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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집 제8권 / 행장(行狀)
수암 선생 유공 행장(修巖先生柳公行狀)
유삼년(維三年) 임인년(1662, 현종 3) 겨울 12월에 수암(修巖) 유선생(柳先生)을 서애(西厓) 선생 문충공(文忠公)의 사당에 부향(祔饗)하였다. 이듬해에 안기공(安奇公)이 수암 선생의 가장(家狀)과 부록(附錄)을 나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숙부는 이미 사당에 향사(享祀)하였습니다.
그러나 평생의 도덕과 학문, 실천과 사적(事跡)은 찬술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저는 후손들이 덕을 상고하면서 모범을 취할 길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그대가 헤아려 주십시오. 경양(景陽)도 또한 오직 그대에게 이것을 부탁하라 했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참으로 불민(不敏)하지만, 생각해보니 총각 때에 선공(先公)께서 수암 선생에게 관례(冠禮)의 예를 부탁드리려 했었다. 하지만 장차 예를 시행하려고 할 때 선생이 죽었기 때문에 일찍이 그 불행함을 매우 탄식하였기에, 의리상 사양할 수 없었다.
슬프도다, 퇴계(退溪)가 죽고 유학의 가르침이 끊어져 세상의 군자들은 자랑과 거만을 학술로 여겼지만 도(道)는 더욱 어두워졌다. 우리 문충공(文忠公)의 학문은 깊게 생각하고 독실하게 실천하여 오로지 내면 공부에 힘을 썼으며, 선생이 이것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겸손하고 사양함을 좋아해 일찍이 자처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의 군자들 중 잘 아는 이가 드물었다. 선생 같은 이는 ‘군자의 성대한 덕을 갖추어 겸손하고 겸손하여, 가득 찼지만 비어있는 듯한 사람.’이라고 하겠다. 선생의 휘는 진(袗)이고, 자는 계화(季華)이며, 영의정 문충공 서애 선생(西厓先生) 휘 성룡(成龍)의 셋째 아들이다. 조부 휘 중영(仲郢)은 관찰사(觀察使) 증 풍산부원군(贈豐山府院君)이다.
증조부 휘 공작(公綽)은 간성 군수(杆城郡守) 증 좌찬성(贈左贊成)이다. 고조부 휘 자온(子溫)은 증 이조 판서(贈吏曹判書)이다. 문충공은 전주 이씨 현감(縣監) 경(坰)의 딸을 아내로 맞았으며, 이씨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다. 만력(萬曆) 임오년(1582, 선조15) 7월 27일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나면서 아름다운 자질을 갖추어 겸손이 넉넉하고 단정했으며, 총영(聰穎)함이 일찍 무르익어 식견이 고원하였다. 막 8살이 되었을 때에 정경부인을 여의었는데, 곡읍(哭泣)하고 애통해 하며 여막 곁을 떠나지 않았고, 두 형을 도와 제사를 받들며 초상 치르기를 마치 성인처럼 했다.
11살에 왜란을 당했는데, 문충공은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서쪽〔의주〕으로 가고, 선생은 자형(姊兄) 이씨(李氏)를 따라 영동(嶺東)의 산골짜기로 피했다. 종종 적을 만나 거의 죽을 뻔했지만, 계책을 내어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다. 당시에 혹 형세를 살펴 생각을 내면 거의 대부분 일의 마땅함에 들어맞아 일행들이 의지했기에 마침내 무사할 수 있었다.
난이 겨우 진정되자 문충공은 벼슬을 그만두고 남쪽으로 돌아와 집에 거처했다. 선생은 조석으로 곁에서 모시면서 경전의 뜻을 강론하여 고인(古人)들이 공부하던 핵심을 깨닫고 마음속으로 묵묵히 생각을 같게 하니, 언의(言意)의 이외에서 자득함이 많았다. 문충공이 일찍이 칭찬하며 말하기를 “너처럼 좋은 자질은 얻기 어렵지만, 퇴계의 문하에 미칠 수 없음이 한스럽다.”라고 했다.
물러나 집안에 기거하면서는 옷깃을 여미고 바르게 앉아 존양(存養)과 실천의 실재를 가슴에 새기고, 좌우(座右)에 ‘하루 종일 정좌(靜坐)하는 것은 쉽지만, 일각(一刻)을 조존(操存)함은 어렵다.〔靜坐終日易 操存一刻難〕’는 열 글자를 써서 스스로 힘썼다.
정미년(1607, 선조 40) 5월에 아버지 상을 당했으며, 상복을 벗고 난 뒤 경술년(1610, 광해군2) 사마시에 입격했는데, 초시(初試)와 복시(覆試)에 모두 장원급제했다. 선생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집안을 보전하기는 어렵고 남들로부터 손가락질 받기는 쉽다고 생각하여, 덕행과 학업을 삼감에 대소를 막론하고 감히 경외(敬畏)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성실하면서도 꾸밈이 없고 자신을 낮추고 겸양하였으니, 사론(士論)이 훌륭하게 여겼다.
임자년(1612, 광해군4) 2월에 해서옥사(海西獄事)가 일어나자 선생은 예전부터 적들이 싫어했기에 결국 무고로 체직되었다. 금오랑(金吾郞) 양극선(梁克選) 공이 체포하러 오자, 조존세(趙存世) 공은 안동 부사로 있으면서 선생은 어질기에 이런 일이 있음은 마땅하지 않다고 말했다.
양공도 또한 평소 선생을 사모하였는데, 마침 선생이 병이 들자 문득 그 소식을 듣고 판관(判官)을 먼저 보내 선생을 포승줄로 묶게 했다. 마을 가운데 구경꾼이 모여 놀라 부르짖으며 눈물을 흘렸지만, 선생의 행보(行步)와 언어ㆍ거동이 조심스럽기가 평소와 같았다.
판관에게 청하기를, “이제 가면 생사를 알 수 없으니, 바라건대 잠시 가묘(家廟)에 가서 하직인사를 드리고 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지만 판관은 허락하지 않았다. 한사코 청한 뒤에야 허락하니, 선생은 묘문(廟門)에 들어가 땅에 엎드려 슬퍼 울부짖으며 재배(再拜)하고 나왔다. 금오랑이 뒤이어 당도하여 안으로 들어가 집안사람들과 결별(訣別)하게 했지만, 선생은 또한 따르지 않았다.
용궁(龍宮)에 이르러 전이성(全以性) 공이 선생을 위문하면서 양극선에게 묻기를 “공은 유아무개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하자, 양극선은 말과 소견에 찬탄을 그치지 않았다. 전이성 공이 계속해 선생의 평소 일을 자세히 말해 주자, 양극선은 더욱 잘 알고 선생의 위호(衛護)를 매우 삼갔다.
심리(審理)가 시작되자 병이 더욱 심해졌다. 이한음(李漢陰), 심일송(沈一松) 같은 여러 대신들이 모두 선생의 병에 대해 말하니, 광해군은 금부(禁府) 문밖에 구금하라고 명했다. 5월에 중형 세마공(洗馬公)이 경저(京邸)에서 어려움을 무릅쓰다 병으로 죽었는데, 6월에 비로소 심리에서 풀려나 상여(喪輿)를 뒤쫓아서 돌아왔다.
병진년(1616, 광해군8)에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당시엔 광해군〔昏朝〕이 정사를 어지럽히고 요망한 신하들은 화를 부채질하여 모후(母侯)를 유폐시키고 동생들을 죽였으며, 거듭 큰 옥사를 일으켜 선비들을 잡아들였고, 자기에게 아부하지 않는 자들을 위협했다.
선성(宣城)에 있는 당시 막 권력을 잡았던 어떤 한 요인(要人)은 선생과 예전부터 친분이 있었는데, 하루는 와서 뵙기를 청하자 선생은 거절하며 들이지 않았다. 그 사람은 성을 내며 이를 갈고 거리낌 없는 말을 하며 선생을 험담하니, 듣는 사람들이 위태롭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지만, 선생은 끝내 동요하지 않았다. 계해년(1623, 인조1)의 반정으로 벼슬길이 크게 열리자 여러 공들이 다투어 선생을 추천하니, 선생은 벼슬길에 나와 봉화 현감(奉化縣監)에 임명되었는데, 사양했지만 윤허하지 않았다.
마침내 현에 부임해보니 탐관오리들의 학정(虐政)을 겪었기에 공사(公私)로 재정이 부족했고, 척박한 땅에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어 백성들은 고통을 견딜 수 없었다. 선생이 고통을 어루만지고 은택을 내리자 조금씩 생동감이 있었는데, 땅을 넓히고 밭을 개량(改量)하려는 일에 토호들의 간섭이 많았지만 선생은 흔들리지 않았다.
토지 제도를 고찰하여 시행하는데 단지 상하(上下)의 등급만 매겨도 빠짐이 없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밭은 늘어나고 세금은 줄어들었다. 대개 선생이 처음 부임했을 때는 백성들의 호구가 100을 채우지 못했는데, 한 달 사이에 떠돌아다니던 자들이 사방에서 돌아와 호구가 배로 늘었다.
순찰사(巡察使) 민성징(閔聖徵)이 선생의 치적(治積)을 보고하자, 조정에서 내외 옷 한 벌을 하사하며 장려하였다. 유서(諭書)에 이르기를, “네가 직무를 수행하면서 백성 사랑하기를 마치 자식처럼 하고, 읍 다스리기를 마치 집안처럼 하였다. 모든 폐단과 병통은 기욕(嗜慾)과 같이 통제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데 다스림에 성대한 치적이 있으니, 참으로 발탁(拔擢)한 뜻을 져버리지 않았다.”라고 했다.
9월 영인(令人)의 초상을 당하자, 이로 인해 장례에 필요한 휴가를 요청하여 사직하고 돌아왔다. 겨울에 형조 정랑(刑曹正郞)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병인년(1626, 인조 4) 여름에 다시 형조에 들어가 정랑이 되었다. 공주(公州) 사람 중 향직(鄕職)을 맡은 이가 그곳 땅으로 황씨(黃氏) 성(姓)을 가진 사람과 서로 미움이 있어 소송이 벌어졌다.
사건이 경옥(京獄)에 계류된 지 몇 년이 지나자 문서가 궤각(几閣)에 가득 차 담당 관리(官吏)조차도 모두 다 볼 수 없었다. 선생은 하루 밤낮으로 다 보고 문안(文案)을 서로 비교해 그 정황을 자세히 알고선 당상관(堂上官)에게 아뢰었다. 완풍군(完豐君) 이서(李曙)가 형조 판서로 있으면서 크게 놀라 탄복하여 말하기를, “공이 아니었으면 거의 이 옥사를 그르칠 뻔 했다.”라고 했다.
죄수들도 부르짖기를 “선대감〔유성룡〕께서도 저희들의 옥사를 살펴 잘못을 바로잡으셨는데, 지금 공께서 또 이와 같습니다.”라고 하고 감읍(感泣)을 그치지 않았다. 고발한 자도 이에 편안해졌으며, 백성들도 이 사실을 알고 통쾌하게 여겼는데, 공무를 본 지 겨우 10일 만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겨울에 영천 군수(榮川郡守)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기도 전에 체직되었다.
정묘년(1627, 인조 5) 1월에 청도 군수(淸道郡守)에 제수되었는데, 치적이 봉화(奉化)에 있을 때와 같았다. 제생들을 유시(諭示)하는 글을 지었는데, 대략은 다음과 같다. 예전 순(舜)이 설(契)에게 명하기를 “백성이 친목하지 않고 오품이 순하지 않으므로 너를 사도(司徒)로 삼으니, 공경히 다섯 가지 가르침을 펴되, 너그럽게 하라.”라고 하였다.
이는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생기게 된 유래이다. 대개 인륜이란 일상에서 마땅히 실천해야 할 도리이다. 배우는 자는 이것을 배울 따름이며, 가르치는 자는 이것을 가르칠 따름이다. 그 때문에 공자가 말하기를 “자제들은 들어가면 효도하고, 나와선 공손해야 한다.”라고 하였고, 맹자가 말하기를 “요순(堯舜)의 도는 효와 공손〔孝悌〕일 따름이다.”라고 했으니, 천하의 이치가 어찌 여기서 더할 것이 있겠는가.
《시경》에 이르기를 “온화하고 공손한 사람이여 오직 덕을 닦는 기초로다.”라고 했고, 횡거 선생(橫渠先生)이 말하기를 “지금 세상엔 학문이 강론되지 않아 남녀가 문득 교만하고 게을러 본성이 어그러졌으며, 자라선 더욱 사납고 포악하고 사나워지게 됨은 다만 일찍부터 자제를 가르치는 일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병의 근원이 제거되지 않아 거처하는 곳과 만나는 사람을 따라서 자랐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몇 조목을 보면 학문의 득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주자(子朱子)에 이르러서도 옛 성현들의 격언(格言)과 선행(善行)을 모아 소자들이 배양해야 할 덕성의 근본으로 삼고, 힘써야 할 것은 오로지 들어가선 효도하고 나와선 공손하며, 스승을 숭상하고 벗을 가까이 하며, 용모를 바르게 하고 절도를 삼가며, 말을 삼가고 실천을 독실하게 하는데 달려 있었을 뿐이지, 어찌 일찍이 기운을 격양시켜 말을 함부로 하고, 어른을 능멸하며, 남의 과실을 말하고, 이기기 좋아함을 다투는 것을 고상하게 여긴다고 가르쳤는가. 공자 같은 대성(大聖)도 오히려 말하기를 “나는 향당(鄕黨)에 있으면서 신실하게 하여 마치 말을 못하는 사람 같았다.”라고 하였다.
대개 향당은 부형(父兄)과 친척들이 있는 곳으로, 현명함이나 지혜로움으로 뻐길 수 없음은 성인도 오히려 그랬는데, 하물며 그 아래 등급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랴. 오직 이와 같을 뿐이기 때문에 이륜(彛倫)이 펼쳐지고 풍속이 두터워지며, 후일에 벼슬길에 나가 도를 실천함도 모두 이것으로부터 적용할 수 있으니, 이른바 ‘근본이 확립되면 도가 생긴다.’는 말이다.
우리 군(郡)은 전적(典籍)과 어진 사람이 성대하게 드러나 전고(前古) 영헌공(英憲公)으로부터 이하 문인(聞人)과 달사(達士)들이 역사에 끊임없이 기록되어 절효공(節孝公)은 성효(誠孝)가 하늘에 닿았으며, 탁영(濯纓)은 문장과 절조(節操)가 있었고, 삼족당(三足堂)은 덕업이 세상에 모범을 드리우는데 이르렀다.
이 세 선생은 비록 백대(百代)나 떨어지고 멀리 천 리(千里) 밖에 있어도 오히려 장차 풍모를 듣고 감발하여 흥기할 수 있는데, 더군다나 제군들은 이곳에서 태어나고 이곳에서 자라 귀로 익숙하게 듣고 눈으로 익숙하게 보았을 것이니, 어찌 마음속으로 스승으로 삼아 스스로 분발하지 않으랴.
그러나 병란 이후부터 가르침의 도가 점점 느슨해져 나이 든 선생들은 대부분 늙거나 죽어 어린아이들은 가르침을 잃게 되었으니, 집에 있으면 공손하게 대답해야 하는 가르침을 듣지 못하고, 집을 나가서는 보행에 대한 예절을 알지 못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부형(父兄)의 친구들을 마주 대하면서도 읍(揖)을 하고, 스승과 어른처럼 존귀한 분에게도 절하지 않으며, 심하게는 문호(門戶)를 분할하여 각각 사당(私黨)을 세워 서로를 비방하고 배척하니, 합당하지도 않고 공변되지도 않아 원근의 사람들이 비루하게 여기고 꾸짖으며 말하기를 “이서(伊西)의 향풍(鄕風)이 이와 같으니, 어찌 같은 고을에 사는 여러 선비들의 수치가 되지 않으랴.”라고 한다.
지금 훈장(訓長)을 택정(擇定)하여 유생들 중 어리고 총민한 자를 선발해 가르치게 하되, 매 삭망(朔望)에 사당에 참배하고, 이로 인해 어렵고 난해한 것을 문답(問答)하여 그 지취(志趣)를 계발하게 하고, 승강(升降)과 읍양(揖讓)의 절도와 충신(忠信)과 독경(篤敬)의 근본에 대해 더욱 가르침을 더해야 한다.
제군들이 참으로 수고와 부지런함을 꺼리지 않고 강습하고 실천해서 푹 무젖어서 조급하지 않고 게으르지 않는다면, 성현이 되는 공부는 진실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만약 명분을 비록 학문에 두면서도 본원에 마음을 쓰지 않고, 혹 그저 일과(日課)만 응하여 구차하게 꾸짖음과 벌(罰)을 면하고, 혹 문사(文辭)만 숭상하고 경박함을 더욱 키우게 되면, 오늘 설강(設講)의 뜻이 아니고, 또 제군에게 바라는 바도 아니다.
12월에 어떤 일로 인해 파직되어 돌아왔다. 무진년(1628, 인조 6) 9월 익위사 익위(翊衛司翊衛)에 제수되었다. 정우복 선생(鄭愚伏先生)이 부제학(副提學)이 되어 장차 기형주(璣衡註)를 진강하려 하자, 익위사의 당직소에서 우복 선생을 옥당으로 모셔와 의의(疑義)를 강론하였으며, 곧바로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에 제수되었다.
기사년(1629, 인조 7) 1월에 외직으로 나가 예천 군수(醴泉郡守)가 되었다. 예천군은 고향〔안동〕과 가까웠기에 경내(境內) 사람들이 모두 오래전부터 아는 사람이어서 집무에 제약이 많았지만, 선생이 일을 처리하는 데는 일정한 법도가 있어 만족하여 따르지 않음이 없었으며, 선생이 떠날 때까지 한 사람도 정사를 간섭하거나 법을 어기는 자가 없었다. 겨울이 되어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오자 읍민들이 돌이켜 생각하며 칭송했다.
신미년(1631, 인조 9) 봄에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3월에 합천 현감(陜川縣監)에 제수되었다가 계유년(1633, 인조 11) 여름에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갑술년(1634, 인조12) 9월 한성 서윤(漢城庶尹)에 제수되어 한양으로 달려가 사은숙배하였다.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자 소(疏)를 올려 체직을 요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당시 처사 강학년(姜鶴年)이 장령(掌令)이 되어 올라오지 않고 소(疏)를 올려 당시의 정사를 논하였는데, 내용도 그 말이 주상을 범하여 조정의 의론(議論)이 크게 격노하고 삼사(三司)에서 모두 들고 일어나 장차 사사(死事)로 논죄하려 했다. 선생은 개연히 앞장서 구제하자 자제들은 화가 미칠까 두려워 그만두라고 간언했지만, 듣지 않았다.
결국 계사를 올리기를,
신은 학년(鶴年)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합니다. 지금 올린 소(疏)의 말을 살펴보니, 생각이 경솔하고 말이 방자하여 곡진함이 자못 부족합니다. 비록 시골의 투박하고 어리석어 일의 정황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임금에게 아뢰는 말이 어찌 마땅히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백이(伯夷), 엄연년(嚴延年)의 일은 더욱 마땅히 인용해서는 안 됩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성상께서 난(亂)을 평정하여 바름으로 되돌렸기에 이륜(彛倫)이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무왕(武王)과 곽광(霍光)은 다른 시대에 태어나 오늘에 비길 수 없을 것인데도 망발(妄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물의(物議)를 준엄하게 배척함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 본심을 헤아려보면, 어찌 다른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주상께 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오로지 말을 다할 것만 생각하고 가릴 줄 몰라 이 지경에 이른 것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명예를 팔아 정직함을 산다는 것도 오히려 그 본심이 아닐까 염려된다.’고 하는데, 하물며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신하를 극죄(極罪)로 다스리는 군주는 없는데도 이것으로 그 죄안을 만들면서 지나치게 여기지 않음에 있어서겠습니까.
예전의 현명한 군주들은 말 때문에 사람에게 죄를 주지 않았습니다. 신이 삼가 헤아려보건대, 전하께서는 즉위한 이래로 초야 선비들이 거만하여도 모두 너그럽게 용서했습니다. 지금 학년에게도 남다른 포용을 보여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고, 또 필경 다른 뜻이 없을 것이라고 하교하셨습니다. 광망(狂妄)됨이 저와 같았는데도 성덕은 이와 같았으니, 보고 듣는 자들이 흔쾌히 복종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신의 생각으론, 신하의 도리는 오로지 뜻을 받들어 순종하는 데에 있으며, 사방의 후손들로 하여금 모두 임금의 넓게 포용하는 관대한 도량이 평상시보다 만 배나 뛰어남을 우러러 보게 해야 합니다. 만약 그 실정을 자세히 따지지 않고 똑같은 법으로 논죄한다면, 한 사람의 하찮은 학연은 비록 애석하게 여길 것이 없겠지만, 어찌 성세(聖世)의 허물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이로 인해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요청했다. 그 후에 대신들이 차자(箚子)를 올려 학년의 죄는 죽임에 해당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아울러 선생을 학년에게 아첨하고 편드는 사람으로 여겨 공격하니, ‘아첨은 날마다 성해지고, 군주의 권세는 날마다 외로워진다.’는 말이 있게 되었다.
임금이 비답을 내리기를 “나는 말을 함부로 낸 것으로 선비를 죽이고 싶지 않으나, 경은 성냄을 조금 느슨하게 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으니, 대개 임금의 뜻이 선생의 말에 느낀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 뒤에 사간원에서 선생의 장계 가운데서 ‘솔의(率意)’ 두 글자를 끄집어 내 마땅히 아뢰어선 안 될 말이라고 여겨 추문(推問)하여 다스리기를 청하였는데, 마침 선생이 죽어서 그만두었다.
을해년(1635, 인조13) 1월에 선생은 상산(商山)에서 하회(河回) 옛집으로 돌아와 수동(壽洞)의 선영에 성묘하고 선성(宣城)에 들러 도산서원(陶山書院)의 사당에 참배했으며, 돌아오는 길에 영천(榮川)에 들렀다가, 문득 병이 들어 13일 저녁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온 고을의 인사들이 모두 와서 달려와 곡(哭)하니, 친구(親舊)들이 부조한 수의(襚衣)를 모아서 염습했다. 원근에서 소식을 들은 이들은 놀라 애도하며 안타까워하지 않은 이가 없었는데, 서로 조문하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리 도는 누구에게 맡길까.”라고 했다.
이 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선산부(善山府) 치소(治所) 동쪽 박곡(朴谷)에 장례 지내니, 모인 사람이 수백 명이었다. 그 뒤 18년 임진년(1652, 효종3) 1월에 군위현(軍威縣) 서쪽 의곡(義谷) 언덕 해좌사향(亥坐巳向)으로 이장했으며, 전부인(前夫人) 권씨(權氏)도 곁에 합장했다.
선생은 사람됨이 겸손하면서도 도량이 넓어 한계를 볼 수 없었고, 우아하면서도 온화하여 모남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성낸 기운을 안색에 나타내지 않았으며 기지(機智)를 사사롭게 쓰려는 마음을 싹틔우지 않았다. 평소엔 삼가고 경계하여 인후(仁厚)한 기운이 온화하게 얼굴에 드러났기에, 바라보면 도를 지닌 군자가 됨을 알 수 있었다.
본성이 효성스럽고 우애로워 문충공(文忠公)을 섬김에 기쁨을 다했으며, 초상을 당하여선 슬픔과 상심으로 병을 얻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으며, 장례와 제사에는 한결같이 유훈(遺訓)을 모범으로 삼았다. 일찍 죽은 두 형을 추모하여 여조카를 양육하여 시집을 가게 했고, 남조카를 가르침에 뜻을 확립케 하여 자기에게서 난 자식보다 더욱 사랑했다.
여러 서제(庶弟)들에게도 은혜와 사랑에 틈을 두지 않아 토지와 하인들을 고르게 분배하되, 나라의 법전으로 제한을 두지 않았으며, 자신은 황폐한 전답이나 노쇠한 하인을 가졌기 때문에 종신토록 궁핍하면서도 원망하는 낯빛이 없었다. 처신(處身)과 대인(待人)은 한결같이 성실해서 조금이라도 허위나 가식의 뜻이 없었다.
친척을 만나거나 이웃을 대할 때는 친소(親疎)와 상하를 막론하고 위로하고 경하하며 주선함에 모두 마땅함을 다해 처음부터 끝까지 후회나 원망, 이런저런 말이 없었다. 붕우와 사귐에는 오래되어도 공경하여 비록 신분이 낮거나 어린 사람을 대할 때도 예의와 경건, 사양과 공손을 다하였으며, 종들에게 꾸짖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선함을 칭송할 때는 얼굴빛을 기쁘게 하고 정신을 맑게 하여 마치 자신에게 선함이 있는 듯했다. 평소의 생각이 편안하고 맑아 세간의 영리 보기를 담박하듯 했으니,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을 만나면 자신을 깨끗이 하고 은둔하였다. 국운이 열렸을 때 일찍이 한 번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교리(校理) 엄성(嚴惺)이 경시관(京試官)으로 있다가 선생의 큰 명성을 사모하여 과거의 장원으로 발탁하고 과(課)를 일반 등급과 다르게 하려 했다.
선생은 서울에 들어가면 주사(主司)가 이름을 기록할 것을 염려하여 결국 대과에 가지 않았으니, 벼슬길에 나아감을 싫어하고 거두어 물러남을 좋아함이 이와 같았다. 전후로 네 번이나 주읍(州邑)의 수령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임기를 채우지 않고 돌아왔다.
그의 위정(爲政)은 이치를 총괄하고 관리함이 치밀하였으니, 전부(田賦)와 전곡(錢穀)으로부터 군부(軍簿)와 옥송(獄訟)에 이르기까지 각각 조리를 꿰뚫어 느슨해지거나 시행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판결(判決)은 엄하면서도 분명했고, 믿음이 말보다 앞서 혹 두 쪽의 의견을 기다리지 않고도 그 참말과 거짓말을 자세하게 파악하니, 소송하는 이가 부끄러워하며 그만두기를 요청했다.
교화의 본원을 도탑게 하여 풍속과 교화를 수하는 것을 더욱 중시하여 인재를 양육함에 일찍이 많은 관심을 두지 않음이 없었다. 지조를 지키며 빈궁하게 살았어도 얼음과 황벽나무처럼 늠연하였고 내외의 구분이 단정하면서도 엄격하여 남들이 사사롭게 간섭할 수 없었다.
중년부터 상주(尙州) 시리(柴里)에 우거했는데, 매번 관직을 마치고 돌아오면 둥글게 친 담장이 적막하고 전죽(饘粥)도 연명하지 못했지만, 선생은 가난을 편안히 여기고 분수를 따라서 만족하면서 스스로 즐거워했다. 일에 조금이라도 자랑하거나 뻐길 것이 있어도 부끄러워 차마 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남들이 청명(淸名)으로 자신에게 돌릴까 두려워했다.
스스로 대대로 높은 벼슬을 했던 명망 있는 가문의 후손으로 여겨 군주를 사모하고 나라를 걱정하여 충절과 정성이 빛났으니, 지위가 낮거나 자신이 물러났다고 해서 조금의 게으름도 없었다. 무릇 관직을 내리는 명이 있으면 번번이 떠나면서 말하기를, “대대로 명망 있는 가문의 의리로 감히 시골에 은둔해 지낼 수는 없다.”라고 했지만, 또한 일찍이 그 관직(官職)에 오래 있지는 않았다.
만년에 사헌부(司憲府)에 들어가자 마침 권귀인(權貴人)이 나라의 인재들을 다 없애려고 하여 시의(時議)가 휩쓸렸지만, 오직 선생만 굳고 간절하게 분변하고 막았는데, 이로 말미암아 마침내 흔들리는 시련을 당해 죽음에 이르렀다.
그의 평생을 상고하니, 어묵(語黙)과 출처(出處)는 모두 예전 순유(醇儒)들의 법도에 부합하였고, 기준이 매우 엄하여 당시의 청명(淸名)한 선비들도 그렇게 되기를 바랄 수 없었다. 문장을 지음에 공언(空言)을 쓰지 않았고 오로지 전아하면서 법도에 맞고 실재에 부응함을 위주로 하여 운치가 곡진하고 조리가 정밀하니, 이관해(李觀海)가 선생의 글을 보고 자신은 미칠 수 없다고 성대하게 칭찬하였다.
선생은 주자의 《가례》가 미완성된 책이며 비록 후현들의 부주(附註)가 있지만 변례(變禮)는 수정하지 못했다고 여겼다. 이로 이해 고금의 상례설(喪禮說)을 모아 미비한 점을 보충하고, 문(門)을 나누고 조목을 세워 검열(檢閱)을 편리하게 하여 긴급한 일에 대응하고자 했다. 책이 완성되자 고치고 바로잡으려 했지만 이루지 못했으며, 지금 초본(草本)이 집안에 갈무리되어 있다.
대개 선생의 학문은 겸양과 공손ㆍ독실(篤實)을 근본으로 하면서 자신을 지킴은 편안하고 굳셌으며, 벼슬길에 나가서는 겸양하고, 공력을 유지함은 쌓임과 오래됨으로 하고, 실천은 곧고 평평함으로 하여 이미 명성을 이루었지만 자처(自處)에는 더욱 공손하였고, 덕이 이미 높았지만 부족하여 마치 가지지 못한 듯했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미덥고 옳은 덕이 사방에 미쳤는데 스스로는 감추었지만 남들이 알아주었으며, 스스로는 낮추었지만 남들이 높여 현우(賢愚)ㆍ귀천(貴賤)ㆍ장유(長幼)ㆍ원근(遠近)을 막론하고 흡족하게 존경하고 사모하여 마치 상서로운 난새와 봉황처럼 온 세상 사람들이 우러러보았으니, 군자의 성덕(盛德)이 아니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으랴.
선생은 아버지께 가르침을 받을 때부터 도로 들어가는 차례를 배워 평소 공부하는 사람이란 이름으로 스스로 높이 내세우길 좋아하지 않고, 감추고 숨기기에 더욱 힘썼다. 그러나 조존(操存)과 체험에 있어서는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홀로 있을 때 삼가는 공부가 실재로 날로 진보하여 그침이 없었기 때문에 참되게 징험하는 성대함이 이런 경지에 이르렀으니, 어찌 우연이겠는가. 문충공〔柳成龍〕은 위로는 퇴계의 적전(嫡傳)을 계승하였고 아래로는 후손들을 무궁한 데까지 이끌었으며, 공(功)을 사직(社稷)에 베풀고 은택은 백성들이 입게 하였으며, 도와 지위가 높았지만 더욱 스스로 겸손하고 억제했으며, 선생은 그 서업(緖業)을 공경히 찬술하여 빛을 감추어도 더욱 드러났다.
《주역》 〈겸괘(謙卦) 구삼(九三)〉에 “공로가 있으면서도 겸손함이니, 군자가 끝마침을 두어야 하니, 길하다.”라고 했으며, “삼(三)은 양강(陽剛)의 덕으로 바름을 얻는다. 상하가 귀의하되 공로가 있으면서도 자랑하지 않고, 공(功)이 있어도 덕을 드러내지 않음은 두터움의 지극함이다.”라고 함은 공이 있으면서도 남에게 낮춘다는 말이다.
때문에 상(象)에 잇기를 ‘공로가 있으면서도 겸손한 군자는 만민이 복종한다.’라고 했으니, 문충공이 여기에 해당한다. 〈겸괘(謙卦) 초육(初六)〉에 이르길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니 대천(大川)을 건너더라도 길하다.”고 하면서 “부드러운 덕으로 겸손히 아래에 처하면서 겸하고 또 겸하다.
이와 같이 하는 자는 군자이다.”라고 했기 때문에 〈상전(象傳)〉 에 잇기를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는 낮춤으로 스스로를 기른다.”라고 했으니, 선생이 여기에 해당한다. 《춘추좌씨전》에 이른바 “대대로 그 아름다운 덕을 이루어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았다.”라는 말은 아마 선생을 이르는 것인저. 전부인(前夫人) 권씨(權氏)는 충정공(忠定公) 벌(橃)의 증손녀(曾孫女)로 1남 8녀를 낳았다.
사내 천지(千之)는 지금 경양승(景陽丞)이다. 장녀는 감역(監役) 김시민(金時敏)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부사(府使) 신숭구(申嵩耇)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진사(進士) 이상일(李尙逸)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금처겸(琴處謙)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김종준(金宗準)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현감(縣監) 정도응(鄭道應)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곽문용(郭文溶)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이재관(李在寬)에게 시집갔다. 계실(繼室)은 진주 하씨(晉州河氏)로 아들 백지(百之)를 낳았다. 세마공(洗馬公)과 안기공(安奇公)의 후손이 문충공(文忠公)의 적손(嫡孫)이다.
기억하기론, 선생이 죽은 달에 안동부(安東府) 성동리(城東里) 집으로 선공(先公)을 찾아뵈었다. 며칠 지난 뒤에 내가 꿈을 꾸었는데, 관부(官府)에 갔더니 많은 사람들이 담장처럼 에워싸고 시끄럽게 떠들기를 ‘봉새가 죽었다.’고 했다. 내가 마침내 곧바로 들어가서 보니, 어떤 큰 새가 빳빳하게 누웠는데 높이는 몇 장(丈)이었고 채색된 깃털에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듯 했다.
꿈에서 깨어 선공에게 사실대로 아뢰니, 선공은 오래도록 기쁜 낯빛이 아니었다. 이날 밤에 선생의 부음이 들렸다. 선공은 통곡하며 말하기를 “인인(仁人)께서 가셨도다. 신이하구나. 우리 아이의 꿈에 징험됨이여.”라고 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완연히 어제의 일 같으니, 슬프도다. 이윽고 안기공에게 말해주며 행장의 끝에 덧붙여 돌려보냈다. 삼가 행장을 쓴다. <끝>
[註解]
[주01] 서애(西厓) 선생 문충공(文忠公) : 호가 서애이며 시호가 문충인 유성룡(柳成龍)을 가리킨다.
[주02] 안기공(安奇公) : 안기도 찰방(安奇道察訪)을 지낸 유원지(柳元之, 1598~1674)를 가리킨다. 그의 부친은 유여(柳袽)이며, 둘째
숙부가 유진(柳袗)이다.
[주03] 경양(景陽) : 경양승(景陽丞)을 지낸 유천지(柳千之, 1616~1689)를 가리킨다. 그는 유진의 장남이다.
[주04] 선공(先公) : 홍호(洪鎬, 1586~1646)를 가리킨다.
[주05] 군자의 …… 겸손하여 : 겸겸군자(謙謙君子)란 겸양의 덕을 갖춘 군자를 말한다. 《주역》 〈겸괘(謙卦) 초육(初六)〉에 “겸손하고
사양하는 군자는 겸손한 덕행으로 자신을 다스린다.〔謙謙君子 卑以自牧也〕”라는 말이 있다.
[주06] 가득 …… 듯한 : 증자(曾子)가 안연(顔淵)을 칭송하기를, “유능하면서도 무능한 사람에게 묻고, 학식이 많으면서도 적은 사람에게
묻고, 있어도 없는 듯이 하고, 가득해도 빈 듯이 했다.〔以能問於不能 以多問於寡 有若無 實若虛 犯而不校昔者 吾友嘗從事於斯
矣〕”고 하였다. 《論語 泰伯》
[주07] 해서옥사(海西獄事) : 이른바 김직재(金直哉, 1554~1612)의 옥사라고 한다. 김직재는 본관은 안동, 자는 경어(景漁)이다. 1612
년(광해군4)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 이호민(李好閔), 좌랑을 지낸 송상인(宋象仁) 등과 공모하여 서울을 함락시킨 다음, 이이첨
(李爾瞻) 등의 대북파를 제거하고 순화군(順和君)의 양아들 진릉군(晉陵君) 태경(泰慶)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했다는 혐의로 아들
백함(白緘), 사위 황보신(皇甫信)과 함께 처형당했다. 이 사건으로 100여 명이 처형되거나 귀양가는 등의 처벌을 받았다. 《燃藜
室記述 卷19 廢主光海君故事本末 金直哉之獄》
[주08] 양극선(梁克選) : 1575~?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군거(君擧), 호는 운송(雲松)이다.
[주09] 조존세(趙存世) : 1562~?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선계(善繼), 호는 청호(聽湖)이다. 양극선과 평소 친분이 있었다. 《拙齋集 卷
14 季父修巖先生行狀》
[주10] 용궁(龍宮) : 경상도 용궁현(龍宮縣)으로,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일대이다.
[주11] 전이성(全以性) : 1577~1646. 본관은 용궁, 자는 성지(性之), 호는 운계(雲溪)이다. 경북 예천군 용궁면 읍부리 출신으로, 한강
정구(鄭逑), 우복 정경세(鄭經世)의 제자이다. 양극선과 평소 친분이 있었다. 《拙齋集 卷14 季父修巖先生行狀》
[주12] 이한음(李漢陰), 심일송(沈一松) : 호가 한음인 이덕형(李德馨, 1561~1613)과 호가 일송인 심희수(沈熹壽, 1548~1622)를 가
리킨다.
[주13] 세마공(洗馬公)이 …… 죽었는데 : 세마공은 유성룡의 둘째 아들 유단(柳褍)을 가리킨다. 당시 유단은 동생 유진이 잡혀가게 되자
안동에서부터 뒤따라와 서울에서 옥바라지를 하였다. 그 결과 병을 얻게 되어 낙선방(樂善坊)의 누이 집에서 죽음을 맞게 되었다.
《道巖集 附錄 遺事》
[주14] 광해군〔昏朝〕이 …… 잡아들였고 : 광해군 5년(1613)에 대북파(大北派)의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李爾瞻) 등이 소북파(小北
派)에서 선조의 적자(嫡子)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 했다는 구실로, 소북파의 영수인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을 사사(賜
死)케 하고 소북을 조정에서 축출하여 이른바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켰다. 그 뒤 1618년에는 인목대비마저 서궁(西宮)에 유
폐시켰다.
[주15] 선성(宣城) : 경상북도 예안(禮安)의 옛이름이다.
[주16] 민성징(閔聖徵) : 1582~1647. 본관은 여흥, 자는 사상(士尙), 호는 졸당(拙堂)ㆍ용졸(用拙)이다.
[주17] 이서(李曙) : 1580~1637. 본관은 전주, 자는 인숙(寅叔), 호는 월봉(月峰)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0대손이다. 1623년 장
단 부사로 있을 때 병력 700명을 동원하여 인조반정을 이루는 데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완풍군(完豊君)에 봉해
졌다.
[주18] 순(舜)이 …… 하라 : 이 말은 《서경》 〈순전(舜典)〉에 보인다.[주-D019] 자제들은 …… 한다 : 이 말은 《논어》 〈학이(學而)〉에
보인다.
[주20] 요순(堯舜)의 …… 따름이다 : 이 말은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보인다.
[주21] 온화하고 …… 기초로다 : 이 말은 《시경》 〈억(抑)〉에 보인다.
[주22] 횡거 선생(橫渠先生)이 …… 때문이다 : 횡거 선생은 호가 횡거인 송대의 학자 장재(張載)를 가리킨다. 이 말은 《근사록》 권5 〈극
기(克己)〉에 보인다.
[주23] 나는 …… 같았다 : 이 말은 《논어》 〈향당(鄕黨)〉에 보인다.
[주24] 현명함이나 …… 없음은 : 향당에서는 나이가 우선이라는 뜻이다.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조정에서는 벼슬이 제일이
며, 향당(鄕黨)에서는 나이가 제일이며, 세상을 돕고 백성을 기르는 데는 덕(德)이 제일이다.〔朝廷莫如爵 鄕黨莫如齒 輔世長民
莫如德〕”라는 말이 있다.
[주25] 근본이 …… 생긴다 : 이 말은 《논어》 〈학이(學而)〉에 보인다.
[주26] 영헌공(英憲公) : 김지대(金之岱, 1190~1266)를 가리킨다. 그의 본관은 청도, 시호는 영헌이며, 거란의 침임에 공을 세워 오산군
(鰲山君)에 봉해졌다.
[주27] 절효공(節孝公)은 …… 이르렀다 : 절효공은 김극일(金克一, 생몰년 미상), 탁영은 김일손(金馹孫, 1464~1498), 삼족당은 김대
유(金大有, 1479~1551)를 가리키며, 이 세 명을 청도삼현(淸道三賢)이라 칭하기도 한다.
[주28] 집에 …… 못하였다 : 유락(唯諾)은 윗사람의 말에 공손하게 대답함을 이른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어른이 계신 방 안으
로 들어갈 때에는 옷자락을 공손히 치켜들고 실내 구석을 따라 빠른 걸음으로 가서 자리에 앉은 다음에 응대를 반드시 조심성 있게
해야 한다.〔摳衣趨隅 必愼唯諾〕”라는 말이 있다.
견수(肩隨)는 연장자(年長者)에 대한 예로서, 연장자와 함께 길을 갈 적에 연하자가 연장자와 나란히 서지 않고 약간 뒤로 물러서
서 가는 것을 뜻한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오년의 연장자에게는 어깨를 따른다.〔五年以長則肩隨之〕”고 하였다.
[주29] 이서(伊西) : 경상북도 청도군의 옛이름이다.
[주30] 정우복 선생(鄭愚伏先生) : 호가 우복인 정경세(鄭經世, 1563~1633)를 가리킨다.
[주31] 기형주(璣衡註) : 《서경》 〈순전(舜典)〉에 “순(舜)이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어 일월(日月)과 오성(五星)을 다스렸다.〔在璇
璣玉衡 以齊七政〕”라는 대목의 주석(註釋)을 말한다.
[주32] 당시 …… 범하여 : 1634년(인조12) 11월 3일에 장령으로 있던 강학년(姜鶴年, 1585~1647)이 광해군의 세자 이지(李祬)를 사
사(賜死)한 것과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을 사사한 것에 대해 비판하면서, “백이(伯夷)가 있다면 틀림없이 포악으로 포악을 바
꾸었다는 비판을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결국 언사가 지나치다 하여 12월 9일 삭탈관작되고 이듬해 유배되었다. 《仁祖實錄
12年 11月 7日》
[주33] 백이(伯夷) 엄연년(嚴延年)의 일 : 백이는 주 무왕(周武王) 때의 현인이며, 엄연년은 한(漢)의 장수이다. 강학년이 백이, 엄연년을
거론하며 폐위된 동궁 지ㆍ인성군 공(珙)에 대해 아뢰기를 “백이(伯夷)가 있었다면 반드시 ‘포악한 자가 포악한 자를 갈아치웠
다.’는 비난을 했을 것이고, 엄연년(嚴延年)이 있었다면 반드시 곽광(霍光)을 탄핵하는 조처가 있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仁
祖實錄 12年 11月 3日》
[주34] 뜻을 받들어 순종하는 : 《효경(孝經)》 〈사군(事君)〉에 “군자가 임금을 섬김에,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물러나서는
허물을 보완할 것을 생각하여, 임금의 아름다운 점은 받들어 따르고 임금의 잘못된 점은 바로잡아 구제한다.〔君子之事上也 進思
盡忠 退思補過 將順其美 匡救其惡〕”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35] 상산(商山) : 경상북도 상주의 옛이름이다.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에 수암 종택이 있다.
[주36] 하회(河回) 옛집 : 유성룡의 생가가 있는 곳으로 경상북도 안동시 하회면 충효당(忠孝堂)을 가리킨다.
[주37] 영천(榮川) : 경상북도 영주(榮州)의 옛이름이다.
[주38] 엄성(嚴惺) : 1575~1628.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경보(敬甫), 호는 동강(桐江)이다.
[주39] 많은 관심을 두지 : 삼치의(三致意)란 깊이 마음을 쓴다는 뜻이다. 《사기(史記)》 권84 〈굴원전(屈原傳)〉에 “군주를 보호하고 나
라를 일으키며 그것을 반복하려거든 한편 가운데 깊이 마음을 쓸 것인저.〔其存君興國 而欲反復之 一篇中 三致意焉〕” 하였다.
[주40] 얼음과 황벽나무처럼 늠연하였고 : 빙벽(氷檗)이란 얼음물을 마시고 황벽(黃檗)을 먹는다〔飮氷食檗〕는 뜻으로, 어려움 속에서도
청렴결백(淸廉潔白)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백거이(白居易)의 “삼 년 세월 동안 자사로 있으면서, 얼음물을 마시고 황벽
을 먹었노라.〔三年爲刺史 飮氷復食檗〕”라는 시구에서 유래한 것이다. 《白樂天詩集 卷1 三年爲刺史》
[주41] 내외의 …… 없었다 : 남편과 아내의 직분을 엄격히 구분하였다는 뜻이다. 주자가 여씨 부인(呂氏夫人)의 묘지명에 “내외의 구분
이 엄격하여 남들이 이간질하지 못했다.〔內外斬斬 無間言〕”라는 말이 있다. 《晦庵集 卷91 夫人呂氏墓誌銘》
[주42] 둥글게 친 담장 : 청빈한 선비의 검소한 거처를 가리키는 것으로 《예기》 〈유행(儒行)〉의 “선비는 가로세로 각각 10보(步) 이내의
담장 안에서 거주한다. 좁은 방은 사방에 벽만 서 있을 뿐이다. 대를 쪼개어 엮은 사립문을 매달고, 문 옆으로 규(圭) 모양의 쪽문을
낸다. 쑥대를 엮은 문을 통해서 방을 출입하고, 깨진 옹기 구멍의 들창을 통해서 밖을 내다본다.〔儒有一畝之宮 環堵之室 篳門圭
窬 蓬戶甕牖〕”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43] 이관해(李觀海) : 호가 관해인 이민구(李敏求, 1589~1670)를 가리킨다.
[주44] 옳은 …… 미쳤는데 : 공자가 “대저 옛날에 군자는 덕을 옥에 비겼으니, 온윤하되 윤택함은 인(仁)이요……부윤이 사방으로 달함은
신(信)이다.〔夫昔者君子比德於玉焉 溫潤而澤仁也……孚尹旁達信也〕” 하였다. 《禮記 聘義》 정현(鄭玄)의 주(注)에서 부윤
(孚尹)을 “옥의 채색을 말한다.”라고 하였고, 육전(陸佃)은 “신정(信正)과 같다.”라고 하였다. 대개 미덥고 바른 덕이 사방에 미침
을 뜻한다.
[주45] 대대로 …… 않았다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文公) 18년 조(條)에 “대대로 그 미덕을 이루어서, 그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았다.〔世濟其美 不隕其名〕” 하였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전재동 (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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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修巖先生柳公行狀
維三年壬寅冬十二月。修巖柳先生。祔饗于西厓先生文忠公祠。越翌年。安奇公。以修巖先生家狀附錄。授某曰。叔父旣陞祀矣 。然其平生德學行事。迄無能爲之撰次。吾恐後之人無以考德而取法。唯吾子圖之。景陽亦唯子是屬。某誠不敏。顧惟總角時。先公詔受禮于先生。將行。先生卒。故嘗自歎其不幸焉。則義有不當辭者。悲夫。退陶歿而緖言絶。自世之君子。以矜衒傲狠。爲學術而道益晦。惟我文忠公之學。沈潛篤實。專用力於內。而先生得之。然性謙退。未嘗以之自居。故世之君子。鮮克知之。若先生者。可謂君子之盛德謙謙。實而若虛者矣。先生諱袗。字季華。領議政文忠公西厓先生諱成龍之第三子也。祖諱仲郢。觀察使贈豐山府院君。曾祖諱公綽。杆城郡守贈左贊成。高祖諱子溫。贈吏曹判書,文忠公。娶宗室李氏。縣監坰之女。封貞敬夫人。以萬曆壬午七月二十七日。生先生。先生生有美質。謙厚端直。聰穎夙成。識趣高遠。甫八歲而失貞敬。哭泣悲哀。不離廬側。助二兄執饋奠。居喪如成人。十一歲。遭倭亂。文忠公扈駕而西。先生從姊兄李氏。避竄嶺東山谷間。往往遇賊瀕死。而能以計自全。時或相勢發慮。縣合機宜。一行賴之。卒以獲濟。亂甫定。文忠公謝事南歸家居。先生朝夕于側。講問經義。得聞古人爲學之要。心會默契。多自得於言意之表。文忠公嘗稱之曰。如爾美質難得。恨不及退陶門。退處私室。斂襟端坐。服膺存養踐履之實。書靜坐終日易。操存一刻難十字於座右。以自勉勵。丁未五月。丁外艱。服闋。中庚戌司馬。初試,覆試。皆居魁。先生唯代大家。維難其保。易受人指。在愼德行學業。事無細大。無敢不敬畏。肫肫卑讓。士論多之。壬子二月。海西獄起。先生舊於賊有嗛。遂爲其誣被逮。金吾郞梁公克選來。趙公存世知安東。爲言先生賢。不宜有此。梁亦素慕先生。會先生疾。輒以聞先遣判官。加先生以縲絏。里中聚觀。驚號涕洟。先生行步言貌詳緩如平日。請於判官曰。此行生死。未可知也。願暫至家廟拜辭而行。判官不許。強而後肯。先生入廟門。伏地哀號。再拜乃出。金吾郞繼至。令入內與家人訣別。則先生亦不從焉。到龍宮。全公以性唁先生。問梁曰。公認柳某何如人。梁爲及所見。讚歎不已。全公因極言先生平日事。梁益悟。護先生甚謹。旣就
理。疾益甚。諸大臣如李漢陰,沈一松。皆言先生病。光海命拘諸禁府門外。五月。仲氏洗馬公隨難于京邸。以憂卒。六月。始得理出。追及喪車而歸。丙辰。拜翊衛司洗馬。不赴。時昏朝政亂。孼臣煽禍。幽母戮弟。屢興大獄。羅織士流。以訹不附己者 。宣城有一要人。方柄用。與先生有舊。一日來請見。先生拒而不納。其人怒。齦齦出悖語。以齕先生。聞者莫不危之。先生終不爲動。癸亥更化。賢路大開。群公競推轂先生起家。拜奉化縣監。辭不許。乃赴縣。經汚吏剝割。公私赤立。土瘠賦重。民不堪苦。先生撫循煦濡。稍有生意。則欲申地部改步其田。豪右多泥之。先生不爲撓。按行田畝。第其上下而無遺漏。由是田增而賦省。蓋先生始至。人戶不滿百。朞月之間。流逋四歸。戶口倍增。巡察使閔聖徵。上先生治行。賜表裏以奬之。諭書有曰。爾居官。愛民如子。治邑如家。凡諸弊瘼。有若嗜慾之難制。治有茂績。誠不負拔擢之意云。九月。喪令人。因乞葬辭歸。冬。拜刑曹正郞。不赴。丙寅夏。復入刑曹爲正郞。公州人有爲鄕職者。與其地黃姓相惡。爲其誣訴。逮繫京獄累年。文書盈几閣。官吏不能遍覽。先生一日夜閱盡。卽其文案。參互句較。悉得其情。白于堂上。李完豐曙判本曹。大驚服歎曰。微公幾誤此獄。囚呼曰。先大監。按某獄。伸其枉。今公又能如此。感泣不已。告者乃逸。輿識快之。供務僅十日。辭歸。冬。拜榮川郡守。未赴而遞。丁卯正月。拜淸道郡守。爲治如奉化時。作文諭諸生。略曰。昔舜命契曰。百姓不親。五品不遜。汝作司徒。敬敷五敎。在寬。此敎學之所由始也。蓋人倫者。日用當行之道。學者。學此而已。敎者。敎此而已。故孔子曰。弟子入則孝。出則弟。孟子曰。堯舜之道。孝弟而已矣。則天下之理。豈有以加於此哉。詩曰。溫溫恭人。維德之基。橫渠先生曰。今世學不講。男女便
驕惰壞了。到長益凶狠。只爲未嘗爲子弟之事。病根不去。隨所居所接而長。觀此數條。而爲學之得失可知矣。至於子朱子。集古聖賢格言善行。以爲小子培養德性之根本。而其所惓惓者。唯在於入孝出弟隆師親友。正容謹節愼言篤行而已。何嘗敎之以尙氣放言。凌蔑長老。言人過失。爭辨好勝。以爲高耶。孔子大聖。猶曰子於鄕黨。恂恂如也。似不能言者。蓋以鄕黨。父兄宗族之所在。不可以賢知加之也。聖人尙爾。況其下者乎。惟其如是。故彝倫敍。風俗厚。他日立身行世。皆可自此而推之。所謂本立而道生也。本郡文獻之盛著。自前古英憲公以下。聞人達士。史不絶書。以至節孝之誠孝格天。濯纓之文章節操。三足之德業範世。此三先生者。雖在百代之下。千里之遠。尙且聞風感發而興起。況諸君生於斯。長於斯。其耳濡目染。豈無私淑而自奮者乎。但自兵燹之後。敎道漸弛。耆德多老死。童蒙失其養。在家不聞唯諾。出門不知肩隨。及其稍長。對揖父兄之執。不拜師長之尊。甚者。分門割戶。各立私黨。互相詆斥。不合不公。致使遠近之人。莫不鄙誚之曰。伊西之鄕風如此。豈不爲一鄕多士之羞哉。今擇定訓長。使選儒生之年少聰敏者而敎誨之。每朔望謁聖。因與難疑答問。啓發其旨意。而其於升降揖讓之節。忠信篤敬之本。尤加戒焉。諸君誠能不憚勞勤。講習服行。優游涵泳。毋急毋怠。則爲聖爲賢之功。亶在是矣。若夫名雖爲學。而不以本原爲心。或但應日課。苟免責罰。或徒尙文辭。益長浮薄。非今日設講之意。而亦非所望於諸君也。十二月。因事罷歸。戊辰九月。拜翊衛司翊衛。鄭愚伏先生爲副提學。將進講璣衡註。自衛曹直所。邀先生玉堂。講論疑義。旋拜司僕寺僉正。己巳正月 。出爲醴泉郡守。郡在鄕隣。境內皆親故。事多牽掣。而先生處之有方。莫不厭伏。訖先生去。無一人干政犯禁者。及冬。棄官歸。邑民追思以頌之。辛未春。除全羅都事。不赴。三月。拜陜川縣監。癸酉夏。解歸。甲戌九月。以漢城庶尹。赴謝。移拜司憲府持平。陳疏乞遞。不許。時姜處士鶴年爲掌令。不至。上疏言事。其語犯。朝議大激。三司俱發。將論死。先生慨然銳爲救正。子弟恐及禍。諫止不聽。遂啓曰。臣不識鶴年爲何狀人。今以其疏語觀之。率意放言。殊欠委曲。雖山野樸愚不識事體。告君之辭。豈宜如是。至於伯夷,嚴延年事。尤有不當引者。恭惟聖上撥亂反正。彝倫復明。武王,霍光。所遭各異。非可擬於今日。而妄發至此。物議之峻斥宜也。然而原其本心。豈有他哉。不過受恩感激。唯思盡言。不知裁擇以至此耳。謂之沽名市直 。猶恐非其本情。而況無君不道。人臣之極罪。以此而爲其罪案。不以過乎。古之明王。不以言語罪人。臣伏覩殿下臨御以來。草野倨傲。悉加寬宥。今於鶴年。優示包容。旣下優批。又以必無他意爲敎。狂妄如彼。而聖德如此。瞻聆所及。莫不聳服。臣愚謂人臣之道。唯當將順至美。使四方後代。咸仰大聖人含弘之量。出於尋常萬萬可也。若不推究其實情。論以一切之法。則幺麽一鶴年。雖不足惜。而獨不爲聖世之累乎。因乞解歸。其後大臣。有上箚極論鶴年罪當殺。幷攻先生以爲阿黨。至有黨與日成 。主勢日孤之語。上批曰。予不欲以言語間妄發殺士。卿少弭忿嫉可也。蓋上意於先生言。有所感悟而然云。後諫院就先生啓辭中 。拈出率意二字。以爲非所宜言。請推治。會先生歿而止。乙亥正月。先生自商山入河隈故居。省先壟壽洞。道宣城。謁陶山廟 。還到榮川。忽得疾。十三日夕。奄至不淑。一郡人士。皆來赴哭。合親舊賻襚以斂之。遠近聞者無不驚悼嗟惜。相與弔曰。斯人至於斯。吾道何託焉。是年月日。葬善山府治東朴谷。會者數百人。後十八年壬辰正月。移葬軍威縣西於義谷亥坐巳向。前夫人權氏祔。先生爲人。謙沖渾涵。不見涯際。雅淳莊和。不露圭角。忿厲之氣。不形於色。機智之私。不萌於心。平居諄諄謹飭 。仁厚之氣藹然達於面目。望之知其爲有道君子也。至性孝友。事文忠。能致其悅。及喪。哀毀得疾。幾殆。葬祭。一惟遺訓是式。念二兄早歿。養其孤女。使有歸。敎其孤子。俾有立。愛之逾於己出。至於諸庶弟。恩愛靡間。均析田民。不以國典限之。自取其荒頓老癈者。故終身窮約而無怨色。處己待人。一以誠實。絶無纖毫虛假意。遇宗姻際鄕隣。疏戚上下。慰慶周旋。咸盡其宜。自始及終。無所悔望有彼此言。與朋友交。久而能敬。雖接卑幼。禮虔辭恭。詬詈之言。不施下賤。至於稱人之善。色愉神暢。若己有之。雅懷恬澹。視世間榮利泊如也。遭時椓喪。潔身肥遯。及際煕運。嘗一行應擧。嚴校理惺。爲京試官。慕先生大名。擢置魁試。課絶常等。先生慮入洛。而主司採名見錄。遂不赴省試。其惡進取而喜斂退如此。前後四典州邑。皆未滿秩賦歸。其爲政綜理微密。自田賦錢穀。至軍簿獄訟。各有條貫。靡有弛而不擧。決折嚴明。信在言前。或不待兩造。而覈其情僞。訟者愧悟請止。尤重於敦化源樹風敎。養育人才。未嘗不三致意焉。勵操淸苦。氷檗凜然。內外斬斬。人莫干以私。自中歲。寓尙之柴里。每官罷還。環堵蕭然。饘粥不繼。而先生安貧推分。衎然自樂。事有纖毫涉矜衒者。羞不忍爲。唯恐人以淸名歸己。自以故家世臣。戀君憂國。忠忱炳然。不以位卑身退而少懈。凡有除命。輒行曰世臣之義。不敢效山野偃蹇。然亦未嘗久於其職 。晩入憲臺。會權貴人欲艾國良。時議靡然。獨先生直之。辯遏堅懇。由是竟遭敲撼以歿。攷其平生。語默出處。悉合於古醇儒之矩度。幅尺甚嚴。一時淸名之士。莫得望焉。爲文章。不爲空言。唯以典實應用爲主。紆餘委曲。造理精到。李觀海見之。聳歎以爲不可及。先生以家禮未成書。雖有後賢附註。變禮無所裁訂。因集古今喪禮說。以補其未備。分門立條。使便檢閱而應卒遽。書旣成。欲更定而未果。今有草本。藏於家。蓋先生之學。以謙恭篤實爲本。而守之以靖確。出之以退讓。持之以積久。行之以正平。名已盛矣。而居之益遜。德已崇矣。而歉若無有。迨其季年。孚尹旁達。自閟而人知之。自卑而人尊之。不論賢愚貴賤長幼遠近。翕然尊而慕之。擧一世而望之。若祥鸞鸑鷟然。非君子之盛德。曷克臻是哉。先生已自趨庭之際。得聞入道次第 。雅不喜以學人之名高自標揭。益務韜晦。然其於操存體驗。毋自欺謹其獨之功。實有日進而不已者。故其孚驗之盛。至於如此 。夫豈偶爾者哉。文忠公上有以紹陶翁之嫡傳。下有以迪來裔於無窮。功施社稷。澤被生民。道崇位尊。愈自謙抑。而先生式纂厥緖。謙光彌彰。在易謙之九三。勞謙君子。有終吉。三陽剛得正。上下所歸。勞而不伐。有功而不德。厚之至也。語以其功下人者也。故係之象曰。勞謙君子。萬民服也。文忠以之。謙之初曰。謙謙君子。用涉大川吉。謂以柔德處謙下。謙而又謙。能如是者。君子也。故係之象曰。謙謙君子。卑以自牧。先生以之。傳所謂世濟其美。不隕其名者。殆先生之謂歟。前夫人權氏。忠定公橃曾孫女。生一男八女。男千之。今爲景陽丞。女長適監役金時敏。次府使申嵩耇。次進士李尙逸。次琴處謙。次金宗準 。次縣監鄭道應。次郭文溶。次李在寬。繼室以晉州河氏。生一男百之。後洗馬公安奇公者。文忠公之嫡孫也。記先生卒之月 。歷訪先公於安東府城東第。旣行數日。某夢至一官府。衆環立如堵墻。讙言鳳死。余遂直入見。有一巨鳥僵臥。高數丈。彩羽䙰褷然矣。覺而諗諸先公。先公色不怡久。是夕。先生訃至。先公哭之曰。仁人逝矣。異哉。徵諸小子矣。至今思之。宛然猶昨日焉。悲夫。旣以語安奇公。附書狀尾而歸之。謹狀。<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