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가 상황이 1년 넘게 지속되고 있지만,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아직 본격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현재 유가와 그 영향력이 과거와 비교해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실질유가와 석유영향력 계수를 통해 알아본다.
국제유가의 오름세가 심상치 않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동남부 해안을 강타함으로써 서부 텍사스산 중질유(WTI) 가격의 70달러선 돌파가 이미 기정사실화되었고, 지난 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움직임을 보였던 두바이유마저 연초 대비 70% 이상 크게 올랐다.
그러나 유가의 이 같은 가파른 오름세에 비해 그것이 성장이나 물가 등 우리 경제에 미친 파급효과는 당장은 그다지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작년 8월 이후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전년동월 대비 평균 3% 내외의 수준으로 그 전 1년 동안에 비해 오히려 0.5%p 정도 낮아졌다. 국내총생산 증가율은 지난 1분기에 2.7%, 2분기 3.3%로 전년도 같은 기간에 비해 상당히 하락하는 경향을 보이고는 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것이 고유가의 직접적인 영향이라기보다는 수출증가세 둔화와 내수회복 지연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실질유가 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아
이처럼 고유가가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그다지 크게 나타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대략 두 가지 정도로 생각된다. 우선, 지금의 고유가 상황이 이른바 ‘오일쇼크’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높은 가격수준은 아니라는 점이다. 명목유가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기 시작한 지는 이미 오래다. 그러나 물가 변화를 감안한 실질유가 개념으로 살펴 본 지금의 유가는 과거 1, 2차 석유파동 당시만큼 높은 수준은 아니다.
원화표시 실질유가는 두바이유의 달러표시 월평균 현물가격에 ‘환율/GDP디플레이터’를 곱한 값이다.
실질유가를 원화로 표시한 것은 석유의 실질가격을 달러가 아닌 원화로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실질유가를 산출하는 데 환율까지 적용하는 이유는 GDP 디플레이터와 마찬가지로 환율 역시 물가수준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원화표시 GDP로부터 산출되는 GDP 디플레이터가 국내경제 수준에서의 물가변동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면, 환율은 장기적으로 국내와 해외의 물가수준 차이에 관한 정보를 함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일물일가(一物一價)의 법칙이 성립한다고 가정하면, 환율변화는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 사이의 물가상승률의 차이로 정의될 수 있다. 따라서 1970년에서 2005년에 걸친 대미환율의 장기적 변화는 미국물가로 대표되는 해외물가 전반과 우리나라 국내물가의 변동의 상대적 차이를 의미한다.
<그림 1>에서 보듯이 현재의 실질유가는 과거 최고치였던 2차 석유파동 당시의 절반을 약간 상회하는 수준으로 나타난다. 실질유가는 우리나라 도입유종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두바이유의 명목가격에서 환율과 국내물가 변화의 영향을 제거한 값을 원화로 표시한 것이다. 국내물가 변동을 나타내는 지표로는 2000년을 기준연도로 한 GDP 디플레이터(deflator)를 사용했다. 이 같은 기준에 의하면, 두바이유의 명목가격 60달러는 실질가격으로 5만5천4백원으로 2차 석유파동 당시의 실질가격 최고치인 배럴당 8만8천6백원(1980년 1월)의 62.5%에 해당한다. 따라서 지난 1년 동안 유가가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자 및 생산자 물가나 국내총생산에 위험 수준의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앞으로가 문제다. 지금의 유가가 당장은 위험수준이 아니라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장기간 지속되면, 결국 우리 경제에 상당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현재 고유가 국면의 가장 큰 특징은 석유가격의 가파른 상승이 상당 기간 석유수요증가를 동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유가가 올라 석유수요가 줄어들고, 가격도 자연히 내리는 과정을 당장은 기대하기가 어려운 상태다.
<그림 2>에서 보듯이 1970년대 이후 발생한 네 번의 중요한 유가급등 사례들은 모두 전세계 석유수요의 일정한 감소를 초래했다. 특히 1974년의 1차 석유파동(1973년 말 1개월만에 3달러에서 13달러로 3배 이상 상승)과 1979년의 2차 석유파동(1979년 초 5개월 동안 15달러에서 39달러로 2.6배 상승)은 세계 석유소비의 증가세를 마이너스로 반전시켰다. 이 같은 유가상승의 소비억제효과가 1990년의 걸프전 때와 2000년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목표유가밴드제(Oil price band mechanism)를 채택하면서부터는 다소 약해지는 듯하다. 지금의 다섯 번째 유가 상승기에는 전세계적으로 보아 아직 석유수요의 위축현상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석유파동과 걸프전 시기에 작동했던 가격급등 메커니즘은 2000년의 네 번째 유가상승기를 거치면서 상당 부분 바뀐 것으로 보인다. 2003년 발발한 미국의 대 이라크 전쟁이 종료된 후 유가상승은 오히려 가속화되었다. 과거 유가급등의 주요 원인이었던 정치, 군사상의 우발적 충격에서 비롯되는 공급불안과 감소가 이제는 부수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뿐인 상황이 된 것이다. 그 대신, 세계 석유수요의 견조한 증가세를 공급능력이 충분히 감당하지 못한다는, 구조적이고 경제적인 이유가 핵심요인으로 부각되고 있다. 세계경제가 완만한 회복세를 보이는 가운데 중국, 러시아, 브라질 등 성장을 주도하는 개발도상 대국들의 석유수요가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으며, 여기에 지정학적 불안과 자연재해, 그리고 투기적 요인 등이 가세했다는 것이다.
또, 지난 1년 동안의 가파른 유가상승의 영향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그림 1>에서 실질유가와 GDP성장률 사이의 관계를 보면, 과거에는 유가상승의 영향이 성장률 추이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데는 대략 4~7분기 정도의 시간이 걸렸음을 알 수 있다.
우리 경제의 석유의존도는 하락 추세
고유가가 우리나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약화된 또 다른 논거로 석유에 대한 우리 경제의 의존도가 과거보다 낮아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경제성장에 힘입어 우리나라의 1인당 석유소비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한편으로 국내총생산에 대한 석유투입량, 즉 석유원단위는 1970년대 이후 두 차례 증가(석유효율의 하락을 의미함)와 감소(석유효율 향상)추세를 거듭해 왔다(<그림 3> 참조).
1970년대 내내 석유원단위가 높아진 데는 정부의 강력한 정책의지에 힘입은 중화학공업 성장의 영향이 컸으며, 1990년대 전반에는 세계적인 저유가 지속에 힘입어 자동차와 에어컨 보급 등이 석유소비가 크게 증가했다.
한편, 석유원단위의 첫 번째 하락기는 1980년대 전반의 중화학공업 구조조정기와 대체로 일치하며, 두 번째는 1997년 외환위기 및 IMF 구조조정 이후 현재까지의 시기다. 이 기간 동안 부가가치 생산의 핵심 축으로 철강, 석유화학, 시멘트 같은 전통적인 중화학공업을 대신해 상대적으로 석유를 덜 사용하는 전기, 전자 및 IT산업이 새롭게 급부상했다.
실질유가와 우리 경제의 석유의존도에 대한 이상의 결과를 종합해 명목유가수준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좀 더 정확하게 나타내는, 이른바 우리나라의 석유영향력 계수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석유영향력 지수는 가격변화를 감안한 실질유가에 우리 경제의 석유의존도를 나타내는 석유원단위를 일종의 가중치처럼 곱한 것으로 각 시점의 명목유가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물가에 대해 표준화함으로써 서로 비교할 수 있게 해 준다.
2차 석유파동 당시 유가가 최고점을 기록했던 1980년 1월의 석유영향력 계수를 100으로 했을 때, 현재 두바이 명목유가 60달러는 석유영향력 계수 53.7에 해당한다. 즉, 현재의 유가가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제2차 석유파동 당시의 절반이 약간 넘는 수준이라는 의미다(<그림 4> 참조).
고유가에 강인한 경제체질 만들어 가야
석유가 인류의 생존에 없어서는 안 될 자원이라는 사실에는 변화가 없다. 그러나 미국을 제외한 OECD국가 상당수는 소득증가를 동반하면서도 1인당 석유소비량이 더 이상 늘어나지 않고 있다(<그림 5> 참조). 일본이나 스위스 같은 나라들은 지난 십수 년 사이 1인당 석유소비량이 오히려 줄어들었다. 반대로 우리나라는 높은 소득증가세와 더불어 1인당 석유소비도 계속 빠르게 늘어나고 있으며, 러시아 같은 신흥경제권의 증가세는 더욱 가파르다. 석유수요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유가 못지 않게 우리 경제의 석유의존도가 높아지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한다. 그 동안 일정한 성과를 거두어 온 IT산업의 성장에 더해 서비스산업의 발전, 더 나아가 경제활동 전반의 지식화를 통해 고유가 환경을 강인하게 헤쳐 나갈 수 있는 경제의 체질을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