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사도직의 향상을 위한 제언
장익 주교(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원장)
말씀을 더 참되이 듣고 나누고 살기 위하여
지난 1998년 봄 로마에서 열린 아시아 시노드에서 누구나 평소 그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오던 바가 하나의 구체적 제안으로 채택되었다. 계시헌장은 특히 그 6장에서 '교회의 모든 선교는 그리스도교 자체와 마찬가지로 성서의 힘으로 자라고 지배를 받아야 하는 만큼(제21항), 그리스도 신자에게는 성서에 다가갈 길이 널리 열려 있어야 하며 하느님 말씀에 봉사하는 교역자들이 성서의 양식을 하느님 백성에게 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제22항)'고 분명히 강조하였다.
그럼에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있은 지 3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성서에 대한 신자들의 날로 커 가는 갈망과는 멀리, 성서 분야의 양성 과정이 지나치게 학문적인 쪽으로, 즉 성서에 관한 공부로만 치우쳐 있어, 특히 신학교에서 성서사도직 양성 쪽의 진지한 보완이 매우 아쉬운 형편이다. 한편, 사목자와 수도자의 힘만으로는 성서에 맛들여 살고자 하는 많은 교우들의 요청에 다 부응할 수도 없거니와 교우들 스스로가 교회 안에서 성서에 올바로 젖어들도록 서로서로 힘이 되는 것 또한 매우 바람직한 일이므로, 좋은 평신도 성서 봉사자들의 알찬 양성이 절실히 필요하다.
성서 봉사자들은 이미 저마다 몸담고 있는 모임이나 운동 나름의 고유한 방식으로 양성되고 있다. 그러나 더 기본적으로 봉사자 누구에게나 다 같이 필요한 깊이 있고 균형 잡힌 자질과 특성을 제시하고 정립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 충실한 양성에 앞서 더 근본적으로 성서사도직의 여러 형식과 운동이 견실하고 균형 있게 평가․전개되도록 돕는 기준을 정립하는 일도 중요하다.
물론 봉사자 양성이라는 중요한 과제와 아울러 신학교 성서 양성 과정의 내실 있고 유기적인 재구성도 절실히 요청되고 있으나, 이 중대한 과제는 양성 전반의 방향을 책임지고 결정하는 주교들과 담당 교수들의 몫이므로 이에 관해서는 다른 자리에서 따로 심도 있게 다루기로 한다.
여기서는 우선 앞서 말한 성서사도직의 내실을 가늠하는 기준과 평신도 봉사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과 특성을 간략하게 제시하여 성서사도직에 임하는 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고자 한다.
이 글의 내용은 1998년 아시아 시노드의 제안을 이어받아 금년 초봄(1999. 3.1-5) 아시아 주교회의연합회(FABC) 성서 담당 부처 주관으로 말레이시아 조호르(Johor)에서 열린 제2차 성서사도직 주교 연수회(BIBA II: The Second Bishops' Institute on the Biblical Apostolate) 에서 진지하게 논의하여 합의한 결실이다(FINAL STATEMENT AND PROPOSITIONS). 이제 남은 것은 이러한 값진 공동 인식을 각 지역교회의 사도직 현장에서 올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여 다함께 실천에 옮기는 일이다.
I. 성서사도직의 내실을 가늠하는 기준
날로 커 가는 성서에 대한 신자들의 갈망에 부응하고자 다양한 성서 모임과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현상은 참으로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성서사도직의 여러 길을 열어 가는 주역들, 또 이에 동참하기를 원하는 이들, 이러한 노력의 내실을 가늠하여 날로 향상하도록 지도할 책임이 있는 사목자들, 이들 모두에게 건전하고 균형 잡힌 도움이 될 만한 준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성서 모임이나 운동을 구상하고 전개하는 이들로서는 자기들이 펼쳐 나가고 있는 일이 과연 온전한지 아니면 더 보완해야 할 측면이 있는지 분명히 알아야겠고, 성서에 맛들이고자 하는 교우들로서는 어떤 주어진 모임이나 운동의 형태가 건실한 것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으며, 사목자들로서는 여러 가지 방법과 내용을 잘 식별하여 성서를 찾는 교우들을 이끌어 주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기준: 기도하며 읽기
하느님께서는 성서를 읽는 이에게 말씀을 건네 오신다. 따라서 그 말씀에 올바로 화답하는 길은 곧 기도이다. 성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 뵙게 되는데, 말씀이신 그리스도 자신이야말로 성서의 뜻을 풀어 주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를 만나 뵈올 마음의 준비를 하자.
기도하고, 묵상하고, 관상할 시간을 따로 내자.
둘째 기준: 성서의 문자적 뜻에 반드시 주의하기
성서 공부의 방법은 본문의 원래 의미를 밝혀 낼 수 있어야 마땅하다. 학문적 성서 연구의 결실이 큰 도움이 되지만, 처음에는 무엇보다도 본문 자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성서학 연구의 결실을 참작해야 한다 함은 본문에 임하는 데 있어 마치 탐정이나 형사처럼 우선 주어진 모든 요소를 두루 살펴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초동 수사에서 미리 결론을 지을 수 없는 것과도 같다. 이런 의미로 본문의 원래 뜻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그 뜻을 삶에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성서 본문에 담긴 다양한 요소들을 주의 깊게 살피자. 마치 탐정처럼 본문을 읽어 나가자.
성서에 나오는 관련 구절과 주해 등을 참고하며 도움을 받자.
주석서도 필요에 따라 활용하자.
성서에 나오는 여러 요소들을 육하 원칙에 따라 잘 살펴보자.
셋째 기준: 성서 전체를 하나로 보기
성서는 그 전체를 통으로 보아야 뜻이 제대로 드러난다(교의헌장). 이렇게 물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나는 성서를 통해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에 관하여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성서에 서술된 사건 하나하나는 구원사 안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가? 성서와 교회 생활 양자에 공통되는 비슷한 사건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성서 전체를 보자. 성서 안에, 특히 주일 독서에서 서로 상관되는 대목에 주의하자.
넷째 기준: 교회의 전승과 믿음의 유비(類比, Analogia Fidei)를 존중하기
올바른 성서 공부는 뜻풀이와 주석과 교회사, 이 세 가지를 두루 고려해야 한다. 교회는 그 유구한 역사에 걸쳐 신앙의 눈으로 성서를 읽어 오면서 더없이 풍부한 경험의 유산을 쌓았다. 그러므로 올바른 성서 해석 방법은 신앙에 근거한 다른 발언들과 교회 전체의 산 전승을 제대로 알아듣게 해야 마땅하다. 이를 일컬어 신앙의 유비라 한다. 신경, 전례문, 교의적 발언 등도 여기 포함되며 개인적인 성서 공부나 학술적 성서 해석에 있어서도 방향 제시의 성격을 띠어야 한다(교의헌장). 뿐더러 교부들의 성서 풀이와 성인들의 삶을 통한 성서적 증언, 그리고 성인들의 삶과 순교자들의 증거를 통한 해설도 성서의 뜻에 나아가는 길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4차원의 성서 뜻풀이는 이러한 길을 열어 왔다.
우리보다 앞서 교회(전승) 안에서 성서를 읽어 온 분들을 생각하자. 구체적으로 교회의 가르침(회칙, 사목 교서 등등)에도 유의하자: 성서 해설서에 나오는 뜻풀이, 성인들과 교부들의 말씀.
다섯째 기준: 성서와 전례의 연관성을 보기
전례를 통하여 성서에 가장 효과적으로 다가가는 길은 말씀의 전례이다. 특히 미사 거행 중의 경우가 그렇다. 성서의 실용 방법, 곧 성서사도직을 올바로 수행하려면 전례 자체에서 활용되는 요소들 - 구약과 신약의 상관 관계, 화답송, 신경, 기도, 지향 기도 등 - 을 반영해야 한다.
성서를 전례와 연관지어 읽자.
짤막한 대목에만 시야를 국한하지 말자.
여섯째 기준: 현장화와 토착화
-현 시대와 상황을 바로 보기-
실다운 성서사도직 형태는 우리가 사는 오늘의 세계 상황과 문제들을 올바로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 성서 본문의 현장화와 토착화를 통하여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 실생활과 밀착된 강론으로 이어지고 신경으로 확인되는 말씀의 전례는 이런 의미에서 좋은 모형이 된다.
내 삶의 책과 더불어 하느님 말씀의 책을 읽자. 우리의 삶과 우리 사회의 문제를 성서 말씀에 견주어 보자.
일곱째 기준: 나누기
참다운 성서사도직 형태는 성서를 중심으로 한데 모인 교회의 모습에 걸맞아야 한다. 무릇 교회란 모든 이가 참여하는 하나의 커다란 성서 나눔 모임이다. 여기에는 제 뜻을 말할 줄 아는 이들뿐 아니라 목소리를 못 내는 이들, 가난한 이들, 억눌린 이들, 또 순박한 이들도 다 포함된다. 남녀 노소, 빈부 귀천이 따로 없다. 대화와 나눔의 이 마당에서는 온갖 인생 체험이 어우러지면서 성서를 함께 읽고 나누는 가운데 삶의 뜻을 깨치게 된다.
다른 이들이 성서 구절 구절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하는지 귀기울여 듣자. 누구나 인생과 신앙 체험이 따로 있으므로 저마다 할 말이 있다. 되도록 많은 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열린 성서 나눔 모임들을 마련하자.
여덟째 기준: 마음과 느낌을 존중하기
성서 모임에서는 참여자의 느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주관적으로 무엇이 있느냐 없느냐 여부는 그 사람의 느낌에 달려 있다. 그대 마음, 그리스도로 가득한 집이 되리니!
성서 말씀을 읽으면서 그대 마음에도 귀를 기울여라. 성서를 읽으면서 나는 무엇을 느끼며, 남들은 또 무엇을 느끼는가?
주님, 종의 마음에 말씀하소서. 제 마음이 주님께 답하리이다.
아홉째 기준: 살아있는 성서 되기
-예언과 관심의 길-
말씀에 따라 행동하고 말씀을 증언하는 사람이 되도록 돕는 성서 공부가 바람직하다. 성서를 읽는 일 자체가 그 사람을 살아 있는 성서로 만들어야 한다. 성독(聖讀, Lectio Divina)은 읽는 이를 변혁시키는 길이다. 성독은 사람을 복음화하며, 그 사람 자신이 복음 전달자가 되게 한다. 말씀을 묵상하는 이는 그 말씀으로 형성되고 그 말씀을 중개한다.
우리 자신이 어떻게, 또 누구에게 살아 있는 성서가 되어야 하며 말씀의 중개자가 되어야 할지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