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손이 곱다고요? 제 손도 거칠고 많은 역경을 거쳤습니다.” 이운재가 하루라도 성한 적이 없었다는 손을 펴 보이며 웃고 있다.“손이 왜 이리 곱지?”
마치 오랫동안 펜만 잡았던 공직자와 악수하는 것 같았다.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넘버원 골키퍼 이운재(33·수원 삼성)의 손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의아해 하자 “골키퍼는 장갑을 끼잖아요”라며 픽 웃는다.
언젠가 대표팀 후배 GK 김영광(23·전남)의 손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슛한 공의 빠른 속도와 파워를 감당 못해 손가락이 자주 꺾이는 바람에 손가락 마디마디가 울퉁불퉁해진 모습이 팬들을 애잔케 했다.
그런데 웬걸. 그의 손은 그 흔한 굳은살조차 찾기 힘들었다. 마침 옆에 있던
탤런트 조형기도 “야! 골키퍼 손 치고 너무 곱다”라며 덩달아 놀라워했다. 앞으로 그를 ‘거미손’ 대신 ‘고운 손’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실제도 그럴까? 그는 “제 손은 무척 거칩니다”라고 실토했다. 공에 맞아 손가락이 비틀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이미 왼손 검지는 잘 접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이운재는 손가락으로 저 멀리를 가리키며 “아직도 할 일이 많고 팬들에게 받은 사랑을 경기장에서 보답해 드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골키퍼는 관록이 중요하다. 30대 중반인 프랑스의 바디앙
바르테즈(35)와 독일의 레만(37)이 이번 독일 월드컵에서 맹활약을 펼친 것을 볼 때 그는 아직도 전성기나 다름없는 나이다. 이운재는 팬들이 원하고 체력이 뒷받침된다면 2010년 남아공화국에서 개최되는 월드컵에 출전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될 경우 이미 1994 미국. 2002 한·일 월드컵에서도 태극마크를 달았던 그는 홍명보 대표팀 코치가 갖고 있는 월드컵 4회 출전과 타이를 이룬다.
■결혼한 이틀 뒤 합숙 훈련
그의 축구 인생은 화려했다. 그러나 환희만 있었던게 아니다. 경희대 1년 때 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로 뽑히며 두각을 나타낸 뒤 94
미국 월드컵 멤버로까지 뽑히며 일찌감치 승승장구했다. 당연히 96
애틀랜타 올림픽 때도 대표에 뽑힐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96년 초 폐결핵으로 장갑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미국 월드컵 후 자만에 빠져 술로 시간을 보내다 살이 너무 쪘고. 이후 무리한 체중 감량을 하다 오히려 폐결핵 3기로 선수 생활이 끝날 뻔했다. 월드컵이 낳은 자만과 방심이 시련을 불렀던 것. 폐결핵을 극복한 98년 말께부터야 비로소 운동을 재개할 수 있었던 이운재는 애틀랜타 올림픽과 98 프랑스 월드컵을 그라운드 밖에서 지켜봐야 했다.
프랑스 월드컵 한국-멕시코전이 열리던 그날 그는 4년간의 열애 끝에 결혼식을 올렸다. 아내 김현주(36)씨와 만남은 94년 6월 처음 이루어졌다. 미국 월드컵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와 우연히 김씨와 처음 만난 그는 그 뒤로 100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데이트를 즐길 정도로 열렬한 사랑을 했다.
그러나 정작 결혼식 이틀 후 수원 삼성의 합숙 훈련에 참여하느라 아직까지 신혼여행을 못 갔다며 웃는다. 한·일 월드컵을 통해 화려하게 비상의 나래를 폈던 그는 ‘인생지사 새옹지마’를 가슴속에 새겨야 했다. 온 국민이 4강 신화의 감격을 겨워하던 그해 아내가 유산했다. 지금은 2003년 10월 큰딸 윤서. 2005년 11월 둘째 딸 은서를 얻어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아빠가 됐지만 당시만 해도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안긴 월드컵이었다.
▲“아내와 두 딸은 제 재산 1호예요.” SBS TV <김승현· 정은아의 좋은 아침>에 출연한 이운재가 아내와 딸을 보면서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다.■피로하면 눈 충혈 백내장 진단
골키퍼로서 단신(182㎝)인 그가 어떻게 필드플레이어에서 골키퍼가 됐을까. 슈팅과 파워 면에서 뒤지지 않았지만 고등학교(청주상고) 때부터 지구력에 문제가 생겼다. 그것을 안 유인권 감독이 그를 골키퍼로 변신시켰다.
89년 고 1 때부터 골키퍼로 탈바꿈한 그는 피눈물 나는 혹독한 훈련을 거쳤다. 무릎이 깨지는 것은 다반사고 늘 부상을 달고 다녔다. 3학년이 되며 그는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대통령배·추계 연맹전·전국체전에선 3관왕에 오른 청주상고의 핵심은 그였다. 대통령배에서는 한 골만 내주는 자린고비 문지기의 솜씨를 뽐내며 최우수 선수상을 받았다. 골키퍼가 된 지 2년 만에 MVP가 된 것.
당연히 각 대학으로부터 스카우트 손길이 뻗쳤다. 그는 기라성 같은 선배들에게 밀려 주전을 꿰차지 못할 명문대보다는 처음부터 경기에 나설 수 있는 실리 있는 대학이 낫다고 판단. 경희대로 진학했다. 경희대에는 지옥훈련을 시키는 사령탑으로 정평이 난 차경복 감독이 있었다. 판단은 옳았다. 그는 골키퍼로 전향한 지 3년 만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그 비결을 물었다. “골키퍼는 손과 발이 아닌 눈과 입으로 하는 포지션입니다. 순간과 찰나에서 동물 같은 감각으로 온몸을 던져 공을 쳐내고 잡아야 하는 바탕에는 시시각각을 꿰뚫을 수 있는 또렷한 시야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전 좋은 시력을 유지하기 위해 인터넷은 일절 하지 않습니다.” 덧붙였다. “고등학교 시절 버스를 탈 때마다 휙 지나치는 자동차의 번호판을 빨리 읽으며 순간 상황을 파악하는 순발력을 키웠습니다.”
그는 지금 시력이 1.5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2.0이었을 정도. 하지만 그는 백내장을 앓고 있다. 조금만 피로하면 눈이 충혈된다. 수술할 정도는 아니고 시력에도 큰 지장을 주지 않아 칼은 대지 않고 있다.
“▲(1)첫돌 기념 사진이다. 지금 봐도 누구나 이운재임을 알 수 있다. (2)대성중 2학년 때 한 대회에 출전. 여관에서 친구들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앞줄 왼쪽이 이운재.(3)고등학교 3학년 때 한 대회에서 결승전을 앞두고 찍었다. 국가대표 유니폼만 입으면 지금의 이운재로 착각할 정도다.(4)여섯 살 때 엄마·누나들과 함께 공원에서 찍었다. 오른쪽이 배구 국가대표를 지낸 큰누나 이영옥씨.(5)청주상고는 91년 전국체전에서 우승. 고향에서 카퍼레이드를 했다. 앞줄 왼쪽 두 번째가 이운재.■5남매 중 국가대표가 두 명
그는 어떻게 축구선수가 됐을까?
73년 청주에서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국가대표 주장과 골키퍼로 든든하게 보여 막내라는 것이 언뜻 믿기지 않는다. 집안은 넉넉지 않았지만 자식들은 최고로 성장했다. 이운재보다 열세 살 위인 형도 운동 선수였다.
고등학교 때 180㎝ 100㎏이었던 형은 세광고에서 야구 선수로 뛰며 스타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장남은 공부해서 성공해야 한다는 부모의 뜻이 너무 완강해 결국 형은 고등학교 때 야구를 그만뒀고 대학에서 전기과를 전공했다.
대신 큰누나(영옥)가 배구 국가대표 선수로 대성했다. 청남초-서울 일신여중-일신여상-도로공사에서 선수 생활을 한 큰누나는 그가 축구 선수가 되겠다고 결심하자 가장 반대했다. 고된 훈련과 합숙 등 운동 선수가 겪어야 하는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동생이 공부를 해서 평범한 직장인이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이 4강 위업을 이루는 쾌거를 본 그의 꿈은 국가대표였다. 그는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초등학교 4학년 때 축구부에 몰래 가입했다. “축구부 가입 신청서를 제출하기 위해선 주민등록등본까지도 함께 내야 했는데 부모님들이 그것을 떼어 줄 일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혼자서 동사무소로 가 등본을 떼 제출했죠.”
그의 성실함은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도 자세히 묘사돼 있다. 행동 특성은 “차분하고 성실한 학생으로 맡은 바 책임감이 강하고 말 없이 행동하는 성격”이다. 이후 그는 순발력과 안정감이 뛰어나며 낮고 빠른 킥 등 골키퍼 조건을 완비한 초특급 수문장으로 성장했다.
■대한민국 희망의 손
그는 매 경기 숙명을 안고 그라운드에 선다. “경기 내내 불안에 떨면서도 ‘절대 냉정하고 침착하자’며 마음을 다잡고. 실력을 과시하기보다 실수하지 않는 게 최우선이라며 먼저 나 자신을 지키는 것이 수문장의 숙명”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는 독일 월드컵이 못내 아쉽다고 했다. 토고전(13일)은 공교롭게도 결혼 8주년 기념일이어서 아내에게 월드컵 해외 원정 첫승이라는 선물을 주긴 했지만 아내의 바람인 16강 선물을 주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했다.
특히 스위스전에서 그는 통산 A매치 100경기에 출전. 한국 골키퍼로는 처음으로 센추리클럽에 가입했다. 94년 3월 5일 미국과의 친선경기에서 국가대표 데뷔전을 가진 지 12년 3개월 8일 만에 대기록을 세웠다. 그는 “국민의 염원인 16강에 들지 못했는데 그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라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팬들은 그가 있기에 든든하다. 팬들은 공의 낙하 지점으로 뛰어올라 쳐내는 그의 손끝을 보면서 쾌감을 만끽한다. 그의 손이 ‘희망의 손’이다. K리그에서 펼쳐질 그의 ‘
마법의 손’이 기대된다.
■이운재는 누구?
▲생년월일:1973년 4월 26일생(양력)
▲출생지: 충북 청주
▲신체 조건: 182㎝. 88㎏
▲혈액형: B형
▲출신 학교: 청남초-대성중-청주상고-경희대
▲A매치 데뷔: 1994년 3월 5일 미국전
▲주요 경력: 96
애틀란타 올림픽 대표. 2000년 북중미 골드컵 대표. 2001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대표. 94·2002·2006 월드컵 대표
▲가족: 부인 김현주씨와 2녀. 큰딸(윤서·3). 둘째(은서·8개월)
▲좌우명:내 자신을 가장 먼저 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