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 엘레지-고봉산
작사 한산도 작곡 백영호
一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
너와 내가 아니냐
세월이 가고 너도 또 가고
나만 혼자 외로이
그때 그 시절 그리운 시절
못 잊어 내가 운다
二
백사장에서 동백 섬에서
속삭이던 그 말이
오고 또 가고 바닷물 타고
들려오네 지금도
이제는 다시 두 번 또 다시
만날 길이 없다면
못난 미련을 던져 버리자
저 바다 멀리 멀리
대사
백사장에서 도백 섬에서 속삭이던
그 말이 오고 또 가고 바다 물 타고 들려오네
지금도 이제는 다시 두 번 또 다시
만날 길 없다면 못난 미련을 던져 버리자
저 바다 멀리 멀리
三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
너와 내가 아니냐
세월이 가고 너도 또 가고
만날 길 없는데
그때 그 시절 그리운 시절
못 잊어 내가 운다
甄萱(견훤)
활동분야:왕
생애와 업적
936년 9월의 어느 날,건너편 언덕에 진을 친 후 백제군을 바라보는 견훤의 가슴속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착잡했다. 그의 나이 어느새 일흔,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26세에 스스로 나라를 세운 뒤 한때는 신라와 고려를 제압하며 삼국통일을 눈앞에 두기도 했건만,이제는 자신이 세운 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고려 편에 서있는 처지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날 노릇이었다.70년 세월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부모가 들에서 일을 하느라 수풀 밑에 눕혀두면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는 일화가 전할 만큼 어렸을 때부터 비범했던 그는 상주 가은현에서 아자개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래의 성은 이씨였으나 후에 견(甄)으로 바꾸었다(본래 견자는 성씨로 쓰이면 진’ 으로 읽혀 견훤’ 이 옳으나,이는 교과서 표기를 따랐다)
견훤에게는 독특한 출생 설화가 전한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가은현에 사는 부잣집 딸에게 밤마다 자주색 옷을 입은 사내가 다녀가곤 했다고 한다.
하루는 임신한 그 딸이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찾아온 남자의 옷자락에 바늘을 꽂아놓았다. 이튿날 바늘에 꿰인 실을 따라갔더니 닭장 밑에 있는 커다란 지렁이의 허리춤에 바늘이 찔려 있더라는 야기다. 견훤이 지렁이의 아들이라는 내용인데, 이는 지렁이의 경상도사투리인 지러이와 견훤의 본래 이름이었다던 진훤의 경상도식 발음 진휘이의 유사함 때문에 만들어진 이야기인 듯하다. 또 설화에 따르면 견훤의 어머니가 꽤 세력 있는 집안의 딸이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는 농사를 짓다 나중에 호족으로 성장해 장군이 되었다. 견훤도 군인의 길을 택했다. 신라의 군대에 들어가 서 남해안으로 배치되었는데, 당시 그는 창을 베고 자면서 적을 기다렸고 다른 병졸들보다 용기가 앞섰다고 기록은 전한다. 능력을 인정받아 비장(裨將)이 되었는데,이는 대장의 보좌관이나 단위부대의 지휘관 정도의 직책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천년왕국 신라는 몰락의 길에 들어서고 있었다. 왕실이 권력다툼에 빠져 있는 사이 농민들은 몰락해 유랑민이 되거나 도적이 되었다. 이러한 농민들의 움직임은 농민 봉기로 이어졌고,신라의 중앙정부는 지방통제력을 상실했다. 그러자 각지에서 독자적인 기반을 갖춘 새로운 세력들이 나타났다. 이들을 호족이라 하는데, 호족은자신의 세력권 안에 있는 주민들을 직접 지배할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군사력을 갖추고 있는 독립된 정치 세력이었다.
견훤은 자신을 따르는 병력을 이끌고 순천과 여수 일대를 시작으로 주변 고을들을 점령해나갔다. 한 달 사이 5,000명의 무리를 모았을 정도로 그의 능력은 뛰어났다. 892년(진성여왕 6) 지금의 광주인 무진주를 점령하고 독립을 선포할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26세였다. 900년(효공왕 4)에는 완산주에 입성해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국호를 ‘백제’ 라 선포했다. 백제가 멸망한지 240년,다시 백제를 부활시키겠다는 기치를 내건 것이다. 또한 자신을 대왕이라 칭하면 서 정개(正開)리는 연호를 반포했다.
견훤은 호족들과의 혼인을 통해 세력을 확장시켜나가면서 옛 백제의 외교를 복원하는 데도 총력을 기울였다. 중국의 오월국(吳越國)과 후당(後唐)에 사신을 파견했으며,거란 • 일본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같은 시기 궁예도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여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고려라 했다. 이렇게 하여 후삼국시대가 열렸다.
나주 지역을 두고 다투는 등 후 고구려와의 세력다툼은 계속되었으나 견훤은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왕건의 즉위를 축하하는 사선을 보내기도 했다.
견훤의 세력이 점점 강성해지자 신라는 왕건과 연합하여 대처하려 했다. 위기감을 느낀 견훤은 927년(경애왕 4) 근품성과 고울부를 공격한 뒤 경주로 진격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웠다.
견훤에게 신라를 내줄 수 없었던 왕건은 급히 구원병을 보냈으나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견훤은 경주를 짓밟았고,왕건의 군대까지 대구 공산에서 크게 이겼다. 당시 전투에서 고려의 개국 공신들이 거의 몰살당했으며,왕건도 신숭겸이 옷을바꿔 입고대신 죽음을 맞아 겨우 살아나올 수 있었을 만큼,고려는 대패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승기를 잡은 견훤은 삼국통일을 눈앞에 보는 듯했다. 그러나 934년 운주성 싸움에서 고려의 장수 유금필에게 전력의 반 이상을 잃으면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당시 그의 나이 이미 68세였다.
후백제의 몰락을 결정적으로 앞당긴 것은 적국인 고려나 신라가 아니라 자신의 아들들이었다. 견훤은 많은 아내를 두어 그들에게서 10여 명의 아들을 얻었다. 그 가운데 넷째 아들 금강을 후계자로 마음에 두자 이것을 알아챈 큰아들 신검과 이찬 능환이 935년 3월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키고 금강을 죽여버렸다. 금산사에 갇혀있던 3개월 동안 견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감시 병사들에게 술을 먹인 뒤 막내 아들 능예,딸쇠복,애첩 고비와 도망친 견훤은 왕건에게 항복하고 자신의 아들들을 죽여달라 청하기에 이른다. 왕건은 견훤에게 상보(尙父)의 지위를 주고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다 그해 11월 신라의 경순왕도 고려에 항복했다.
다음 해 고려군과 후 백제군은 지금의 경북 선산인 일선군 일리천 전투에서 마지막 일전을 치른다. 견훤은 고려군의 한 사람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백제의 장수 몇 명이 갑옷을 벗고 견훤의 말 앞에 나와 항복했다. 옛 주인의 모습을 보고 전의 (戰意)를 잃었을 것이다. 전투 중 창을 거꾸로 잡고 싸우는 병사들도 있었다. 백제군은 후퇴를 거듭하다 지금의 충남 연산인 황산군에서 신검이 두 아우와 능환 등을 이끌고 항복했다.
견훤은 수심과 번민으로 등창이 나,싸움터인 황산의 절에서 세상을 떠났다. 눈을 감으면서 탄식했다는 말이 전한다.
“하늘이 나를 보내면서,어찌하여 왕건이 뒤따르게 하였던고..... 한 땅에 두 마리 용은 살 수 없느니라"
평 가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끝내는 맨 마지막 부분에 견훤에 대한 평을 달았다.
“견훤은 신라의 백성 출신으로서 신라의 관록을 먹으면서 반역의 마음을 품어 나라의 위태로움을 다행으로 여겨 수도를 쳐들어가 임금과 신하를 도륙하기를 마치 새 잡듯,풀 베듯 하였으니 실로 천하에서 가장 흉악한 자였다. 그러므로 (중략) 자기 자식에게서 재앙을 받았다. 이는 스스로 취한 것이니 누구를 탓하리오?
승리자인 왕건의 신하들이 편찬한 역사서이기에 견훤에 대한 평가는 가혹하리만큼 비판적이다. 이러한 평가는 오랫동안 유효했다.(영조실록) 14년조에서도 “극적(極敵) 견훤”이라는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근래에 이르러서야 견훤을 힘을 앞세워 전쟁만 일삼은 무모한 지도자가 아니라 탁월한 능력으로 한 나라를 건국하고 반세기 동안 이끈 리더로 평가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캔자스대학의 허스트 3세 교수는 ‘고려 왕조 창건 속의 인물들’ 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논문 〈선인 • 악인 • 추인〉을 통해 “견훤 역시 ‘악인’ 이라는 이미지로부터 상당히 회복될 필요가 있다. 그는 쇠퇴하는 힘에 대항하여 맹렬히 공격한 한반도 남서부 지역 인물로서,그때까지 천명을 보유하고 있던 신라 왕조와 함께 상당한 군사적,도덕적 힘을 지니고 있던 백제인이었다. 견훤의 왕국은 거의 반세기 동안이나 존재하였으며 번성했다. 다만 지지한 사람들과 지지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그러나 나는 그도 역시 상당한 지도력과 군사적 자질을 소유하였던 인물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한다”고평했다.
호족
신라 말 중앙정부가 왕위를 둘러싼 치열한 다툼에 빠져 있을 때 국가권력이 미치지 않는 지방에서 독자적인 행정력과 군대를 갖춘 세력이 등장했다. 이들을 호족이라 하는데,촌락 행정을 맡고 있던 촌주부터 몰락한 귀족,해상세력,도적에 이르기까지 출신은 매우 다양했다. 이들은 골품제와 상관없이 인재를 등용해 지지기반을 넓혀가며 주변 지역을 복속해나갔다. 그 중 세력이 강한 자가 대 호족으로 성장했는데,왕건,궁예,견훤 등이 바로 대 호족이다.
作成者 黃圭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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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봉산원로가수님의 해운대 엘레지 음악곡을 감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