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옥정이며, 역관 장현의 종질녀로만 알려져 있을 뿐,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아. 한때 그녀가 장렬왕후(인조의 계비)의 동생 조사석의 딸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는데, 그녀의 어머니와 조사석이 내연의 관계였다는 설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유를 막론하고, 장옥정은 조사석과 숙종의 종친인 동평군의 주선으로 궁녀가 되었으며, 장렬왕후의 시종으로 있다가 숙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다. 1686년 숙원(淑媛. 종4품)이 되고, 1688년 소의(昭儀. 정2품)로 승격되었으며, 이때 왕자 균(훗날의 경종)을 낳아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다.
숙종이 왕자 균을 세자로 책봉하려 할때 서인의 노, 소론 대신들은 왕비 인현왕후 민쎄의 나이가 많이 않다는 이유로 반대 상소를 올려 후일을 기다리자고 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이 말을 듣지 않고, 1689년 정월에 균을 세자에 책봉하고 장소의를 빈(嬪. 정1품)으로 승격시킨다.
기사환국 이후 같은 해 5월. 숙종은 인현왕후 민쎄를 폐위시키고, 희빈 장씨를 왕비에 책봉하려 하였다. 그러자 서두의 오두인, 박태보 등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참혹한 형벌을 받고 파직되었으며, 이후 조정은 남인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이 사건 이후 숙종은 민비를 폐위한 것을 후회하였는데, 1694년 소론의 김춘택, 한중혁 등이 이를 눈치채고 폐비 복위운동을 전개한다. 이에 남인의 영수 민암 등이 이 문제를 기회로 조정에 남아 있던 서인 세력을 모두 제거하려고 김춘택을 비롯, 수십명의 서인을 감옥에 가두는 일대 옥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숙종은 민비를 폐위한 것을 후회하던 중이라, 오히려 서인들을 옥사로 다스리던 민암을 파직한 후 사사시켰으며, 권다운, 목내선, 김덕원 등을 유배시키고 소론의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등을 등용했다. 그리고 중전으로 올랐던 장씨를 다시 빈으로 강등시키고 폐위되었던 민씨를 복원시켜 왕비에 앉혔는데, 이 사건을 "갑술옥사"라고 한다.
갑술옥사 이후 숙종은 사사시켰던 송시열, 김수항 등을 복작시켰고, 남인을 대거 정계에서 몰아냈다. 소론이 들어서고 남인이 물러날 때 희빈 장씨의 오빠 장희재가 희빈 장씨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 속에 폐비 민씨와 관련된 문구가 발견되어 논란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일부 신하들은 장희재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소론의 남구만, 유지완 등은 세자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그를 용서하자고 하여 이 사건은 무마되었다.
1701년 왕비로 복위되었던 민씨가 병으로 죽은 뒤 희빈 장씨가 자신의 거처인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설치하고 민비가 죽기를 기원한 것이 발각되었다. 숙종은 이 일에 관련된 희빈 장씨와 그녀의 오빠 장희재를 사사하고 궁인, 무녀 등도 함께 죽였다. 이 사건을 "무고의 옥"이라 한다.
이로써 궁녀에서 후궁생황을 거쳐 왕비에 오르기까지 했던 희빈 장씨는 수많은 풍문과 일화를 남긴 채 43세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숙종은 그녀의 처사에 분개한 나머지 이후로는 빈이 후비로 승격하는 일을 법으로 금지해버리기까지 했다.
희빈 장씨가 죽자 그녀를 지지하던 남구만, 최석정, 유상운 등의 소론 세력이 몰락하고 다시 노론이 득세하게 된다.
희빈 장씨의 소생으로는 경종과 옹주 하나가 있다. 무덤은 경기도 고양시 옹두동 서오릉에 있다.
* 대빈궁(大嬪宮)
대빈궁은 희빈 장씨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칠궁안에 있다.
1722년(경종 2)에 건립되었는데,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되는 동시에 대빈궁이 세워지면서 이곳에 신주가 봉안되었다.
건립 당시에는 지금의 낙원동에 해당하는 중부(中部) 경행방(慶幸坊)에 있었으나, 1870년(고종 7) 육상궁으로 옮겼다.
이어 1887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렸다가 1908년(순종 2) 다시 육상궁 안으로 옮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육상궁에는 6명의 후궁 신주만 봉안되어 있어 육궁(六宮)이라고 하다가 1929년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의 덕안궁(德安宮)을 옮겨오면서 지금과 같이 칠궁이라 하게 되었다.
목조건물로, 건축 기법은 칠궁의 다른 건물과 비슷하지만, 기둥이 모두 두리기둥으로 되어 있어 좀더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역사 평론가 이덕일씨의 장희빈 이야기
소녀 장옥정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숙부 장현(張炫)은 비록 중인이었지만 <<숙종실록>>에 "국중(國中)의 거부"로 기록될 정도로 부자였다. 그런데 서녀(庶女)였던 장옥정 자신은 종모법(從母法·자식의 신분은 어머니를 따르는 법)에 따라 천인이었다. 어머니 윤씨가 조사석 집안의 여종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돈을 주고 속환(贖還)받아 여종 신세는 벗어났지만 천인 딱지는 뗄 수 없었다. 양반가의 여종 출신으로 중인의 첩이 된 어머니 윤씨의 신산스런 삶이 자신의 미래였다.
장씨는 이런 신분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도 마다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그녀가 궁녀가 된 것은 다른 여성들처럼 호구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녀의 숙부 장현은 남인 계열 종친 복창군과 함께 유배된 적이 있을 정도로 정치색이 강한 인물이었고 사실상 남인 당인(黨人)이기도 했다. 장현이 장옥정을 입궁시킨 것은 남인 정권획득의 일환이었다. 남인의 후원으로 자의대비전 나인(內人)이 된 옥정은 대비의 후원으로 그리 어렵지 않게 숙종을 만날 수 있었다.
열 한 살 때 얻은 동갑 부인 인경왕후 김씨를 잃어 외로움에 젖은 스무 살(1680년) 청년 숙종이 실록에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고 기록된 미녀 옥정에게 빠져든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옥정은 후궁에 봉해지기도 전에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 김씨에게 강제로 쫓겨났다. 명성왕후는 옥정이 남인의 간자(間者)라는 서인들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옥정은 이듬해(1681년) 숙종과 서인 영수 민유중 딸의 국혼 소식을 궐밖에서 들어야 했다.
그녀의 하염없는 기다림은 2년 후인 숙종 9년(1683) 명성왕후 김씨가 41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끝났다. 복상 기간이 끝나자마자 입궁한 그녀를 숙종은 내명부 종4품 숙원에 봉했다. 정식으로 후궁이 된 옥정은 남인의 계획대로 인현왕후 민씨와 대결했다. 서인들이 편찬한 <<숙종실록>>은 곳곳에서 인현왕후의 부덕(婦德)과 장씨의 패덕(悖德)을 비교하고 있지만 민씨가 장씨의 종아리를 친 사실이 기록돼 있을 정도로 민씨의 격렬한 질투가 행간에 남아있다. 숙종은 명문가 출신 민씨가 아니라 여종의 딸을 더 총애했다. 후궁 장씨에 대한 서인들의 증오는 증폭됐다. 서인들은 숙종 13년 6월에 발생한 수해를 장씨 탓으로 돌리고, 조사석이 장씨 모친 윤씨의 애인이기 때문에 우의정에 제수됐다는 말까지 지어냈다.
그러나 장씨는 서인들의 이런 저주를 비웃기라도 하듯 숙종 14년 10월 아들을 낳았다. 그러자 이 아이가 왕이 될 지 모른다고 판단한 서인들의 반응은 더욱 격렬해졌다. 서인 소속의 사헌부 관리들은 장희빈의 산후 조리를 돕기 위해 궁중에 들어오는 모친 윤씨의 옥교(屋轎:지붕이 있는 가마)를 빼앗고 꾸짖었다. 장씨는 이를 갓난 왕자에 대한 공격이자 왕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판단했다. 숙종은 서인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갓난 왕자를 원자로 정해, 자신의 후사임을 내외에 천명했다. 그런데 이미 종묘 고묘까지 마친 이 사안에 대해 서인 영수 송시열이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로써 숙종과 서인 사이에는 화해할 수 없는 기류가 흘렀다. 숙종은 재위 15년 서인들을 내쫓고 남인들을 등용하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을 단행했다. 나아가 서인 계열 왕비 민씨까지 쫓아냈다.
숙종 16년(1690) 10월 여종의 딸인 장씨는 드디어 왕비 자리에 올랐다. 서인 명문거족들과 맞서 거둔 승리였다. 서인 영수들은 불귀의 객이 됐다. 남인들이 장악한 조정에서 원자는 당연히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적으로 돌린 상대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쫓아낸 적이 있는 서인이었다. 송시열이 사사 당하던 날 서울의 남문 밖 우수대(禹壽臺)에는 천여 명이 넘는 서인 사대부들이 모여 눈물을 흘렸는데, 이 눈물은 장씨와 남인에게 향하는 것이었다.
숙종 19년 무렵 궁녀 최씨가 숙종의 승은(承恩:임금을 밤에 모심)을 입은 것을 계기로 서인들은 정권탈환에 나섰다. 최씨 역시 장씨처럼 미천한 신분이었는데, 궐 밖의 폐비 민씨가 그녀를 서인으로 포섭했다. 최씨가 숙종 20년 연잉군(延▩君:훗날의 영조)을 낳자 서인들은 본격적인 행동을 개시했다. 폐비 민씨와 귀인 김씨, 숙안공주·숙명공주 등 명문거족들은 막대한 정치자금을 제공했다. 숙종 20년(1694) 3월 말 서인들의 이런 움직임을 간파한 남인들이 서인들을 역모로 고변하자 서인들도 남인들을 역모로 맞고변했다. 숙종은 4월 1일 비망기를 내려 남인들을 전격적으로 축출하고 서인들을 등용했다. 이것이 갑술환국(甲戌換局)이었는데 이후 기사환국과 똑같은 상황이 전개되었다. 숙종은 왕비 장씨를 별당으로 내쫓고 폐비 민씨를 불러들였다. 남인들이 쫓겨난 조정에서 후궁으로 격하된 장씨가 기댈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숙종 27년 인현왕후가 3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장씨는 재기를 꿈꿨다. 서인들은 장씨의 목숨을 끊어놓지 않으면 언제 기사환국과 같은 일이 재발할지 모른다고 판단했다. 서인들은 숙빈 최씨를 시켜 "민비의 죽음은 장희빈의 저주 때문"이라고 밀고하게 했다. 숙종은 장씨를 희생양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그는 장씨가 중전을 한번도 문병하지 않고,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설치해 저주했다고 비난하면서 자결을 명령했다.
14세의 세자가 대신들에게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노론 좌의정 이세백은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세자를 외면했다. 여종의 딸로 신분제에 맞섰던 장씨는 당쟁을 이용해 왕비까지 올랐으나 역시 당쟁 때문에 비참하게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다. 남은 것은 증오였고 그에 따른 보복의 비극뿐이었다.
* 장희빈의 아들 경종 - 재위 4년만에 숨져 독살설
장희빈 소생인 세자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서인들은 이후 세자를 제거하려는 노론과 보호하려는 소론으로 나뉘었다. 최씨 소생의 연잉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던 숙종은 재위 말년 노론 영수 이이명과 세자 교체를 논의했다. 하지만 소론의 반발 때문에 실패하고 세자가 끝내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경종이다.
노론은 즉위 초부터 경종을 윽박질러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케 하고, 나아가 왕세제 대리청정을 밀어붙이다가 소론 강경파 김일경 등에게 역습을 당해 정권을 빼앗겼다. 그 후 노론이 경종을 살해하려 했다는 고변이 이어지면서 많은 핵심당인들이 사형 당했다.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노론이 독살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연잉군이 임금(영조)에 즉위한 지 4년 후(1728) 이인좌 등은 경종의 복수를 다짐하며 군사를 일으키기도 했다. 정치 보복이 보복을 낳는 악순환의 계속이었다.
개인적인 견해
우리가 알고 있는 장희빈에 관한 사실은... 많은 부분이 왜곡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극의 경우, 현존하는 역사서에 기초를 한다. 장희빈에 관한 역사서는 <<속종실록>>일 것인데, 내가 이러한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는 증거는, <<숙종실록>>은 장희빈과는 적대적인 위치에 놓여있던 인현왕후를 옹호했던 서인들에 의해 편찬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아주 없는 말을 지어내지는 않았을 것이나, 모르는 일이 아니겠는가...
만일, <<숙종실록>>을 남인들이 편찬하였다면, 장희빈이 희대의 악녀로 꼽힐 수 있는 가에 대한 의문점을 충분히 남길 수 있는 것이라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인간은 절대악인이나 절대선인은 없다고 생각한다. 시대상황에 따라 인간의 선악이 정해지는 것이 아닐까?
장희빈은 대단한 여인임에는 틀림 없는 사실이다. 천인출신에서 한때는 국모의 자리에 올랐을 정도이니 말이다.
몇백년 만에 나타나는 장씨 성을 가진 여인에 의해 정치가 혼란해졌다는 누군가의 우스개소리가 생각난다. 연산군 때의 장녹수, 숙종 때의 장희빈... 큰손 장영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