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게시물은 Jean Claude Santerre라는 프랑스인이 인도차이나를 방문해서 자신이 체험한 바를 보고한 에세이이다. 원래 프랑스어로 쓰여진 이 글의 제목은 "Qui Gouverne le Cambodge?"이다. "KI-Media"가 영어로 번역해 2011년 3월 1일 공개한 것을,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해 공개한다. <베트남령 인도차이나 연방>(Vietnamese-Indochina Union)은 가능할 것인가 하는 연구주제에 관해,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보고문이다. |
캄보디아는 누가 지배하는가?
Who Rules Cambodia?
글 : Jean Claude Santerre
나는 저가 여행코스 개발을 위해 과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역을 다시금 방문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들 국가들에 대한 생각으로 들뜬 나는 작은 소지품만 챙긴 채 그날로 길을 떠났다.
나는 먼저 베트남의 할롱베이(Halong Bay, 下龍灣, 하롱베이)로 갔는데, 그곳에서 놀랍게도 보파(Bopha)와 재회했다. 그녀는 프놈펜에 거주하는 사랑스런 아가씨로, 보파는 그녀의 캄보디아 식 이름이다. 보파가 프랑스에서 유학할 당시, 그녀는 나의 여자친구였다. 그녀와 호텔에서 하룻밤을 함께 보낸 후, 가이드를 해달라는 내 제안을 그녀가 수락했다. 이후 그녀가 나의 통역을 담당했는데, 보파는 베트남어와 크메르어 모두 매우 유창하고, 프랑스어와 영어도 상당한 수준이다.
보파는 아름다움이 잠재된 곳들로 나를 안내했다. 나는 이곳의 매력과 대단한 부드러움에 진심으로 매료됐다. 정해진 일정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여행업자의 고객들에게 제공하게 될 장소들과 루트를 따라 캄보디아에도 가야만 했다. 물론 나의 가이드인 보파와 항상 함께 했다.
베트남-캄보디아 국경을 통과하면서, 나는 수많은 사람들과 물류가 이동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나는 여러 해 동안 더 오지들도 많이 가봤지만, 이렇게 국경이 느슨하게 관리되는 국가는 보질 못했다. 캄보디아를 오가는 베트남인들도 많았고, 상품들도 끝없이 오가고 있었다. 나는 엄청난 교통량에 놀라서 보파에게 "무엇이 이 많은 사람들을 오가게 하는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캄보디아는 우리(베트남인들)에게 파라다이스야"라고 답했다.
국경을 건넌 우리는 프놈펜으로 갔다. 그곳에서 보파의 가족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보파의 아버지는 원래 베트남 출신으로, 1982년에 캄보디아로 이주해왔다. 그녀의 아버지는 베트남 정부가 추진했던 캄보디아 내 정착 정책 담당자이기도 하다. 그는 캄보디아 내에서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베트남 정부로부터 매달 5,000달러씩을 지급받는다.
보파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1989년에 베트남 군대가 철수한 이후로도 많은 베트남인들이 캄보디아에 잔류했다. 이러한 베트남인들은 훈센(Hun Sen) 정부에 등용됐거나 경제 붐을 타고 재계로 진출했다. 보파의 말에 따르면, 그녀의 형제 자매들도 모두 베트남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모두들 '왕립 프놈펜대학'(RUPP)을 졸업했다. 남동생 중 1명은 현재 프랑스에서 공부 중이다.
보파와 그녀의 부모님은 나를 위해 만찬을 준비해줬다. 나는 진심으로 감명을 받았다. 그들의 친절한 마음을 결코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다음날부터 나는 프놈펜을 답사하는 내 일을 시작했다. 소수의 부유층 사람들이 최신형 4륜구동 승용차를 운전하는 모습과 대다수 사람들이 오두막집에 사는 모습에서, 나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어떤 날 밤, 보파가 나더러 밤거리 구경을 나가자고 했다. 우리는 캄보디아 수도에서 가장 비싼 바들과 레스트랑에 구경을 갔다. 그곳에서 나는 젊은이들이 돈을 세지도 않은 채 지불하는 모습을 봤다. 돈이 마치 물처럼 사용되고 있었다. 보파는 나에게 말하기를, 그들이 바로 프놈펜의 지배층 젊은이들이라고 알려주었다.
바를 나온 우리는 훈센(Hun Sen) 정권의 군 장성 중 1명이라는 께끔연(Ke Kim Yan) 장군 소유의 고급 빌라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보파가 나에게 말하기를, 께끔연 장군의 아들 1명이 금년(2011) 1월 말에 또다른 고위 장성의 딸과 결혼했다고 알려줬다. 사돈이 된 장성은 '1997년 7월 캄보디아 쿠테타' 당시 전차부대를 몰고가서 '왕당파' 군대를 궤멸시킨 인물이라고 했다.
보파에 따르면, '께끔연 장군의 아들 결혼식'에는 훈센 총리 자신을 비롯하여, 속안(Sok An) 부총리 등 캄보디아 고위 관리들이 대거 참석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캄보디아에서 엄청난 행운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그 결혼식의 부케용 꽃 장식에만 20만 달러가 사용됐다고 하며, 50만 달러 상당의 다이아몬드 의상도 착용했다고 한다.
신혼부부는 골프 코스가 딸린 아름다운 저택을 결혼선물로 받았다. 나는 그 대저택이 매우 안전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도대체 그 엄청난 부가 어디서 왔는지 궁금했다. 캄보디아는 너무 가난해 보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촌에서 초라한 오두막 생활을 하는데, 그런 집들은 강풍도 제대로 막아줄 것 같지 않았다. 프놈펜의 밤거리 구경은 나로 하여금 약간의 양심적 충격을 받게 만들었다.
그후 나는 보파에게 시엠립(Siem Reap)으로 안내해주지 않겠냐고 부탁했다. 시엠립으로 가는 도중에, 보파는 나에게 캄보디아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매우 순조로울 것이라 말했다. 그녀는 캄보디아 지도층들이 어리석고, 미개하며, 무식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우리(베트남인)는 그들을 정치적 전면에 내세우기만 할 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권력과 돈을 탐하도록 내버려둔다. 그렇게만 하면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때때로 캄보디아 지도자들이 아프거나 하면 베트남 지도자들이 방문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보파는 나에게 부탁한 여행업자의 사업에 매우 흥미를 갖고 있었다. 내가 시엠립에 도착하자, 그녀는 나에게 몇몇 현지 호텔 관계자들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그녀가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 속에서, 나는 그들이 이미 서로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호텔 관계자 한 사람이 나에게 자신의 호텔에서 1박 하도록 해주었다. 그날 밤 보파는 프놈펜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녀와 여행사업에 관해 계속 협의해나가기로 약속했다. 그녀는 나에게 라오스에 살고 있는 그녀 숙부의 연락처도 알려주었다.
다음날 나는 라오스 방문을 앞두고 시엠립 관광에 나섰다. 나는 몇몇 NGO 관계자들도 만났다. 그들은 내게 보파가 이야기해준 것 말고도 더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캄보디아 지도층들이 그런 국가적 중대사에 대처하는 방식의 숨겨진 비양심에 놀랐다. 그리하여 나는 여행길에서 만났던 가난하지만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았던 사람들을 위해, 내가 보고 들은 것들을 증언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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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캄보디아 내 베트남인들의 영향력에 대해
캄보디아인이 아닌 사람이 증언한 것은 이번이 거의 처음으로 보입니다..
캄보디아 내 베트남 사람들로부터 직접 전해들은 이야기인데..
베트남 정부의 <캄보디아 내 이주정책>이라는 용어가 등장합니다..
비밀리에이긴 하지만, 공식적으로 그런 정책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최초의 기록으로 판단됩니다..
지금까지 우리 카페는 그냥 그럴 것이라 추정만 해왔는데
실제로 그런 용어가 있음을 알 수 있는거죠..
이 글의 저자는 캄보디아에 대해 별로 지식이 없는 사람인데도
여자친구 덕분에 상당히 심도깊은 정보를 넘겨받은 걸로 판단됩니다..
아울러 캄보디아-라오스-베트남에서 사업할 때는
어떤 루트를 뚫어야 할지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거죠..
그런데 말이죠...
"경제"에 관심있는 회원들은 말이죠..
또.. 이런 게시물을 안 읽는다는 거...
그걸 생각하면 정말 신기하단 말이죠~ ^ ^
이번 게시물도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됩니다..ㅋㅋㅋ
우리 카페에서 항상 주장하는 말이 있잖습니까~
<큰돈을 벌려면, 돈 안되는 데부터 관심을 두라!!>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나아갑니다..
그나저나 걱정이네요..
이대로 20~30년만 지나면
캄보디아와 라오스는
<베트남령 인도차이나 연방>(Vietnamese-Indochina Union)에 편입될듯 합니다...
바로 그게 호치민이 꿈꾸던 인도차이나의 미래인데...
과연 그대로 나아가게 될 것인가,,,.
그렇다면 호치민은 거대-제국주의에 투쟁한 군소-제국주의자였는가...
흐음... 어렵네요...
글구 <베트남령 인도차이나 연방>이란 용어는
"크메르의 세계"가 세계 최초로 사용하는 말이니...
인용하실 때는 꼭 인용표기를 부탁드립니다.. ^ ^
제가 느낀 소감과 한치도 차이가 없군요. 그리고 캄보디아 재벌중에 하나인 소카호텔과 소키멕스 주유소를 운영하고 있는 소키멕스 그룹의 오너(갑자기 이름이 생각이 안나네요)도 베트남인이라는 소문이 있더군요. 위에 언급된 시기에 정착한 사람중의 하나라는 소문이죠. 그 회사는 베트남 국경을 통해서 석유를 밀수입하는게 공공연한 사실이고 현지 유가와의 차이를 고려하면 그 이익은 막대하죠. 저도 사업상 거래를 해보았는데 그 회사에서는 밀수된 석유에 대해서는 좀 더 싼 가격에 판매를 하더군요. 하여튼 이 나라도 요즘의 한국처럼 참으로 '막장'입니다.
그렇습니다..
통상 캄보디아 재계를 언급할 때
로얄그룹, 리용팟 그룹 등등 여러 기업들이 회자가 됩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캄보디아 제1의 재벌은 "소끼멕스"가 아닐까 추정도 해보곤 합니다..
"소끼멕스"는 석유유통업을 거의 독점하고 있고, 보꼬산 카지노와
앙코르와트 입장료 걷는 바로 그 회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회사에 관한 정보는 극히 부족합니다.,..
언론에 노출도 거의 안되는 편입니다..
캄보디아에서는 베트남 관련 내용이
묵언의 보도통제가 되는 것은 아닐까도 생각될 정도입니다..
회장의 이름은 속꽁입니다.
물론 H 씨 일가 역시 지분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겠습니다만.
그리고 현재 캄보디아 내 베트남인 인구가 얼마나 될지 정말 추정이 안되네요...
전에는 제 개인적 추정으로는 40만명~60만명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요즘은 점점 더 그 수치를 훨씬 높여잡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최대 150만명 선까지도 말이죠..
근데 최근 증가속도가 더 빠를 것 같다는 느낌도 듭니다..
그리고 한국 정치도
정말 저도 두손 두발 다 들겠습니다..
내각제를 하던가 해야지 말이죠..
내각제 국가면
벌써 의회해산하고 새로 총선했을
그런 판국인데 말이죠.,.
지금 사고치는 속도로 봐서는
2년도 너무 길어 보입니다..
정말 나라가 망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상기 기사와 올노님과 상선약수님의 관찰들에 의하면 캄보디아의 미래가 어둡군요.
현재 베트남과 훈센정권의 관계와 과거 불란서 식민시대에 있었던 베트남의 종속국(?)이라는 관점,
그러나 베트남에 대한 크메르 역사(자존감), 시아누크의 고민, 크메르 루즈의 실험, 그 이전 정권에서 베트남인 학살 등,
크메르 민족의 베트남에 대한 지배와 저항의 자세가 훈센정권 몰락과 맞물리면, 어떻게 표출될까요?
이러한 가정은 현 훈센정권이 몰락하는 상황에서 크메르민족주의가 부상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인데요.
그리고 캄보디아를 둘러싼 외교적 관계, 중국, 태국, 베트남, 라오스, 미국, 불란서,러시아 등도 영향을 줄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일단 야당인 삼랑시당은 분명하게도
(1) 정통적인 자유 민주주의 이념과
(2) 크메르 민족주의...
이 2가지를 정강정책의 양대 축으로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훈센의 입장에서는 크메르 민족주의의 주적이 베트남으로 향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자꾸 서쪽인 태국 쪽으로 관심과 적개심의 방향으로 돌려왔는데...
문제는 이제 서쪽인 태국이 자국의 민족주의를 고양하면서
그 적개심의 방향을 캄보디아에 맞추고 있기 때문에..
작년까지와 같이 훈센이 "통제가능한" 긴장 조성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고 있습니다..
즉 잘못하면 서쪽에서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되는거죠..
따라서 모든 게 불확실한 상황이네요..
아울러 우리가 아직 라오스에 대해 깊이는 안 파고 있습니다만...
라오스에서도 베트남 세력이나 베트남인들의 진출이
상당한 현상이 있지 않을까 추정됩니다..
1979년에 크메르루즈를 붕괴시킨 후에
베트남 군대가 캄보디아로만 진격했던 것이 아닙니다..
라오스로도 그 이전부터 적지않은 병력이 진격을 해서..
태국 군과 국경에서 소규모 충돌을 벌인 바 있습니다..
라오스로 진격했던 베트남 군대의 병력 규모 역시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니 현재도 라오스에서 캄보디아와 유사한 현상이 있을 가능성이 있을겁니다..
이 문제에 대해 어딘가에 글을 써보기도 했습니다만, 가장 충격적인 것은 캄보디아 국회(상하의원 모두)의원 중 20% 정도가 자국어(크메르 어)가 서툰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실제 캄보디아에서는 국회 방송이 자주 나오는데, 일부 의원이 발언을 할 때 보면 발음이 매우 어색합니다.
베트남 출신 캄보디아 인의 발음은 베트남식 억양이 들어 있어서 쉽게 구분이 되는데, 바로 그런 발음입니다.
또한왕족으로서는 유일했던 CPP의 창당 멤버였으며, 훈센이 제2총리 할 당시부터 부총리 겸 국방장관을 지냈던 차크라퐁 왕자를 30년 모시며 살아온 "삼받스"라는 분의 증언에 따르면, 초기에 자신은 부총리의 보좌관으로,
지금 관방부 장관, 부총리 라 부르는(본 카페에 상세한 설명이 있으니 참조 바랍니다.) 속안 장관은 훈센의 보좌관으로 함께 사무실을 썼는데, 두 사람이 헤먹을 걸고 같이 숙식을 함께해 왔다고 하는데 그는(속안) 베트남 군인이었다고 합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캄보디아인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위에 상선약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 중에 국경을 통한 밀수는 저도 한 달 동안 매일 지켜본 사실입니다.
2004년 경에 캄보디아에서 최초로 우물파주기 운동을 시작한 단체의 일로 첫 번째 우물파기 공사를 한 동네는 베트남 국경 지역이었는데, 이 동네 남자들은 자전거에 석유통을 세개를 매 답니다. 하나는 짐받이에 올리고,
두개는 나무를 짐받이에 걸쳐서 양쪽으로 매다는 식인데, 이렇게 빈 통을 들고 베트남 국경을 넘어가 돌아올 때는 휘발유를 가득 담아와서 저유조까지 가면, 세 통당 2달러를 받는데, 하루에 보통 3회 왕복을 했고, 부지런 한 사람은 4~5회까지 하는데, 이럴 경우는 중간에 오토바이를 탄 다른 가족과 중간에 바톤터치하듯 통을 넘기는 식이라고 합니다.
그들을 따라 자전거로 함께 갔었는데, 저는 외국인이라 베트남 비자를 받아야 한다더군요.(당시는 베트남 입국시 비자가 필요 했었습니다.)
현 국왕 시하모니가 즉위 초에 국민들로부터 평민 출신의 여자가 낳은 아들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던 것도(스닫 마에 토아마타: 어머니가 평민인왕)
발음이 크메르인 보통의 발음이 아니라 말레이시아 식 억양이 매우 강했기 때문이기도 하며,
2003년 선거 직전에 캄보디아 국적을 취득한 베트남 인들은 모두 170만명이 이르렀으며, 이들 중 87만명이 투표권을 취득한 성인들이었기 때문에 전체 유권자 680만명 중 87만명은 CPP만을 찍는 베트남 출신이었던 것입니다.
당시의 선거 전에 말레이시아 등 화교권 국가에서는 삼레앙시 당이 제 1 당이 된다는 소문이 파다 했기 때문에 자국민 소개령이 떨어져 태국 등으로 나간 숫자가 엄청 났으며, 실제로 프놈펜 시에서는 마지막 선거운동일인 7월 25일 저녁에 마우쩌뚱 도로-깜뿌찌 끄라옴 도로-모니붱 도로-시하눅 도로-노로돔 도로로 도는
오토바이 대 행진이 있었는데, 아무리 낮게 잡아도 삼레앙시의 집권은 확실 해 보였었습니다.
실제로 선거 결과가 프놈펜 12석 중 6석을 석권하기는 했지만, 당시 선거에서 베트남 출신이 대략 5%만이라도 되는 지역이라면 투표 통을 열었을 때 CPP 표가 70~90%가 넘게 나오고, 26개의 정당이 출마한 선거에서 야당다운 야당은 3~4개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어용 여당이었는데, 선거 용지나 기표에 문제가 있는 것이 나왔을 때 개표위원들이 판정을 할 때 20여 명의 어용 여당 개표 관리 위원이 CPP에 유리한 판정을 하는 등, 말 그대로 선거가 아니라 그저 장난이었을 정도였습니다.
여기서 참으로 한심한 것은 삼레앙시나 라나릿이나 베트남
출신자들에게 국적을 주는 것은 이미 수 년 전에 합의 된 내용이라 해도, 어찌 선거를 앞둔 4개월 전에 통과를 시켰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숫자만 해도 15%가 넘는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당시 선거에 나온 정당명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끄나빡 ㅇㅇ 아이끄릿(ㅇㅇ독립당)" 하는 식이었는데, 이는 캄보디안 들의 반 베트남 정서가 어떠한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똔레삽 호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50%이상이 베트남 출신의 "보트피플" 들인데, 이들의 횡포는 가히 상상을 뛰어 넘고 있습니다.
만약 베트남 출신 사람들(캄보디아에서는 "윤" 이라 합니다.)이 말썽을 일으켰을 경우 경찰들도 손을 대지 못합니다.
깜뽕 수웅에 약 10만여 명이 살고 있는 수상 마을에는 베트남 어가 되지 않으면 무엇 하나 알아 볼 수도 없을 지경입니다.
프놈펜에 있는 담꼬 시장에 새벽 1시 경에 가 보면, 엄청난 양의 야채 등 농산물이 도매 되고 있는데, 지금은 90% 이상이 육로를 통해서 들어오지만 불과 5년 전만 해도 수로를 통해 베트남에서 올라온 상품을 거래하던 곳이었습니다.
스떵 민체아이(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남쪽으로 있는 다리를 건너면 그 동네가 스떵민체아이)에는 이와 관련된 장사를 하는 사람이 많이 사는 동네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베트남 출신임에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크메르 루지 이전만 해도 중국 상인이 전체 상권의
90%를 장악했었다고 했는데, 지금은 화교들 스스로 말하기를 60% 선이라고 하며, 베트남 사람들 말로는 자신들이 캄보디아 상권의 50%를 장악 했다고는 합니다만 적어도 30%는 충분히 된다고 보입니다.
이처럼 정부 주요 직책, 국회의 의석 등 정계는 물론이고 경제조차도 막대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베트남인 들이 동북 지역의 드넓은 황무지를 계약하고 고무 농장을 만들고자 투자하고 있는 것에대해, 지극히 일반적인 투자임에도 불구하고 "훈센이 합법적으로 우리의 땅을 베트남에 넘기고 있다.(반 훈센 사이트의 글: 죄송합니다, 사이트 이름이 정확히 생각나지 않아요)"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고, 지역의 주민들도 이런 저런 이유로
베트남 회사와 갈등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케금냥이야 말로 캄보디안 중에 사유지가 가장 많은 사람인데, 몇 년 전에 지 딸인가 아들인가 결혼을 시키면서 노로돔 대로를 가로 막고 천막을 쳐서 혼인 식을 한 인간인데, 이 자는 정확히 훈센의 사람이 아니라 찌어심의 똘만이입니다.
정치 경제 등 쉽게 보이는 부분 뿐만이 아니라 문화 등의 부분 등에서도 서서히 베트남 화 하고 있는데, 여기에 가장 막대한 영향을 주는 것은 젊은 군인들의 베트남 유학입니다.
캄보디아 군인들 중 젊은 신입 군인들은 베트남으로 1~3년의 유학을 다녀오는데, 전액 무상 교육입니다.
이들이 벌써 사회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지 오래 되었고, 그들이 가지고
들어온 베트남 문화와 생활 방식 등은 점차 캄보디아의 일상적인 삶처럼 녹아 들고 있습니다.
모르기는 해도 위 글을 쓴 사람이 말한 "보파"라고 하는 사람이 한 말이 현실로 드러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지도.....
스스로 윤이라며 낮추어 보는 사람들을 따라하는 철없는 크마에가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마치 우리가 수 십년이 지나도 일상 대화에서 "식사", "부락" 등 일본 식 단어가 튀어 나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빤야사 수트라(캄보디아에서는 "빤야사" 만 발음합니다.) 대학의 늙은 이사장의 우려가 문득 생각이 나기에 긴 글을 써 보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쏙섭아이 님,
정말 귀중한 자문에 감사드립니다..
매우 상세하고도 중요한 점들을 지적해주신 것 같습니다.
아마도 2009년 말부터 베트남이 정부 차원에서 캄보디아에 대한 엄청난 진출 양상을 보이는 것은
그러한 물밑에서의 저변이 거의 확보된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말씀하신대로 께금연 장군은 찌어 심 파였기 때문에
군총사령관 직에서 교체된 것이었고,,
젊은 장교들뿐만 아니라
새로운 군총사령관인 뽈 사로은 장군도 베트남에서 박사학위를 했습니다.
가령 호 남홍(Hoe Namhong) 외무부장관의 성명 중에
"남"(Nam)은 베트남어로 숫자 "5"를 의미합니다.
캄보디아에서의 패권 경쟁은
외관상으로는 중국과 미국의 경쟁처럼 보여집니다만...
실제로는 베트남이 이미 거의 모든 걸 장악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나머지 외교적 관계는 일종의 부수적 관계에 불과하여
선전용이거나, 부분적인 실용적 이유에서 기인할듯 합니다.
그리고 "빤야싸 대학"의 교명에 대해 말씀해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산스끄리뜨어 "샤스뜨라"(shaastra)는 원래 "학술적 문헌"을 의미했습니다만,,.
후대로 오면 <베다>나 <우빠니샤드> 같은 고대 성전에 대한 "주석서"를 의미 했습니다.
그래서 한문권에서는 "논서"(論書)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다가 더욱 후대로 내려오면 "학문분과"나 "학문"을 의미하기도 했는데..
크메르어나 태국어에는 이러한 의미로 변했을 시절에
인도로부터 차용된 외래어가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만 캄보디아에서는 크메르어 발음을 특성상
표기에는 Sastra라는 철자가 모두 표기되어 있지만
읽을 때는 "싸"라고 발음하더군요..
그래서 가령 "문학"을 의미하는 크메르어는 "악써 싸"인데
"악써"(태국어-악쏜)는 원래 "문자"를 의미하는 산스끄리뜨어 "악샤라"akshara에서 온 말입니다.
하여간 나중에 한국인을 위한 크메르어 사전이 만들어진다면
그러한 고대의 어원들을 밝힐 수 있다면
더욱 많은 도움이 될듯 합니다..
따라서 태국어-크메르어-인도 고전어를 비교해서 사전을 만든다면
동남아 문화를 연구하는 데 엄청난 발전이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아직은 그렇게 포괄적 차원에서 연구하는 학자는
세계적으로도 없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빤야싸 대학"의 교명은
"빤냐"(Panna)는 빨리어로서 "지혜"를 의미하고
그 산스끄리뜨어는 "쁘락냐"(Prajna)로서
한문 권에서는 음역으로는 "반야"(般若)라고 번역했고
의역을 할 때는 "지혜"(智慧)로 번역되곤 했었죠,,
그러니 "빤야사 대학"은
우리말로 고친다면
<지혜학 대학>.. 혹은 <지학대학>이나 <혜학대학> 정도
될듯 하네요~ ^ ^
쏙섭아이 님께서는
크메르어 언어연구에 관심이 있으시기 때문에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시면
더욱 깊이있는 방향으로
연구하시는 것도 가능할듯 해서
말씀드려 봅니다..
네 감사합니다. 열심히 더 노력하겠습니다....그리고 울트라 님께서 설명하신 빤야사에 관한 말씀은 분명하고 정확한 말씀입니다.
가장 답답하고 한심한 것은 이런 사실들을 일반국민들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시골지역은 훈센지지 세력이어서 이런 말조차도 처음 들어 보는 것처럼 반응합니다. 학생들과 캄보디아 돌아가는 상황을 이야기하면 모두가 눈만 깜빡거리고 있고 저 사람 혹시 폴폿을 추종하는 사람아닌가 하는 식으로 쳐다보기도 합니다. 일바국민들은 자신들이 경멸하는 유은이라는 베트남 사람들을 여전히 자신들보다 수준이 낮은 민족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뒤통수를 철저하게 치고 있는데 말이죠.
그렇군요.. 목수 님께서는 항상 시골지역의 여론을 전해주시는데, 역시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시골 지역으로 갈수록 정보전달의 부족이나 보수적인 태도들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시골사람들은 자신들의 땅을 빼앗기는 지경에 이르지 않는 한은 결코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각종 보고들을 보면 그런 것 같더군요..
좋은글 읽어봅니다,
싸쓰뜨러짜,,,/는 그럼 대학교수인가요?
드물게는 고교의 교사를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 대학의 "교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범어 샤스뜨라shaastra가 마지막의 단모음 a는 발음안되므로
시옷 받침으로 끝나면서 "쌋"으로 발음됩니다만...
복합어 shastra-aacaarya [샤스뜨라-아짜랴: 학문의 스승]의
"뜨라" 부분의 모음은 장모음 aa로 변하므로 발음을 해주다 보니
"싸쓰뜨라" 전체를 발음해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을 의미하는 "아짜"(범어: 아짜랴)가 결합하여
"싸쓰뜨라짜"(싸쓰뜨라+아짜)로 된 복합어입니다..
인도 문화권의 발음들은 y가 모음이 아니라 반모음이라 하여 자음이 됩니다..
그래서 ya도 마지막에 가면
묵음이 됩니다.. 그 점은 r 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아짜랴"가 크메르어 "아짜"로 변합니다..
마찬가지로 태국어의 경우, 자국 발음규칙에 따라
"교수"를 "삿타짠"이라고 하는데..
이 역시 "삿타"(샤스뜨라)와 "아짠"(아짜랴)이 더해진 말입니다..
태국어 역시 크메르어와 마찬가지로 발음을 다해 주진 않지만
그 철자 속에 산스끄리뜨어의 원래 철자들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