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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사 우슬재.상등리 고개서 총격 "4명사망"
3천여 읍민들 해남 교육청앞 궐기 대회
경찰 무기탈취 .. JC 회원 주축 시위전개
시위확산 해남 <상>
80년대 박정희 정권과 유신에 반대해 수많은 청년운동가와 민주인사를 배출한 전남 농민운동의 거점이었던 해남군.
5.18당시 이곳에서도 시위가 벌어지고 다량의 무기가 탈취됐으며 특히 향토사단에 의한 총격으로 시민군이 사망했다.
당시 시위참가자와 군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80년 5월 23일 해남읍 우슬재와 마산면 상등리 고개에서 4명이상이 향토사단 병력의 총격으로 사망했고 다수가 부상했다.
향토사단에 의한 유혈진압은 없었다는 군의 발표와는 다른 사실이다.
당시 해남은 나주 영암 강진을 거쳐온 시위대가 완도와 진도, 목포등지로 오고간 통로였기에 군내 많은 지역에서 시위대가 활약했다. 당시 시위에 참여해 옥고를 치르고 직장 수협에서 타의에 의해 쫒겨났다. 다시 복직한 김병일씨(39.현 해남군 수협예금계장)의 증언 [오전부터 광주시위대의 차가 해남군내에 나타났다 점심후 시위차량은 읍내에 진입했고 국제약국 주변도로에서부터 해남교육청앞에 이르는 넓은 광장에 시위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응집했다. 버스를 비롯한 2-3대의 차량으로 내려온 시위대는 여고생부터 중년까지 섞여 있었고 차량에는 [전두환 개새끼 물러가라 ] [김대중씨 석방하라] [계엄해제] [우리는 목숨을 걸었다. 모두 합세하자]등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조용하던 해남읍이 오후부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계엄만행 성토
당시 해남의 농민운동인사들은 광주 북동성당에서 열릴 예정이던 농민대회에 참가했기에 해남시위에는 가담하지 못하고 읍내 JC회원들의 주도로 자체시위가 시작된다.
김덕수씨(당시 JC회장. 현서울거주)를 중심으로 한 30여명의 JC회원들은 대흥사에서 바자회를 하고 있다 시위대가 왔다는 말을 듣고 곧장 읍내로 들어와 긴급회의를 갖고 민주인사석방과 민주회복 독재자 추방 계엄해제등 5개의항의 요구를 내걸고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한다.
오후 3-4시께 3천 여명의 읍민들은 해남교육청앞에서 성토대회를 갖고 시가행진에 들어간다.
오후 5시께는 광주에서 6대의 차량에 분승한 시위대가 도착해 광주에서의 계엄군 발포소식을 전하자 열기는 덕 고조되면서 일부 청년들은 광주시위대와 함께 광주로 향하고 일부는 남아있는 광주시위대와 합세해 20-30대의 차량을 동원,인근면과 완도등지로 향한다.
옥천면 용동에숨겨졌던 광주고속버스가 JC회원들에 의해 동원되고 대한통운 트럭등도 차례로 탈취된다. 이들 시위차량은 해남읍-삼산-화산-현산-북평-송지 등을 경유해 밤 10시 완도읍까지가 야간시위를 벌인다.
JC회원등 일부시위대 차량 5대는 22일 새벽에 대흥사 안흥여관으로 철수 ,이곳에서 이날의시위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광주시위대합세
22일 시위대는 새벽부터 해남읍-마산면-황사면-문내면-황원면을 돌며 시위를 벌이고 오전에는 해남읍-옥천면 -계용면-강진읍-영암읍-목포시로 시위지역을 넓혀 나간다. 이들은 시위도중 계곡지서 ,옥천지서 송지면 월송지서등 6개 지서에서 많은 무기를 획득하고 오후 5시 30분께는 해남경찰서 무기고를 부수고 M1과 칼빈 4백정을 탈취한다.
7-8대의 차량시위대는 장흥교도소를 습격한다고 떠났으나 군의 바리케이드와 저지로 장흥접근을 못하고 다시 해남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당시 해남군 일대는 향토방위 부대인 31사단93연대 2대대가 주둔해 맡고 있었고 이 부대가 해남에서 시민군을 향해 총격한 장본인이다. (해남 다음편에서는 해남 시위대의 광주 진입도 밝힐예정이다. )
첫댓글 잘읽었습니다.
광주시민들의 희생 이세상 모두가 가슴에 새겨야 함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엇습니다
잊져서는 안될 우리의 불행한 현대사 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 그게, 다 5.18광주민주항쟁 결과물 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