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산강과 함께 흘러온 역사
역사를 보듬어 영일만 푸른 바다로
흘러가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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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와 경주시의 접경에
형산(兄山)과 제산(弟山)이 있어 형산강이라
부른다
(위의 첫번째사진에서 강의 오른쪽 산이 형산이고
왼쪽에 작게 보이는 산이 제산이다)
형산강은 경주시 서면 도리 인내산(513m) 동쪽 계곡에서 발원해 대천(大川)이라 불리며
남동쪽으로 흐르다가
울산광역시 두서면에서 경주시 내남면을 지나 북류하는 복안천(伏安川)과 합류한 뒤, 유로를
북쪽으로 바꾸어 흐르면서 남천(南川)·소현천(小見川)·신당천(神堂川)과 차례로 합친다.
안강읍에 이르러 남류하는 기계천(杞溪川)과 합친 뒤 북동쪽으로 유로를 바꾸어 동해의
영일만으로 흘러드는 길이 63.9km, 유역면적 1167㎢의 하천으로 우리 나라(휴전선 이남) 10대 하천 중 하나다.
강은 상류에서부터 경주평야, 안강평야, 포항평야를 만들었는데,
경주평야는 형산강의 여러 지류 중 유역면적과 유량이 많은 대천, 남천, 북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발달한 선상지로 홍수의 피해가 적고 경작이 용이하기 때문에 고대 국가 형성에 유리한 지형이다.
안강평야는 본류에 기계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형성되었으며, 하류에
형산제산지협(兄山第山地峽)이 있으므로 폭우가 내리면 물이 잘 빠져나가지 못해 안강일대를 물바다로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제산쪽을 더 깎아내어
강폭을 넓히려는 계획도 하였으나 실현을 보지 못하고 있다.
또, 포항평야는 형산강이 운반한 퇴적물과 영일만 북쪽에서 운반된 퇴적물이 복합적으로
퇴적되어 형성된 해안충적평야로 염해의 우려가 있었고 해안에는 갈대가 우거진 습지와 바람이 심하게 부는 모래사장이 분포한 것으로 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원래는 하나로 된 산이었다.
신라의 김부 대왕( 金傅大王 )이 죽은 후 하늘에 올라 용이되어 꼬리로 산을 치니 호수의 물이 빠지고 안강 일대의 늪은 옥토로 변했다고
한다.
신석기 시대 이전부터 형산강 유역에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본격적인
유물이 발굴되는 것은 청동기 시대부터다.
영남 지역의 청동기 문화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형산강 유역은 낙동강 문화권과는
교류는 있었으나 서로 구별되는 성격을 가지며 출토 유물을 살펴보면 남부 해안지대 보다는 한강 및 대동강 유역의 중부지방, 기원후에는 한군현과
교류가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입실리, 구정동, 안강 등지에서 후기 청동기가 많이 발굴되었으며 경주 내남면 상신리,
경주 석장동 금장대, 포항 흥해읍 칠포리 등에서는 암각화가 발견되기도 했다.
형산강은 고대 신라를 잉태함으로써 역사의 전면에
부각되었다.
형산강은 신라의 건국 설화에부터
등장한다.
서라벌을 흐르는 형산강의 지류 중에 알천이 있는데, 이 알천에서 알에서 태어난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를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났다는 설화가 있다.
또, 박혁거세의 부인이 되는 알영 부인은 계룡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는데 입술에 닭 부리 같은
것이 붙어 있어서 알천에 목욕을 시켰더니 부리가 떨어져 나가고 미인이 되었다는 설화도 있다.
신라의 설화 중에는 나정 우물가의 박혁거세 탄생 설화를 비롯하여 유난히 우물과 관련된 것이
많은데, 이것은 경주 평야가 선상지인 것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형산강은 신라의 왕궁과 사찰, 그리고 신분별 주택지구를 구분하고 식수를 공급하는 역할을
했으며 권력 싸움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진흥왕때 화랑의 원류인 원화를선발 조직하였으나 원화 남모와 준정이 서로 시기하여 준정이
남모를 죽여 몰래 묻은 곳도 형산강(알천)이었고, 37대 선덕왕(선덕여왕이 아님-선덕여왕은 27대임) 사후에 생긴 김경신과 김주원의 왕위 분쟁도
형산강의 범람에서 시작했다.
삼국사기에 "알천에서 열병(閱兵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병의 연병장도 여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랑 사다함이 전쟁에서 세운 공으로 토지를 하사 받을 때 비옥한 땅을 사양하고 자진해서
받은 불모의 땅이 알천가의 어느 곳이었다.
또, 원효가 요석공주를 찾아 갈 때 일부러 다리에서 떨어져 옷을 적신 곳도
형산강(남천-문천의 유교)이었다.
충신 박제상이 고구려에서 돌아와서 집에 들리지도 못하고 내물왕의 아들 미해를 구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떠나자 박제상의 부인이 모래밭에 드러누워 대성통곡을 하였다는 벌지지도 형산강(문천)이다
형산강은 신라 시조 탄생부터 신라 하대 귀족들의 권력투쟁과 방탕한 생활, 그리고 경애왕이
견훤에게 나라를 내어주기까지 신라 역사의 생생한 현장으로서 항상 그곳에 있었다.
그 후 형산강은 역사의 무대에 화려하게 다시
등장하지는 못했다.
형산강 하구는 일본에서 건너오기에 가깝고 만조를 만나면 강을 거슬러 안강평야와 경주평야까지
올라가 곡식을 약탈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영일만 일대는 신라의 국력이 강성해지기 전까지 끊임없이 왜구에 시달렸다. 이러한 상황은 해상왕 장보고의
몰락과 신라 멸망 이후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형산강은 물류 운송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시대에는 형산강 유역의 세곡을 모아두었다가 해로로 서울로 수송하는 조창이 포항에
있었고, 함경도와 전라도 사이에 오가는 물자와 양곡을 중계하는 역할을 했다. 18세기 중반에는 부조에 장시가 크게 발달하기도 했다.
형산강도 한국 현대사의 비극인 6.25 전쟁이 남긴 상처를 가지고 있다.
전쟁 발발 8주차부터 시작된 형산강 지구 전투가 그것이다.
당시 국군과 UN군 연합군은 패퇴를 거듭하며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 온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안강과 포항을 빼앗기면 인민군의 부산 진출을 막을 수 없을 지경이었고
포항에는 연합군의 공군, 해군의 발진 기지가 있어 이곳을 빼앗긴다면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었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치열했던 이 때의 전투에서 형산강 유역의 자연이 크게 훼손되었음은 물론 국군, 인민군 모두
많은 사상자를 냈다.
경주시 안강읍에는 안강전투승전기념관이, 포항시 용흥동에는 전몰학도충혼탑이 서서 형산강에 그
피를 씻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