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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無比) 큰스님 妙法蓮華經 문수원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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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明未來 (1.明下品師[1.明師相 2.明供養者功德]2.明上品師) 12. 若是善男子善女人이 我滅度後에 能竊爲一人하야 說法華經하대 乃至一句하면 當 약시선남자선녀인 아멸도후 능절위일인 ㅍ 설법화경 내지일구 당
知是人은 則如來使라 如來所遣으로 行如來事어든 何況於大衆中에 廣爲人說이리 지시인 칙여래사 여래소견 행여래사 하황어대중중 광위인설 요
㈏ 總明(1.明逆者得罪 2.明順者得福) 13. 藥王아 若有惡人이 以不善心으로 於一劫中에 現於佛前에 常毁罵佛이라도 其罪 약왕 약유악인 이불선심 어일겁중 현어불전 상훼매불 기죄
尙輕이어니와 若人이 以一惡言으로 毁眥在家出家의 讀誦法華經者면 其罪甚重이니 상경 약인 이일악언 훼자재가출가 독송법화경자 기죄심중 라
14.
藥王아 其有讀誦法華經者는 當知是人은 以佛莊嚴으로 而自莊嚴하고 則爲如來 약왕 기유독송법화경자 당지시인 이불장엄 이자장엄 즉위여래
肩所荷擔이며 其所至方에 應隨香禮하야 一心合掌하고 恭敬供養하며 尊重讚歎하대 견소하담 기소지방 응수향례 일심합장 공경공양 존중찬탄
華香瓔珞과 抹香塗香燒香과 繒蓋幢幡과 衣服肴饌이며 作諸伎樂하야 人中上供으 화향영락 말향도향소향 증개당번 의복효찬 작제기악 인중상공 로 而供養之하며 應持天寶하야 而以算之하고 天上寶聚를 應以奉獻이니 이공양지 응지천보 이이산지 천상보취 응이봉헌
15. 所以者何오 是人歡喜說法하면 須臾聞之라도 卽得究竟에 阿耨多羅三藐三菩提 소이자하 시인 환희설법 수유문지 즉득구경 아뇩다라삼먁삼보리
故니라 고
나.偈頌
16. 爾時世尊이 欲重宣此義하사 而說偈言하니라 이시세존 욕중선차의 이설게언
㈎ 勸自行利他
17. 若欲住佛道하야 成就自然智인댄 약욕주불도 성취자연지
常當勤供養 受持法華者니라 상당근공양 수지법화자
18. 其有欲疾得 一切種智慧인댄 기유욕질득 일체종지혜
當受持是經하고 幷供養持者니라 당수지시경 병공양지자
㈏ 頌師門別總 ㉮ 頌別 (1.頌現在法師[1.頌下品師 2.頌上品師]2.頌未來法師[1.頌下品師 2.頌上品師])
19. 若有能受持 妙法華經者는 약유능수지 묘법화경자
當知佛所使로 愍念諸衆生이니라 당지불소사 민념제중생
20. 諸有能受持 妙法華經者는 제유능수지 묘법화경자
捨於淸淨土하고愍衆故生此니 사어청정토 민중고생차
21. 當知如是人은 自在所欲生하야 당지여시인 자재소욕생
能於此惡世에 廣說無上法하며 능어차악세 광설무상법
應以天華香과 及天寶衣服과 응이천화향 급천보의복
天上妙寶聚로 供養說法者니라 천상묘보취 공양설법자
22. 吾滅後惡世에 能持是經者를 오멸후악세 능지시경자
當合掌禮敬하대 如供養世尊하며 당합장예경 여공양세존
上饌衆甘美와 及種種衣服으로 상찬중감미 급종종의복
供養是佛子하야 冀得須臾聞하며 공양시불자 기득수유문
23. 若能於後世에 受持是經者를 약능어후세 수지시경자
我遣在人中하야 行於如來事니라 아견재인중 행어여래사 |
어떤 문제든지 다 그렇지만 이 불교공부를 하다 보면 아는 것도 있고 간혹 또 모르는 것도 있고 그렇습니다. 다 알면 좋겠지만 다 알고 넘어가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경전에 대해서 아주 밝았던 과거의 사람이 해 놓은 주해 같은 것을 보면 간혹 모른다고 한 내용도 있고, 또 뒷사람들의 자세한 해석을 기다린다고 한 그런 표현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 배운 앞 페이지를 보면 일념수희(一念隨喜)라고 하는 그런 표현이 있는데 이런 말이 참 위안을 줍니다. 법화경 중에서 한 게송, 또는 한 구절만이라도 우리가 듣고 잠깐 동안 좋은 내용이다 하고 기뻐한다, 또는 수긍한다는 그런 말이지요.
일념수희(一念隨喜)라는 말이 ‘한 생각, 또는 잠깐 동안 따라서 기뻐한다’는 말이지요. 그동안 뭔 말인지 몰랐는데 ‘오늘 한 구절은 참 괜찮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교훈이 될 만하다’, 또 ‘불교를 이해하는데 정말 중요한 말이다.’라고 하는 그런 마음이 내키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뭐 일 년 동안 쫓아다닌 보람은 있는 거예요. 여기 법화경에서는 일 년 동안 쫓아다닌 보람이 있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잠깐 한 구절에서 어떤 이해가 되고, 맛을 느끼고 환희심이 난다고 하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성불을 보증하겠다, 그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큰 깨달음을 이룰 기틀이 마련됐다’고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일념수희(一念隨喜), 참 중요한 말이지요.
그래서 불교 안에서든지 아니면 어떤 경전 안에서든지 물론 다 알면 좋지만 우리가 크게 다 알려고 하는 그런 생각까지는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하다보면 모를 때도 있고, 사실 모르고 넘어 가는 경우가 훨씬 많지요. 그러다가 또 가끔 한 대목씩 마음에 와 닿을 때가 있고 그렇습니다.
불교도 늘 좋은 건 아니지요. 불교를 믿는 신자로써 평소에 불교가 좋다 해도 밤낮없이 언제나 한결같이 그렇게 좋은 느낌이 있지는 않습니다. 가끔 가다가 불교가 싫을 때도 있고, 부처님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고, 저게 어떻게 불교인가 싶은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지요. 그러다가도 한 번씩은 불교에 대한 신심, 경외심, 상당한 환희심 이런 걸 느끼게 됩니다.
책도 마찬가지에요. 이름 있다고 하는 책도 읽다보면 영 짜증이 나고, 이게 그렇게 명작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마음에 안 들다가도 또 한 번씩은 재미를 느끼고 그렇습니다.
뭐 어떤 물건이나 자기가 하고 있는 학문이나 공부나 종교나 아니면 사람이나 무엇에든지 역시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법화경의 이야기에 우리가 안도할 수 있는 게, 한 순간만이라도 따라 기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깨달음의 씨앗이 되고, 큰 깨달음을 보증 받는 그런 계기가 된다는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어떻게 보면 법화경은 참 쉽습니다.
저기 앞에서 지나왔지만, 어린아이가 장난삼아 모래를 뭉쳐가지고 이것이 부처님이라 하고, 거기에 그저 장난삼아 합장하고 설사 예배를 했다 치더라도 그것만으로도 이미 불도를 이룬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망상으로, 산란이 가득한 마음으로 “부처님~”
하고 한 번 외운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이미 불도를 이룬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어요. 알고 보면 법화경만치 쉬운 경전이 없다는 그런 생각입니다.
그래서 수지독송(受持讀誦)이라는 그 수지(受持)도 다른 사람들은 해석하기를 ‘마음 속에 받아서 마음 속에 깊이 새기고 그 어떤 사상과 그 정신이 떠나지 않는 것’이라고 표현 합니다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경전만 들고 다녀도 수지(受持)다 이거에요. 경전만 들고 다녀도 이미 훌륭한 법사라고 하는 거지요. 그렇게 쉽게 설명이 되어야 돼요, 법화경은 알고 보면 쉬운 것입니다. 경전만 가지고 다녀도 훌륭한 법사이다, 라고 하니 얼마나 쉽습니까? 그렇게 설명하지 않으면 아주 어려운 경이 되어 버려요. 법화경에는 망상심으로, 산란심으로 “부처님!”하고 한 번만 외워도 성불의 기틀이 마련된다고 까지 이야기 하고, 어린아이가 장난삼아 흙으로 부처님을 뭉쳐놓고 부처님이라고 하는, 그것만으로도 부처가 된다는 보증을 받게 되는 것으로, 이렇게 쉬운 방향으로 불교가 이야기 되어 있는데 수지독송(受持讀誦)이라는 수지를 어렵게 해석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일념수희(一念隨喜)라는 것도 그렇지요, 한 순간만 ‘좋다’ 라고 하는 생각이 들어도 그것만으로도 아주 훌륭한 법사이고, 성불의 보증을 받게 되며 큰 깨달음을 이를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됐다고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법화경이 경 중의 왕이다, 최고의 경전이다, 팔만대장경을 종합한 종합서이다, 또 부처님께서 49년간 설법한 것의 총결론으로써 이야기 된 것이다’라고 흔히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만치 사실은 어떻게 보면 부처님의 경지라고 하는 것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상당히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 것이고, 이미 우리는 부처님의 세계 속에 나도 모르게 일찍이 들어와 있었다고 하는 거, 이런 느낌을 받고 또 그것을 일깨워 주는 그런 가르침이기 때문에 법화경은 그렇게 쉽게 설명되어져야 옳다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여기 법사품의 이야기대로라면 그 동안 법화경과 인연 맺은 여러 분들은 전부 훌륭한 법사에요. 법화경을 늘 가지고 다니지요, 읽지요, 간혹 한 구절 외우지요, 그리고 이 정도로 법화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 사실 흔치 않아요. 그럼 법사 중에도 법사라고 생각을 해도 좋습니다.
그런 법사는 바로 ‘부처님의 사신, 부처님을 대신해서 아주 중요한 심부름을 하는 부처님의 사절이다’ 라고 하는 그런 표현이 오늘 배울 12번에 바로 나옵니다. 아주 유명한 구절이에요.
약시선남자선녀인(若是善男子善女人)이 아멸도후(我滅度後)에
만약에 선남자 선여인이 내가 열반에 든 뒤에,
내가 죽은 뒤에 이런 말이지요.
능절위일인(能竊爲一人)하야 설법화경(說法華經)하대, 한 사람을 위해서 법화경을 설하되
절(竊)자는 문수원에서처럼 많은 분들을 모아 놓고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고, 뒷방에서나 찻간에서나 아니면 가정집에서든, 길거리에서든 간에 가만히 한 사람을 위해서, 한 사람을 앉혀놓고서라도, 그런 뜻입니다.
내지일구(乃至一句)하면, (법화경 전부를 설하면 좋겠지만)단 한 구절만 하더라도,
아, 법화경에 이런 대목이 있더라 하고, 한 대목만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설한다 하더라도
당지시인(當知是人)은 칙여래사(則如來使)라, 마땅히 알아라. 이 사람은 여래의 사절이니라.
여래의 사절, 여래의 사신이에요. 말하자면 여래를 대신해서 그 일을 대신하는 사람이에요. 여래의 심부름꾼이지요. 그 얼마나 훌륭한 지위입니까? 최고의 지위이지요. 부처님의 심부름꾼 노릇을 한다, 부처님의 사절, 부처님의 사신 노릇을 한다는 것이 세상에 있을 법이나 한 일입니까.
한 나라의 사신이라고 하는 것은 흔히 있지요. 그러나 그 것도 아무나 다른 나라에 보내지 않습니다. 왕을 대신해서 또는 한 나라를 대표해서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간다는 것은 정말 나라를 대신하는, 나라의 체면을 세울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뽑아서 보냅니다. 거기 가서 말 한마디 잘못하거나 행동 한 번 잘못하거나, 순간적인 판단을 잘못하면 완전히 나라를 망치게 되는 그런 예들이 많지요. 그래서 옛날에도 보면 사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만치 중요한 임무를 띠었어요.
우리는 모두가 이렇게 법화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분명이 여래의 사절이고 부처님의 사신입니다. 여래의 소견(所遣)이라 그랬어요. 여래께서 보낸 바라 이거에요.
부처님께서 흔쾌히 보내서 우리가 법화경 공부를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여래소견(如來所遣)로 행여래사(行如來事)어든, 여래가 보낸 바이며 여래의 일을 행하는 사람이며,
여래가 해야 할 일을 우리가 하는 거다, 이 말입니다.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들고 다니는 사람도, 또 누구에게 이야기 해 주는 사람도, 어디 가서 ‘내가 법화경 공부한다.’ 라는 그 말만 해도, 법화경 구절이 어떻다는 것은 놔두고라도 법화경 공부한다는 것을 알려도, 그것도 벌써 이미 여기에 해당되는 거예요. 여래의 사신에 들어 간다 이겁니다.
하황어대중중(何況於大衆中)에 광위인설(廣爲人說)이리요,
한사람에게 몰래, 아까 절(竊) 자가 가만히 라는 뜻이지요. 절도(竊盜) 할 때의 절(竊)자니까요.
몰래 가만히 한 사람에게만 그렇게 속닥거리면서 법화경을 이야기해도 그렇거늘, 여러 사람 앞에서 널리 많은 사람을 위해서 설하는 것이야 두말 할 나위 있겠느냐는 그런 말입니다.
여래의 사신이라고 하는 그런 구절은 아주 법화경 공부하는 사람의 기를 한껏 살려주는 그런 내용이 되고 있습니다. 기를 살려주기 위해서가 아니고 사실이 이제 그렇다는 거지요.
사실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사람은 부처님이 할 일을 하는 사람이고, 부처님을 대신해서 하는 일이고, 또 부처님이 제일 바라는 바를 하는 일이라고 그랬습니다.
내가 가끔 공양(供養) 이야기를 하면서 부처님에게 우리가 불공(佛供)을 올리는데, 불공은 말하자면 공양 대접을 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이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데 과연 부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알기나 알고 공양을 올린 적이 있는지, 불공 올린다고 하면서 부처님의 식성이 뭔지 알고 대접을 올렸느냐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친구에게 공양 대접을 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무얼 좋아하는지 묻잖아요. 그래서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대접하면 돈이 적게 들고도 훨씬 빛나고 그만치 또 보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처님께 공양 올린다고 하면서도 부처님이 뭘 좋아하시는지는 전혀 감안 안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갖다 올리는 거지요. 그저 부처님도 좋아하시려니 짐작만 하는 거지요. 그보다는 생각조차 해보지를 않아요.
화엄경 [보현행원품]에는 공양의 이야기를 쭉 하면서, 내가 참으로 좋아하는 공양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합니다. 뭐 향공양, 초 공양, 꽃 공양....너희들이 올리는 공양, 다 좋다 이거에요. 정성을 들여서 올리는 그 마음만으로도 훌륭하다고 하지요.
예를 들어서 등불 공양을 올리는데, 심지는 수미산 만하게 하고 기름은 저 바닷물같이 그렇게 많이 준비해서 등불을 켠다면, 그것 다 좋은 일이라 이거지요. 그렇지만은 그것보다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공양은 ‘법공양’이라고 했어요. 부처님 입으로 직접 말씀하신 대목이거든요. 여러 가지 공양 중에서 최고의 공양은 법공양이라는 거지요.
예를 들어서 사람을 대접할 때도 이 반찬, 저 반찬, 양식, 일식, 중식.. 온갖 것 다 차려놓으면 좋기야 좋지요, 그렇지만 그게 다 필요하나요? 정작 그 사람이 즐겨먹는 거면 되지요. 국수 하나 잘 먹는다면 국수 하나면 끝나는 거예요, 사실은.
그렇지만 다른 공양도 차렸다면 그것도 좋고 고마운 일이지만 참으로 내 마음에 드는 것은, 내가 즐겨 하는 공양, 그것이 마음에 든다는 그런 표현이지요. 부처님이 즐기시는 공양은 ‘법공양’이라 그러셨어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공양 중에서 법공양을 제일로 치잖아요, 이제는 신도님들이 어지간히 알아가지고 법공양에 대해서 상당히 생각을 많이 합니다.
법공양이란 것은 부처님의 법을 펴는 것이 첫 번째 공양이고, 그 다음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실천 수행하는 것이 역시 법공양이지요. 실천수행이 설사 어렵다고 하더라도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일차적인 법공양이거든요. 그것이 이제 부처님이 제일 좋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단 한 사람에게 가만히 몰래 속삭이면서 법화경을 이야기 해 주더라도 그것은 이미 부처님을 대신한 부처님의 사자(使者)이고 부처님의 사절(使節)이라는 말이지요.
이런 정도로까지 이야기를 해 놓았습니다. 그럼 부처님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게 무엇이고, 또 좋아한다는 것은 자기의 어떤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참으로 소중하고 값진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겠지요. 이런 대목은 법화경에서도 아주 유명한 대목이에요.
약왕(藥王)아,
여기서는 그 반대로 말합니다. 앞에서는 부처님 법을 전하는 입장에서 말한 것이고, 그렇게 법화경을 한 구절이라도 전하는 것이 중요하듯이, 만일에 그 반대로 악한 사람이 있어 가지고, 법화경 가진 사람, 법화경 공부를 하는 사람, 또는 법화경을 펴려고 하는 사람을 비방한다든지 헐뜯으면 그건 큰일 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뭐든 반대의 현상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니까요.
약왕(藥王)아, 약유악인(若有惡人)이 이불선심(以不善心)으로, 약왕아, 만약에 어떤 악한 사람이 선하지 못한 그런 마음으로써
어일겁중(於一劫中)에, 한 겁 가운데서, 어느 한 시절, 어느 한 때
어느 한 시절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럴 때는 한 때라고 해도 좋습니다. 겁이라는 게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긴 시간을 말하지만, 한 시절, 한 계절, 한 때, 일기(一機), 한 기회라는 이런 뜻도 되요.
현어불전(現於佛前)에 상훼매불(常毁罵佛)이라도, 부처님 앞에서 항상 부처님을 훼(毁)매(罵)하더라도,
요즘 훼불사건이 나긴 많이 납디다. 훼는 헐뜯는다, 매는 꾸짖고 욕한다는 거지요.
옛날에 탄허스님께 자주 들어온 이야기입니다.
어떤 과거 보는 사람이 부처님께 복을 지으면 좋다는 소리를 듣고는 좁쌀 한 말을 공양을 올리고는 시험 치러 갔다가 뚝 떨어져서 돌아 왔어요. 돌아와 보니 그 좁쌀 한 말이 아깝거든요. 가만 생각하니 영 분하단 말이에요. 그래서 부처님께 가서는 하는 말이 “내 좁쌀을 한 말이나 먹더니 얼굴이 놀놀해 져 가지고 좁쌀처럼 노랗게 되어 앉아 있다”고 했다는 거예요. 좁쌀은 노랗거든요, 부처님 얼굴색깔하고 거의 같다고요.
그런 이야기를 탄허스님께서 아주 가끔 하시더라고요.
그게 이제 매(罵), 꾸짖는 거지요. 좁쌀 한 말만 뚝 따먹고 저렇게 놀놀하게 앉아 있다고요.
훼는 꾸짖는 거지요.
부처님 앞에서 그렇게 항상 한다 하더라도
기죄(其罪) 상경(尙輕)이어니와, 그 죄는 오히려 가볍거니와,
부처님을 욕하고 헐뜯고 꾸짖고 하는 그것도 충분한 죄가 되지요, 그러나 그 죄는 오히려 가볍거니와
약인(若人)이 이일악언(以一惡言)으로, 만약 어떤 사람이 한 마디 악언으로,
일악언이라는 것은 한 마디의 악언입니다.
훼자재가출가(毁眥在家出家)의 독송법화경자(讀誦法華經者)면 기죄심중(其罪甚重)이니라, 재가자나 출가한 스님이나 누구든 간에 법화경을 읽고 외우는 사람을 훼자(毁眥)하면은 그 죄가 심히 무겁다.
훼(毁)는 헐뜯는 것, 자(眥)는 험담하는 것,
“저 사람은 법화경 공부하면서도 늘 저모양이야”, 이런 다든지 하는 경우이지요.
그러니까 이건 무슨 말이냐 하면, 부처님을 욕하는 것보다도 법화경 공부하는 사람을 욕하는 게 그 죄가 훨씬 크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라도 그 사람이 법화경을 공부한다고 하면 절대 그 사람을 욕하지 마세요. 차라리 부처님을 욕하는 것이 죄가 가볍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일리 있는 말입니다.
법화경만 자꾸 추켜세워 법화경을 중요시 여기고자 하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실질적으로 내양이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법화경은 일불승(一佛乘)이고 말하자면 부처님의 최후의 가르침이고, 마지막으로 최종적으로 가르쳐 주고 싶은 그런 내용이 이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지요.
법화경을 헐뜯고 비난한다는 것은 법화경을 등진 사람, 법화경에서 가르치는 진리성을 등진 사람이라고 이렇게 보는 거예요. 법화경 적인 삶을 등진 사람이라면 정말 그건 큰 죄를 범한 것이고, 인생을 크게 잘못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지 내 가르침을 욕한다고 해서 부처님이 스스로 그 사람을 욕되게 한다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이 법화경과 등지고 있는 사람, 법화경의 가르침, 진리의 삶을 등지고 있는 경우를 말하는 거예요, 그것을 표현을 하자니 이렇게 표현이 되는 거지요. 차라리 부처님 욕하는 것은 좋다, 법화경 공부하는 사람은 욕하지 말아라. 법화경 공부하는 사람을 욕하는 것이 훨씬 죄가 많다, 잘못이 많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사실은 그대로, 액면대로의 내용도 좋아요, 집에 가서 혹시 누가 욕하거나 그러면 겁 한 번 주세요.
“나는 법화경 공부하는 사람인데 법화경 공부하는 사람을 헐뜯거나 욕하면 부처님을 욕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죄가 크다 하더라.” 책에 표시를 해 놨다가 딱 들이대면 돼요, 이건 좋은 방편이에요. 실지로 그래요. 법화경 공부 하는 사람을 함부로 건드리면 안돼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야기는 경에 있는 대로입니다.
약왕(藥王)아 기유독송법화경자(其有讀誦法華經者)는, 약왕아, 법화경을 듣거나 외우는 사람은
당지시인(當知是人)은, 마땅히 알아라. 이 사람은
이불장엄(以佛莊嚴)으로 이자장엄(而自莊嚴)하고, (아주 유명한 대목입니다)부처님의 장엄으로서 스스로 장엄한 사람이며
참 멋지지요. 법화경을 좋아하는 사람은, 법화경을 지고 다닌다, 법화경을 좋아한다, 법화경을 공부한다는 사람은 부처님의 장엄으로써 스스로를 장엄했어요. 부처님은 무엇으로 장엄합니까? 뭐 32상 80종호, 그거 아니에요. 부처님의 정신, 부처님 속에 있는 진리성, 그 가르침, 이것이 부처님다운 것이지 어떤 외양이 아닙니다. 우리는 장엄이라고 하면 얼른 밖으로만 생각하는데 외형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금강경에도 보면 삼십이상으로써 관여래부아, 라는 말이 나오지요. 그러니까 수보리가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습니다." 라고 하는 대목이 있지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듣고 계시다가, "그럼 전륜성왕도 여래겠구나", 이랬어요. 전륜성왕도 삼십이상을 갖췄으니까 그럼 전륜성왕도 여래겠구나, 하시니 수보리가 가만 생각해 보니 아니거든요. "아닙니다, 부처님. 잘못 생각했습니다, 삼십이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가 없습니다." 라고 고쳐 말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외형이 아무리 부처님을 닮았다고 해도 그것을 가지고 부처님이라 할 수 없다는 거지요.
부처님을 가지고 장엄을 했다는 것은 법화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독송했다는 사람은 부처님의 정신, 부처님의 법, 그것을 오롯이 마음 속에 지닌 사람이니까 외형이야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외형이야 설사 무슨 축생의 얼굴을 하고 있더라도 그 정신 무장이(여기 무장이라고 표현했지만은), 그 정신이 부처님 정신으로 무장이 되었으니까 여기서는 장엄이라고 보는 거지요. 부처님의 정신 장엄하듯이 비록 축생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정신으로 장엄을 했다는 것을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부처님의 정신으로 무장이 됐다고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거지요. 이건 아주 유명한 말이지요. 부처님의 정신으로 무장을 했다. 정신은 그대로 부처님 정신가 똑 같다 이거에요.
그리고 이것은 또 이런 의미도 됩니다.
즉위여래(則爲如來) 견소하담(肩所荷擔)이며, 여래께서 어깨로 짊어지는 것과 같으며,
이제 법화경 공부하는 사람들의 기를 한껏 높여주고 기를 펴도록 해 주고, 당연하니 이런 말을 들을만한 그런 경우가 되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이 대목에 와서 우리가 법화경을 공부한다는 것에 대해 긍지와 자부심을 사실은 한껏 가져야 돼요. 그래야 이 법화경이 자꾸 세상에 퍼집니다.
이것을 유통분(流通分)이라고 내가 그랬지요. 전문 가운데서 전반부 가운데서 유통분에 해당되는데 유통분은 뭡니까? 이 경전이 세상에 많이 펼쳐지기를 바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경이 좋다고 하고, 경 공부하는 사람이 긍지와 자부심을 한껏 가지면 그 힘에 의해서 경이 자꾸 펼쳐질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많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여래께서 어깨로 다 짊어진다는 말이에요.
부처님께서 법화경 공부하는 사람을 어깨로 짊어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요. 그러니 우리는 부처님께 무등 타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법화경 공부하는 사람은 그 정도입니다.
부처님이 법화경 공부하는 사람들을 어깨로 짊어지고 있는 턱입니다.
기소지방(其所至方)에 응수향례(應隨香禮)하야, 그가 가는 곳 어디라도, 그가 이르는 바 지방 어디라도, 법화경 공부하는 사람이 어디에 가든지 간에 응당히 따라 가서 예배를 하여,
법화경 공부하는 사람이 어디를 가더라도 따라가서 예배를 해야 돼요.
일심합장(一心合掌)하고 공경공양(恭敬供養)하며, 법화경 공부하는 사람에게 일심합장하고 공경 공양하고,
여기는 다 같이 공부하니까 따로 할 게 없네요. 그래도 서로서로 또 해야 되겠지요. 서로서로 해야 돼요. 할 게 없다는 방향으로 생각하지 말고 다 공양할만한 사람이다, 라고 이렇게 생각을 해야 바른 해석입니다.
왜 그런가 하니 다 부처의 소질을 가졌다면 ‘아이고, 내나 니나 똑같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가 모두 부처님이라는 그런 자세가 필요한 거지요.
존중찬탄(尊重讚歎)하대 화향영락(華香瓔珞)과, 꽃, 향, 영락을 바쳐 존중하고 찬탄하고,
아, 저 분은 보기는 저래도 법화경을 수지독송하는 사람이야, 법화경을 공부하러 다니는 사람이다, 이렇게 존중하고 찬탄해야 한다는 겁니다.
말향도향소향(抹香塗香燒香)과 증개당번(繒蓋幢幡)과, 아주 좋은 보석,진주 영락, 패물 이런 것들을 사달라고 하세요. 나는 법화경 공부하는 사람이니까 패물 좀 많이 바치라고 하세요. ^^*
법화경 공부하는 사람은 말향 도향 소향, 온갖 향을 다 써도 좋아요.
증개는 비단으로 커텐을 한다든지 이렇게 장엄을 하기 위해서 늘어뜨리기도 하고, 비단은 귀한 것이어서 머리에 띠를 두르기도 하고 그래요. 티벳 같은 곳에 가면 지금도 비단 수건을 목에 걸어주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당번은 깃발 같은 것이지요.
의복효찬(衣服肴饌)이며, 좋은 의복과 반찬,
작제기악(作諸伎樂)하야, 여러 가지 재주와 음악 같은 것을 연주해 주고,
노래도 하고 춤도 추며 그런 것으로서 그 사람에게 공양하며,
인중상공(人中上供)으로 이공양지(而供養之)하며, 사람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공양거리로 공양하며,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 뭐에요? 노래가 좋다면 노래를 해주고, 춤이 좋다면 춤도 춰 주고...
앞에서 여러 공양물을 소개했지요.
상공으로서 이공양지 하며, 이 세상에서 사람이 사용하는 가장 좋아하는 공양거리로써 공양하며,
응지천보(應持天寶)하야, 응당히 하늘의 보배로써
이건 이제 하늘에서 난 보배라기보다는 아주 뛰어난 보배를 말하지요.
이이산지(而以算之)하고, 뛰어난 보배로써 그 사람에게 뿌려주며
천상보취(天上寶聚)를 응이봉헌(應以奉獻)이니, 천상에서 나는 아주 뛰어난 보취로써 응당히 바칠 지니
지방에서 아무데서나 나지 않는 그런 뛰어난 값진 보배무더기로써 응당 바칠지니라.
그러니까 법화경 책을 보면, 기유독송법화경자(其有讀誦法華經者)니라, 그 법화경을 독송하는 사람, 그 사람은 부처님의 장엄으로써 장엄했고 부처님이 무등태우고 다니는 바라, 기소지방(其所至方)에 응수향례(應隨香禮)하야, 이 사람이 가는 데마다 따라다니면서 공양 찬탄하고 온갖 것으로서 있는 것 없는 것 다 갖다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당부를 했습니다.
그럼 그 분이 법화경 공부를 했지마는 왜 그토록 존중과 찬탄과 공양을 받아야 되느냐? 법화경이 좋기 때문에 그래요. 그 사람이 좋아서가 아니고 법화경이 훌륭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 훌륭한 법화경을 이 사람이 수지독송하니까 이 사람에게 당연히 그렇게 해야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똑 같지요. 그런데 왜 그 사람에게는 그렇게 해야 되느냐? 이 사람은 법화경을 수지독송하니까 그래요.
법화경 공부 안하면 소용없어요, 그렇게 할 거 없어요. 이 대목에서 부처님이 약왕보살에게 아주 참 당부할 수 있는 최대의 당부를 하는 거지요. 이 이상 어떻게 더 당부합니까? 법화경이 좋다고 하는 말은 많이 있었어요,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법화경을 공부한 사람을 이렇게 존중하고 찬탄하고 그 사람에게 공양 올리고 존경하라고 하는 말의 뜻은 법화경이 그만큼 좋다고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법화경은 참 평생, 세세생생 공부해도 좋을 꺼리입니다. 예를 들어서 평생 한 가지만 가지고 공부를 한다고 하면 법화경이 상당히 좋습니다. 어떤 이는 금강경만 가지고 하는 이도 있는데 우리가 보통 [보문품]이라고도 하고 [관음경]이라고도 하는 보문품은 법화경 안에 있는 한 품(品)이에요. 그것만 가지고 평생을 독송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일생을 두고 하나의 경전을 통해서, 말하자면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법화경을 가지고 공부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실 양은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거든요. 이 정도는 자기의 의지하는 경전으로 사실은 삼을 만하지요. 자꾸 보고 읽고 또 해석한 것, 풀이한 것을 참고하고 그렇게 하면 평생 공부꺼리로 아주 좋지요. 이건 정말 권할 만하고 평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시간을 이런 데 투자해도 아깝지 않고 정말 보람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거지요.
내가 여기서 법화경 공부를 해서 이렇게 일러 드리는 것은 법화경 안에 담겨있는 뜻의 십분의 일 정도나 일러줄까 말까한 것입니다. 내가 그 정도 밖에는 파악을 못하니까요. 여러분들이 경험을 쌓아서 자꾸 읽고 깊이 생각하고 해서 이 안에 담겨 있는 그 오묘한 뜻을 아주 더 깊이 계발해 내고 또 깨달아야 할 그런 일이지요.
소이자하(所以者何)오, 왜 이렇게 까지 법화경 공부하는 사람을 우리가 존중 찬탄해야 하느냐?
시인환희설법(是人歡喜說法)하면, 이 사람이 기쁜 마음으로 법을 설하면
수유문지(須臾聞之)라도, 잠깐동안 법을 듣는다 할지라도
즉득구경(卽得究竟)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故)니라,끝내 가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 때문이니라.
이 사람이 기쁜 마음으로 설법을 한다 이거에요, 그러면 그 사람에게 잠깐만 들어도, 수유문지(須臾聞之)라는 게 잠깐만 듣는다는 뜻이지요. 아주 잠깐만 그 사람에게 듣는다 할지라도 그 인연으로 끝내 가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된다,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법화경을 수지독송하는 사람을 내가 공경 공양 존중 찬탄하라는 바이다, 이거에요. 그 이유를 부처님이 분명히 밝혀 놓으셨지요.
이시세존(爾時世尊)이 욕중선차의(欲重宣此義)하사, 그때 세존이 그 뜻을 거듭 펴려고 하사
이설게언(而說偈言)하니라, 게송을 설해 말씀하사대
이것은 앞에서 말씀하신 것을 게송으로 새로 말씀하시는 거지요. 법화경 첫 부분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게송으로 재차 말씀하시고 계시지요.
약욕주불도(若欲住佛道)하야, 만약에 불도에 머물러서
부처의 가르침, 부처의 도에 머물러서
성취자연지(成就自然智)인댄, 자연지를 성취하고자 할진댄,
이건 본래로 가지고 있는 지혜를 자연지(自然智)라고 해요. 우리가 아무리 갈고 닦아도 뭐 큰 깨달음을 설사 얻었다 하더라도 끝내는 우리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지혜, 그 지혜를 계발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것을 다른 데에서 뚝 따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자연지(自然智)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는 무사지(無師智)라고 해요, 없을 무(無) 스승 사(師)자, 스승 없는 지혜라는 말인데 스승이 주는 지혜가 아니고, 스승 없이도 내가 본래 가지고 있는 지혜라는 그런 뜻에서 무사지(無師智)라고 그래요, 자연지와 뜻은 같습니다. 스승 없는 지혜, 참 좋은 말이거든요. 그게.
남이 가르쳐 주어서 아는 지식이나 지혜는 별 볼일 없어요, 그건 별 것 아닙니다. 그리고 그건 별로 힘이 없어요. 자기가 깨달아야지요. 자기가 철두철미하게 경험한 것이 그것이 힘이 돼요. 일상사도 마찬가지이지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심지어 밥을 하는 요령도 남이 설명해 주는 걸로는 잘 안돼요. 자기가 경험을 통해서 자기 나름의 노하우가 마련이 되면 그때는 남이 뭐라고 설명하지 않아도 아는 거예요. 자기 경험이 중요한 거예요. 무사지(無師智)이니 자연지(自然智)이니 하는 말이 누가 준 것이 아니고 내 속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것을 확실하게 계발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것을 성취하고자 할진댄
상당근공양(常當勤供養) 수지법화자(受持法華者)니라,
항상 마땅히 그리고 부지런히, 법화경을 수지하는 사람을 공양할지니라.
그러니까 여기에 보면 자연지를 성취하려고 하면 법화경 공부하는 사람을 공양하라 그랬어요. 그랬다면 보통사람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법화경 공부하는 사람을 공양하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바로 법화경을 공부하겠습니까?
다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에이, 법화경 공부하는 사람을 공양하느니 차라리 내가 공부하자. 그 까짓 것 못할 바 뭐 있겠나’ 그런 마음이 들거예요.
사실 그런 마음을 촉발시키는 그런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 그래놨지요? 법화경 공부하는 사람을 부지런히 공양하라고 해 놨어요. 공양하는 것도 좋지만 자기가 직접 법화경을 공부하면 그건 더 좋지요. 그게 말하자면 진정한 법공양이니까요.
기유욕질득(其有欲疾得)일체종지혜(一切種智慧)인댄, 그 어떤 이가 일체종지혜를 빨리 얻고자 할진댄
질득(疾得), 이때는 병 질(疾)자가 아니고 빨리 질 자입니다. 일체종지혜(一切種智慧)도 자연지, 무사지와 같습니다. 모든 것을 다 꿰뚫어 아는 그런 지혜를 일체종지혜라고 그래요.
일제종지라고도 하지요. 그런 것을 빨리 얻고자 할 때는, 여기에 바로 해 놨네요.
당수지시경 (當受持是經)하고병공양지자(幷供養持)者니라, 마땅히 이 경을 수지하고 또 아울러 이 경을 가지는 사람에게 공양할지니라.
자기도 수지하고 경을 가진 사람에게도 잘 받들고 공양하라, 이렇게 양쪽으로 다 해놨네요.
약유능수지(若有能受持) 묘법화경자(妙法華經者)는, 만약에 어떤 자가 능히 묘법화경을 수지하는 자는
당지불소사 (當知佛所使)로, 당지하라, 부처님의 심부름하는 바로써 부처님이 시키는 바로써 이렇게 해도 좋구요. 저 앞에 사절이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부처님의 사절로써,
민념제중생(愍念諸衆生)이니라, 모든 중생을 어여삐 여기고 불쌍히 생각하는 것이니라.
제유능수지(諸有能受持) 묘법화경자(妙法華經者)는, 능히 묘법화경을 수지하는 모든 사람은
사어청정토 (捨於淸淨土)하고 민중고생차(愍衆故生此)니, 청정한 국토, 좋은 세상을 버리고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는 까닭에 여기에 왔다.
이 험한 세상에 왜 왔느냐? 이 법화경 때문에 왔다 이거에요.
그렇게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법화경을 수지하는 사람은 다른 좋은 세상에 가서 살 수 있는데 이 법화경 공부를 해 가지고 법화경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중생들을 돕고자 하는 그런 마음으로 생차(生此), 이 땅에 태어났다는 거지요.
우리가 이 땅에 온 것은 법화경 때문에 왔다고 이렇게까지 이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목적이, 또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뭐냐? 법화경을 공부하는 사람은 바로 법화경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을 해도 좋습니다.
또 우리가 그 정도 설정을 해 놔야지요.
나는 왜 이 세상에 와서 사느냐? 온갖 험한 이야기, 속상한 꼴들 많이 보지만 그것 모두 내가 법화경 하나 생각하면 다 잊을 수가 있고 나는 법화경을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고, 법화경을 위해서 여기에 왔으니까 그걸로 만족하다, 이렇게 우리가 삶의 목표를 확실하게 정하면 좋은 거지요.
여기는 이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당지여시인(當知如是)人은자재소욕생(自在所欲生)하야,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라, 이 사람은 자재롭게 자유자재로 하고자 하는 바대로 태어나서
능어차악세(能於此惡世)에, 능히 이 악세에 태어나서
참 험악한 세상이지요, 갈수록 더하지요. TV 틀면 뉴스 시간에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된 것 악세만 이야기 하는 거지요. 전부 잘못된 것만 가지고 계속해서 끝없이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광설무상법(廣說無上法)하며, 능히 무상법, 가장 높은 법을 널리 설하며
악세에 필요한 것이 좋은 가르침이지요. 좋은 가르침은 악하지 않은 세상에는 필요치가 않지요. 착한사람 보고 착하게 하라고 할 필요는 없지요.
응이천화향(應以天華香)과급천보의복(及天寶衣服)과, 응당이 아주 훌륭한 꽃과 향과 하늘의 보배로 된 의복과
천상묘보취(天上妙寶聚)로공양설법자(供養說法者)니라, 천상의 가장 훌륭한 아름다운 보배의 무더기로써 설법하는 자를 공양할지니라.
오멸후악세(吾滅後惡世)에 능지시경자(能持是經者)를, 내가 열반한 뒤 능히 이 경 가진 자를
당합장예경(當合掌禮敬)하대 여공양세존(如供養世尊)하며, 마땅히 합장하고 예경하되 세존께 공양하는 것과 같이 하며,
이제 집에 가서 부처님 대접하듯 하라고 하세요. 여기 부처님 대접 하듯이 하라고 했잖아요. 악세에 이 경을 수지하는 사람, 이 경을 가지는 사람, 법화경을 들고 다니기만 해도 그 사람에게 합장하고 예배하기를 부처님께 예배하듯이 해야 해요. 왜 그러냐? 그 사람이 좋아서가 아니에요. 법화경이 훌륭하기 때문입니다. 법화경이 훌륭하기 때문에, 그 훌륭한 법화경을 가진 사람이기에 부처님처럼 예경하고 공양하라고 했습니다.
여공양세존(如供養世尊)하라, 세존에게 공양하듯이 하라.
아주 좋은 말이네요. 최고네요. 법화경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렇다하면 아주 기를 펴는 거지요.
상찬중감미(上饌衆甘美)와 급종종의복(及種種衣服)으로, 아주 최고의 음식, 그리고 여러 가지 맛나고 아름다운 음식과, 그리고 여러 가지 별별 의복으로
공양시불자(供養是佛子)하야기득수유문(冀得須臾聞)하며, 이 불자에게 공양해서 잠깐이라도 듣기를 바라며,
이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불자에요, 법화경 공부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불자이지요.
득(得)자는 바란다는 뜻입니다. 수유(須臾)는 잠깐이라는 뜻이지요.
법화경 수지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추켜 놨으니 이쯤 되면요, ‘아이구, 법화경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높은가? 그럼 나도 법화경 공부할란다.’
다 그렇게 생각할거란 말이에요? 지금 이 자리에는 법화경과 일찍이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라서 뭐 여기에 해당이 안 될는지 모르지만 법화경과 인연을 맺지 못한 사람들이 있으면 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법화경 공부하는 사람 있거든 잘 존경해. 부처님 존경하는 것보다 그 사람 존경하는 것이 훨씬 나아.” 그렇게 말하면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그리고 “만약에 부처님을 차라리 비난하지, 법화경 공부를 하는 사람을 비난하면 큰일난다.”고 이렇게 하면 대개 보통 사람들의 마음은 ‘아이구, 법화경이 그렇게 위대한 경인가? 나도 법화경 공부 좀 할란다.’ 이런 생각을 할 거에요. 당연히 하지요. 바로 그런 효과가 이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래는 반대의 경우가 나옵니다.
약능어후세(若能於後世)에 수지시경자(受持是經者)를, 만약에 능히 후세에 이 경을 수지하는 자는
아견재인중(我遣在人中)하야 행어여래사(行於如來事)니라, 내가 여러 사람들 가운데 그 사람을 보내 여래의 일을 행하게 하는 것이니라.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나 같은 사람도 부처님이 가라고 해서 왔는지도 몰라요. 부처님이 보냈다고 했거든요. 아견((我遣), 내가 보냈다고 했거든요. 여러 사람 가운데 보내서 부처님의 일, 여래의 일을 행하게 하느니라, 그렇게 거기 분명히 이야기 해 놨어요.
첫댓글 법화경을 듣거나 외우는 사람은 부처님의 장엄으로서 스스로 장엄한 사람이며...()()()
이불장엄(以佛莊嚴)으로 이자장엄(而自莊嚴)하고...고맙습니다...()()()
一念隨喜, 受持讀誦, 廣爲人說, 고맙습니다. _()()()_
一念隨喜,,,,,當受持是經 幷供養持者,,,자기도 수지해서 열심히 공부해야만 하고 이 경을 공부하는 사람도 잘 공양해 받들라 ! 은우 법우님, 정말 수고 많이 하셨어요.
一念隨喜...은우님,고맙습니다._()()()_
법화경을 듣거나 외우는 사람은 부처님의 장엄으로서 스스로 장엄한 사람이며...고맙습니다. _()()()_
其有讀誦法華經者는 以佛莊嚴으로 而自莊嚴이며...은우 님! 수고하셨습니다.._()()()_
이불장엄(以佛莊嚴)으로 이자장엄(而自莊嚴)하고.. 참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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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약왕(藥王)아 기유독송법화경자(其有讀誦法華經者)는,
당지시인(當知是人)은 이불장엄(以佛莊嚴)으로 이자장엄(而自莊嚴)하고...........
부처님의 경지라는 것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가까이 있고 사실은 우리도 모르게 그 안에 들어와 있다
한 사람만을 위해서라도 오다 가다 법화경 한 구절만이라도 설하면 이 사람은 如來使
--여래가 보내어서 여래의 일 如來事를 행하는 사람이다
법화경을 독송하는 사람은 佛莊嚴으로 스스로를 장엄한 것이 된다
불도에 머물러서 自然智를 성취하고 싶으면 법화 행자를 공양 공경해라
一切種智慧를 빨리 성취하고 싶으면 법화경을 수지 독송하거나 법화 행자를 공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