의 정서를 촉발하는 편도체와 주변의 중뇌에 호르몬이 과다하여 정서를 파악하는 동물적인 감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상대가
진짜 자기를 믿거나 좋아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잘 느끼는데, 학교의 선생님이 다정한 대화를 시도해도 아이들은 선생님이 얼마만큼 자기를 좋아하는지
느낀다고 한다. 아이들은 자기를 정말 믿어주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는다. 같은 내용의 대화라 해도 상대가 가진 애정과 친밀도가 더 강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학교가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많다고 해고 아이들에게 정서적인 영향을 주는 대화는 가정에서 10배 이상 더 일어난다.
학원이나 학교에서 아이들을 친부모만큼 사랑해주는 교사를 어찌 만나겠는가. 아이가 실수나 실패를 해도 자식의 장래를 의심하지 않고 믿어주는 사람도
역시 부모일 확률이 가장 높다. 근거 없는 믿음이라도 부모의 자식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은 돌을 사람으로 바꾸는 피그말리온 효과가 있다. 이상이
학교가 아닌 가정에서만 가능한 정서적 체험적 교육들이다.
그런데 지식 위주의 조기교육은 여러 가지 면에서 자녀들에게
득보다는 실이 더 많다. 앞에서 말한 방목이나 굶는 체험이나 힘든 노동체험이나 부모가 책을 자주 보는 모습과 달리 조기교육은 정 반대의 상황을
만든다. 많은 시간을 지식의 관점으로 쓰는 부모는 자녀와 긍정적인 관계를 이루기 힘들다. 유아기에 부모와 긍정적인 관계를 이루어 나가는 것은
자녀가 성장해서 살아가는 기초가 되는데 지식의 관점으로 아이를 대하면 부모와 자녀사이에 양질의 우호적인 상호작용의 시간이 부족해지고 부모는
자녀에게 투자한 만큼의 성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의 다시 그 관계는 악화되기 쉽다. 또 자녀는 부모의 판단에 이끌려 자신이 원치도 않는
비자기주도적 교육을 받게 됨으로써 긍정적인 정서의 성장과 발달에 나쁘다. 아이는 자신의 삶을 자율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데서 오는 무기력감에
빠지기 쉽고 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자발적인 동기유발로 학습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창의적인 도파민회로는 약해지면서 ‘대충’이라는 말이
아이의 두뇌와 몸 곳곳에 자리를 잡는다. 따라서 스스로 집중해서 최선을 다하는 긍정적인 주도력을 익히기 어렵다.
현재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3세에서 7세 사이의 과도한
관리와 보호, 8세 이후의 무모한 조기교육은 정서의 뇌 지식의 뇌 지혜의 뇌 3면의 균형을 깨는 측면이 있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급속도로
일자리를 빼앗는 지금은 데이터화 되는 지식보다는 데이터화가 되기 힘든 정서와 지혜가 행복한 인재의 조건이 된다. 최근 환자와의 인간적 관계나
커뮤니티 형성에 실패한 의사들은 병원 문을 닫고 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지식이 보편화 된 세상에서는 정서와 지혜가 돈을 지불할 가치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은 앞으로 더 확산되고 있기에 필자는 학교에서 해주기 힘든 교육을 부모들에게 조목조목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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