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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東書院
김정숙
소재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
(보물 제350호)
도동서원은 원래 조선 五賢 중 한 분이신 寒暄堂 金宏弼(1454~150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568년(선조 1) 유림에서 현풍현 비슬산 기슭에 사우를 건립하여 향사를 받들어 오다가 1573년 雙溪書院으로 賜額되었으나,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
그 후 1605년(선조 38)에 지금의 자리에 사우를 재건하고 당시 洞名을 따서 甫老洞書院이라 불리어지다가, 2년 뒤인 1607년(선조 40) 에 도학의 道가 東來하다라는 의미인 도동서원으로 賜額되었으며, 이 때부터 洞名도 道洞里로 개명되었다.
이 곳 도동서원은 우리나라 5대 서원 중의 하나이며, 조선시대 서원이 성행할 때 전국 680여 개의 院祠가 있었는데,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전국 47개소 주요원사를 제외한 모든 원사가 훼철되었으나 이 곳 도동서원은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주요 원사 중 하나이다. 서원 건축이 가져야 할 건축적 규범을 갖추고 있는 조선 중기를 대표할 수 있는 서원으로 평가된다.
도동서원의 두드러진 특징은 賜額을 두 번 받은 점과 북향이라는 점, 석조물이 많이 있다는 점 그리고 주요 건물의 중심축을 남북일직선 상에 배열하고 좁은 폭으로 된 계단도 모두 중심축 상에 놓고 있어서 중심축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 서원은 산지형서원의 전형적인 배치형태로, 기능에 따라 3개의 공간 즉 진입공간, 강학공간, 제향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진입공간에는 서원의 대문격인 外三門과 水月樓, 강학공간에는 喚主門을 경계로하여 講堂(中正堂), 東齋(居仁齋), 西齋(居義齋), 藏板閣 등이 있으며, 제향공간에는 內三門, 祠堂 등이 있다. 그 밖에 典祀廳과 蒸飯所, 遺物展示館, 神道碑 등이 있다.
강당과 사당 담장이 1963년 1월 21일에 일괄로 보물 제 350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강학공간 출입문인 환주문은 그 구성이 특이하며 담장은 아름다운 토담으로 전국에서 최초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 은행나무
서원 앞에는 도동서원으로 사액된 기념으로 寒岡 鄭逑(1543~1620)가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400여 년이 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잔뜩 드리우고 있는데, 서원의 역사를 말해 주는 나무라고 할 수 있다. 향교나 서원 앞에는 은행나무 한두 그루가 심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칠 때 은행나무 아래 행단에서 가르쳤다는 점에서 연유하여 은행나무는 학문의 상징, 은행나무가 서 있는 안 쪽은 학문의 장소를 상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이 나무는 하늘로 올라가는 기운이 강해서 선비의 기상을 상징하며, 유생들의 학문도 은행나무 열매처럼 맺었으면 하는 소망 때문에 심는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세월의 무게가 힘에 겨운 지 밑으로 쳐져서 콘크리트기둥(1977년 설치)에 의지하고 있다.
▷ 神道碑
도동서원 동쪽에 있는 이 비는 1626(인조 4)에 사우당 김대진이 후손과 사림 및 경상감사 이민구의 협력을 받아 세웠는데, 旅軒 張顯光이 짓고 사헌부감찰 裵弘祐가 썼다. 장현광이 지은 신도비에는 “선생은 비록 높은 지위를 얻어서 도를 행하지는 못했고, 미처 책을 저술하여 가르침을 남기지는 못했으나 능히 한 세상 유림의 으뜸 스승이 되었고 죽음으로써 도학의 기치를 세웠다”고 헌사되어 있다.
수월루 앞 국역신도비는 1980년에 건립된 것이다.
▶ 진입공간
건물의 정문격인 외삼문과 누각으로 된 건물.
▷ 외삼문과 수월루
석축 위에 나래를 편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으로 된 2층 건물이다. 1855년에 창건하였으나 1888년 화재로 소실되고 지금의 건물은 1973년에 복원되었다.
건물의 하층은 정문격인 외삼문인데, 외삼문 출입 시에는 유교예법에 따라 南入北出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도동서원의 경우 북향이기 때문에 南入北出의 원칙을 지켜야 하지만 남향인
경우에는 동입서출해야 함.
중앙의 문은 신이나 임금님만 출입이 가능하다. 2층 누각은 일종의 여유공간이다. 유생들이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면서 시를 짓거나 시문과 정치, 사회를 토론하던 곳으로, 유유히 흘러가는 낙동강과 더불어 펼쳐지는 아름다운 자연을 즐길 수 있다. ‘수월루’라는 현판명칭은 강물 위에 드리워진 달을 연상케 하는데, 후손 樂山 金兌株의 글씨이다.
환주문 올라가는 계단 양 옆에 연꽃 일반적으로 연꽃은 불교를 상징하는 꽃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다양한 상징성을 지닌다. 조선시대에는 ‘군자의 청렴’을 상징하며 세속적인 상징은 길상적인 의미 즉 다산(다남)을 상징함. 그래서 연꽃모양을 조각해 놓았다고 본다.
모양과 태극 중국 철학에서 우주 만물의 근원이 되는 실체.
모양의 아름다운 석조물이 있는데, 아쉽게도 태극모양의 일부분이 훼손되어 태극이 아닌 동물상을 연상케 한다. 문경 봉암사 대웅보전 올라가는 계단에 이와 유사한 모양의 조석물이 있다.
▷ 喚主門
강학공간으로 들어가는 아름다운 한 칸의 작은 일각문인데 지붕은 사모지붕으로 지붕 꼭대기에는 절병통이 얹혀 있다. 이는 빗물의 누수를 막기 위해서 얹어 놓았다.
이 문은 공간 구획상 진입공간과 강학공간을 구별하는 것으로, 환주문이란 명칭은 ‘주인을 부르는 문’이라고 해석되지만 내 마음의 주인, 즉 주인의식을 가지고 문을 들어서라는 뜻으로 붙인 것 같다. 다른 문에 비해서 작게 만들었는데, 들어설 때 고개를 숙이고 예를 행하고 들어서라고 문을 작게 만들었다고 보여진다. 문 밑에는 꽃모양의 버팀돌이 설치되어 있는데, 버팀돌로 보기에는 너무 크고 아름답다. 이 돌의 용도는 버팀돌이지만 문을 들어 설 때 옷매무새도 단정하게 하고 조심해서 들어서라는 의미도 담겨져 있다고 본다.
▶ 강학공간
강당인 중정당과 동재인 거인재와 서재인 거의재, 장판각 등으로 이루어진 공간으로 서원의 중심영역이다.
▷ 講堂(中正堂)
원장과 선생이 기거하면서 강학 및 강의하던 공간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 반 주심포기둥에 맞배지붕으로 된 건물이다. 가운데 3칸은 대청이며 그 좌우로 온돌방을 들이고 온돌방 앞에 마루를 놓아 대청과 연결시켰다. 덤벙주초에 굵직한 민흘림 두리기둥으로 되어 있는데, 이 기둥은 한강이 안동부사로 있을 때 안동에서 낙동강으로 도동까지 운반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강당기둥 위의 上紙는 首位書院임을 뜻한다. 지붕 끝은 겹처마로 되어 있고 양 측면에는 미닫이 판문 4개가 설치되어 있다. 이는 박공에 풍판이 달려있지만 비바람을 막아주는 역할도 하고, 강당건물이 북향이기 때문에 여름에는 강한 햇볕을 막고 겨울에는 찬기운을 막기 위해서 설치한 것으로 보여 진다. 이는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강당 내 중앙 벽 위에 설치된 ‘道東書院’현판은 사액현판으로 ‘萬曆 三十五年 二月 日 宣賜’라는 款識가 있다. 현판글씨는 慕亭 裵大維가 썼다. ‘中正堂’현판은 芹谷 李觀徵의 글씨이며, 전면의 ‘道東書院’현판은 退溪의 글씨를 집자해서 각한 것이다. 그 밖에 임금님의 傳敎, 白鹿洞規, 諸執事分定記, 道洞書院院規, 國忌 版이 강당 마루벽에 걸려 있다.
강당의 마루 앞 기단 중앙에 설치된 庭燎臺는 긴 돌기둥과 사각형의 상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료대는 상석 위에 솔가지나 기름통을 올려놓고 불을 밝히는 일종의 조명대이다. 보통 정료대는 뜰에 설치하며 서원에서는 사당 앞에 설치해서 야간에 제례를 지낼 때 불을 밝힌다. 도동서원처럼 강당 앞 기단 위에 설치한 경우는 드문데, 이는 기단이 높기 때문에 편의상 기단 위에 설치해서 야간에 강당에서 행사할 때 불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도동서원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부분은 기단이다. 정면의 길이가 17m, 높이가 150cm 정도이며, 측면은 대지의 상승비례에 따라 점차 낮아진다. 다듬은 돌 허튼층쌓기로 2중 갑석으로 마무리하였다. 면석은 다양한 크기와 각으로 된 돌을 짜 맞추어 쌓았는데, 4~12개의 각으로 맞물려 있으며, 자연스러운 여러 가지 색으로 이루어져 있어 마치 천연염색을 한 천으로 조각보를 곱게 기워서 펼쳐 놓은 듯이 아름답다. 40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오늘날까지 흐트러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당시 우리 선조들의 정성과 기술을 엿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갑석 바로 아래에 네 개의 龍頭가 설치되어 있으며, 좌우면석에 꽃송이와 다람쥐 모양의 조각물이 있다. 좌측에는 올라가는 모양이고 우측에는 내려가는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계단을 오르고 내려가는 방향을 표시한 것으로 본다. 즉 오른쪽으로 올라가서 내려갈 때도 오른쪽으로 내려가라는 표시로 보는데, 이는 내․외삼문 출입할 때와 같다. 다른 하나는 細虎로 조선왕릉의 망주석에 이와 유사한 모양이 새겨져 있는데, 조선시대에 중요시했던 左上右下의 원칙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환주문에서 강당에 이르는 마당 가운데 한 사람이 지나갈만한 납작한 돌길을 내어 끝에는 낮은 축대를 횡으로 쌓아 강당이 들어선 지대와 동․서 양재의 지대를 구별하였다. 돌길과 만나는 축대의 중앙에는 거북모양의 조석물이 있는데, 눈은 부릅뜨고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어 제법 사나워 보인다. 이는 유생들에게 원장님과 선생님이 기거하는 강당 한가운데로 다니지 말라는 상징으로 보고, 풍수지리적인 개념으로 보면 북쪽에는 玄武(後玄武)이기 때문에 거북모양을 조각해서 설치한 것으로 보여 진다.
▷ 東齋(居仁齋)와 西齋(居義齋)
유생(동재:양반자제 또는 선배, 서재:비양반자제 또는 후배)들이 起居하면서 공부하던 공간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으로 된 건물이다. 2칸은 통 칸으로 된 온돌방이고 1칸은 마루방으로 되어 있다.
대부분의 향교나 서원의 동․서재는 방위중심으로 동쪽에 있는 재를 ‘동재’, 서쪽에 있는 재를 ‘서재’라고 하는데, 도동서원에서는 서쪽에 있는 재를 ‘동재’ 동쪽에 있는 재를 ‘서재’라고 한다. 이것은 인간중심으로 재의 명칭을 붙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재는 거인재, 서재를 거의재라고 하는데, 이는 유교적인 명칭이라고 본다. 공자가 주장한 유교의 도덕이념인 ‘仁, 義, 禮, 智, 信’을 방위로 보면 인은 동, 의는 서(예는 남, 지는 북이고 신은 중앙)인데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라 보여 진다.
동․서재의 건물형식이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동재의 마루방 기둥은 원기둥이고, 서재는 마루방 기둥이 각기둥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중국 秦나라 때의 《呂氏春秋傳》에 나오는 ‘天圓地方’이라는 말에 緣由하여 동재와 서재에서 기거하는 유생들의 신분차이를 나타내려고 한 것 같다. 그리고 동재의 경우 마루방 위에 도리와 장혀를 받쳐 주는 창방과 소로가 있으며, 여름에 시원하도록 뒷 쪽에 판문이 설치되어 있고, 북쪽 벽면은 판으로 되어 있다. 온돌방 앞에는 쪽마루도 설치되어 있으나 서재는 민도리형식이며 판문도 없이 벽으로 되어 있다. 도동서원은 이와 같이 유생들이 기거하는 집까지 차별을 두고 있다.
▷ 藏板閣
강당 동쪽에 한 단 낮은 대지를 조성하여 정면 2칸 측면 1칸의 작은 건물로 한훤당의 景賢錄 목판본을 보관하던 곳이다. 지금은 이 목판본을 유물전시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 牲壇
강당 서쪽에 사각형의 돌기둥 위에 정사각형의 상석을 놓은 것이다. 생단은 犧牲 천지신명, 廟社에 제사 지낼 때 제물로 바치는 산 짐승. 주로 소, 양, 돼지 따위를 바친다.(서원의 경우 주로 돼지를 쓴다.)
을 품평하는 단을 말한다. 도동서원에서는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에 향사를 지내는데 향사지내기 전 날 산 돼지 한 마리를 생단에 얹어 놓고 생단 서쪽에서 선축관이 희생이 정결한가를 “腯”하고 물으면 헌관이 좋으면 “充”하고 그렇지 않으면 “不”이라고 하는데, “충”하면 의식이 끝나고 제수로 준비하게 된다. 현존하는 생단 가운데 규모는 크지 않지만 정교하고 아름답다.
▶ 제향공간
위계질서에 따라 높고 신성한 곳에 배치하였다.
▷ 祠堂
사당 앞에는 내삼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삼문 좌우에 담장을 설치하여 강학공간과 제향공간을 구별하고 있다. 내삼문의 중앙의 문은 死者가 출입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어 神門이라고도 한다.
사당은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 맞배지붕으로 된 건물이다. 기단은 가구식기단으로 다듬은 면석을 한 줄로 세우고 그 위에 판석을 덮었다. 정면에는 칸마다 밖여닫이 판문으로 되어 있으며 내부는 통 칸으로 트였다.
主壁에는 한훤당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좌측에는 한강의 위패가 1678년(숙종 4)에 추배되어 있다.
동․서벽에는 재건 당시에 그린 조선 중기 걸작이라고 하는 작자 미상의 벽화 2점이 있다. 동벽에는 한훤당의 자연을 노래한 시 <船上>에 나오는 “江心月一舟”를 화제로 쓴 벽화로, 하늘에는 보름달이 떠 있고 강 가운데 배 한 척 그리고 배 위엔 사람이 노를 젓고 있는 그림이고, 서벽에는 그의 시 <路傍松>에 나오는 “一老蒼髥任路塵”과 뜻이 일맥상통하는 “雪路長松”을 화제로 쓴 벽화이데, 길 가에 홀로 서 있는 늙은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 이는 선생의 도학정신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사당 앞마당에는 석등이 설치되어 있는데 화사석은 분실되고 옥개석과 사각석주만 남아 있다. 이와 같이 사당 앞에 석등이 설치된 곳은 흔치 않다. 석등은 정료대와 조명방법이 달라 등잔이나 호롱불을 넣어 어둠을 밝혔다고 한다.
사당의 동쪽 담장에는 次가 설치되어 있다. 담장에 사각형으로 구멍을 뚫어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만든 것으로, 그 속에 祝文을 넣고 태우는 곳인데 보기드문 특수한 장치이다. 다른 서원에서는 감이나 사당의 기단 한 모퉁이에서 축문을 태운다.
도동서원에서는 일년에 두 번 춘추에 향사를 지내고 있는데, 음력 2월과 8월 中丁日에 지내고 있다.
한훤당을 입향한 현존한 서원은 求智 道東書院, 順天 玉川書院, 羅洲 景賢書院, 和順 海望書院, 尙州 道南書院이다.
▷ 蒸飯所
사당의 서쪽에 있는 독립된 공간으로, 祭器庫로 쓰이기도 하지만 본래는 享祀 때에 메를 짓고 기물을 보관 준비하는 곳이다. 사당 좌측 담장에 협문을 내어 출입하도록 되어 있으며 건물의 사방에 좁은 공간을 두고 있다.
사당의 내삼문 앞 계단 입구에는 태극문양과 하도 중국 伏羲氏 때에 황하강에서 龍馬가 지고 나왔다는 쉰다섯 점으로 된 그림. 동서남북중 앙으로 일정한 수로 나누어 배열되어 있으며, 洛書와 함께 주역의 기본이치가 되었다.
(낙서: 중국 하나라의 禹王이 홍수를 다스릴 때에 낙수강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쓰여 있 었다는 마흔 다섯 개의 점으로 된 아홉 개의 무늬. 팔괘와 洪範九疇가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라 한다.
에 나오는 우주를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상서화로 보이는 꽃봉오리도 있다. 내삼문 신문 바로 앞에는 눈을 부릅뜨고 이를 드러낸 주작모양의 석조물이 있는데, 이는 神門으로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면 안된다는 상징성이 내포된 듯하며, 풍수적으로 보면 남쪽엔 주작이기 때문에 이를 설치해 둔 것으로 보인다.
▷ 담장
도동서원의 담장은 전국에서 최초로 보물(제 350호)로 지정된 것이다. 진흙을 섞어가며 막돌을 몇 줄 쌓아올린 다음 진흙 한 겹과 암기와 한 줄씩 5번 정도 올리고 약 1m 간격으로 엇갈리게 수막새를 끼워 넣었으며, 담장의 지붕은 지층의 높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처리하였다. 담장에 암기와와 수막새를 사용하여 음양의 조화를 통해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장식효과를 최대한 살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와 같이 돌과 흙, 기와를 골고루 사용한 견고한 축조기법과 지형에 따라 바뀌는 높낮이와 면의 변화 그리고 담장지붕이 그리는 모습은 우리나라 건축에서나 볼 수 있는 기법이다. 특히 7~8월에 피는 배롱나무꽃은 내삼문 동쪽 담장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해준다.
▶ 配享人物
▷ 寒暄堂 金宏弼 (1454~1504)
서울 정릉동에서 태어났으며, 字는 大猷, 號는 蓑翁, 寒暄堂, 시호는 文敬 본관은 瑞興이다, 고려후기의 士族인 증조부 中坤이 수령과 청환을 역임하다가 아내의 고향인 현풍현에 이주하게 되면서 그 곳을 근거지로 삼게 되었다.
1472년(성종 3)에 경남 합천군 가야면 개천바위 위에 집(한훤당)을 짓고 선비들과 사귀면서 학문을 닦았다. 2년 뒤 그는 佔畢齋 金宗直(1431~1492)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을 배웠는데, 이를 계기로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를 ‘소학동자’라 일컬었다. 이 후 평생토록 소학을 篤信하고 모든 처신을 그것에 따라 행하여 ‘소학의 化身’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30세 이후에야 四書三經 등 여러 책을 섭렵하였다.
<소학>에 입각한 그의 處身, 服喪 , 率家 자세는 당시 사대부들의 귀감이 되었으며, ‘寒暄堂의 家範’이라 하여 숭상되었다.
그는 1480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게 되었으며, 이 때에 圓覺寺 승려들의 불법을 포함한 斥佛과 유학의 진흥에 관한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李克均에 의해 理學에 밝고 지조가 굳다는 명목으로 遺逸之士로 천거되어 남부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생활이 시작되었다. 이어서 典牲署參奉, 軍資監主簿와 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으며, 1497년에는 刑曹佐郞이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杖 80대와 遠方付處의 형을 받고 평안도 회천에 유배되었다. 한훤당은 유배지에서도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힘썼는데, 희천에서는 조광조에게 학문을 전수하여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500년(연산군 6)에 전라도 순천으로 이배되었으며,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戊午黨人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중종반정 뒤 연산군 때에 피화한 인물들의 신원이 이루어짐에 따라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자손은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 뒤 사림파의 개혁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구축과 인재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됨에 따라 그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었다. 그 결과 1517년(중종 12) 鄭光弼․申用漑․金詮 등의 상소와 홍문관부제학 金淨 등의 문묘종사 상소 및 관학 유생들의 상소로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 겸 領經筵監春秋館事에 追贈되었으며, 춘추로 家廟에 官에서 致祭할 것을 결정하였다. 1575년(선조 8) 文敬으로 賜諡되고 1610년(광해 2)에 관학 및 8도 유생들의 상소로 한훤당을 포함한 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이 五賢으로 문묘에 從祀되었다.
학문성향은 鄭夢周 · 吉再․金叔滋․金宗直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통을 계승하였으며, 治人보다는 修己에 중점을 두었다. 현실에 대응하는 의식에 있어서도 그 성향이 드러나 적극적, 능동적이지 못하였지만 이로 인하여 20여 명에 달하는 그의 문인들은 두 차례의 사화에도 크게 타격을 받지 않아 후일 개혁정치를 주도한 기호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였다. 그의 문인으로는 조광조 · 이장곤 · 김안국․김정국․정붕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景賢錄》․《寒暄堂集》․《家範》등이 있다.
▷ 한훤당 시
<船上>
船如天上坐 배는 하늘 위에 앉은 듯
魚似鏡中遊 물고기는 거울 속에 노는 듯
飮罷携琴去 술 마신 뒤 거문고 끼고 돌아가
江心月一舟 강 복판 달빛이 가득 찼네
<路傍松>
一老蒼髥任路塵 한 그루 늙은 소나무 길가에 서 있어
勞勞迎送往來賓 괴로이도 오가는 길손 맞고 보내네
歲寒與汝同心事 찬겨울에 너와 같이 변하지 않는 마음
經過人中見幾人 지나가는 사람 중에 몇이나 보았을고
▷ 寒岡 鄭逑(1543~1620)
조선전기 문신, 학자. 자는 道可, 호는 寒岡, 본관은 청주, 대장군 毅의 후손으로, 復齋 摠의 6대 손이며, 思中의 셋째 아들이다. 1573년(선조 6)에 조정에서 禮賓侍參奉으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고 이로부터 7년 동안 建元陵參奉, 義興. 三嘉. 知禮 등의 현감 발령이 있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고 창평산 선영 곁에 집을 지어 寒岡精舍라 이름하고 거기에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다. 1580년(선조 13) 38세에 다시 창녕현감으로 발령되어 비로소 부임. 1년 반 동안 지방행정에 종사하여 선정으로 生祠堂이 세워졌다. 그러나 사헌부지평으로 발령됨을 기회로 벼슬을 버리고 매화 100그루를 심어 백매원이라 불렀다.
小所山前小小家 작고 작은 산 앞에 조그만 집을 지어
滿園梅菊逐年加 뜰 가득 매화·국화 해마다 늘어나네
更敎雲水粧如畵 구름과 물을 더하여 그림 같은 자연속
擧世生涯我最奢 이 세상에 내 생애 가장 사치스럽네
이 시는 한강이 백매원을 두고 읊은 것으로 세속의 부귀영화를 등진 대신, 자연미를 마음껏 누리는 자기의 생활을 세상에서 가장 사치스럽다고 노래한 것이다.
그 뒤에 외직으로 동복, 함안, 통천 등 고을살이를 거쳐 강릉부사, 강원감사, 성천부사, 충주목사, 안동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내직으로 교정청, 교정랑, 동부승지, 좌승지, 형조참판 등을 거쳐 광해군 초에 대사헌으로 특진되었으나 굳이 사퇴하고 나왔다. 그의 관직경력을 보면 내직은 항상 사퇴를 하였으나 외직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임하였다. 그의 만년은 광해군이 형제(임해군, 영창대군)를 죽이고 모후를 폐하는 등 소동이 있을 때 여러 번 상소를 올렸으나 이루지 못했고, 北人政權의 횡포 밑에 여러 차례 중상과 모함을 입기도 하여 은퇴지 武屹(금릉군 증산면)에서 다시 蘆谷으로, 또 다시 泗濱精舍로 이주하여 78세를 일기를 숭고한 일생을 마쳤다. 문집에 《한강집》이 있고, 저서가 많았다고 전하나 1614년 집이 불타 다 없어지고 지금은 《심경발휘》, 《聖賢風》, 《太極問辨》, 《臥龍誌》, 《歷代紀年》, 《冠儀》, 《婚儀》, 《葬儀》, 《毅儀》, 《羹墻錄》, 《景賢續錄》등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