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 종광 스님
바른 견해 얻고자 한다면
결코 미혹당하지 말아야
부처·조사의 허명에 속으면
깨달음에선 영영 멀어져
속박하는 것 과감히 쳐내야
진정한 자유와 해탈이 가능
道流야 出家兒는 且要學道니라 祇如山僧은 往日에 曾向毘尼中留心하고
亦曾於經論尋討라가 後方知是濟世藥이며 表顯之說이라
遂乃一時抛却하고 卽訪道參禪하니라 後遇大善知識하야
方乃道眼이 分明하야 始識得天下老和尙하야 知其邪正하니
不是娘生下便會요 還是體究練磨하야 一朝自省하니라
해석) “여러분! 출가한 사람은 도를 배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는 과거 계율에 마음을 두었고, 또 경론을 연구했다.
그러나 나중에 그것들이 세간을 구제하기 위한 약방문이며
드러내어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일시에 버려 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도를 찾아 참선을 했다.
뒷날 큰 선지식을 만나 뵙고 나서야 마침내 도안(道眼)이 분명해져서
비로소 천하의 노화상들의 삿됨과 바름을 알게 됐다.
이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알게 된 것이 아니다.
몸으로 부딪쳐 연구하고 갈고 닦은 결과이며
어느 날 하루아침에 스스로 깨닫게 된 것이다.”
강의) 임제 스님께서 도를 이루기까지의 과정이 잘 설명돼 있습니다.
임제 스님도 처음엔 계율과 경론도 배우고 익혔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진리가 아니라 문자로 표현된 것에 불과하다는 알게 되자
기존의 것들을 한꺼번에 버리고 참선에 돌입해 정진합니다.
그 노력에 더해 황벽 스님이라는 뛰어난 선지식을 만나면서 깨달음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
위의 원문에서 비니(毘尼)는 비나야(卑奈耶)로 산스크리트 ‘vinaya’입니다.
율(律)이라는 뜻입니다. 임제 스님은 ‘경율론’ 삼장을 약방문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처방전입니다. 처방전을 달달 외운다고 해서 병이 나을 리 없습니다.
약을 복용해야 병이 낫습니다. 경율론이 그렇습니다.
그러니 참선은 약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약의 강도에 따라,
질에 따라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임제 스님 스스로 말씀하셨듯이 도는 그냥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식의 가르침이 있어야 하고 또한 치열한 수행이 바탕이 돼야 합니다.
그런 결과로 어느 날 몰록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道流야 儞欲得如法見解인댄 但莫受人惑하고 向裏向外하야
逢著便殺하라 逢佛殺佛하며 逢祖殺祖하며 逢羅漢殺羅漢하며
逢父母殺父母하며 逢親眷殺親眷하야사 始得解脫하야 不與物拘하고 透脫自在니라
해석) “여러분, 법에 맞는 올바른 견해를 얻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미혹을 당하지 말아야 한다.
안으로 향하건 밖으로 향하건 만나는 대로 바로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권속을 만나면 친척권속을 죽여라. 그래야 비로소 해탈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사물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될 것이다.”
강의) 임제 스님의 유명한 살불살조(殺佛殺祖)입니다.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인다는 뜻입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말은
나를 얽어매는 것은 무엇이든지 부셔버리라는 뜻입니다.
부처라는 관념, 조사나 아라한이라는 이름에 속박되면 절대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이런 종교적 권위로 만들어진 우상을 부셔버리지 않고서
진정한 자유와 해탈을 이룰 수 없습니다.
권위든 경험이든 관념이든 나를 속박하는 것은 그 무엇이라도 과감하게 쳐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스스로가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서 있는 곳마다 참된 진리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불교는 성직자나 제사장이 아니라 스스로 부처가 되는 공부입니다.
임제 스님은 조금은 과격한 말로 이를 확실하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如諸方學道流는 未有不依物出來底라 山僧向此間은 從頭打하야
手上出來하면 手上打하고 口裏出來하면 口裏打하고 眼裏出來하면
眼裏打하나니 未有一箇獨脫出來底요 皆是上他古人閑幾境이니라
해석) “여러 곳에서 온 수행자들 중에
아무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들 하나도 없었다.
산승은 그러면 처음부터 쳐버린다. 손에서 나오면 손을 치고,
입에서 나오면 입을 치고, 눈에서 나오면 눈을 쳐버린다.
홀로 벗어나서 쓸데없는 것을 다 버리고
있는 그대로 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 옛 사람들의 쓸데없는 방편이나 도구에 의존하고 있었다.”
강의) 선사랍시고 선어록의 화두문답이나 읊조리며 허송세월 보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마 임제 스님 당시도 크게 다르지 않았나 봅니다.
진솔한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이지 않고
옛 사람들의 방편이나 흉내 내서는 결코 깨달을 수 없습니다.
연극무대에서 아무리 오랫동안 판사 역할을 한들 판사가 될 리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옛 사람의 흉내를 내는 것은
연극에서 판사 역할을 하면서 스스로 판사라고 착각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山僧은 無一法與人이요 祇是治病解縛이니 儞諸方道流는 試不依物出來하라
我要共儞商量이라 十年五歲토록 並無一人하고
皆是依艸附葉竹木精靈과 野狐精魅니 向一切糞塊上亂咬로다
瞎漢이여 枉消他十方信施하고 道我是出家兒라하야
作如是見解로다 向儞道하노니 無佛無法하며 無修無證하나니
祇與麽傍家에 擬求什麽物고 瞎漢아 頭上安頭라 是儞欠少什麽오
해석) “산승은 다른 사람에게 줄 법이 하나도 없다.
다만 병을 치료를 해주고 결박돼 있는 것을 풀어줄 뿐이다.
제방에서 수행을 하는 여러분! 시험 삼아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말고 나와 보라.
나는 그대들과 함께 법에 대해서 논쟁하고 싶다.
10년이 가고 5년이 지나도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풀과 나무 잎사귀에 붙어있는 유령이나 대나무나 나무에 붙어사는 귀신들이다.
또 들여우나 도깨비 같은 것들이어서 모두 똥 덩어리에 달라붙어 어지럽게 씹어 먹는 것이다.
눈먼 자들이여! 저 시방의 신도들이 시주한 귀중한 보시를 함부로 쓰면서
나는 출가한 수행자라고 하며 이 따위 형편없는 견해를 짓는다.
나는 그대들에게 분명히 말한다. 부처도 없고 법도 없고 닦을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다.
그런데 이렇게 옆길로 돌아다니면서 어떤 물건을 구하고자 하는가?
눈먼 자들이여! 머리 위에 또 머리를 얹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대들이 무엇이 부족하단 말인가?”
강의) 깨달음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는 밖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부처입니다. 모든 것이 갖춰져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줄 법이 없다는 뜻은 이런 의미입니다.
다만 삼독에 빠져 진리의 당체가 무명에 가린 것뿐입니다.
본래 부처인데 병이 들거나, 묶여 있습니다.
병이 나으면, 또 묶인 줄을 풀어버리면 그대로 해탈입니다.
따로 어디서 부처님을 데리고 오거나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임제 스님은 스스로가 부처임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본래의 모습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행한다는 사람들이 밖에서 부처를 찾고
옛 사람이 남긴 찌꺼기를 뒤져 진리를 말합니다.
신도들의 신심이 담긴 시주를 받아 귀신 짓거리를 하면서 수행자라고 뻐기고 있습니다.
‘초발심장경문(初發心自警文)’에
금생미명심(今生未明心) 滴水也難消(적수야난소)라는 말이 있습니다.
금생에 마음을 밝히지 못하면 한 방울의 물도 소화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시주물의 은혜는 지중합니다.
목에 머리를 달고 있으면서
또 다시 머리를 찾아 헤매는 어리석음은 이제 그쳐야 합니다.
道流야 是儞目前用底가 與祖佛不別이어늘 祇麽不信하고 便向外求로다
莫錯하라 向外無法이요 內亦不可得이니라 儞取山僧口裏語로는 不如休歇無事去니
已起者는 莫續하고 未起者는 不要放起하라 便勝儞十年行脚이니라
約山僧見處하면 無如許多般이요 祇是平常이니 著衣喫飯하고 無事過時니라
해석) “여러분! 그대들의 눈앞에서 사용하고 있는 그놈.
그놈이 바로 조사나 부처와 다르지 않다. 왜 믿지 않고 밖에서 구하는가?
착각하지 마라. 밖에는 법이 없으며 안에도 얻을 것이 없다.
이렇게 말하니 이제 산승의 입 속에서 나오는 것에 집착하는 것 같은데
생각을 쉬어 일없이 지내는 것만 못하다.
이미 일어난 것을 계속하지 않도록 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은 일어나지 않도록 내버려 두어라.
이것이 10년을 행각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산승이 보는 바에 따르면 불법은 복잡한 일들이 없는 것이니,
평소대로 옷 입고 밥 먹으며 일없이 세월을 보내는 것이다.”
강의) 임제 스님께서 이미 여러 차례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로 눈앞에서 작용하는 또는 법문을 듣고 있는 바로 그놈. 즉 바로 네가 부처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밖에서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반대로 안을 찾아 헤매도 얻을 것은 없습니다.
내가 부처라고 하니까 내 안을 뒤져보는 것은
황금알을 낳는 닭의 배를 갈라 황금을 찾으려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알기만 하면 됩니다. 내가 부처임을 체득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안팎으로 치달리는 마음을 쉬고 일 없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무사(無事), 즉 일 없다는 말은 흔히 생각하는 게으름이나 무기력과는 다릅니다.
안팎으로 투철한 견해가 만들어져 지옥의 고통에 직면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삼세제불이 눈앞에 나타나도 티끌만큼의 기쁨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투철한 견해가 바탕이 됐을 때 일 없음이 도가 되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평상(平常)이 그대로 도가 되는 것입니다.
2012. 11. 20
출처 :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