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대 후반, 종전의 자유민권운동이 한풀 꺾이고 체제의 제도화가 진전되는 가운데 그 다음 시대의 사조를 이끌고 갈 두 동인 결사가 탄생하였다. 민우사(民友社, 1887년)와 정교사(政敎社, 1888년)가 그것이다. 전자는 장래의 일본(1886)이란 베스트셀러로 일약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된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가 조직한 것으로 잡지國民之友와 國民新聞(1890년 창간)을 발간하게 된다. 후자는 미야케 세츠레이(三宅雪嶺), 시가 쥬코(志賀重昻)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것으로 잡지 日本人을 발간하였으며, 이 그룹과 同心異體로 불리우는 구가 카츠난(陸羯南)의 신문日本(1889년 창간)을 지원하게 된다.
이 두 그룹은 일반적으로 전자가 「평민적 歐化主義」, 후자가 「國粹主義」로서 특징지워지고 있다.1) 이러한 양자의 상반된 입장은 본래 정부의 조약개정 방향에 대한 태도에서 비롯되고 있으나, 동시에 보다 근본적으로는 메이지유신 단행이래 정부가 추진해온 근대화 정책에 대한 분기된 평가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즉, 전자가 근대화(「歐化」)가 「세계의 대세」라는 관점에서 적극 지지하는 입장이라면, 그 정도가 지나치다며 일본이라는 나라의 문화적 아이덴티티를 상실하지 않으면서 근대화를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후자의 「국수주의」인 것이다.2) 도쿠토미는 스스로 양 그룹을 대변하는 國民新聞과 日本은 「주의주장, 취미, 기호에서 물과 기름처럼 서로 반대」였다고 술회하고 있다.3)
이렇듯 주의를 달리하는 두 그룹은 1890년대를 통해서 여전히 양극적인 입장을 유지하면서 언론계에 영향력을 확대해갔다. 당대의 인물 평론가 도리야베 슌테이(鳥谷部春汀)는 도쿠토미와 구가를 후쿠치 에이치(福池櫻痴)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시대를 잇는 차세대의 3대 신문기자로 꼽았다.4) 두 언론지식인 및 그들이 주재했던 두 신문의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평가이다.
본고에서는 이 1890년대를 통해 상이한 입장에서 사회적 영향력을 갖고 있던 구가와 도쿠토미의 대외문제에 대한 논의를 정리함으로써 청일전쟁에서 러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 내에 존재했던 대외인식론의 두 유형을 추출하고자 한다. 청일전쟁 이후를 검토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들이 활동을 시작한 1880년대 후반은 1885년에 청, 일 간에 맺은 천진조약으로 인해 조선을 둘러싼 양국의 각축이 소강 상태에 들어감으로써 대외문제에 대한 논의가 그다지 활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청일전쟁 이후 러일전쟁에 이르는 시기는 세계 제국주의가 아시아로 권역을 확대하는 시기와 중첩되면서 일본이 본격적인 제국주의로 전환하는 시기로서, 대외문제에 대한 논의는 활발하게 전개된다.
종래 이 시기의 대외문제에 관한 논의 및 운동을 포괄적으로 다룬 대표적인 연구로는 「대외경파」를 분석한 사카타 마사토시(酒田正敏)의 연구, 후쿠자와와 「대외경파」계의 인물을 중심으로 분석한 반노 준지(坂野潤治)의 연구, 신문 등을 주된 소재로 당시의 동향을 총 망라적으로 다룬 이토 유키오(伊藤之雄)의 연구 등을 들 수 있다.5) 본고는 이런 기존의 연구를 토대로, 동 시기의 대외문제에 관한 인식을 1890년대의 두 상반되는 지식인의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한가지 미리 밝혀 둘 것은 청일전쟁 이후는 이미 조선에 대한 인식에서 일본 전체가 거의 합의를 보이고 있어, 중국 문제를 둘러싼 논의가 주된 검토의 대상이 되리라는 점이다.
Ⅱ. 청일전쟁의 의의와 전쟁 처리
1894년 5월말, 제6회 제국의회가 정부 탄핵문제로 분규하게 되자, 정부는 제5회 제국의회(1893년 12월 개회)에 이어 재차 의회를 해산시켰다. 연이은 두 차례의 의회해산에 국민의 정부에 대한 비판은 최고조에 달하고, 정부는 궁지에 몰렸다. 그런 와중에 조선으로부터 조선 정부가 동학군 진압을 위해 중국에 지원을 요청하였다는 보고가 날라 들었다. 일본 정부는 곧바로 6월2일 조선 출병을 결정하고, 6월5일에는 대본영 설치의 명령을 내렸다.
일본군의 조선 출병 후, 그 직전까지 조약개정 문제라는 외교적 사안으로 정부에 향해져 있던 비판의 화살은 급속히 조선문제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 대응을 지지하는 논조로 전환되었다. 구가도 정부의 출병 결정을 다음과 같은 근거에서 지지하였다. 즉, 중국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 확대는 동양의 세력균형 면에서 일본에 위험하며, 만일 조선이 무너져서 중국에 복속되게 되면 일본의 안전보장은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6) 이러한 생각에서 구가는 6월 초 출병이래 조선에서의 중국과의 교섭과정을 예의 주시하면서, 마침내 조선을 둘러싸고 중국과의 전쟁도 불사한다는 입장을 시사하기에 이른다.7)
청일전쟁이 개시되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자신이 주재하는 時事新報에 그 유명한 「청일전쟁은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다」라는 논설을 게재하였다. 그 논설 속에서 후쿠자와는 「전쟁은 청,일 양국 사이에서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 근원을 따지자면 문명개화의 진보를 꾀하는 자와 그 진보를 방해하려고 하는 자 간의 싸움이지, 결코 양국 간의 싸움이 아니다.」라고 청일전쟁의 의의를 규정하였다.8) 이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라는 규정은 청일전쟁의 정당성을 담보하는 안성맞춤의 언설로서 당시의 논자들 사이에 널리 공유되어 갔다. 구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는 청일전쟁은 조선의 現狀을 좌시할 수 없는 「인도」상의 厚誼에서 비롯된 것이며9), 이 전쟁의 목적은 「동양의 진보를 꾀하기 위해 支那라는 야만을 치는 데에 있다」10)고 강조하였다.
전쟁 개시 후 전황에 대한 구가의 관심은 대단하였다. 그는 이 전쟁을 계기로 일본제국의 흥륭을 기해야 할 것이라고 하며 그 전쟁에 큰 기대를 걸었다.11) 그 기대는 다음과 같이 발전되어갔다. 「동양이라는 도마 위에는 (일,청,한)삼국이 함께 올라 있고, 이를 요리하려고 하는 것은 오직 구미 제국이다. 우리가 세상의 식자와 함께 절실히 바라는 바는 (일본)제국을 도마 위에서 끌어내려 요리인의 자리에 앉히는 것이다.」 그는 한마디로 말해 청일전쟁을 「야만을 정벌하는 동시에 제국 스스로 도마 위를 떠나 칼의 자리에 서는」계기가 될 것이라고 자리매김하였다.12) 이는 다시 말하자면 일본이 중국대륙을 무대로 열강과 경쟁하는 입장에 서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 구가는 청일전쟁이 동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우월적 지위를 결정적으로 만드는 전기가 되리라고 전망한 한편, 그 전쟁의 정당성을 어디까지나 조선을 문명으로 이끌기 위한 「인도」적 견지에서 설명하고 있었다.
한편, 도쿠토미는 훗날 청일전쟁을 「국가로서 한 轉機인 동시에 나 개인으로서도 사고의 한 전기」였다고 회고하고 있다.13) 그 전기란 역사적으로 페리의 내항,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잇는 제3기의 「개국」에 해당되며, 제1, 제2기의 개국이 「서양인이 문을 깨부수고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면, 제3기의 개국은 「일본국 스스로가 밖으로 밀고 나가는 시기」라고 설명하였다.14) 이를 다시 그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팽창」의 시대의 개막을 의미한다.
도쿠토미는 일본 정부의 조선 출병 결정 이전부터 동양에서의 세력균형과 거류민의 보호를 위해 일본군의 출병을 촉구하고 있었다.15) 동학군의 진정 후에도 그는 일본군의 철병에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조선출병의 목적은 「조선의 독립 보호」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16) 이에 이르러 종전의 거류민 보호라는 명분은 어느새 조선의 독립유지로 대체되었다. 이후 7월 중순경부터 그는 중국과의 개전을 호소하게 되는데, 그때는 「국민적 팽창」, 「대일본」의 건설이 개전의 목적으로 강조되게 된다.17) 이렇듯 조선에서의 소요 발생 이후 사태의 진전에 따라 도쿠토미의 조선문제 개입에 대한 동기 설명은 미묘하게 변화해갔으나, 궁극적으로 그는 청일전쟁을 일본의 대외 팽창의 호기로 보고 적극적인 대외 팽창을 주장해가게 된다.
이렇듯 양자는 청일전쟁이 동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지위를 전환시켜 구미열강의 대열로 진입할 전기가 될 것을 전망한 점에서 공통되고 있었다. 그러나 구가가 명분상이나마 「인도」적 견지에서 일종의 문명화 사명과 같은 것을 내세워 청일전쟁을 지지하였다면, 도쿠토미는 보다 노골적으로 팽창을 지향하고 있었던 점에서 차이를 보였다. 이후 양자는 청일전쟁의 진전에 따른 대응 및 전쟁 처리에 대한 입장에서도 현저한 대조를 보이게 된다.
9월 하순, 전쟁 개시 후 두 달 정도가 지나면서부터 구가는 전쟁처리에 관해 모색을 시작한다. 그는 「조선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라는 전쟁 목적에 부합하도록 조선 국경의 일정 거리 이내에 중국군의 주둔을 제한할 것 등의 3항목과 중국의 요지에 일본군대의 주둔을 인정시킬 것 등의 3항목을 배상금의 청구와 더불어 중국에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8) 아울러 중국의 보복 및 열강의 세력 증강에 대한 대비, 조선의 보호 등을 이유로 향후 일본의 군비확장의 필요성도 역설하였다.19)
그러나 현재 진행 중인 전쟁에 대해서 그는 가능한 군사적 충돌을 최소화하고, 전후의 일본사회를 위해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선에서 빨리 수습할 것을 주장한다. 「北守南進」론이 그것이다. 청일전쟁 이전부터 구가는 남진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남진론은 1880년대 중후반에서 청일전쟁 이전의 시기에 집중적으로 분출된 경향으로,20) 이 시기의 남진론은 「동남양제도(諸島)」를 주된 대상으로 하여 자유무역에 기초한 통상입국(立國)을 취지로 하는 일종의 해양국가론으로서 전개되든가, 과잉인구의 배출구로서 논의되고 있었다.21) 즉 이 시기의 남진론에는 군사전략적 관점은 개재되어 있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 점은 구가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것이 전쟁처리를 둘러싸고 종전의 남진론적 입장에 군사전략적인 관점을 도입하여 제시된 것이 「북수남진」론인 것이다.
「북수남진」론이 제창된 것은 10월 하순, 7회에 걸쳐 연재된 「外政策」이라는 논설에서이다. 10월14일, 일본군은 압록강 도하전에서 격전 끝에 청군을 격파하고, 중국의 구련성(九連城)으로 입성하였다. 구가가 「外政策」을 쓴 것은 일본군이 막 중국대륙으로 진입한 시점에서였다. 「外政策」에서 그는 대외정책의 기본을 「조선의 독립」과 「중국의 영존」(후에 「중국보존」)에 두고, 이 방침에 서서 서서히 대두하고 있던 중국대륙의 점령 확대를 요구하는 세론을 「침략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런 위에 그는 「제국이 뻗어나갈 자연스런 방향은 북방에서 防守적이고, 남방으로 진취적이어야 한다」22)고 「북수남진」론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이러하다. 즉, 일본은 조선의 개혁 및 「독립」을 확보하기 위해 러시아와의 협조를 통해 중국을 견제하는 방책을 취해야 한다. 따라서 조선의 국경에서 중국과 대치[北守]하는 한편 남방을 향해 팽창해야[南進] 한다는 것인데, 그 때 남방으로의 팽창이란 무역, 通航, 이주 등을 통해 「중국 남부의 해륙」으로 진출하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남진」이 종래와 같이 경제적 측면을 통한 「남진」의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종전의 그것과는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종래는 남진의 대상지가 동남아시아였던 것이 여기서는 중국 남부로 바뀌었으며, 나아가 무역 보호를 위해 적절한 지역-대만을 암시-에 일본군을 주둔시키도록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23)
이렇듯 구가가 「북수남진」론을 내세운 것은 전쟁 처리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대만의 획득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11월, 미국의 강화 중재 신청에 대해 중국이 직접 항복할 때까지는 강화를 수락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강화의 첫째 조건으로서 대만의 할양을 들었다.24) 그 후에도 구가는 빈번히 신문 논설을 통해 대만의 획득을 호소하였다. 당시의 여론은 차츰 팽창적으로 되어가 대륙의 일부와 대만, 양쪽 모두의 할양을 조건으로 해야 한다는 소리가 일반화되어가는 상황이었다.25)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구가는 중국대륙은 놓아두고 어디까지나 대만의 점령, 할양을 고집하였다.
한편, 청일전쟁을 일본의 본격적인 대외팽창의 계기로 삼고자 한 도쿠토미는 전쟁의 개시와 더불어 「팽창」과 「대일본」의 이념을 국민에게 침투시키려고 언론을 통해 적극적으로 홍보해갔다. 그의 생각을 단적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도쿠토미가 1894년 말, 청일전쟁의 발발 이래 써온 글을 모아서 출판한 대일본팽창론의 서문을 들 수 있다. 동서의 서문에는 「중국과 전쟁하는 문제로서 대일본의 팽창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대일본 팽창의 문제로서 중국과의 전쟁을 논하는 것이다」라 하여, 일본이 어디까지나 「팽창」을 위해 전쟁을 하는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26) 그가 말하는 「대일본」이란 「세계의 강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국민」을 의미하였다.27)
이렇듯 대일본의 국민이 되라고 주장하는 한편으로 도쿠토미는 전쟁의 대중화를 꾀하였다. 즉 국민전쟁의 관념을 구성해가게 되는 것이다. 그 논의는 말할 것도 없이 「애국심」의 강조와 한 쌍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전쟁의 수행자는 정부나 정치가가 아니라 군인을 배출하는 국민이라고 지적하고, 「전쟁은 국민 스스로가 시작하였다」고 선언하였다.28) 국민이 전쟁을 시작한 것은 국민 스스로가 그 위대성을 자각한 결과라고 한다. 그는 전시 중에 보이는 애국심의 고양을 기뻐하며, 「내란은 많은 경우 국민의 품위를 타락시키고, 외란은 대부분 국민의 품위를 숭고하게 만든다. 내란은 많은 경우 사심을 품고 있으나, 외란에 직면해서는 국민이 완전히 公心으로 충만하게 된다. 청일사건은 실로 우리나라의 품위, 우리 국민의 품격에 일대 비약을 초래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29) 이러한 전쟁예찬이 전시 중의 일본 국민에게 얼마만큼 자극적으로 다가왔겠는가는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처럼 전쟁을 국민 및 국민의 애국심과 결부시키는 사고의 전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국민과 황실의 일체성을 강조하는 논의로 전개되고,30) 또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번벌 옹호의 도구로 간주되어 온 군대를 「국민의 군대」로 인식 전환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31)
이와 같이 「대일본」의 팽창을 위한 「국민의 전쟁」이라는 이념을 국민에게 심어주려고 꾀했던 도쿠토미는 전쟁 처리의 문제에 있어서도 당시의 일반적인 주류였던 중국 내부로의 전쟁 확대 및 대륙 할양을 주장하는 입장을 보였다. 그는 구가가 「북수남진」론을 펴 중국 대륙으로의 전선 확대를 가급적 저지하려고 하고 있을 때에, 산동성과 盛京省을 공략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2) 그 후 할양 요구의 대상지로 대만이 첨가되게 된다.33) 도쿠토미는 노골적인 팽창 의욕을 전시 내내 억제하지 못하였다.
이상에서 살펴온 구가와 도쿠토미의 청일전쟁 및 그 전쟁 처리를 둘러싼 상이한 태도는 삼국간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도쿠토미는 훗날 회고에서 삼국간섭으로 인해 자신은 「정신적으로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다. 이는 필시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힘이 부족하면 어떤 정의도 반푼어치의 가치도 없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고 밝히고 있다.34) 삼국간섭 당시 마침 요동반도에서 취재 중이던 그는 요동반도 반환의 소식을 듣고, 분한 마음에 짧았지만 일시 일본의 영토였던 그 땅의 흙을 한줌 쥐고 돌아왔다고 한다.35) 이 전쟁을 계기로 세계 강국을 꿈꾸던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라고 하겠다.
반면, 구가의 반응은 「와신상담」의 슬로건이 횡행하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조금 이채를 띠었다. 그는 삼국간섭의 책임은 삼국간섭에 대해 역부족으로 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요동반도의 할양이라는 무리한 요구를 함으로써 외국의 간섭을 초래하고 만 정부의 실책에 있다고 지적하였다.36) 이러한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구가는 요동반도의 반환 자체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다만 조건부의 반환이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 조건으로는 「반환지인 요동반도는 장래 어떠한 경우라도 일본제국의 승낙 없이는 중국이 이를 타국에 할양할 수 없다」등이 제시되었다. 이 조건부 반환의 주장은 3년 뒤 러시아의 여순, 대련 점령에 의해 그 선견성이 증명되게 된다.
Ⅲ. 전후경영 및 열강의 중국 분할을 둘러싸고
청일전쟁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 점에서는 일치하면서도 그 논리와 전쟁 처리, 삼국간섭에 관한 견해에서 차이를 보였던 구가와 도쿠토미는 군비확장과 대규모의 산업육성 계획을 두 기둥으로 하는 이른바 「전후경영」37)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입장에 서게 된다.
전쟁이 종결되자마자 즉시로 군비확장을 주창하기 시작한 것은 도쿠토미였다. 삼국간섭 후 10일간의 발행정지 처분을 받았던 國民新聞은 정지가 풀리자마자 곧바로 군비확장의 여론 형성에 착수하였다. 그들의 군비확장의 주장은 「국제 사회에서 최후의 웅변은 무력이다. 열국으로서 가장 으뜸가는 자격은 武裝이다」라는 신념에 기초해 있었으며,38) 외교도 「병력」의 뒷받침 없이는 그 효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39) 도쿠토미는 금후 일본이 조선이나 중국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성을 지적하며, 그 개입을 영광되고 실효성 있게 하기 위해서는 역시 병력을 갖추는 것, 즉 군비확장이 불가피함을 강조하였다.40) 이러한 입장에 있던 그였기에, 도쿠토미는 전후경영 예산으로 불리운 제9회 제국의회(1895년12월 개회)에 제출된 예산안에 대해 외교에 적극성이 결여되어 있고, 해군 군비확장의 규모가 작다는 이유로 비판하였다.41) 그 후 청일전후 정치에서 최대의 쟁점이 된 군비확장과 그에 따른 증세문제에서 도쿠토미는 시종일관 군비확장과 증세 찬성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에 반해 구가는 군비확장 반대의 입장을 취하였다. 구가는 전쟁이 끝나기 이전부터 전후의 방침으로서 조선 및 중국에 대한 통상, 통항, 이주, 기업의 활성화를 기대하고 있었다.42) 전후에 대외방침으로 제시한 「상권의 확장」, 혹은 「대외평화사업」은 바로 이를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43) 이처럼 경제적 방면의 실리를 추구할 것을 기대하고 있던 구가에게 있어 재정의 과도한 부담을 초래하는 군비확장은 찬성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앞서 언급한 전후경영 예산안에 대해 그는 예산의 방만한 비대화와 증세를 중점적으로 비판하였다.44) 도쿠토미와는 다른 관점에서의 비판인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이 단계에서 구가의 군비확장에 대한 비판은 본격화되지 않았다. 그것은 도쿠토미가 앞서의 비평에서 군비확장의 규모가 작다고 한 데서 엿볼 수 있듯이, 이 단계에서는 아직 군비확장의 전모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구가의 군비확장 비판이 본격화되는 것은 차년도 예산안의 윤곽이 밝혀질 즈음에서 이다.
그의 군비확장 비판의 요점은 비경제적인 군비확장에 지나치게 많은 재정을 할당함으로써 민생에 폐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군비와 民政 사이의 불균형에 있었다.45) 또한 그는 나아가 과도한 군비확장이 사회문제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여, 사회주의를 발생시킬 여지를 제공할 우려가 있다고도 생각하였다.46) 이와 같이 전후 정치의 전개과정에서 구가와 도쿠토미는 군비확장 반대와 찬성이라는 대극적 위치에 서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1897년 11월 말 독일의 膠州灣 점령으로 동아시아 정세는 일시에 긴박해졌다. 독일에 이어 러시아도 여순, 대련을, 영국은 威海衛를 점령하였다. 이른바 중국 분할의 개시이다. 이 사태를 계기로 구가의 대외문제에 대한 관심은 심화되며, 그 관심은 이른바 「대외경파」로 불리우는 진보당계의 정치인 및 공작 고노에 아츠마로(近衛篤麿)와 연계를 맺으면서 적극적인 활동으로 전개된다.47)
우선 1898년 4월4일, 진보당 의원을 중심으로 한 중의원 의원과 약간의 귀족원 의원, 그리고 구가를 포함한 민간의 유지 등 30여명이 모여, 러시아와 독일에 대한 정부의 항의를 촉구하는 결의를 행하였다.48) 이들 「對外同志會」는 4월9일 재차 집회를 열어, 20명의 위원을 선정하고 금후의 운동 방침을 협의하였다. 그 후 그들은 대연설회의 개최, 「대외동지회」의 취지서의 지방 배포, 대외동지 신문잡지기자 간친회의 개최 등 운동을 추진해갔다.
한편, 열강의 중국 분할 개시를 계기로 일본 국내에서는 대외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진 자들에 의한 새로운 단체들이 형성되게 되며, 그 중심에 고노에 귀족원 의장이 군림하게 된다. 고노에는 종합잡지 太陽1898년 1월호에 「同人種同盟」이란 글을 게재하여 국내외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글의 논지는 동양의 전도는 인종 경쟁의 무대가 될 전망이니, 백인종의 열국 동맹에 대비해 모든 황인종 국가는 동인종 보호의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이나, 실제로 그가 염두에 둔 것은 중국과의 동맹이었다.49) 이 글로 인해 고노에는 국내외에 청일동맹론자로 알려지게 된다.
위의 글을 발표하면서 대외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한 고노에는 마침내 1898년 6월 대륙낭인들과 함께 同文會를 조직하며, 그 해 11월, 동류의 동아회(東亞會, 그 해 4월 결성)와 통합하여 東亞同文會를 결성한다.50) 동아동문회는 (1)「중국보전」, (2)중국의 개혁 원조, (3)중국의 시사문제 연구와 실행, (4)국론의 환기를 결성 취지로 내세웠다. 구가는 이 동아동문회의 초대 간사장직을 수행하며, 「대외경파」의 운동에 이데올로그적 존재로 활약하게 된다. 구가는 「고노에가 가장 신뢰한 최고의 브레인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51)
구가와 동아동문회를 비롯한 「대외경파」의 입장은 한마디로 「중국보전」으로, 일본은 열강의 중국 분할에 대해 반대하는 동시에 중국의 개혁을 도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구가는 「중국보전」을 주장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즉, 동아시아 문제의 궁극적 원인은 중국이 아직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지 못한 데에 있다. 따라서 동양 평화의 기초는 중국제국을 오늘날의 의미에서의 진정한 국가로 만드는 데에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개혁이 절실히 필요하고, 이에는 열국의 협조가 불가결하다는 것이다.52)
구가는 다시 「중국보전」과 중국 개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일청동맹과 같은 정치적 외교관계는 중국을 둘러싼 열강과의 이해관계상 함부로 실행할 수 없는 일이나, 우선 「사교상(사회 내지 지식적 방면을 의미-인용자)」 청일이 서로 친밀해지면 그것이 나아가 정책면에도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보전」이란 「사교상」의 情誼에서 이웃 나라의 붕괴를 가능한 한 막으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 위에 사회 개혁의 내용으로서 사상의 변혁과 경제 진흥을 들고, 전자를 위해서는 저술, 출판, 교육 등의 사업을, 후자를 위해서는 일본의 기술을 중국에 도입할 것을 제시하였다.53) 이러한 것들이 바로 동아동문회의 주된 사업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구가가 고노에, 동아동문회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중국 분할 반대의 입장에 서 있었다면, 도쿠토미는 반대로 중국 분할 문제에는 비교적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독일의 교주만 점령이 보도된 후, 그는 우선 열강의 움직임을 주시한 위에 거국일치적으로 그에 대응할 것을 주장한다.54) 그리고 앞서 언급한 고노에의 동인종 동맹설에 대해서는 혹독하게 비판한다. 그는 중국을 연구함으로써 양국 감정의 융화를 꾀해 백년지대계를 세우자는 고노에의 주장에는 찬성하나, 그가 그 근거를 「같은 인종」이라는 점에 두는 것은 오류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유럽 제국을 적으로 돌린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하고 반문한다. 그 보다는 교역의 확대, 문명의 공유라는 보다 광의의 기반 위에 양국 협력을 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도쿠토미의 생각이었다.55) 도쿠토미는 다른 논설에서도 동인종동맹론에 대해 궁극적으로는 세계를 적으로 돌려 고립하는 위험한 길이다」라고 비판하였다.56) 그는 「중국보전」론의 기저에 놓여 있는 아시아주의적 발상에 회의적이었던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바는 일본이 人道, 문명, 평화를 지지하는 동시에 「유럽 열국과 대등한 위치에 서서 국가로서 누려야 할 이익과 권리를 조금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57) 이는 현재 중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열강들에 의한 분할에 일본이 참가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암시하고 있다. 그는 독일, 러시아, 영국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영토 점령, 조차에 일본이 빠졌다는 이유로 현 상태를 세력균형의 붕괴라고 규정하고, 그 회복을 위해 일본도 청일전쟁 이후 주둔 중인 威海衛의 군대 철병을 유예하거나, 이에 대신할 要地를 획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58)
그러나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중국보전」의 입장에 섰던 구가도 도쿠토미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가 관여하고 있던 「대외동지회」는 정부가 중국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에 대한 대응으로서 중국 정부로부터 복건성 불할양의 약속을 받아낸 것에 대해, 「정부의 조치가 이에 머문다면 동아시아 세력균형의 회복에 일말의 도움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장래에 방해가 될 소지가 있으니 외교의 실패로 본다」는 결의를 발표하였다.59) 구가도 이 조치를 외교상의 실패라고 규정하고, 그 이유를 첫째 이로써 일본이 타 열강의 분할을 인정한 셈이 되었다는 것, 둘째 장래 일본이 대만의 보호를 위해 대만의 對岸에 위치하는 복건성에 요지를 조차하려고 해도 이번의 불할양 약속으로 어렵게 된 점에서 찾았다.60)
결국 「중국보전」의 주장자들이라고 해도 중국 분할에의 참가 가능성은 늘 열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결과적으로 구가와 도쿠토미 사이에는 외견적인 요구 사항에 있어 합치할 개연성이 점차 높아져가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 개연성은 청일전후 「대외평화사업」을 방침으로 경제적 팽창을 지향하고 있던 구가의 입장에 도쿠토미가 접근해오면서 현실화되어갔다. 즉 도쿠토미는 이 시점에 오면 중국과의 관계에서 중,일간의 무역관계의 긴밀화를 내세우게 되는데,61) 이는 당시의 제국주의가 점차 영토획득 보다는 경제적 이익을 동기로 움직이고 있던 세계의 동향을 그 누구보다도 빨리 간파한 결과였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제국주의론으로 제시된다.
도쿠토미는 1898년 9월1일자 신문 사설에서 「나는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임페리얼리즘)를 주장하고, 안으로는 자유관용(리베럴리즘)의 정책을 주장한다」(괄호 안은 원문)62)고 밝히면서 스스로 제국주의자를 자처하게 되었는가 하면, 그 이듬해에는 「제국주의는 평화적 팽창주의이다. 壟斷, 독점이 아닌 의미에서의 팽창주의이다. 무역, 생산, 교통, 식민을 통해 일국의 이익을 확충하고, 민족의 발달을 기하는 것이다. 이른바 군비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방편이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제국주의를 준봉한다」고 언명하였다.63)
이상의 도쿠토미의 제국주의 주장은 당시 영국 사상계에서 전개된 제국주의 논의의 동향을 반영한 것으로 이를 둘러싸고 구가와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64) 청일전쟁 발발 이래 군비확장을 통한 대일본 건설의 대외팽창을 주장하던 도쿠토미가 세계 제국주의의 흐름을 반영하여 경제적 이권획득을 제국주의의 본질로 파악하게 된 것은 결과적으로 본래부터 일국의 생존을 위한 경제적 대외팽창이면 정당하다고 여기고 있던 구가의 주장과 일치를 초래하게 되었다. 구가는 처음에는 그러한 것은 제국주의가 아니라고 반론하였으나, 결국은 그의 주관적 의도와 상관없이 일본의 아시아로의 팽창을 포기하지 않는 한 도쿠토미와의 거리를 확보하기 어렵게 되었다. 1899년에 전개되는 중국을 둘러싼 구가의 논의는 대개가 경제적 이권 획득을 주장하는 것으로,65) 도쿠토미의 주장과 거의 유사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는 이제 바야흐로 시대는 제국주의 전성기로 접어들어,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생각하는 한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설 자리는 현저하게 협소해졌음을 의미하고 있다.
Ⅳ. 의화단사건과 만주문제
1900년 5월, 중국에서는 산동성을 근거지로 하는 의화단이 북경 근교까지 습격해오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중국에 주재해 있던 열국은 공사단 보호를 위해 5월31일(3000명)과 6월10일(2000여명)의 두차례에 걸쳐 공동 출병을 단행하였으나, 사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의화단은 6월20일 마침내 북경 공략에 성공하여 각 국 공사관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영국은 일본군의 증병을 정식 요청하는 동시에 이 사항에 관해 열국에 조회, 동의를 얻음으로써 일본군의 대량 파견을 실현시켰다. 즉, 일본 정부는 7월6일의 각의에서 제5사단의 증파를 결정하고, 이로써 일본군은 열국 연합군의 반수를 차지하면서 그 주력을 이루게 되었다.66)
구가는 당초 의화단 사건에 대해 중국에 흔히 있는 종교집단에 의한 소란이라고 보고, 오히려 대외문제가 증세의 구실로서 정치에 이용될 것을 우려하였다.67) 그러나 차츰 사태의 심각성이 드러나게 되자, 정부의 출병 결정에 지지는 하나 일본군은 오직 공사, 영사 및 거류민의 보호에만 진력할 것이며, 의화단 진압에는 가담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 이유는 진압의 장기화에 따른 군사비 조달의 곤란과 진압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의의 사태에 대한 책임 부담 때문이었다.68) 다시 말해 자칫하면 일본으로서는 별반 이익도 없이 다대한 손해만을 볼 수 있다는 판단이다. 단, 그는 사태 진정 후의 대책으로서 열국과의 협조 하의 중국 개혁의 추진을 제시하며, 그런 목적에서의 출병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한다고 밝혔다.69)
이처럼 의화단 사건 발발 당초 구가는 일본군 출병을 지지하되, 의화단 진압에는 가능한 개입하지 말고, 중국의 개혁을 포함한 사후 대책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고 있던 사후 대책의 골자는 열국 협조에 의한 중국의 개혁 및 중국의 「개발」에 있으며, 이는 「중국보전」을 전제로 한 것들이었다.
먼저 중국의 개혁을 통한 「중국보전」은 종래의 그의 지론이나, 이번의 사태를 중국 개혁의 호기라고 생각하고 그 주장에 한층 더 열을 올리게 된다. 다만 그의 논의 과정에서 중국 측의 개혁 주체에 관해서는 약간의 미묘한 변화가 보인다. 처음에는 康有爲나 孫文 등의 「혁명당」에게서 그 주체를 찾았으나,70) 후에는 光緖帝의 옹립하에 북경정부를 재건하고, 李鴻章, 劉坤一, 張之洞으로 하여금 개혁을 추진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71)
이어서 구가는 중국「개발」론을 전개하였다. 그의 개발론의 단초는 전 해 독일에 대해 논한 글 속에서 보인다. 그는 열강의 중국 침입이 결과적으로는 중국의 이익이 된다고 논하기 시작하였다. 그에 의하면 서양 열강에 의한 중국 각지에서의 세력권 형성은 반드시 분할이라고 할 수 없으며, 열강의 침입은 오히려 중국민족을 위해 계발의 동기를 부여하여 4억 중국민을 분발시키는 단서를 열게 될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는 독일의 경우를 예를 들어, 독일이 조차한 산동지역에서 「개발」에 힘을 써 유럽의 신문물을 중국에 이식한다면, 그 결과는 독일인의 이익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중국인의 이익으로 돌아가는 부분이 많을 것이라고 하였다.72)
그가 중국을 점령한 열강을 비난하던 자세에서 그들의 행위가 중국에 미치는 「개발」효과를 인정하게 된 것은 제국주의의 용인을 의미한다. 그는 사고를 전환하여 제국주의의 「개발」효과를 적극적으로 내세움으로써 일본의 중국 분할 참가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한 것이다. 그는 중국을 둘러싼 열국 간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중국을 개발하여 안전하게 세계의 대시장으로 만들 수 있을까」하는 점에 있다고 지적하고, 그 개발에는 열국의 공동 간섭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73) 그는 그 한 예로 구체적으로 철도부설의 문제를 들어 논하고 있다. 그는 금후의 철도부설을 중국의 「개발」을 유도하는 방향에서 검토하자고 하면서, 구체안으로 다음의 것들을 제시하였다. 즉, (1)배상금의 대부분을 중국의 철도부설비로 쓴다. (2)연합국의 대표로 구성되는 상설 열국위원회를 설치하여 철도 부설에 관한 계획에서 관리까지를 위임한다. (3)그 철도에서 얻어지는 수입을 가지고 열국의 손해를 점차 배상한다.74)
이렇듯 열국 간의 협조를 통한 중국의 개발을 역설하는 점에서는 도쿠토미의 견해도 얼마간 구가와 유사하였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도쿠토미는 구가와 동아동문회가 대방침으로 내세우고 있는 「중국보전」의 주장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후술할 동아동문회가 모체가 되어 조직되는 국민동맹회를 거론한 국민신문의 한 사설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금후 만일 동아시아의 시국이 변하여 중국을 보전하기 어려운 상황이 현출된다면 그에 어떻게 대처하려고 하는 것인가. 예를 들어 열강간에 분할의 논의가 일어난다면, 우리 일본은 그래도 여전히 이에 대해 오로지 보전을 주장해야 하는가. 시국의 변화에 관계 없이 미리 방책을 정해 놓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를 수행해야 한다는 생각은 기민하게 움직여야 할 외교 수단을 묶어두고, 융통성 있는 시책을 제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라고.75)
도쿠토미의 외교에 관한 관점은 각 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는 것이며, 이익을 위해서는 동맹도, 그 파기의 가능성도 항상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는 러시아에 대한 견제를 위해 영국과 독일간에 맺어진 협약에 대해 논평하기를, 이는 양국이 중국을 보전할 필요가 있을 동안만 유지될 것이며, 그것이 유지되기 어려운 상황이 되면 다시 협상을 맺어 각자의 이익을 추구할 것이라고 지적하며, 그런 상황에 이르러서도 일본은 보전 정책을 고수할 것이냐고 반문하였다.76) 도쿠토미의 중국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항시 구미 열강의 동향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그런 한 구가에서처럼 중국 개혁론은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
7월에 들어 의화단의 세력은 중국 북부로까지 뻗어나가 東淸철도를 파괴하는 사태로 발전했다. 이에 동 철도의 보호를 이유로 러시아군은 하얼빈으로 진군하고, 7월 하순에서 8월 초순에 걸쳐 하얼빈, 琿春, 愛琿 일대를, 나아가 10월 초에 가면 남만주 지역까지 점령을 완료한다. 이것이 러일 관계를 전쟁으로 이끄는 불씨가 된 만주문제의 발단이다.
러시아의 만주지역 점령의 움직임이 포착되자, 동아동문회는 국민의 여론 환기를 위해 그 해 9월 국민동맹회를 조직한다. 구가는 이 국민동맹회에 가담하여 10명으로 구성되는 협의원의 일인으로 동 조직에 관여하게 된다. 국민동맹회는 「중국보전」과 「조선옹호」를 기치로 내세우며 러시아의 만주 철퇴를 촉구하였다. 그들 일부에서는 벌써부터 개전까지 불사하겠다는 강경론도 등장하게 되는데, 이 즈음부터 구가의 견해는 강경화해가는 동아동문회의 핵심분자들과 조금씩 간격을 벌리게 된다. 구가의 러시아에 대한 입장은 그가 청일전쟁 시에 「북수남진」론을 제창한 이래 여전히 러일협조론을 견지하고 있었다.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한 당초, 이는 어디까지나 현지 러시아군의 거동이지 러시아 정부의 방침은 아닐 것이라고 한다든지,77) 러시아군의 만주점령을 위한 북경 철퇴를 시의 적절한 조치로 평가한다든지의 논조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78)
그러나 러시아의 만주점령이 확대되자, 구가는 러시아의 단독점령을 저지하기 위해 열국에 의한 공동 점령 구상을 제시한다. 이미 중국 북부는 실질적으로 열국에 의해 분할 점령당한 상태이므로, 차제에 아예 열국이 제휴하여 북부 및 만주 지역을 공동 점령지로 전환시킴으로써 러시아의 단독점령을 저지하자는 것이다. 그는 이의 실현을 위해서라면 러시아가 그 지역 점령을 위해 부담한 비용의 얼마간을 열국이 배상하는 것까지도 고려하고 있었다.79)
이 구상은 차츰 「중립지」구상으로 구체화되어간다. 중립지 구상이란 열국에 의한 공동점령지를 중립지로 만들어, 그 요충지에 일종의 「중재회」와 같은 것을 설치하고, 중재회에 상당한 권한을 부여하여 중국 북부의 중립지를 통치한다는 내용이다. 이 중립지 구상은 만주를 개방함으로써 그 지역과의 무역의 자유를 확보하려는 전망도 함께 갖고 있었다.80) 요컨대, 열국 공동관리 및 만주개방이 만주문제에 대한 구가의 해결 방안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이 주장은 러시아의 제2기 철병 약속 이행이 불발로 끝나 개전론이 고양되기 시작한 1903년 전반까지 반복된다.
한편, 도쿠토미의 국민신문도 만주문제에 대해서는 만주개방을 주장하였다. 러청밀약의 정보가 전해진 1901년 초, 동 신문은 「우리 일본 제국은 만주에 대해 추호의 야심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상업면에서 우리나라와 만주는 대단히 밀접한 이해관계가 있다」고 지적하며, 만일 상업상의 불이익, 불편을 초래할 시는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없다고 만주개방을 촉구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81) 또 다른 사설에서도 「우리는 굳이 의심에 찬 눈으로 만주에서의 러시아의 행동을 중지시킬 필요는 없으며, 함부로 이를 저지해야 할 이유도 없다. 만일 러시아의 만주 경영이 문명을 위해 만주를 개척하는 데에 있고, 그 목적이 세계의 시장을 위해 만주를 개방하는 데에 있으며, 철도 부설도 이를 위한 것이며, 광산의 발굴도 이를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이에 대해 이의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의 주장은 만주문제 보다는 조선문제의 최종적 해결이 우선이며, 그것은 러시아와의 협정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82)
이렇듯 의화단 사건 이후 발생한 만주문제에 있어 구가와 도쿠토미는 만주개방이라는 점에서 의견을 같이 하고 있었으며, 비록 조선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라는 단서가 붙기는 했으나, 쉽사리 러시아와의 개전으로 경사되지 않고, 러시아를 외교적으로 협조의 대상으로 고려하고 있던 점에서도 양자는 공통성을 보였다. 국민신문은 러시아가 제2기 만주 철병기한을 지키지 않은 후에도 「우리 나라는 러시아에 대해 하등의 다른 마음이 없다. 만일 러시아가 성실히 극동의 평화를 유지할 것을 목적으로 삼고 평화적 경영을 하려고 한다면, 우리 나라는 이에 협력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며 러시아에게 열국과의 협조를 촉구하였다.83) 도쿠토미는 어디까지나 러시아의 「사실상의 철퇴」와 만주의 「실제상의 개방」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84)
Ⅴ. 맺 음 말
1903년 6월10일,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교수를 주축으로 하는 7명의 박사들이 수상과 외무대신에게 대러 개전을 촉구하는 건의서를 제출한 것이 기폭제가 되어 일본의 여론은 러시아에 대한 개전론 일색으로 변하였다. 정부 내부에서는 이미 러시아가 제2기 철병기한인 4월18일을 어기자, 21일 가츠라(桂)수상, 고무라(小村)외무대신, 원로 이토(伊藤)와 야마가타(山縣)가 회동을 갖고 개전으로의 방침을 굳히고 있었다. 결국 이듬해 2월 러일전쟁은 개시된다.
지금까지 고찰해온 1890년대에 일본의 시대사조를 이끌었던 두 언론 지식인 도쿠토미와 구가가 보여준 대외인식론은 일본의 본격적인 제국주의 전환기에 있어서 존재했던 두 가지 유형의 담론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청일전쟁의 의의에 대해서 양자는 일본이 아시아지역에서 중국을 제치고 우월적 위치에 섬으로써 구미 열강의 대열에 진입할 계기가 될 것이라는 인식에서 일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일전쟁을 수습해가는 방식과 전후의 대외 방침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 양자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구가의 경우는 전쟁의 목적에 충실하여, 그것을 달성할 전망이 보이는 정도에서 전쟁을 수습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전후의 대외방침으로서는 조선 및 중국 남부로의 경제적 팽창이 바람직하다고 보고, 그를 위한 근거지 확보라는 차원에서 대만의 획득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도쿠토미는 이 전쟁을 가능한 확대하여 중국대륙의 일부를 할양 받을 수 있을 때까지 전세를 몰아감으로써 일본의 구미 열강 대열에의 진입을 확실하게 만들고, 이를 「세계의 일본」, 「대일본」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즉 적극적인 대외팽창을 이념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청일전쟁을 통해 드러난 이들의 입장 차이는 전후경영에 대한 견해의 차이로 이어졌다. 도쿠토미는 앞서 기술한 입장에서 자연히 국가의 정책으로서 군비확장을 최대의 목표로 내세우게 되며, 구가는 민정(民政)우선, 대외 「상권의 확장」의 입장에서 과도한 군비확장에는 줄곧 반대하였다.
그 후 1897년 말부터 개시되는 열강의 중국분할 문제를 둘러싸고도 양자는 다른 입장을 보이게 되나, 사태의 진전과 더불어 미묘한 공명판을 형성해가게 된다. 즉, 구가는 「대외경파」로 불리우는 부류의 인사들과 더불어 「중국보전」을 주창하며, 열강의 중국분할에 반대하는 태도를 보이게 된다. 중국 분할에 대한 그의 대항책은 중국 개혁을 통한 「보전」이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도쿠토미는 외교란 각 국의 실리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므로, 처음부터 외교의 방침으로서 「중국보전」을 내세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그 보다는 열강의 동향을 잘 살펴 일본도 경우에 따라서는 중국분할에 참가해야 한다는 논조를 폈다.
이리하여 양자는 「중국보전」과 중국분할 찬성이라는 상반되는 견해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중국에서의 이권 획득 주장이라는 면에서 서로 접근을 보이게 된다. 즉 구가는 열강의 움직임에 대해 「세력균형」의 관점에서, 도쿠토미는 반드시 영토 획득이 아닌 경제적 이득이라는 동기에서 제국주의가 움직이고 있다는 제국주의의 새로운 흐름을 흡수한 결과 이권 획득의 주장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양자는 그 후도 의화단 사건 이후 러일전쟁의 발단이 되는 러시아의 만주점령 문제를 둘러싸고, 열강 사이의 협조를 강조하는 점과 만주개방이라는 점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된다.
이상을 다소 단순화해서 도식화하면, 구가는 억제적 전쟁․전쟁처리론 - 군비확장 반대 - 「중국보전」 - 만주개방의 논조를 보였으며, 도쿠토미는 팽창적 전쟁․전쟁처리론 - 군비확장 찬성 - 중국 분할 - 만주개방의 논조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들이 보인 대외인식론은 그 시대의 대외인식론의 전형적인 두 유형을 제시하고 있으며, 따라서 청일전쟁에서 러일전쟁 사이에 전개된 다양한 논의는 두 유형 속의 어느 하나로 배치시켜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또한 이 두 유형의 대외인식론은 1920년대에 분기되는 외교를 둘러싼 아시아주의와 국제협조주의의 선구를 이루는 것으로도 자리매김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Views on the Foreign Affairs of the Japanese Intellectual
from Sino-Japanese War to Russo-Japanese War
- Centering on Kuga Katsunan and Tokutomi Sōhō -
Park, Yang-Shin
This thesis is to arrange the arguments about the foreign affairs of Kuga Katsunan and Tokutomi Soho, two intellectuals who had social influences from different standpoints in 1890s. Thus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draw two patterns of the views on the foreign affairs existing in Japan from Sino-Japanese War to Russo-Japanese War.
First of all, the two intellectuals fundamentally have the same recognition for the significance of Sino-Japanese War. That is, the War would allow Japan to stand on the superior position, leaving out China in Asia and to go into a line of the world powers in Europe and America. But they make the difference in the ways settling Sino-Japanese War and the views on foreign policy after the war. Kuga thinks that it's proper to settle the war at the point of achieving its purpose. As for the post-war foreign policy, he thinks it is desirable to expand economically to Chosun and the southern part of China. On the other hand, Tokutomi wants to confirm the going into a line of the world powers by expanding the war as far as possible and winning a triumph. Furthermore he presents the idea of positive expansion toward abroad.
This difference between their standpoints on Sino-Japanese War leads to that of views on the post-war domestic policy. Tokutomi puts up the expansion of armaments as the greatest purpose, while Kuga continuously objects to the excessive military expansion from the standpoint of priority of civil government.
They have different views around the issue of China division by the world powers starting from the end of 1897. Kuga shows the attitude of China preservation, which is opposite to China division by the world powers. And he asserts China reform to preserve China. On the contrary, Tokutomi considers it stupid to presents China preservation as foreign policy from the beginning, since the foreign affairs depends on the actual profit of the nation. Thus he develops the idea that Japan should participate in China division depending on the tendency of the world powers.
In sum they have the opposite ideas, China preservation and the approval of China division. But they show the common attitude toward the acquirement of interests in China. Finally over the issue of Manchuria occupation by Russia, the cause of Russo-Japanese War, they come to an agreement on the aspects of the emphasis on the cooperation among the world powers and the market opening of Manchuria.
In conclusion the views on the foreign affairs of two Japanese intellectuals suggests two typical patterns of that time. Therefore various arguments developed from Sino-Japanese War to Russo-Japanese War can be understood in the context of the two patter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