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믿음은 쳐다보는 겁니다. <<복음 요한 3,14-21>>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여러분들이 올해 들어 처음으로 야외 미사를 드리고 계십니다.
2주 전까지는 저 위의 경당에서 미사를 30명 정도 미사 드렸죠.
인원이 정해지다 보니 서울 경기방은 대기자들이 6개월, 1년을 기다려야 한대요.
이제 야외에 나오니, 인원수는 거의 해제되었죠. 500에서 600명은 충분히 앉을 수 있어요.
그 대신 이제 야외에서 나오니까 숫자는 거의 해제가 됐어요.
여기는 군데군데 성지처럼 만들었고, 2천 명도 미사 드릴 수 있는 곳이죠.
저는 이 사제관을 지으면서 신중에 신중을 기했던 것이 은퇴한 신부가 사는 일개 사제관이 아니라,
저 사제관 안에는 97분의 성인 유해가 모셔져 있고,
예수님이 매달리셨던 십자가 나무 조각 세 점이 있어요.
그 세 점 중 제일 큰 조각이 지금 제대 위에 올라와 있지요.
십자가 형상을 딴 성물이 올라와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안에는 예수님의 성혈이 묻어있는 십자가죠.
십자가 형상을 딴 성물이 아니라,
사제에게 축복받은 성물이 아니라,
정말로 2천 년 전 헬레나 성녀가 찾아냈던 죽은 이를 살려냈던 그 십자가 나무의 조각이지요.
이렇게 97분의 성인 유해와 3점의 십자가 조각이 모셔져 있어 나는 조심스러워요.
경당 30명 미사 때 가장 큰 축복은 그 성인 유해 앞에서 미사를 드린다는 거죠.
그리고 미사 후 내려와서 사제관 전체를 구경하실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야외 미사 때는 모두 들어갈 수 없죠.
다만 입구에서 커피는 여러분이 뽑아서 드실 수 있어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미사 드릴 때 97분의 성인들이 우리를 내려다보시면서 전구해 주시고 있다는 거죠.
아멘
내가 늘 ‘여기 어떻게 오셨습니까?’ 하면 정답은 ‘주님이 불러 주시어 왔습니다.’입니다.
‘관광차 빌려서 왔습니다’,
‘누구 차 얻어 타고 왔습니다’가 정답이 아니라 ‘감히 이 거룩한 곳에 올 자격도 없는 나지만
주님이 나를 오늘 이 자리까지 끌어내 주셨습니다.’ 이게 바로 정답이고 겸손한 대답이죠.
오늘 내가 아쉬운 것은 예약하셨다가 조금 춥다는 일기 예보 듣고 취소하신 분들입니다.
물론 그런 상황일 수밖에 없을 수도 있지만, 안타까운 거죠.
주님은 은총 주시려 불러냈는데, 인간적인 계산으로 추우면 감기 걸리면 어쩌나 생각하고,
여기에 전혀 와서 보지고 않고, 그 주시려는 은총을 막은 거죠.
시편 81장 10절에 그런 말이 있죠.
‘너희들은 다만 입을 벌려라. 내가 채워 주리라.’
또 묵시록 3장 20절에는 예수님 문밖에서 문 두드리고 있잖아요.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서 너희와 같이 만찬을 같이 하리라.’
그런데 그 문은 예수님 쪽에서 못 열어요, 문고리가 안에 있어요.
문을 두들기면서 ‘마리아야, 루시아야, 이쪽으로 오너라. 내가 너 힘든 거 해결해 줄게.’
그렇게 해서 예약된 것이죠.
그런데 그 인간적이고 약한 것 때문에 취소했다 하니 성인 성녀들이 좀 안타까워하시겠다는 생각이 들죠.
그래서 앞으로 성당에서 성지 순례 간다고 하면, 열 일 제치고 가셔야 해요.
부모님 장례 빼고는 가야 해요.
성지는 빛이 강한 곳이에요.
빛이 강한 쪽에 가면 내 안에 있는 어둠은 못 견디죠.
나는 한평생을 성지에서 산 신부인 거 아시죠?
성지에 정말 많은 환자, 마음이 아픈 분부터 몸이 아픈 분, 마귀 들린 부마자가 오죠.
부마자들이 처음에는 집안 식구들이 팔다리 묶여 끌려오고 미사 중 난동 부리죠.
얼마나 부모들이 다른 신자들을 보기가 미안해요.
하지만, 그럴 때 자기 새끼 살리는 마음 있으면 얼굴에 철판 깔아야 해요.
그다음 달에도 또 와요.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는 손을 묶었던 줄을 풀고 부모와 같이 걸어 들어오는 거야.
‘아, 이제 어둠이 밀려 나가기 시작하는구나.’
나중에는 성지에서 주차장 봉사를 하고 있어요. 성지 봉사자로 바뀐 거죠.
어둠을 이기는 것은 빛밖에 없고요, 악을 이기는 것은 선밖에 없어요.
내 몸뚱아리와 내 영혼이 어둠 속에 헤매고 있다면, ‘내가 기어서라도 빛이 강한 곳으로 찾아갈 거다,
내 죽더라도 성지 마당에서 죽을 거다.’라고 결심해야만 내 안의 어둠이 사라져요.
오늘 여러분을 불러 주신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치유, 두 번째는 구마, 세 번째는 사제의 입을 통해 담대한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오늘이 자리에 불러 놓으신 거죠. 아멘
그래서 미사 드리기 전의 얼굴과 미사 끝나고 집을 향해 갈 때 얼굴이 달라야 해요.
엄청난 은혜를 받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둘째, 넷째 미사 때만이 아니라 아무 때나 혼자 기도하고 갈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러다 운 좋게 제가 문 열고 나오다 만나면 안수해 드릴 수 있고, 내가 집 안에 있어도 다 보고 강복은 드립니다.
여러분 여기 나무 의자가 몇 개예요? 12개. 12사도 의자, 12사도를 의미해요.
한쪽은 돌로 바쳤고 한쪽은 나무로 바쳤죠.
돌은 12사도의 강한 믿음을 나타내고 나무는 유연성을 나타내요.
그래서 상징적인 의자죠.
여러분, 미사 때만 오지 말고 서울 올라가는 길이라면 잠깐이라도 들려 기도하시고,
또 성모님 성지가 15분이니 가서 성모 엄마께도 인사드리고 가세요.
이것이 전부 우리 신앙의 여정이죠.
오늘 복음에는 ‘믿는다’라는 단어가 다섯 번 나옵니다.
그런데 무엇을 믿나요? 믿는 것의 내용이 중요하죠.
돈을 믿는 사람이 있어요, 자기 머리를 믿는 사람이 있고,
또 자기 집안을 믿는 사람이 있고, 자기 주먹을 믿는 사람이 있죠.
자기 주먹을 믿는 사람은 그 주먹이 자기를 배반 안 할까요?
언젠가는 배반해. 돈을 믿었던 사람은 돈에게 배신 안 당할까요?
자기 IQ 높았던 것 믿었던 사람이 나중에 풍 맞아 자기 아들 이름도 몰라요.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특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요한복음을 통해서 하신
‘믿는다’라고 하는 것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서 삶의 질과 행복이 결정되죠.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해요?
첫 번째 천지의 창조주를 믿어야 해요.
세상을 만드시고, 인간을 만드시고, 바로 나를 만들어 내셨다고 하는 창조주의 창조를 우리가 믿는다는 뜻이죠.
정성을 다하여 우리를 만드셨어요.
장난감 만드는 사람이 직업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장난삼아 만들다 보니 인간이 된 것이 아니라,
성경에 보면 뭐로 빚었다고 나와요? 시멘트? 흙으로.
흙으로 사람 형태까지 만들어 놓고, 그리고 눈코입 이런 거를 만들었겠죠?
그때까지는 그냥 진흙 인형이죠.
마지막으로 할 일이 뭐였습니까?
숨을 불어 넣어야 하잖아요, 그죠.
그런데 숨을 불어 넣을 때 어떻게 하셨는지 성경에는 없지만, 하느님은 무릎을 꿇으셨겠죠.
창조주 하느님이 무릎을 꿇으면서 지극정성을 다해서 빚은 것이 바로 우리 존재예요.
‘나를 빚어내신 그 창조주 하느님을 믿겠습니다’ 하는 것이 우리 믿음의 내용 첫 번째예요.
아멘.
다른 어떤 짐승을 만들 때 숨 불어 넣으신 적은 한 번도 없죠.
말씀으로 ‘별 되라, 해 되라, 달 돼라.’
하지만 인간을 당신 모상대로 만들기 위해 하느님이 무릎을 꿇고 숨을 불어넣어 주셨죠.
그래서 우리들은 귀한 존재죠.
그리고 그 하느님을 우리는 믿는다는 것이 우리 믿음의 첫 번째입니다.
우리는 발에 밟히는 지렁이가 아니잖아요. 보면 도망가는 바퀴벌레가 아니잖아요?
하늘을 나는 새, 저 새들에게는 어떡하면 안 잡혀 먹이나,
어떡하면 내 새끼를 겨울에 안 얼어 죽나, 그것만 관심사예요.
쟤네들은 우리처럼 신앙이 없잖아요, 그죠?
두 번째로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이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라는 것을 믿어야 해요.
하느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어요.
내가 피정때도 그런 얘기 하죠,
예수님이 우리를 치유시키는 원칙이 있는데, 첫 번째 조건을 안 다시더라.
예수님을 쫓아냈던 그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이 메시아인 줄 알고 쫓아다녔을까요?
아니에요. 99.9% 다 기복이에요.
저 사람 쫓아다니다 보면 병 낫는데,
누가 저 사람 옷자락 만지고 하혈이 멈췄대,
죽은 지 사흘 된 누가 소생했대.
예수님 쫓아내는 사람들의 마음은 ‘저분이 메시아건 아니건 상관없어, 나만 고쳐주면 돼’ 하는 마음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 고칠 때마다 까탈스럽게 하나하나 불러서 면담하면서
과연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확인한 다음에 축복 주셨어요?
아니에요. 무조건 축복해 주셨죠. 조건을 안 붙였어!
왜? 하느님 사랑이 원래 그래요.
엄마가 자식에게 갖는 사랑이 그렇듯이 새끼한테 모든 것 다 해 주고 싶잖아요.
그것이 엄마 사랑, 부모 사랑이죠.
저는 사제로 살면서 늘 내 머릿속에 사목자로서 첫 번째 기준이 뭐냐?
‘어떻게 하면 신자들을 행복하게 해 줄까?’
그것이 제게 제일 큰 화두였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성당에 들어오면서부터 치유가 시작될 수 있도록
어떻게 하면 이 허물어져 가는 성당을 정리할 수 있을까 고민했죠.
또 정성된 미사 전례와 준비된 강론으로 신자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한 다음,
성체를 나눠줄 때는 눈물을 안 흘리는 신자가 어디 있어, 돌아나갈 때는 들어올 때 얼굴이 아니야
‘그래 다시 한번 해 보자 다시 일어서자’라고 결심하게 해 주는 것이 사목자들의 큰 몫이죠.
미사는 해치우는 것이 아니죠.
그래서 저는 본당이든 성지든 어느 곳을 가든 제 머릿속 첫 번째, 신자들에게 조건을 걸지 않았어요.
‘내가 이만큼 하면 당신들이 나한테 이만큼 해줘야 해’라고 하지 않았죠.
물론 초자 시절에는 조건을 걸었더니 나만 상처를 받고 원하는 것은 들어오지도 않아요.
열심히 가르치고 내 욕심이 뭐였냐?
한국에서 최고 성당, 제일 똑똑한 신자들. 그런데 안 따라와요.
혼자 속으로 ‘아유, 이렇게 훌륭한 신부 있을 때 열심히 쫓아 와야지. 맨날 좋냐?’
그런데 그것은 하느님의 마음이 아닙디다.
하느님은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저도 사목할 때는 조건 없이 해요. 그리고 미련 없이 떠나요.
내가 생고생해서 이렇게 만들어 놓았는데, 여기서 은퇴하고 싶은데, 더 있고 싶은데.
인사이동 종이 한 장 딱 보면 ‘아, 떠나는구나.’
조건을 걸 때는 떠날 때도 마음대로 못 떠나요,
거기에 애착이라는 것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조건 없이 베풀고 사는 사람은 누구라도 떠나보낼 수 있어요.
기쁜 마음으로 떠나갈 수 있고 헤어질 때도 그렇게 속이 상하지 않아요.
조건을 건다는 것은 내가 소유한다는 뜻이에요.
조건을 거는 것만큼 ‘너는 내 거야, 너는 나한테 잡혀 있어’ 그 뜻이야.
여러분들 자식들한테 조건 많이 걸죠? 자식은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돼야 해.
마찬가지 용서할 때도 조건 걸면, 조건 거는 만큼 ‘아직 나는 너를 덜 용서한다’라는 말이죠.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창조주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는 용서하실 때는
아무 조건을 붙이지 않으셨다는 것을 믿겠다는 뜻이에요.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지만 인간의 사랑은 늘 조건이 붙는다고 했죠.
Give and Take, 너를 사랑하는 것만큼 나도 너한테 사랑받고 싶다는 거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상처가 왜 생깁니까?
그 시작이 뭡니까?
내가 주기는 주는데, 너도 나한테 줘야 해.
100프로는 아니어도 반은 되돌려줘야 하는 것 아니니? 그래야 네가 인간이지.
시어머니가 며느리한테 10을 주면서 ‘어른 공경할 줄 아는 기본 인성이 있다면 셋을 돌려줘야지.’
전국에 계신 시어머니, 며느리에게 베풀고 되돌려 받아 본 적 있습니까?
안 돌아와요.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부모가 자식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해 주면서
‘이러면 나한테 칭찬 한마디 해 주겠지!’ 하며 기대하지만, 칭찬 안 할 때가 있단 말이에요.
그러면 서운하죠.
내가 주면서도 되돌아오는 것이 채워지지 않을 때, 그때부터 둘 사이가 갈라지기 시작하는 거죠.
그때 무슨 싹이 나온다 그랬어요?
미움의 싹이 내 영혼의 땅을 비집고 나와 커가면서 분노의 줄기가 되고,
그 분노의 줄기 끝에 무관심이라는 독이 잔뜩 든 열매가 맺혀요.
성서학적으로 무관심이라는 것은 영적 죽음, 영적 살인을 나타내요.
한집에 살아도 이건 그냥 물건 취급하는 거예요.
우리 영어에서는 인격적인 사람을 ‘You(유)’라 부르고,
하느님은 당신이라 하지만, 돌이나 책상은 ‘that, this’로 불러요.
한집안 살아도 내 안에 you가 아니라 that, this 같은 존재죠.
그러면 인간은 하느님의 이런 조건 없는 사랑을 못 하는가?
어떻게 생각하세요?
항상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서운하고.
‘괜히 주었어, 내가 해준데 얼마인데 내 뒤통수를 때릴 수 있어?’
이런 노예의 생활로부터 헤어날 수가 없단 말인가?
결론은 조건 없는 사랑할 수 있어요.
여러분들 불난 집에서 자식들이 있는데 자식 구하려 부모가 불 속에 뛰어들죠.
온몸에 4도 5도 화상을 입고 숨이 끊어지면서도 아이를 담요에 싸서 나와요.
그렇게 부모는 죽을 수 있어요.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이죠.
기찻길에 놀고 있는 아이를 밀쳐내고 엄마가 기차에 깔려 죽어요.
기차에 깔릴 때 엄마는 무거운 쇳덩이가 나를 누를 때 얼마나 아플지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 인간도 그렇게 조건을 걸지 않는 사랑을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지금 이야기한 예는 피붙이잖아요. 그렇죠?
내 새끼가 아닌 사람을 위해 조건 없이 죽을 수 있느냐 이거에요.
여러분 같으면 죽을 수 있어요? 쉽지 않아요.
하지만 신앙인 가운데 우리 교회 역사에는 그렇게 돌아가신 분들이 너무 많잖아요.
막시밀리안 골베 신부님.
포로수용소에 한 사람이 탈출하면 20명을 죽였어요.
운동장에 쫙 세워 놓고 교도소장이 ‘너, 너’ 하면 죽는 거예요.
골베 신부님 앞은 그냥 지나갔어, 그런데 그 옆에 있는 사람에게 ‘너’
그 남자는 털썩 주저앉으면서 ‘나 좀 살려 주세요. 자식 있어요. 자식 만나야 해요.’
소장 발을 붙들고 울어도 통합니까?
‘정했으면 끝이야.’
그런데 골베 신부님이 한 발 나서서 ‘제가 대신 죽겠습니다.’
‘넌 뭐야?’ ‘천주교 신부입니다. 저를 죽이십시오.’
‘그래, 너 참 잘났다.’
그래서 신부님은 20명 가운데 한 명이 되어 지하 방에 갇혔죠.
형벌은 아사형(餓死刑).
하루하루 가면서 죽어가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죠.
신부님은 마지막까지 영적으로 사람들을 보살피시면서 제일 마지막까지 살아남으셨대요.
그래도 숨이 안 끊어지니 독극물 주사로 신부님을 죽였어요.
그 죽음이 과연 어리석은 죽음이라고 누가 얘기하겠어요?
지금도 프랑스와 독일 국경에 가면 열 개의 무덤이 있어요.
그런데 그 무덤 가운데 유독 한 무덤 앞에 꽃들이 많이 바쳐져 있어요.
그 무덤들은 뭐냐?
아홉 개 무덤은 그 당시에 레지스탕스, 독일과 싸우던 프랑스 사람들 무덤이고,
한가운데 있는 무덤은 놀랍게도 독일군의 무덤이에요.
레지스탕스를 잡아놓고 사형시키는 날, 총을 쏴야 하는 독일 병사가 다른 사람은 다 쏘는데 못 쏘는 거예요.
‘쏴, 이놈아.’
‘못 쏘겠습니다.’
‘왜?’ ‘저는 크리스천입니다.’
‘안 쏘면 너 죽어.’,‘ 차라리 그 길을 택하겠습니다.’
독일군 장교가 그 자리에서 쏴 죽였죠.
그때 당시로는 어리석은 죽음이 그랬겠죠.
동료들은 ‘미친놈, 지금 전쟁인데, 거기서 하느님이 왜 나와?’
그렇지만 긴 세월이 지나도록 지금도 끊임없이 꽃다발이 쌓여 있는
무덤은 레지스탕스 무덤이 아니라 독일군 무덤이에요.
‘하느님이 내려다보고 계시는데 어떻게 내가 사람을 죽입니까? 제가 죽는 게 낫습니다.’
약한 인간도 이렇게 조건 없는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내 피정 때 한 이야기인데 들어보셨을 겁니다.
내가 옛날에 수인 사목할 때 청주대학교 앞에서 살인 사건이 있었어요.
청주대학 학생이 교문을 나오다가 깡패랑 어깨가 부딪혀 시비가 붙었죠.
그 깡패가 12군데를 찔러 그 자리에서 죽였어요.
죽은 아이는 우리 교우였고, 깡패는 사형선고를 받았죠.
6개월이 지났는데 그 죽은 아이 엄마가 나를 찾아왔어요.
‘신부님 저 6개월 동안 피눈물 흘리면서 기도했습니다. 부탁 있습니다.’
‘뭐요?’
‘내 아들 죽인 그 아이를 아들로 삼고 싶습니다.’
‘자매님, 이게 무슨 소리예요?’
‘신부님, 저 그냥 감상적으로 하는 이야기 아닙니다. 반년을 고민했어요.’
그러면서 만나게 해달래요.
살인범에게 가서 이야기하니, 안 만난대요.
‘그 아줌마 미친 거 아닙니까?
내 새끼 어떻게 죽였는지 뻔히 알면서 나를 아들로 삼는다고요, 웃기지 말라 하세요.’
그 자매님은 계속 나를 찾아와서 만나게 해달라고 했죠.
나도 계속 가서 한 번만 만나라고 했죠.
한 5개월 만에 간수들 입회하에 살인범과 피해자의 엄마가 만났어요.
사형수는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서 앞에 앉는 것도 쳐다보질 않습니다.
자매가 5분 있다 일어나더니 사형수 옆으로 가길래, 간수들은 긴장했죠.
때리거나 해코지하려나 해서 간수들이 딱 달라붙더라고요.
눈물이 흐르는 걸 봤어요.
그렇게 해서 참 기구한 모자의 인연이 맺어졌습니다.
실제로 그때부터 자매님은 일주일에 한 번씩 면회와 사식 넣고 겨울 되면 양말과 옷을 뜨개질해 주면서
지극정성으로 옥바라지했죠.
청와대에 탄원 올리고 하면서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받았죠.
그 아이도 사슬에서 풀리니 한 달에 두 번 있는 미사에도 나오기 시작하고 세례받고
모범수가 되어 점점 감형되어 13년 살았어요.
그때까지도 그 자매님은 아들을 기다렸어요.
출소하자마자 좁은 청주에서는 살 수가 없으니, 전라도 땅으로 갑디다.
거기서 지금도 슈퍼마켓 둘이 해요.
모르는 사람들은 정말 친아들이고 친엄마로 알죠.
내가 난 새끼 불 속에 내가 뛰어들어서 내가 죽고 자식 살릴 수 있는 건 당연한 거야, 그죠.
하지만 그것을 뛰어넘어서 내 새끼를 처참하게 죽인 살인범을 내 자식으로 만드는 것.
저는 그때 그 자매의 사랑에서 하느님을 봤어요.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이렇게 조건이 없을 것이다.
내가 하느님한테 삿대질하고 오만 죄 중에 빠져 내 죄가 진홍색처럼 붉어도,
돌아온 탕자 기다리는 마음으로 하느님은 나를 기다리고 있겠구나.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이 조건 없음을 믿겠습니다.
그것이 두 번째 ‘믿는다’라는 것의 내용입니다. 아멘
세 번째로 우리가 뭘 믿어야 하는가?
‘창조주이신 하느님은 우리를 늘 돌보고 계심을 믿습니다.’
‘늘 돌보고 계신다.’
우리 약한 인간들은 늘 공포 속에 삽니다.
병에 대한 공포도 있고, 외로움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공포, 미래에 대한 공포도 있죠.
이것을 인간의 4대 공포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은연히 나를 힘들게 하고 어둠으로 자꾸 집어넣어 버려요.
그럴 때마다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죠?
‘주님은 내 앞길 선하게 예배하고 계신다.’ 야훼이레
제가 참 많이 얘기했죠.
이 김웅열 신부를 쓰러지지 않고 버티게 하는 세 가지 믿음의 기둥이 있다.
무엇이죠?
첫 번째 기둥, 주님은 나를 사랑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두 번째 기둥, 주님은 나의 어려움 반드시 해결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세 번째 기둥, 주님은 나의 앞길 선하게 예비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이 세 가지 기둥을 내가 놓쳤다면 이제까지 사제로 살아올 수 있었을까?
오늘 복음에 보면 뱀에게 물린 유대인들이 뭐 보고 낫죠? 구리 뱀.
그 형상을 들고 있고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은 치유되었죠.
그래서 ‘신앙’이라는 것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눈을 마주치는 것이 신앙입니다.
유대인들이 구리 뱀을 바라보고 나았듯이 우리도 하느님과 눈을 마주쳐야 해요.
뒤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러분을 보고 웃고 계시죠?
겨우내 옷 입혀 드렸다가 지난주에 벗겨드렸어요.
‘얘들아, 얼굴 좀 펴. 오늘 너희들 온 것, 내가 부활시키려고 너희들 부른 거야.
얼굴 좀 피면서 활짝 웃어 봐.’ 아멘
성모님도 웃고 계시죠? 정말 백만 불짜리 미소를 짓고 계세요.
경박하지도 않고, 준엄하지도 않으면서 정말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계시죠.
사실 작가에게 3번 바꾸래서 만들었어요.
아들이 부활해서 웃고 있는데, 엄마가 인상 쓰고 계실 수는 없죠.
오늘 여러분들 부활시키려고 부르신 거예요. 아멘
불뱀에 물렸을 때 구리 뱀을 바라본 사람은 치유 받았습니다.
물 위를 잘 걷던 베드로가 물에 빠진 것은 주님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주님 살려주십시오.’ 하면서 다시 주님을 쳐다보니 주님이 끌어내 주시죠.
주님 바라보던 시선을 다른 곳을 돌리면 허우적거려요.
주님을 바라보고 살면 살고, 바라보지 않으면 죽어요.
비록 만신창이가 되고 죄악에 빠져 있더라도 주님을 바라보면 우리는 산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부끄럽다고 죄의식 때문에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죽어요.
이번 판공 때는 죄 같지 않은 것을 고백하지 마시고,
이제까지 한 번도 고백하지 못했던 부끄러운 것,
하려고 마음만 먹었지 숨기고 살았던 것,
모고해하고 살았던 것,
그것을 하느님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부끄럽다고 주님을 쳐다보지 않으면 우린 죽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을 쳐다볼 수 있게끔 높은데 매달려 계신 거예요.
여러분들은 하루에 몇 번씩 거실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을 쳐다보시나요.
우리 집에 예수님 매달려 있는 것조차 의식하지 않고 산 날들이 얼마나 많은지.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계속 쳐다보면 그 사람과 비슷해져요.
BTS 매일 보는 사람은 BTS처럼 옷도 입고 다니고 그 흉내도 내요.
임영웅을 좋아하는 아줌마는 임영웅 노래만 부르고 다니고, 김치도 해다 바치고.
우리가 쳐다봐야 할 것은 연예인이 아니죠.
여러분 집에 모시고 있는 예수님.
예수님을 쳐다볼수록 예수님 마음으로 바뀌어요.
예수님을 쳐다볼수록 예수님 같은 생각을 하게 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게 돼요.
여러분들의 본당 신부님이 참 거룩하게 사시면, 본당 신부님을 볼 때마다
'나도 우리 신부님처럼 저렇게 거룩하게 살아야지'하는 마음이 들 거예요.
사순절은 내 눈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내가 정말 주님을 제대로 쳐다보고 있는지, 그것을 확인하는 시기입니다.
주님을 쳐다보면 기쁨이 충만하고 평화가 충만하고 사랑이 충만해짐을 믿습니다. 아멘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