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유(中有)와 천도재(薦度齋)>
천도재
중유(中有, skt. anatara-bhava)는
불교에서 말하는 사유(四有)의 하나를 말한다.
밀교에서 인간 일회의 삶을 「생유(生有)―본유(本有)―사유(死有)―중유(中有)」라는
4유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 모태에 의탁해 태어나는 순간을 생유(生有)라 하고,
• 출생 후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생전의 존재를 본유(本有)라 하며,
• 죽는 순간을 사유(死有),
• 죽어서 다시 태어날 때까지의 존재를 중유(中有), 혹은 중음(中陰)이라 한다.
따라서 중유는 중생이 죽어서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 49일 동안의 중간존재이다.
이때 영혼이 머무는 곳을 중유(中有), 중음(中陰) 중간계(中間界) 등으로 불린다.
남방 상좌부불교에서는 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生有)과
삶의 과정(本有)과 죽음의 마음(死有-死沒心)의 세 단계만을 인정하지만
밀교(密敎)에서는 사유와 생유 사이의 과정으로 중유(中有)를 인정한다.
중유는 최소 7일에서 최대 49일간이라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중생은 윤회한다고 한다.
중유(中有)란 명부시왕전(冥府十王殿)에서 염라대왕을 비롯한
시왕(十王)으로부터 재판을 받고 있는 기간인데,
7일마다 시왕을 바꾸어 가며 생전에 저지른 죄업을
49일 동안 일곱 번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따라서 죽음 즉시 다음 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승도 저승도 아닌 곳(중간계/中間界)에서
49일간 중유의 존재로 머물며
심판을 받은 뒤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게 된다고 본다.
이점이 남방불교와 다르다. 남방불교에서는
죽음과 동시에 ― 사몰심(死沒心)이 일어나고
그와 동시에 재생연결식이 일어난다고 한다.
따라서 남방불교(테라와다불교)에서는 천도재(薦度齋) 같은 것이 없다.
중유(中有)는 윤회과정의 휴면(休眠) 상태 같은 것이다.
그러나 남방불교에서는 마음작용의 중지, 수면(睡眠) 상태,
휴면(休眠) 상태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남방불교에서는 중유라는 개념이
세속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망상이라고 생각한다.
북방불교에 있어서 죽음에 대한 관점은
근본불교와 방편불교의 이중적 구도 속에 놓여 있다.
이러한 두 가지 흐름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
설법한 근본불교는 자력수행의 인식론적 각성을 중시하는 것이었으나,
대승불교에 와서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신앙적 측면으로
발전해 나간 데 따른 것이다.
대승불교의 내세관에 따르면, 사람이 죽은 뒤에 전개되는 세계는
두 차원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첫 단계인 중유로서의 머묾이 지난 다음 비로소
두 번째 단계인 새로운 생을 받게 되는데,
이때 ‘중유’와 ‘내세’는 모두 사후에 속하지만 큰 차이를 지니고 있다.
죽은 직후에 머무는 중유의 단계는 그곳에 머무는 존재양상에서부터
시공간의 개념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일원화돼 있다.
시간적으로 중유에 머무는 기간은 49일로 설정돼 있으며,
공간적으로 중간계(中間界)에 머무는 곳은 이승도 저승도 아닌
중간지점에 해당한다.
이러한 시공간에 머무는 존재는 생전의 정체성을
그대로 지닌 영적 존재이고, 이 중유의 단계를 지나면
새로운 내세를 받게 되는데,
이때의 내세는 개인의 생전 업(業)에 따라 차별화되고
다원화된 모습을 지니게 된다.
육체의 주인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은
육체라는 허물을 벗고, 49일간 중음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모태를 만나 새로이 태어나게 된다.
죽음이란 영혼(아뢰야식)과 육체의 분리를 의미한다.
이때의 영혼을 중음신(中陰身)이라 하며,
여기서 중음신(中陰身), 영혼, 아뢰야식이 같은 개념인데,
아직 사후 인생이 결정 안 된 불귀의 혼인 셈이다.
중유의 존재는 일종의 영혼 상태로서 의식으로 성립되며,
향을 음식으로 하기 때문에 건달바(乾闥婆:食香)라고도 한다.
흔히 속설이나 무속에서 망자의 혼백(영혼)이 한이 많아
승천하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고 있다는 말도 따지고 보면
중유 상태로 있다는 말이다.
이 중유기간인 49일 동안 7일마다 천도의식(薦度儀式)을 행하며,
특별히 49일째 되는 날에 행하는 천도재(薦度齋)를 사십구재(49齋)라 한다.
이 칠칠재를 다른 말로는 중음법요(中陰法要)라고도 한다.
이러한 내용이 <약사여래본원경(藥師如來本願經)> 등에
잘 나타나있다.
49일 동안 7번 유가족이 영가를 위해 천도재를 올리며 공덕을 지어주면,
비록 나쁜 업을 지은 영가라 해도 불보살의 가피 덕분에
고통의 세상으로 나아가지 않게 되고, 영가들은 훌륭한 공덕을 이루어
보다 더 좋은 인연처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요즘은 7번 행하는 천도의식을 생략하고 마지막 49재만 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이러함은 전혀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설화로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남방불교에서는 이런 행위를 망상이라 폄하한다.
중유란 ‘혼(魂)’이라든가 ‘자아’가 항상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브라만교 등의 일반종교인들이 죽어서 다시 태어날 때에도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 분명히 있다든가
죽은 후에 혼(魂)이 다시 태어날 때까지
조금 시간적 간격이 있다는 등으로 생각하면서 형성된 개념이다.
그것이 브라만교가 왕성하던 인더스강 유역이나
인도의 북서부에서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등의
부파(部派)에 전입되고, 이것이 대승의 유식불교에 전승됐으며,
특이 밀교 계통에서는 중유의 과정을 심각하게 인정해
중유(中有) 혹은 중음(中陰)이라 부르는 개념이 성립됐다.
따라서 이에는 불교가 부파불교시대를 지나 대승불교가 형성되고,
특히 밀교가 중국을 거쳐 오면서 꾸며지고 첨가된 허구의 내용들이 많다.
이러한 것이 자칫 외부에 알려질 경우,
불교는 미신이라는 지탄을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조선불교유신론>을 펴낸 한용운(韓龍雲)은
시왕(十王)은 불교 고유 신앙이 아니라며 시왕 무용론을 펴기도 했다.
그는 시왕신앙을 칠성(七星)과 산신(山神)에 대한 신앙과 마찬가지로
저급한 불교문화의 한 형태라고 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매우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져
여전히 불교문화의 한 면을 이루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고,
이걸 이용해 상업적으로 천도재(薦度齋)를 지내는 등 부작용 또한 크다.
기실 천도재를 올리는 행위도 망자를 위함이 아니라
산 자들의 위안일 뿐이다.
그렇게라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위안잔치에 불과하다.
근본불교 입장에서는 죽은 사람의 혼백(영혼)이나
나의 주체가 되는 변치 않는 영혼은 없다고 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불교에는 ‘영혼’이라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천도재는 비불교적인 의식이다.
다만 있다면 마음이 있는데 이 마음은 매 순간 조건에 의해 일어났다
조건에 의해 사라지는, 즉 찰나 생멸한다.
무명의 중생은 찰나에 일어나는 마음을
‘나’라 하고, 나의 영혼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사람에겐
영혼이 있고,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없다고 하겠다.
특히 우리나라 불교는 선(禪)불교를 지향한다고 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밀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불교이고,
전통적인 샤마니즘(무속)의 영향까지 받음으로써
더욱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부처님 원음과는 동떨어진 기복불교로 흐르고 있다.
불교의 가장 강한 특징이
부처님이 “와서 보라!”고 하신 말씀처럼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교의인데,
부파불교시대에 비과학적인 허황된 이론들이 너무 많이 편입돼
불교철학을 우습게 만들어 놓았다.
다만 불교 우주관이라는 측면에서 종합적인 얼개를 구성함에
구색을 맞추기 위해 필요한 부분을 신화적으로 상정됐던 것이므로
교훈적으로 이해하는 범위에 한정해야지
이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용해서 천도재(薦度齋) 같은
상업적인 행위로 흐르면 곤란하다.
이상을 정리해보면,
천도재는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僞經)에 의해 행해지는 밀교적 의식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의 입장에서 본다면 매우 비불교적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천도재란 있을 수가 없다.
인간 내세의 문제는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다.
부처님은 이런 내세 문제에 대해 언급하기를 피하셨다.
인간 의식의 범위를 넘어선 문제란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런 내용의 질문을 받으시면 무기(無記)를 행하셨다.
따라서 과학적으로 실증할 수도 없는 허황된 이론에 매달려
영업적으로 천도재를 지내는 사찰의 잘못된 행태에 말려들지 말아야 하겠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고,
오늘날 내세란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허황된 이론을 펼치고 있는 것은 넌센스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을 교의들은
과감하게 폐기해야 한다. 그래야 당당하게 다른 종교에
앞서 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거듭 확실히 해야 할 것은,
부처님은 내세관이나 윤회설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았다.
다만 당시 인도사회에 윤회설이 일반화돼 있었기에
후세 사람들이 관념적으로 받아들였을 따름이다.
그리고 이런 환상의 이론들이 난무하면
자칫 미신으로 타락할 우려마저 있다.
더군다나 이런 허황된 이론으로
신도들을 향해 영리행위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사기 행각이다.
이런 사기행각을 일삼는 승려는 사이비라 할 수밖에 없다.
사찰에서 이런 사기 행각을 버젓이 하고 있다는 것은
지탄의 대상이 돼야 한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