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사이로 비치는 달빛 아래 짙은 밤색 머리에 은회색의 로브를 입은 남자가 넓은 그루터기에 앉아 있었다. 그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외모에 날카로운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는 하얀 백발에 앙상한 두 팔을 검은색 조끼 사이로 드러낸 남자가 죽은 듯이 땅 위에 누워 있었다.
그루터기에 앉아있는 로브를 입은 남자는 누군가에게 얘기하듯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 ...그러므로 마나는 신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고귀한 선물이다. 그것은 보이지는 않지만 이른 아침 떠오르는 태양에도, 막 싹을 틔운 화초에도, 네가 들이쉬는 공기에도 존재하는 무형의 기운 (Spiritual Form Energy) 이지. 그렇다면 마법사는? 마법사는 마나를 물질화하고 마법을 통해 증폭시켜 보이지 않는 마나를 물리화, 형상화 시키는 존재야. 따라서 마법사는 마나의 흐름을 이해하고 이끌어내기 위해 자신과 자연과의 관계를 이해하며 무엇보다 그 정신의 세계를 온전하게 해야한다. 마나는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무엇에도 존재하지만 마법사 자신이 그 흐름을 이해하고 이끌어내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야. 따라서 오랜 수련을 거친 마법사는 마나의 흐름을 이해하며 더 많은 마나의 흐름을 자신의 몸 안에 이끌어낼수 있지. 그렇기 위해서는... "
" 다섯번째 듣는 애기요. "
죽은 듯이 누워있던 백발의 남자의 입에서 돌연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은회색 로브의 남자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 너를 깨우는 데는 기초강론이 제일이지. "
" 흥. "
백발의 남자가 코웃음을 치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등 뒤에는 온통 푸른빛의 얼음조각이 달라붙어 있었다.
백발의 남자는 힐끔 자신의 등 뒤를 돌아보며 인상을 찡그리더니 나직하게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 프로즌 오브 (Frozen Orb)... 과연 대단하군. "
은회색 로브의 남자가 말했다.
" 나에게 그 스펠을 쓰게 한 사람은 몇 안되지. 다섯번째 도전도 실패했지만 너도 나쁘지는 않았다. "
은회색 로브를 입은 남자가 문득 지긋한 눈빛으로 백발의 남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 네가 원한다면 전수해주겠다. 네가 저주와 죽음의 길을 떠나기만 한다면... "
" 필요없소. "
백발의 남자가 그의 말을 끊고 냉랭하게 내뱉었다.
은회색 로브를 입은 남자의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스쳐갔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백발의 남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너란 녀석은... 아직도 이해할수 없군. 왜 네가 그 길을 고집하는지... 너에겐 자질이 있어. 나, 조디악 드레이크의 이름을 이을 자격이 있단 말이다. "
백발의 남자는 딱딱하게 굳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른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 너희 네크로맨서들의 공통적인 성향이기도 하지만 너는 더욱 무모하다, 료겐 하데스. 처음 네놈이 나를 찾아와 도전했을 때부터 느꼈지만 너는 마치 강자를 찾는 전사처럼 끝없이 도전하려는 기질을 가졌어. 그것이 언젠가 나를 꺾고 너에게 대륙 제일이라는 칭호를 가져다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
조디악의 얼굴이 굳어졌다. 잠시 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 그것이 너를 마법의 완성으로 이끌수는 없다. "
조디악 드레이크, 이백여년 전 탈 라샤 이후 가장 위대한 소서러 (Socerer)라는 그와 저주와 죽음의 조율사, 네크로맨서 료겐 하데스 사이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료겐이 조디악을 돌아보며 말했다.
" 마법의 완성이라... 당신은 그것에 도달했다는 것인가? "
조디악은 깊은 상념에 빠져들 듯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그렇지는 않지. 그러나 내가 그것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있다. "
" 그건... 무엇이지? "
조디악은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한참 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 내가 지금 가려는 길... 그 끝에 그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 "
료겐의 붉은 눈이 반짝거렸다.
" 디아블로를 봉인하는 것 말이오? "
조디악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쳐갔다.
" ...비슷하지. 아니, 그 일부분이라고 해야할까. "
료겐이 의아해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 디아블로를 봉인하는 것이 일부분이라니,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이오? "
료겐은 여전히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조디악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조디악은 천천히 그루터기에서 일어나더니 멀리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통나무 집쪽으로 걸아가기 시작했다.
바닥에 앉은 채 조디악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던 료겐에게 조디악이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조금 전 내가 너를 무모하다고 했었나? 어쩌면 내가 하려는 일은 더 무모할지도 모르겠군, 후후후... "
료겐은 느린 걸음으로 멀어져가는 조디악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 디아블로를 봉인할 때 도움은 필요없소? 원한다면 함께 가겠소. "
조디악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 아니, 조력자는 이미 충분하다. 자카룸의 그림자와 가장 빠른 화살이라면 부족함이 없지. 그리고 또... "
그가 무엇을 말하다가 속으로 삼킨 것인지 고된 고행을 통해 신체의 감각이 극한에 다다른 료겐도 들을 수 없었다.
조디악의 목소리가 점차 멀어져갔다.
" 너는 남는게 좋아, 료겐. 그리고 혹시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
" ...? "
" ...내 다른 제자를 부탁한다. 베라미스, 그녀의 이름이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건 나는 너희 둘 모두 제자로 여기고 있으니까 너희는 사형제지간이야. "
" ... "
" 료겐. "
" ... "
" 료겐, 이 박쥐의 귀에 개코를 가진 몬스터같은 녀석아, 안 일어나? "
" ... "
" 아직 부족한가? 좋아, 에라이, 이 뼈만 남은 괴물거지 녀석아. 자려면 노잣돈이나 벌게 길거리에서 자라. 델 엡소롬에서처럼 돈이나.. "
" 입 닫아. 네 놈의 구취 때문에 두통이 생길 지경이다. "
료겐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거대한 체구의 사나이 쿠오 듀크가 창밖으로 비치는 햇볕을 가로막아 료겐의 몸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 채 침대 옆에서 피식 웃으며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사막의 태양이 솟아오른지 한참이 지난 늦은 아침이었다.
" 밤새 계속 뒤척거리더니 늦잠을 자는군. 오랜만에 편한 잠자리에 드니 잠이 안 오던가? "
료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쪽 무릎을 끌어당겨 팔꿈치를 올려놓았다.
쿠오 듀크의 말대로 오랜만에 따듯하고 편한 잠자리였지만 어제밤 료겐이 쉽게 잠들지 못한 것은 차가운 땅바닥과 침대에서 오는 잠자리의 생소함 때문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꿈에서 만난 한 남자, 그리고 그가 남긴 말이 료겐의 머릿속을 떠다니며 그의 수면을 방해한 것이다.
료겐은 아직도 머리속을 떠나지 않고있는 생각을 떨쳐내려는 듯 이마로 흘러내린 백발을 뒤로 쓸어넘기고 쿠오 듀크를 돌아보았다.
" 팔라딘과 베라... 소서리스는? "
쿠오 듀크가 대답했다.
" 산책이라도 간 것 같은데. 원래 일행이었는지 웬 꼬마 하나를 데리고 나가더군. "
쿠오 듀크가 근처의 의자를 당겨와 앉더니 료겐을 보며 말했다.
"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
" 뭐가? "
" 팔라딘, 데브란트 말이다. 아직도 그 녀석을 죽일 생각인가? "
쿠오 듀크의 질문은 또 다시 료겐을 침묵에 빠져들게 했다.
" 나는 어쨌던 그놈의 로커스트들 때문에 그 녀석한테 신세를 졌으니 빚을 갚을 때까지는 싸우지 않을 생각인데. 너는? "
" 글쎄... "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료겐이 갑자기 시트를 제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 산책이라... 흥. "
료겐은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자신의 무장을 챙겨 입었다.
그가 막 낡은 검은색 조끼에 한팔을 집어넣었을 때 료겐은 쿠오 듀크의 시선이 그의 몸 한 군데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 너 뭐하는 거냐? "
" 응? 아, 아니... "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료겐의 몸 어딘가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쿠오 듀크가 조금 당황듯이 주춤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 하하하, 네크로맨서도 남자가 맞긴 맞네? 난 또 네 놈이 워낙 삐쩍 말라서 불능인줄 알았지. "
쿠오 듀크는 자신의 발견에 싱글벙글 웃느라고 료겐의 얼굴빛이 얼음장처럼 굳어지는 것을 못 보고 있었다.
" 으흠, 이거 대단한 발견인데. 저주와 죽음의 조율사도 아침마다 남자의 신체현상을 똑같이 겪는구나. 근데 보아하니 그 정도로는 레이디를 만족시키려면 힘들 것 같은데. 료겐, 너 약제라도 좀 지어 먹어야.. 응, 너 뭐하는거냐? "
" ... 본 스피어! "
아트마 테번의 여주인 아트마는 객실청소를 하려고 이층복도를 걸어가다가 갑자기 방문을 부서뜨릴듯이 뛰쳐나온 거대한 체구의 남자에 부딪칠뻔 했다.
양팔 가득 안고있던 수건과 함께 넘어진 아트마를 뒤로 하고 큰 체구의 남자는 웃음소리를 흘리며 테번 밖으로 부리나케 뛰쳐나갔다.
" 주인님, 괜찮으세요? "
점원 네드가 놀란 얼굴로 뛰어와 그녀를 부축했다.
아트마는 네드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며 짜증스럽게 투덜거렸다.
" 아이고, 허리야. 뭐 저런 미친 자식이 다 있어? 저 놈 어느 방이야? 네드, 당장 방 비워...? "
아트머의 짜증스런 목소리는 조금 전 그녀와 부딪힐뻔한 거대한 체구의 남자가 뛰쳐나간 방문에서 천천히 걸어나온 백발의 남자를 보는 순간 사그라들었다.
백발의 남자는 싸늘한 냉기와 음산함을 풍기며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아트마를 보다가 천천히 그녀와 점원 네드의 옆을 지나쳐갔다.
아트마는 그 남자가 옆을 지나칠 때 일생에서 처음으로 그녀의 몸매를 원망하며 그의 통행에 방해되지 않게 최대한 그녀의 거구를 벽에 밀착시켰다.
백발의 남자가 계단을 내려가 테번 밖으로 나가자 그제서야 아트마는 파고들 듯이 벽을 짓누르던 등을 떼고 한숨을 내쉬었다.
" 헤에, 진짜 인상 더럽네요. 주인님, 저 손님 방 비울까요? 아얏! 왜 때려요? "
료겐이 나간 쪽을 쳐다보며 말하던 네드가 아트마의 솥뚜껑 같은 손에 뒤통수를 얻어맞고 팔짝 뛰었다.
" 이 녀석아, 방 하나 비우려다가 가게 문 닫을 일 있냐? 저 방 청소나 깨끗이 해! "
검푸른 파도와 새햐얀 모래 그리고 붉은 태양이 맞닿은 해변 위로 세 사람이 걸어가고 있었다.
마르고 초췌한 체구의 어린 아이와 뒤로 치켜올려 묶은 갈색머리가 흣날리는 젊은 여자가 손을 잡고 걷고 있었고 그 뒤로 이글거리는 태양이 내리쬐는 해변과는 어울리지 않게 갑옷에 롱소드까지 갖춘 남자가 따라가고 있었다.
얼핏 보면 마치 산책을 나온 레이디와 어린 군주를 수행하는 기사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자는 레이디라고 보기에는 초록색 긴 스커트에 낡은 상의뿐인 너무 간단한 복장에 맨발이었고, 아이는 어린 군주라고 보기에는 이마에 보이는 흉한 상처까지 해서 너무 초췌해 보였고, 기사는 너무 허름한 행색이었으며 태양에 달궈진 해변은 산책을 하기에는 너무나 뜨거웠다.
앞서 걷고 있는 여자가 옆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있는 아이에게 말했다.
" 알브레트, 바다를 본 건 처음인가요? "
알브레트는 걸으면서도 멍하니 해변가에 철썩거리며 밀려드는 파도와 그 뒤로 까마득히 보이는 수평선을 보느라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베라미스는 그런 알브레트를 보며 조용히 미소를 짓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 데브란트, 덥지 않아요? "
데브란트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 괜찮습니다. "
그가 입은 갑옷이 열기에 달아올라 은은하게 붉은 빛을 띄고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데브란트의 얼굴에는 거의 땀이 흐르지 않고 있었다.
베라미스가 그에게 뭔가 다시 말하려는데 알브레트가 갑자기 그녀의 손을 놓고 바다쪽으로 달려갔다.
아이는 파도가 적신 축축한 모래의 느낌이 생소한 듯 몇번이고 발로 밟아보다가 조금 망설이며 잔잔한 파도에 발을 담갔다. 그리고 바닷물에 손을 담그고 젓다가 손가락을 핥았다.
베라미스가 손가락을 빨아보고 얼굴을 찡그린 알브레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바람에 휘날리는 초록색의 긴 치마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알브레트에게 걸어가며 소리쳤다.
" 알브레트, 우리 모래로 성을 만들어 볼까요? "
" ...? "
" 이쪽으로 와봐요. "
베라미스가 모래 위에 앉아 알브레트에게 손짓하자 그가 다가왔다.
" 자, 여기를 파고 모래를 이렇게 쌓아서... 그렇지, 그런 식으로... 밑에는 젖은 모래로 이렇게 쌓아봐요. "
하얗게 파도가 부서지는 해변 위에 앉은 두 사람이 바쁘게 손을 움직이며 무엇인가를 쌓아 올렸다.
데브란트가 뒤편에 서서 조용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오가 지난 후 베라미스와 알브레트 그리고 데브란트는 테번으로 돌아갔다.
알브레트의 한 손에는 베라미스가 줏어준 큼직한 소라껍데기가 들려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것을 한쪽 귀에 댄 채 걸어갔다.
그들이 막 테번이 보이는 길로 접어들자 어깨 위로 백발을 늘어뜨린 료겐 하데스가 팔짱을 낀 채 어느 건물 벽에 기대어 있는게 보였다.
알브레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소라껍데기를 꼭 안고 테번 안으로 들어가자 베라미스는 고개를 돌리고 료겐을 보았다.
" 하데스씨, 편히 주무셨나요? 우리는... "
" 내 용건은 네가 아니니 빠져. "
료겐이 수그리고 있던 머리를 천천히 들어 데브란트에게 시선을 옮겼다.
" 멋진 동료애군, 팔라딘. 원래 그렇게 잘 잊는 편인가? 누군가 네 놈을 위해 죽은 것까지도? "
데브란트는 묵묵한 표정으로 료겐을 마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용건은 그것뿐인가? "
" 그렇다면? "
데브란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않고 천천히 검집에서 롱소드를 뽑아들었다.
료겐의 차가운 조소를 흘리며 팔짱을 풀고 품속에서 완드를 꺼냈다.
" 이번에는 틀림없이 자카룸의 곁으로 보내주지. "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며 천천히 다가섰다.
베라미스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 두 사람 다 멈춰요. "
료겐이 형형한 눈빛으로 데브란트를 노려보며 말했다.
" 비켜. "
료겐이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완드를 휘두르려는데 등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 실례하겠소. "
베라미스가 료겐의 등뒤를 돌아보며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 케인? "
짙은 회색 로브를 입고 하얀 수염을 턱 밑으로 늘어뜨린 데카드 케인이 어느새 그들의 뒤에 서있었다.
케인이 앞으로 몇걸음 걸어오더니 입을 열었다.
" 그대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소. "
네 사람과 대륙 제일의 현자라고 불리우는 노인은 며칠 전까지는 아리스가 머물렀지만 이제는 료겐과 쿠오 듀크가 쓰고있는 방 안에 모여 앉았다.
케인은 방 한가운데 놓인 작은 티 테이블 앞의 의자에 앉았고 베라미스가 그 옆에 앉았다. 데브란트는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고 쿠오 듀크는 창가에 팔짱을 끼고 기대섰다. 료겐은 데브란트와 멀리 떨어진 침대 위에 한쪽 무릎을 세워 한 팔을 올려놓고 앉았다.
케인이 입을 열었다.
" 내가 그대들을 부른 이유는 조금 전 말했듯이 그대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오. 다만... "
케인은 천천히 그들 모두를 둘러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 삶의 끄트머리에 다다른 노인으로서나 학자로서가 아니라 마지막 호라드림의 일원으로서의 들려줄 이야기오. "
방안에 모여있는 네 사람의 표정이 변했다. 쿠오 듀크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고 료겐의 눈이 반짝거렸으며 데브란트는 고개를 들어 케인을 바라보았다. 베라미스만이 평온한 기색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케인이 베라미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소. 내가 호라드림의 마지막 계승자임을 조디악은 알고있었소. 그의 유일한 제자가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겠지. "
" 네. 스승님께 들은 적이 있습니다. "
베라미스가 대답하는데 료겐은 고개를 돌렸다.
" 지금부터 내가 들려줄 이야기는 아주 오래된 그래서 누구나 조금씩은 들어봤을 이야기오. 지금은 한낱 전설로나 여겨지는 그런 이야기, 그러나 결코 전설이 아닌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진실의 이야기오. "
" 시간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함께 존재해왔지만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며 어느 한 쪽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서로의 피를 흘리며 영원히 반목해야 하는 존재들이 있었소. 한 쪽은 빛과 질서를 통해 우주를 다스리고자 하는 천상의 존재들 즉 신의 세력이고 또 한 쪽은 암흑과 혼돈을 진실로 내세우는 악마의 세력이오. "
" 그들의 합일될 수 없는 반목은 태초부터 시작되어 영원히 계속되어 왔소. 때로는 천상의 문에서, 때로는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시간이 존재하는 모든 공간에서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은 전쟁이 계속되었소. "
" 그러던 어느 시간에 대천사 티리엘은 가장 용맹한 빛의 수호자 이주알을 내세워 지옥의 세력을 가장 깊숙한 곳까지 후퇴시키는데 성공했소. 그러나 천사 이주알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스스로를 타락시켜 어둠의 세력과 하나가 되었고 그로인해 빛의 군대는 커다란 패배를 당하여 다시 후퇴할 수밖에 없었소. "
" 결국 양쪽 모두 막심한 피해를 입고 자신들의 상처와 기력을 회복해야 했소. 그리하여 어느 한쪽도 다른 한 쪽을 제압하여 영원한 전쟁, 즉 역사가들이 일컫는 죄악의 전쟁 (The Sin War)을 끝낼수 없는 처지에 이르자 전쟁의 흐름을 바꿀만한 새로운 방법이 대두되었소. 그것이 바로 인간이오. "
케인인 문득 네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 내 그대들에게 묻겠으니 대답해 보시오. 인간은 무엇이오? "
케인은 모두를 돌아보다가 잔뜩 인상을 쓰고있는 쿠오 듀크에게 시선을 옮기더니 물었다.
" 아리앗의 수호자여, 인간은 무엇이오? "
쿠오 듀크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화들짝 놀랐다.
" 헉, 나한테 묻는 겁니까? "
" 그렇소. "
쿠오 듀크는 그 거대한 체구에 걸맞지 않게 우물거리며 손가락을 꼬았다.
" 음, 그러니까... 인간은... 사람이지요...사람은 또... 인간이고... "
케인의 주름진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 그럼 인간은 무엇을 가지고 있소? "
" 예? "
" 당신은 무엇을 가지고 있소? 다른 종족, 다른 생물에 비하여 무엇을 가지고 있소? "
쿠오 듀크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 아, 나야 뭐... 강철같은 근육과 힘 그리고 또... "
" 단순한 머리. "
" 그래, 그거랑 또... 카악! 야, 임마! "
케인은 잔잔한 미소를 띄고 쿠오 듀크와 료겐이 실랑이를 벌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인간은 무엇이오? 인간은 약한 존재요. 인간에게는 사자처럼 강한 발톱도, 말처럼 빠른 다리도, 곰과 같은 힘도 없소. 음, 예외도 있겠지만... "
케인이 료겐과 떠들고 있는 쿠오 듀크를 자신도 모르게 힐끗 보며 말끝을 흐렸다.
" 그러나 인간에게는 지능이 있소. 또한 신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고귀한 선물이라는 마나를 다룰수 있는 능력이 있소. 그리고 무엇보다도... "
케인은 문득 말을 멈추더니 데브란트를 돌아보았다.
" 자카룸의 종이여. "
데브란트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케인을 바라보았다.
" 그대는 팔라딘, 빛의 신 자카룸의 뜻을 수호하는 기사요. 그렇지 않소? "
데브란트는 묵묵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케인은 다시 고개를 돌려 료겐을 바라보았다.
" 내 짐작이 맞다면 그대는 저주와 죽음의 조율사 같소만. "
료겐이 잠시 멈칫하다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 그렇소. "
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 그대들 네크로맨서는 신의 존재를 부인하오. 그렇지 않소? "
료겐은 말없이 약간 고개를 끄덕거렸다.
케인 또한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다시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 그렇소. 그대들 중에도 한 사람은 신의 수호자이고 한 사람은 신을 부인하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
" 이것이 바로 인간이 천상과 지옥의 세력 모두의 관심을 끈 이유이자 인간이 죄악의 전쟁의 흐름을 바꿀수 있는 존재로 대두된 이유요. "
케인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 그것은 인간이 선택의 존재라는 사실이오. "
방안에 모인 사람 모두의 시선이 케인에게 향했다.
케인은 마치 제자를 가르치는 교사처럼 양팔을 벌리며 차근차근 말했다.
" 한 사람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신의 수호자가 되었고 한 사람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신의 존재를 부인하오. 마찬가지로 이백여년 전의 인간들 또한 필요하다면 스스로 천상과 지옥의 세력 중 하나를 선택할수 있었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
" 인간은 약하지만 위대한 존재요. 인간의 지능은 이미 우리를 지상의 모든 생물의 주인으로 만들었고 마나를 다루는 능력은 이백여년 전 지옥의 군주 셋을 봉인할 정도로 발전하였소. 그런 인간에게 선택의 기회까지 주어졌소. 그대들이 신 또는 악마라면 그런 존재인 인간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겠소? "
" 처음 인간의 능력을 발견하고 눈을 돌린 것은 악마였소. 그들은 인간에게 높은 지위와 능력을 보장하며 자신들의 세력으로 끌어들이려 했소. 그러나 애초부터 인간을 돌봐왔던 신의 세력과 인간 사이의 유대는 지옥의 세력이 쉽게 방해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소. 그러다가 지옥의 세력은 인간을 다루는데 더 효과적인 방법을 발견했소. "
" 인간은 선택의 존재요. 따라서 인간의 본성에는 빛과 질서와 암흑과 혼돈의 의식이 모두 존재하오. 악마는 그중에서 암흑과 혼돈의 의식을 일깨워서 인간을 그들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소. 인간이 천상과의 전쟁에서 중요한 열쇠가 될 것임을 깨닫고 그러한 행위에 가장 앞장 섰던 악마들이 바로 지옥의 세 군주 바알-메피스토-디아블로요. "
" 인간을 그들의 전쟁에 끌어들이려는 세 악마로 인해 인간세상은 피폐되어갔소. 농부는 수확물에 불을 지르고, 아들은 부모에게 칼을 겨누고, 신하는 주군의 목을 베며 마치 지옥이 이 땅에 재림한듯 변하여갔소. "
" 결국 지상에 힘을 지닌 인간들이 세 악마에 대항하기 위해 하나 둘씩 모여들어 단합하기 시작했소. 그 시작이 바로 내가 속한 호라드림이오. "
" 그런데 지옥의 세력 내부에서 내분이 일어났소. 지옥의 세 군주가 인간을 끌어들이는데 혈안이 되자 나머지 지옥의 7대 악마들중 몇몇이 그들 세 군주의 권위와 능력 그리고 천상과의 전쟁을 종결하려는 의지에 대해 회의를 품게된 것이오. "
" 내분은 결국 반란으로 이어져 지옥의 세 군주는 다른 악마들에 의해 막심한 상처를 입고 지상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소. 그리고 그들은 지상 어딘가로 뿔뿔이 흩어져 인간의 증오, 파괴, 공포를 양식으로 삼아 다시 힘을 회복하여 지옥을 탈환하려고 했소. 덕분에 수없이 많은 인간들이 그들에게 죽거나 서로를 죽여가며 피를 흘려야 했소. "
" 천상에서는 대천사 티리엘을 내려보내 세 악마를 봉인할 수 있는 소울스톤을 호라드림에게 전했소. 천상의 세력은 당시 지옥의 세력에게 입은 피해와 다른 악마들의 도전 때문에 세 악마를 추적할 여유도 없었으니까. 그리하여 호라드림, 스스로 지옥의 세력의 반대편을 선택한 인간들이 지상에 쫓겨 내려온 세 악마를 추적하기 시작했소. "
" 호라드림에 의해 가장 먼저 봉인된 악마는 메피스토였소. 그리고 그대들도 며칠 전 들었다시피 이곳 루트 골레인의 근처에서 바알이 붙잡혀 탈 라샤와 함께 봉인되었소. 최후에 나의 선조 제라드 케인에 의해 칸다루스 중부에서 마지막 지옥의 군주 디아블로가 소울스톤에 봉인되었소. "
" 메피스토가 봉인된 소울스톤은 동쪽의 성지 쿠라스트로 옮겨져 신전의 도시 지하에 보관되었소. 바알의 소울스톤은 탈 라샤와 함께 봉인된 채로 티리엘에 의해 재봉인 되어 사막 어딘가에 숨겨졌소. 그리고 디아블로의 소울스톤은 트리스트람의 어느 지하로 옮겨졌고 그 위에 교회당을 세워 영원히 그것의 존재를 지키게 하였던 것이오. "
" 그런데 그로부터 이백여년이 지난 어느 날 한 사람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이뤄진 균형에 금이 가기 시작했소. "
베라미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라자루스... 대주교 라자루스 말이군요. "
" 그렇소. 자카룸의 대주교 라자루스 그는 아... "
케인이 깊이 한숨을 내쉬더니 문득 데브란트를 돌아보았다.
" 그는 원래 대단히 신실한 사람이었소. 내 짐작에 그가 변하게 된 이유는 자신에게 올거라 생각했던 교황의 직위가 지금의 칼림 교황에게 돌아갔기 때문인 것 같소. 그 이후로 그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고 보다 강한 힘에 집착하기 시작했소. 그리고 타락해가는 그의 영혼은 트리스트람의 캐타콤의 가장 깊은 곳에 묻혀있는 디아블로의 소울스톤의 부름에 이끌려 결국 자신의 손으로 공포의 군주를 깨우게 되었소. "
" 마침내 소울스톤의 봉인에서 풀려난 디아블로는 오랜 봉인으로 그 힘을 거의 잃은 상태였소. 라자루스는 그를 위해 자신에게 충성하던 인간들을 캐타콤으로 이끌어 디아블로의 양식이 되게 했지. 그 이후의 일은 그대들 역시 잘 알 것이오. 칸다루스의 왕 리오릭 전하는 디아블로에 의해 타락되고 광기의 암흑왕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웨스트마치와 전쟁을 벌였고 결국 부하인 대장군 라크다난에 의해 살해되었소. "
" 그리고 디아블로는 라자루스에 의해 납치된... 알브레트 왕자, 지금 옆방에서 자고있는 저 아이를 숙주로 삼아 지상에서의 힘을 회복하게 되었소. 그의 권능으로 트리스트람의 캐타콤은 지옥과 맞닿은 암흑과 혼돈의 장소로 변해버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도전했다가 돌아오지 못했소. 세 사람의 영웅을 제외하고는 말이오. "
" 당시 나는 자카룸 사제단과 함께 디아블로의 봉인을 조사하기 위해 트리스트람에 머무느라 세 사람 모두를 만날 수 있었소. 나는 그대들이 개인적인 인연 혹은 소문을 통해서 세 사람에 대해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오. 조디악 드레이크와 페라포세 그리고 올레시온 비요크만, 그들이 바로 되살아난 디아블로를 죽이기 위해 캐타콤의 어둠 속으로 내려갔던 영웅들이오. "
"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행운과 영광을 시험하려는 수많은 사람들을 삼켜버린 어둠 속으로 사라진지 며칠 후 나는 공포의 군주 디아블로의 고통스러운 최후의 비명을 들을 수 있었소. "
" 그러나 마나에 몸담은 존귀한 자들이 멀리서도 디아블로의 죽음을 알수있을 때까지도 디아블로를 죽인 세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소. 그리고 그대들도 알다시피 타모에와 이곳 루트 골레인처럼 대륙 곳곳에 나타나는 어둠의 징후, 지옥의 세력이 싹트는 징후가 계속 되었소. "
창밖에는 어느새 해가 져물고 있었다.
시나브로 찾아오는 어두움 만큼이나 방안에 모여앉은 네 사람의 얼굴도 어두웠다.
케인은 말을 많이 한 탓에 조금 힘들어 했지만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베라미스를 향하고 있었다.
" 조디악의 제자여. "
베라미스의 낯빛은 어느새 파리해져 있었다.
" 네, 케인. "
케인은 말했다.
" 나는 그대가 스승을 찾기 위해 여행에 오른 것을 알고있소. 또한 그대가 대륙 곳곳에 나타나는 어둠의 징후에 대해서도 얘기한 것을 기억하고 있소. 그대는 그 이유를 아시오? "
베라미스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 그... 그것은... "
케인은 창백한 표정의 베라미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데브란트에게 시선을 옮겼다.
데브란트는 여전히 묵묵한 표정이었지만 꽉 움켜쥔 그의 주먹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 데브란트. "
데브란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케인을 마주보았다.
" 나는 팔라딘의 더블 드래곤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소. 그 중 하나는 물론 자카룸의 그림자라는 가장 존귀한 칭호로 불리운 올레시온 비요크만일 것이오. 그대 데브란트가 또 다른 드래곤이오? "
데브란트는 아무 대답 없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그런 침묵은 대륙 제일의 현자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케인이 계속 말했다.
" 그대는 올레시온이 디아블로를 죽인 뒤에 돌아오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오? 그와 그대가 웨스트마치와의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팔라딘의 교규를 어겨서 파문되었기 때문이오? "
쿠오 듀크가 놀라워하며 데브란트를 쳐다봤다.
데브란트는 꾹 다문 입술을 깨물다가 말했다.
" 아니... 그와 나는... 참전을 결심했을 때부터 파문을 각오했습니다. "
" 그렇다면 올레시온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이오? 그는 죽은 것이오? 그러나 여기 베라미스는 몸소 캐타콤의 최후층까지 내려가 로그 페라포세의 유체를 발견했지만 올레시온과 조디악의 시체는 없었소. "
데브란트가 이를 악물고 천천히 말했다.
" 그는... 죽지 않았소. "
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그렇소.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대만은 알 것이라고 생각했소. 그렇다면 올레시온은 어디에 있소? 그리고... "
케인이 다시 베라미스를 돌아보았다.
" 조디악은 어디로 사라진 것이오? 왜 디아블로는 죽었는데 어둠의 세력은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오? "
케인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데브란트와 베라미스를 번갈아 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창백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내가 대답하지. "
료겐의 냉랭한 목소리가 방안에 가라앉은 정적을 깼다.
료겐은 특유의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 디아블로를 죽이고 돌아오지 않은 두 사람, 무엇인가에 이끌리듯이 대륙 곳곳에 나타나기 시작한 몬스터들, 지상에 내려온 지옥의 악마, 고뇌의 여신 안다리엘.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이유라면... "
료겐의 눈이 반짝거렸다.
" 공포의 군주 디아블로는 죽지 않았다는거지. 아니, 새 생명을 얻었다고나 할까. 아마 그 두 사람 중 하나가 새로운 숙주가 되었겠지. "
-- 우당탕!
데브란트가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그가 앉아있던 의자가 뒤로 날아갔다.
데브란트의 얼굴이 온통 시퍼렇게 되어 마치 불꽃을 뿜어낼 듯한 눈으로 료겐을 노려보았다.
그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며 그 안에서 목이 졸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닥쳐라... "
료겐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스쳐갔다.
" 내 말이 틀렸나, 팔라딘의 더블 드래곤? 아니, 파문당한 팔라딘? "
갑자기 웅- 소리가 들리며 데브란트의 발 밑에서 컨선트레이션 오오라가 발현되었다.
어느새 롱소드를 뽑아들은 데브란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는데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 디아블로가 죽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최후의 비명을 들었고 옆방의 알브레트가 인간의 모습을 되찾은 것이 그것을 증명하오. 그러나 라자루스가 디아블로의 소울스톤을 얻어 알브레트의 이마에 이식함으로써 디아블로는 지상에서의 육신을 얻었고 그때부터 대륙 곳곳에 디아블로의 권능에 의한 어둠의 세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소. 그리고 타모에와 루트 골레인에서 보다시피 그것이 더 심해지고 있다는 것은 결국 디아블로는 죽지 않았다는 결론이 되오. "
케인의 말을 경청하는 네 사람의 얼굴이 모두 굳어있었다.
케인이 데브란트와 베라미스를 보며 말했다.
" 나는 두 사람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오. 그래서 그들의 행방을 찾기위해 데브란트는 타모에에서 안다리엘을 주살하며 여기까지 왔을 것이고 베라미스는 트리스트람의 캐타콤에까지 내려갔을 것이오. 그러나 인정하기 어려웠을거요. 하나는 대륙 제일의 마법사이고 또 하나는 대륙 제일의 팔라딘, 그 고귀한 존재중 하나가 디아블로에게 잠식되었다는 것은 나 역시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요. "
" 그래서 나는 두 사람에게 묻고자 하오. 베라미스. "
베라미스가 고개를 들어 케인을 마주보았다.
" 그대는 그대의 앞에 펼쳐진 길의 끝에서 그대가 알고있는 스승이 아닌 다른 모습의 조디악을 만날지도 모르오. 그래도 그 길을 가겠소? "
잠시 정적이 흐른 후 베라미스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 ...네. "
케인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데브란트를 돌아보았다.
" 써어, (Sir) 데브란트. 그대가 가려는 길의 끝에는 한때는 그대의 동료이자 상관이었던 사람이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오. 그래도 그 길을 가겠소? "
데브란트는 어둡고 묵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물론입니다. "
" 디아블로가 고작 어린 아이의 육신을 얻었을 때도 대륙 제일의 세 영웅들만이 그것을 제압하는데 성공했소. 이제... 대륙 제일의 마법사 혹은 전사와 하나가 된 디아블로의 힘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만큼 강할 것이오. 그래도 그 길을 가겠소? 그것이 당신의 선택이오? "
베라미스는 문득 데브란트를 돌아보았다. 데브란트 역시 그녀를 보고있었다.
어쩌면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 스승과 친구를 만날지도 모르는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마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어 함께 대답했다.
" 예. "
케인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쿠오 듀크와 료겐에게 시선을 옮기더니 말했다.
" 그대들 두 사람은... "
" 올레시온 비요크만이라고 했습니까? "
쿠오 듀크가 케인의 말을 도중에 끊으며 물었다.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 그렇소. "
쿠오 듀크는 웬지 모르게 범접하기 어려운 사나운 분위기를 풍기며 천천히 말했다.
" 그 이름 하나로 나의 뜻은 결정됐습니다. "
케인이 이채롭다는 듯이 쿠오 듀크를 바라보았다.
쿠오 듀크가 계속 말했다.
" 내 길과 저 친구들의 길이 맞닿은 것 같군요. "
데브란트가 쿠오 듀크를 돌아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 네가...그와 무슨 관계인가? "
쿠오 듀크가 팔짱을 끼며 힐끗 데브란트를 보더니 말했다.
" 자네와는 상관없는 일이네. "
데브란트가 쿠오 듀크를 뚫어지게 보는데 쿠오 듀크는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케인은 이제 방안에 남은 단 한 사람, 료겐 하데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 그대가 여기서 내 이야기를 듣게 된 것도 어쩌면 운명일지 모르오. 그대는 어찌하겠소? "
" 당신이 알바 아니지. "
료겐이 차갑게 내뱉었다.
케인은 물끄러미 료겐을 바라보았다.
료겐이 냉랭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 어둠의 세력이 출몰함은 삶과 죽음의 조화와 생명의 순환이 깨어짐을 의미한다. 삶과 죽음의 순환을 지켜보는 그림자인 네크로맨서로써 그 조화를 깨뜨리는 어둠의 세력을 두고볼수는 없는 법, 그것이 나로 하여금 라스마의 사원을 떠나 대륙으로 오게 한 이유다. 따라서 당신의 말과 상관없이 나는 어둠의 근원인 공포의 군주를 추척해야 하는 사명이 있어. 즉 저들과 동행하려는 것이 아니라 원래 나의 사명이란 얘기다. "
케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말했다.
" 네크로맨서의 사명... 이해하겠소. 그런데 단지 그것뿐이오? "
료겐이 눈을 치켜뜨며 케인을 노려보았다.
" 물론. "
" 흠, 그러하오? "
케인의 입가에 짧고 희미한 미소가 스쳐갔다.
케인은 저마다의 인연과 이유를 통해 한가지 길의 출발점에 서게 된 네 사람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팔라딘의 더블 드래곤이란 칭호에 전쟁에서는 불패의 전공을 세운 바 있지만 지금은 파문당한 팔라딘, 대륙 제일의 마법사의 제자인 잔 에수의 여사제, 격렬한 전투민족 북부 바바리안, 저주와 죽음의 조율사 네크로맨서.
어쩌면 가장 이질적이고 독특한 사람들이 한 길을 걷게 된 것인지로 몰랐다.
" 아까도 얘기했듯이 인간은 선택의 존재요. 그대들의 선택의 결말이 어떠할지는 모르지만 운명의 주사위가 그대들을 이곳에 모이게 했다면 이제 주사위는 그대들의 손에 있소. 그리고... "
케인은 천천히 소매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손바닥만한 크기의 둥그스레한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거무틱틱한 빛깔에 둥그런 원반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케인은 그 물건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다시 말했다.
" 이것이 그대들의 선택에 따른 첫번째 주사위요. "
베라미스가 의아한 눈빛으로 케인에게 물었다.
" 그것은...? "
케인이 천천히 대답했다.
" 바이퍼 아뮬렛. (Viper Amulet) 탈 라샤의 무덤을 봉인한 호라드림의 스태프의 머리 부분이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