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깊이
어느 교회의 성도가
집에서 앵무새 한 마리를 키웠다고 합니다.
이 집 사람은
늘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죽겠다. 정말로 죽겠어..."
이렇게 말을 하고는 했는데
이 앵무새 역시
틈만 나면
"죽겠다. 정말로 죽겠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그 말을 할 때는
잘 몰랐는데
앵무새가 날마다
"죽겠다. 정말로 죽겠어..."
라고 하니
정말로 듣기가 싫었다고 합니다.
어느날
그 사람이
믿음 좋은 장로님을 만났는데
그 장로님께서도
집에서 앵무새를 키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생각을 했습니다.
"혹시
우리 집 앵무새를
장로님댁에
며칠간 머물게 하면
앵무새의 말이 달라질까?"
그래서
작정을 하고
앵무새를 데리고
장로님 집을 방문했습니다.
장로님 집에 들어서자 마자
자기가 키우는 앵무새가
입을 열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죽겠다. 정말로 죽겠어..."
그랬더니
장로님 댁의 앵무새가
자기가 키운
앵무새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렇게 한 마디를 했다고 합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에게
크게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각자
자기들이 주어 들은
지식을 기반으로
주님의 질문에 답을 적어 제출합니다.
어떤 이는
세례 요한이라고 써서 제출했고,
어떤 이는
엘리야라고 써서 제출했으며,
또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여러 선지자들 중의 하나라고 써서 제출했습니다.
이들의 답은 모두 맞습니다.
주님의 질문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번에는
질문을 다시 바꿔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 주님의 제자
베드로가
봉숭아 학당의 맹구처럼
용기있게 손을 들고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바보 맹구가
어려운
수학문제를 푼 것처럼
참으로 놀랍고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가방끈이 짧은
베드로가
정답을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베드로가 매우 기특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베드로를 칭찬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렇습니다.
주님의 질문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계시가 아니면
도저히 맞출 수 없는
정말로 어려운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베드로가 맞추었습니다.
성령의 권능과 기름부으심 속에서...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베드로가 안 것은
복음의
단편적인 지식일 뿐,
복음의 깊이와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을 듣고
주님은
드디어 십자가의 비밀을 공개했습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간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서 가르치시니..."
주님께서는
단지
"내가
그리스도다.
내가
하늘로부터 온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것만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희들은
나를
그리스도로 알고 있느냐?
그렇다면
너희도
나와 함께 이 길을 가야 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비밀을 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답게
그리스도와
연합한 모습으로
십자가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앵무새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라고
지껄이는 수준이 아닙니다.
예, 맞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고요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쩠다는 것입니까?
사실,
귀신도
이 정도는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4)
귀신처럼
예수님을 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까?
오히려 주님은
이런 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주님께서는
귀신과는 절대 타협이 없습니다.
그들을 통해서는
자신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조차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
주님이
그리스도이고
주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어떻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십자가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무익하고
아니
참으로 사악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들어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알게되는 것도 놀라운 은총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복음의 깊이는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그들이 살아낸
십자가의 삶만큼
열려지는 놀라운 신비입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6-29)
당신에게
복음의 깊이는 무엇입니까?
당신은
그리스도와
얼마나 깊이 연합한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당신에게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이것도
당신에게는
앵무새 처럼
누군가에게 주어 들은
무익한 지식에 불과한 것입니까?
여러분에게
십자가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에서
그 십자가를
드러내실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또 어느 정도입니까?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5)
사도 바울은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서
다시 산 자였기 때문에
이렇게
당당히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이후
성령의 기름부으심 속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신들의 모습을 보고
변화된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11)
오늘도 당신의 몸에서
예수의 흔적이 확인되셨습니까?
오늘도 당신은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당신의 육체에 채우며 사셨습니까?
주님께서는 날마다
우리들을
더 깊은
복음의 실제 속으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十字架의 戰士
金眞九 牧師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