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대표적인 북한인권단체인 '북조선귀국자의 인권과 생명을 지키는 회
' 야마다 후미아키 (山 田文眀)대표는 중국에서의 탈북여성들에 대한 인신매매의
심각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일본인들의 북한인권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집회를
지난 2월 5일부터 6일까지 오사카-동경에서 개최했습니다.
이 집회에서는 중국에서 인신매매를 당했던 젊은 탈북여성들이 직접 나와 증언해
많은 일본인들과 재일교포들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같은 탈북자로서 탈북여성들이
중국에서 인신매매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 부터 알았지만 당사자들로
부터 생생한 증언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 이런 치욕같은 과거는 드러내고 싶지 않은 상처이기 때문에
좀처럼 이런 생생한 증언은 들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30대도 안된 젊은 여성으로 중국에서 인신매매를 당한 체험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였고, 어려운 증언을 해준 두 분 탈북여성의 용기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를 돈 주고 사와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피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증언 도중에 눈물을 흘리는 탈북여성 이 씨의 증언에 많은 일본인들이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너무나 처절한 증언 앞에 모두 할말을 잃은 분위기였습니다.
그가 전한 가족의 비극적인 증언 내용을 그대로 소개 하려고 합니다.
함경북도 무산군의 평범한 가정이었던 나의 가정은 큰 언니의 탈북으로부터
비극이 시작됐습니다.
공업대학을 졸업하고 무산광산에 배치 받은 언니가 노역 같은 노동에 견디지 못해
중국으로 탈북 했는데, 당시 무산광산 선전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나에게는
언니가 중국으로 도망갔다는 것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것이어서 반드시
언니를 찾아와야 만 했습니다.
언니를 찾아오기 위해 수소문하고 있는데, 한 북한 젊은이로부터 언니가 보냈다는
편지를 받아보았습니다. 그 내용은 “중국이 북한보다 훨씬 살기 좋으니 북한으로
갈 수 없으며 너희들도 가능하면 중국에 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싶어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브로커의 안내를 받고 중국에
가게 됐습니다.
직접 언니를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고 싶은 언니는
보이지 않고, 낮선 건장한 중국 조선족들이 중국말로 주고받으며 하는 행동이
우리를 불안하게 했습니다.
당시 우리들은 북한 여성들이 중국에서 팔려 다닌다는 사실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3일을 땅굴 같은 오두막에 우리를 가두더니 어느날 언니를 만나게 해준다며 두 대의
택시로 어머니와 우리 형제를 갈라 태웠는데, “한 택시에 여러 명을 태울 수 없어
두 대로 갈라 태웠다”는 조선족의 말에 안심했습니다.
그런데 연길시의 한 사거리에서 어머니가 탄 택시는 좌측으로 빠지고 자신들이 탄
택시는 오른쪽으로 도는 순간 불안을 느끼고 함께 타고 있던 재중동포에게 거칠게
항의 했습니다. 함께 타고 있는 조선족은 우리 형제를 제압하며 막무가내로 우리들을
끌고 갔습니다.
동생과 나는 어머니와 함께 가게 해달라고 애원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당시 동생은 18살, 나는 21살이었습니다. 연길에서 수백키로 떨어진 흑룡강성 어느 산골 마을에 도착해서야 우리 형제는 중국 사람들에 팔려왔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물론 어머니도 다른 사람에게 팔려갔고, 언니는 우리보다 먼저 팔려나간 상태였습니다.
나는 동생보다 그래도 나이를 조금 더 먹었기 때문에 덜 억울했지만 이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동생이 낮선 남자에게 팔려 시집을 가야 한다는 사실에 너무나 억이 막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동생에게 유일한 보호자인 내가 동생을 위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비참했습니다.
결국 강제로 팔려간 우리 형제는 일년 후에 아이 엄마가 되어야 했습니다.
나는 결혼 지참금을 마련해준 남편의 부모에게 자신은 괜찮으니 이 돈으로 가족을
구해오는데 쓰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다행이도 남편이 여기에 동의해줘 그 돈으로
어머니를 팔아먹은 사람에게 다시 돈을 주어 어머니를 사 오기로 결심 했습니다.
영문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이 인간에게 팔린 것도 억울한데, 어머니를 돈 주고 사와야
한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통곡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나를 팔아먹은 브로커를 찾아가 어머니를 내놓으라고 이판사판으로 덤벼들었습니다.
당시 중국정부가 인신매매에 대해 단속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고당하면 그도 무사치
못해 결국 어머니가 있는 곳을 알게 됐습니다.
어머니가 있는 곳을 찾았을 때 우리 모녀는 함께 부둥켜 앉고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머니는 늙었기 때문에 팔리지 않아 그대로 있었다고 합니다. 다행이도 팔려가던 언니가
극적으로 그곳을 뛰쳐나와 자신을 팔아먹은 브로커를 찾아가 동생과 어머니가 팔려 간 곳을
물었는데, 어머니의 행방만 알고 두 동생의 소식은 알려주지 않아 몰랐다고 합니다.
정말 운이 좋게도 우리 세형제와 어머니는 함께 모이게 됐습니다.
마침 탈북자들이 중국주재 외국대사관으로 뛰어드는 모습을 보고 우리도 노예처럼 살 바에는 차라리 그 길을 택하다가 죽자는데 의견을 모았지만 어머니는 목숨을 담보하는 위험한 일을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를 설득해 행동에 들어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인권단체의 도움을 받아 북경주재 한국대사관을 찾았고, 운이 좋게도 우리는
대사관의 보호를 받아 한국에 오게 됐습니다.
아버지는 가족 모두가 한국에 갔다는 소식을 듣고 탈북해 역시 한국대사관을 찾았지만
대사관 문턱에서 중국공안에 체포돼 북송됐는데, 현재는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됐다고 합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는 자유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 가족보다 더 비참한 탈북여성들이 지금도 중국 땅을 헤매고 있습니다. 그들을 도와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이상 탈북자 이 씨가 증언한 내용입니다. 많은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데려온 천기원 목사의
증언은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팔려간 15세의 탈북소녀가 20살 많은 중국인으로부터
매일과 같이 폭행당하는 것도 모자라 발가벗긴 채로 1년간 집안에 가둬 있다가 자신에게
구원됐다고 합니다. 천 목사가 그 집을 방문했을때 그 소녀는 발가 벗긴채 천정에 매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 소녀는 지금 한국에 와 있지만 정신적인 충격 때문에 한국사회에
적응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많은 일본인들과 재일교포들은 탈북자들과 함께 울었고 비극적인 가족의 슬픔을
함께 했습니다. 참석자 모두는 탈북자들을 격려 했고 일본인들이 납치자 문제 뿐
아니라 탈북자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지키는 회' 대표인 야마다 교수는 2003년 8월 탈북자 가족을 상하이에 있는 일본인
학교로 진입시키려다 중국공안에 체포돼 옥고를 치른 경험이 있어 누구보다도
탈북자의 참상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관심 밖의 일인 탈북여성의 인신매매 참상이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많은
인권운동가들 속에서 진지하게 논의되고 그들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보면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탈북여성들은 바로 우리의 누나이고 동생인 우리의 형제들인데 그들은 같은 형제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이웃나라 일본에서 그 참상을 알리고 그곳에 더 큰 호응을
얻는다는 게 뭔가 순서가 잘못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일본의 양심 있는 인권운동가들은 과거 한반도의 일본의 지배를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위안부 문제 등 아픈 과거를 함께 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일제시기 위안부문제에
대해서 일본에 대해 비판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는 위안부 못지않은 인권유린을 당하고
있는 탈북여성에 대해 무관심 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일본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한국인이 됐으면 하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