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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연법동기회
 
 
 
카페 게시글
▣여행 스크랩 해돋이의 명소 부산 기장군의 오랑대
현림 추천 0 조회 382 15.05.31 14: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해돋이의 명소 부산 기장군의 오랑대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연화리에 위치한 오랑대(五郞臺:?)는 부산의 해돋이 명소 중 하나로 잘 알려진 곳이다.

옛날 기장에 유배된 친구를 찾아온 다섯 명의 선비가 절경에 취해 술을 마시며, 가무를 즐기고

시를 읊은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화를 지닌 오랑대는 바로 위 사찰인 해광사의 용왕전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무속인들이 용왕님을 모시고 치성을 올리는 곳으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오랑대는 절애의 큰 바위 위에 세워진 암자로 색다른 동해 바다의 일출을 담을 수 있는 곳이기에

많은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기장의 유래

부산광역시 기장군의 기장의 원래이름은 갑화양곡(甲火良谷)이라고 한다.

갑향의 갑은 음독하여 갓[]과 통하는 것으로 보고 갓마을[邊城-변두리마을]이라 하기도 하고,

갑을 대()로 보고 큰 마을로 보기도 한다.

 

 

 

 

 한자로 본다면 기장(機張)은 두 가지 유래설이 있는데

첫째는 서경(書經)고우기장주(苦虞機張註)에 기()는 노아(弩牙)라 하고,

또 노기기장(弩機旣張)이라 하여 갑병으로 국토를 지키기 위하여

이곳 변방인 기장을 수비한데서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둘째는 기장지역의 지형적 모습과 관련하여 현 기장읍의 소재지가 일광산을 배산으로 하여

베틀()을 차린() 형국이라는데서 유래된다고도 한다.

이를 바탕으로 옥황상제의 옥녀가 이곳에 내려 와서 베틀을 차려 비단을 짜고 물레질을 한 곳이기 때문에

베틀 기()와 베풀 장()으로서 기장(機張)이라고 하였다는 전설이 만들어져 전해지고 있다.

 

 

 

 

기장의 그 별호를 차성(車城)이라고 하였다는 설도 유래되고 있는데

차성(車城)이라 불린 이유는 차()는 정수리()를 뜻한다고 하여

해안과 접하는 군사상의 요충지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기장을 차성으로 부르게 된 듯하다.

북쪽으로는 일광면, 서쪽으로는 철마면, 남쪽으로는 해운대구와 접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바다에 면해 있다

 

 

 

 

@오랑대의 유래는 기록상 알려진 것이 없다.

오랑대의 위치를 보아 일본과 근접한 동해안이란 점과 부산 바로 밑에 위치한

포항시 용덕리에 위치한 연오랑과 세오녀의 전설을 지닌

일월지(日月池)에서 그 이름만 따 온 것이 아닌가 억측해 본다.

 

 

 

 

1)경북포항시 남구 오천읍 용덕리 일월지에 얽힌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

신라 제8대 임금인 아달라왕(阿達羅王) 즉위 4(157) 정유(丁酉)해의 일이었다.

경주의 동쪽인 영일(迎日)의 동해 바닷가에 있는 일월지(日月池) 연못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라고 하는 부부가 살고 있었다.

 

 

 

 

이들 부부는 물고기 잡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어느 날 연오가 바다에 가서 해조(海藻)를 따고 있던 중, 갑자기 바위 하나가 물위에 떠오는 것을 발견했다.

이상하게 생각한 연오는 신발을 벗어 놓고 바위 위에 올라가 보았다.

그랬더니 그 바위는 바다로 점점 들어가서는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가버리는 것이었다.

이를 본 그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하고는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런데, 본제기(日本帝紀)를 살펴보면 그 시대 전후에 신라 사람으로 일본국에 왕이 된 사람이 없었으니

아마도 이것은 변두리(邊邑)의 작은 나라 왕(小王)이고 일본 전체의 왕(眞王)은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세오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남편이 일하던 곳으로 가서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남편은 보이지 않고 그가 벗어놓은 신발만 남아있는데, 역시 바위 하나가 물위에 떠있는 것이었다.

세오 역시 이상하게 생각하고 바위 위에 올라앉았더니 바위가 움직여서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이었다.

그 나라 사람들이 세오를 보고 너무 놀라서 왕께 말씀을 드렸는데,

왕이 와서 보니 바위에 실려온 사람은 바로 자신의 부인인 세오였다.

부인을 다시 만나게 된 연오는 세오를 귀비(貴妃)로 삼고 그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연오와 세오가 일본으로 건너간 후로 신라에서는 커다란 이변(異變)이 일어났는데,

해와 달이 모두 없어지고 온 나라가 암흑천지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하늘의 변화를 보고 점을 치는 일관(日官)이 신라왕께 아뢰었다.

그 전까지는 우리 나라에 살고 있는 해와 달의 정령이 신라를 떠나

지금은 일본으로 가버린 때문에 이런 변괴가 일어났습니다.

그 말을 들은 신라왕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두 사람을 찾아 다시 우리 나라로 돌아오기를 권해 보도록 했다.

 

 

 

 

 

사신을 만나 그 말을 들은 연오가 말하기를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이니 이제 어찌 돌아갈 수 있겠소.

그러나 신라의 해와 달이 없어진 것도 딱한 일이기는 하오. 나의 왕비가 짠 고운 명주 비단이 있으니

이것을 가져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해와 달이 예전처럼 다시 생길 것이오.라고 했다.

이에 연오가 그 비단을 사신에게 내어주니 할 수 없이 신라로 돌아와서 사실대로 신라왕에게 아뢰었다.

연오가 말한 대로 그 비단을 제물 삼아 하늘에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그전과 같이 나와서 세상이 다시 밝아졌다.

신라 왕실에서는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았고,

비단을 넣어놓은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했으며,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했다

 

 

 

 

 

@연오랑과 세오녀(延烏郞 - 細烏女)삼국유사필원잡기에 수록되어 전하는 설화이다.

원전은 고려 이전의 문헌인 수이전에 실려 있었다고 여겨지며,

태양신(太陽神)에 관한 한국의 신화로서는 유일한 것으로 일본 태양신 신화와의 비교연구가 주목되는 자료다.

 

 

 

 

 

@연오랑·세오녀 신화는 하늘의 일월(日月)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로

분명한 설화적 기록을 지니고 있는 반면 기장의 오랑대는 이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사실 세계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태양과 달은 숭배의 대상이었으며 신성(神聖)의 상징이었다.

모든 것은 태양의 힘으로부터 생겨나고 그렇게 생겨난 모든 생명체는 언제든지 달에 의해 키워진다고 믿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해와 달에 관한 수많은 종류의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다.

비록 분명한 설화적 기록은 아직 없지만 동해안의 해돋이 명소로 알려진 기장의 오랑대도

이런 이야기 정도는 지녔을 것이라 추측해 본다.

 

 

 

 

 

@이처럼 해와 달에 대한 이야기들은 전국적으로 분포하면서 무가에까지 습합되어 있는데,

오랑대에 용왕을 모신 것도 이에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그 중에서 연오랑·세오녀 신화가 매우 오래된 것이며 역사적으로도 상당한 신빙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연오와 세오의 이름에 모두 까마귀를 나타내는 오()가 들어가 있는 것에서 태양숭배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태양의 근원을 따라가 보려는 당신 신라인들의 염원과 생각을 잘 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까마귀는 태양 속에 살고 있는 신령스런 동물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태양신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연오와 세오의 이름은 태양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연오와 세오가 살던 지방의 이름을 삼국유사에서는 도기야라 하고 있는데,

 동국여지승람에 욱기야(郁祈野)로 표기하고 있어서 흥미를 끈다.

이는 경상도지리지근오지(斤烏支)?오지(烏支)?와 음이 일치하는데다가

일본의 지명 오키(隱岐)와도 음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연오?세오가 일본에 건너가 태양과 관련이 있는 땅인 오키(迎日)의 이름을

자기의 신왕국의 명칭으로 삼은 것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연오랑세오녀신화는 오랜 옛날부터 태양을 숭배하던 우리 선조가

 태양의 근거지를 찾아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서 그곳을 개척하여 통치자가 되면서

한반도의 동쪽 지방인 신라와 밀접한 교통을 한 태양숭배사상의 동방이동현상을 신화의 방식으로 설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과 근접한 동해의 해돋이 부산 기징의 오랑대도

아마 이런 연유에서 분명한 자료는 찾지 못했지만

오랑(五郞)이 아닌 오랑(烏郞)이란 이름이 더 적절한 것이 아닐까 하고 홀로 추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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