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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사회 속의 시인
무언가 블루진 같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기를 원했다.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도록 할 무언가를, 대량생산품 한 가지를.
앤디 워홀
다음과 같은 대화는 샌프란시스코의 택시 안에서든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구간의 기차 안에서든 혹은 서울행 비행기 안에서든 오갈 수 있다. - 공무여행 중이신가요? - 네 이만저만한 문학회의에 참석합니다. - 아 그러세요, 작가시로군요? - 네. - 그런데 무얼 그렇게 쓰시죠? - 아, 네, 그러니까 시집을 몇 권 냈습니다. - 아, 그러시군요. 그런데 생계는 어떻게 하시나요?
다른 편에서는 극단적인 반대를 우리는 발견한다. 지난 50년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명단에는 시문학으로 인해 명성을 얻은 남녀 작가들이 족히 3분의 1은 있다. T. S. 엘리오트(1948년)에서 비슬라바 심보르스카(1996년)까지.
처음 든 면은 시인의 일상이다. 그러나 그의 직업으로 겪는 대부분의 체험은 그 중간에 있다. 서구의 대중사회는 시인을 그들 무대 중 최고의 무대 위로, 즉 텔리비젼으로 올려주면서 동시에 최하급 독립 취업자들이 겪는 생존의 곤경에 붙들어 둔다. 사회가 그와 같은 한 사람을 마침 필요로 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말이다. 그리고 물론 또 시인이 사회의 이런저런 필요에 봉사하고 그것을 충족시키는데 어떻게 적합한가에 따라서도. 시인의 자살 후에 멋진 출판사가 멋진 판본을 만들어 내면 비로소 세상이 알아줄 획기적인 작품을 쓴, 모퉁이 선술집의 주정뱅이 천재로서의 시인. 달변에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시대정신의 주석자로서의 시인 혹은 소위 “여성의 기적”으로서의 여성시인, 오늘 여기에서 인정받고 자리잡은 토크쇼우의 스타 등.
이십 년 전에 글쓰기를 시작했던 한 사람을 상정해보자. 그가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라는 한 나라에서 때이른 급한 성공을 했다고 해두자. 그 나라는 오늘날의 대중사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한 두 권의 얇은 시집으로써 스타가 될 수 있었다. 진실이 조금만 있어도, 다시 말해 시의 약간의 더듬거림에, 그 언어에 반영되어 가시적인 세계 속의 균열이 조금만 드러나도 폐쇄된 나라의 독자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여기 한 사람이 우리 편에서 이야기하고 있구나. 여기 한 사람이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우리들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서야 겨우 이야기할 만한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구나” 하고. 그런 것은 언제나 당장 이해받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결코 완전하게 이해받지 않는다. 그것은 모더니즘과 그 이후의 모든 표징들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에는 우리들의 일상에는 없는 ‘올바른 행보’의 관점이 담겨져 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폐쇄된 사회의 독자들이란 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허용이 될 경우 (금지될 경우에는 몰래 비로소 제대로), 자기네 시인들을 칭송한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시인들에게 요구한다. 그들은 시인들이 주제에서 이탈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스웨덴 해안에서 구름이 어떻게 비치는지는 읽으려하지 않는다. 같은 발트해라도 자기 나라에 면한 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만 알려고 한다. 그들은 서방에서는 매우 드물고 (어쩌면 60년대에나 있었을 것이고), 오늘날 중부 유럽에는 전혀 없는 요구를 한다. ‘그걸 백치 같은 권력자들에게 보여 주어라! 그들의 면상에다 도전의 장갑을 던져라!’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상정한 이 시인은 그런 것들을 조금 보여주었던 것이다. 갇혀있음과 권력의 허위를 그는 언어라는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여주었다. 그의 뮤즈가 허락하는 만큼만 분명하게. 그다지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고. 그것만으로도 그를 독려한 독자들 뿐만 아니라 비밀경찰이, 겉보기엔 비의적인 시들 속에 얼마나 많은 현실적인 요소가 들어있는지 알아채기에는 충분했다. 국가 권력은 그가 고국에서 조금 덜 출연해야겠으며 조금 덜 출판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이 시인으로 하여금 결론을 내려 그 나라를 떠나 서쪽으로 향하게 하자.
서독의 어느 대도시에서 맞는 그의 첫날 이야기를 지어내 보자. 그가 무얼 할까? 세계의 보다 큰 절반을 그는 텔리비젼을 통해, 텔리비젼에 나오는 그대로만 알고 있을 따름이다. 세계의 다채로움을 그는 흑백으로만 알고 있다. 그의 소형 텔레비전 수상기가 그렇게 재생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비판적인 서쪽 공영 텔리비전 방송도 보기는 했다. 선전과 저녁 시간 이전 시리즈물 말고도. 그는 “크고 넓은 세계의 향기” 프로와 말보로 맨을 안다. 그는 래시, 플린트 스톤과 함께 그는 성장했고 우주선 엔터프라이즈호의 첫 모험들을 관심있게 보았었다. 우리 그의 방 벽에다 지미 헨드릭스의 포스터 한 장이 걸려 있게 하고, 핑크 플로이드의 판을 그의 동독제 전축에다 올려 놓아보자. 그런 것만 있었어도 그는 벌써 서쪽에 연고가 있거나 돈이 있은 특권층에 속했을 텐데. 그런데 이제 그가 여기 소위 씨티의 번쩍이는 세계 속에 서 있다. 여기 화려하고 요란스러운 거리를 걷는다. 쇼우윈도우 속에 휘황찬란하게 진열된 군것질거리와 마실 것들을 따라서. 여기서 그는 처음으로 돈으로 사는 여자들과 노숙자들을 공공장소에서 본다. 그리고 패스트 푸드와 음반가게들을. 세상에, 음반가게들을. 그리고 서점들, 동쪽에는 없었거나 비밀리에 유통되거나 혹은 그 선(選)이 조직적으로 훼손되어 있었던 모든 책이 있는 경이로운 서점들... 그리고 이탈리아식으로 혹은 스페인식으로, 중국식으로 혹은 프랑스식으로, 터키식으로 혹은 바로 “부르주아 독일식”으로 먹을 수 있는 밀집된 레스토랑들.
그에게 소박한 물신주의가 있다고 해 보자. 그를 어느 백화점에 들어가게 하고 바라보자. 그가 앞만 보고 곧장 문구용품부 방향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그는 예쁘고 섬세한 필기도구들을 몇 개 집는다. 저 건너편에 있을 때는 그는 늘 그런 걸 소망했었으며 ‘서쪽 아줌마’로부터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었다. 이제 그가 그것들을 모은다. 점점 더 탐욕스럽게 그는 필기도구들 더미 속에서 허겁지겁 움켜쥔다. 양손에 잡히는 만큼 긁어 모은다. 두 손이 떨린다. 우리는 놀라서 바라본다, 그가 갑자기 모든 필기도구들을 분류도 안한 채 원래 자리에다 되던지는 모습을. 저기 그가 벌써 백화점을 떠나고 있다. 으레 그렇듯 뛰쳐나간다. 발작증세이다! 거리의 하수구에다 구역질을 한다. 그 앞으로 번쩍번쩍 빛나는 승용차 차체들의 흥분한 듯한 미끄러짐.
그가 오늘 저녁 출연한다고 해보자. 서쪽에서의 첫 낭독회이다. 여기 그가 쪼그리고 앉아, 어느 시를 낭독할 수 있을지 보고 있다. 자신의 동독식 언어가 서독에서는 어떻게 들릴까? 누가 오기나 하겠는가, 이 작은 서점으로. 모든 것을, 그것도 동시에 제공하는 세계에서 낭독회 따위가 무슨 매력이 있기나 하랴. 꽤 지루하고 우중충한 세계에서 온 시들을 들으러 사람들이 온 단 말인가? 놀랍게도 서점은 가득 차 있다. 청중은 모두 선생과 서점주인여자들 그리고 싸인 수집가들로 보인다. 그 가운데는 비판적 표정을 지은 긴 머리의 유령같은 인물들도 몇몇 있다. 여기 있는 모두가 멋진 안경을 쓰고 있다. 그는 기를 쓰고 낭독한다. 이어서 그는 많은 질문을 받고 기꺼이 장벽 건너편 나라에 대하여 알려준다. 그 나라가 이미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된 후로도 몇 년 더 그는 이 일을 할 것이다. 문화정책이라는 이름의 진부한 것에 대하여 그는 이야기할 것이다. 즉 검열에 대하여. 여기 서쪽 사람들은 어째서 그런 것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묻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그들 세계의 자유를 확인하려고 그런다. 한 번 몸서리 치고 그리고 한 번 흡족해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 여기서는 그런 이들이 더 많은데 - 재빨리 서쪽의 검열을 지적하려고 한다. 시장이라는 검열. 어떤 시는 팔리고 또 어떤 시는 안 팔리는 것을 통한 검열 - 그리고 그 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안 팔리는 시는 비판적인 시, 자본주의가 찢어놓은 상처에 손을 대는 시라는 것이다 등등. 어쨌든 안 팔리는 시도 팔리는 시와 꼭같이 출판될 권리가 있다니. 우리의 시인은 놀라서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손은 허공을 휘저을 뿐이다. 필기도구들 앞에서도 결국 그랬듯이.
여기 이것은 그에게 교정에서 오가던 대화들을 상기시킨다. 이런 저런 음악가들이 마침내 장삿속에 넘어갔느냐 아니냐를 두고 치고 받을 정도까지 뜨겁게 토론한 곳 말이다. 그럼으로써 그 음악가는 시장이 강요하는 법칙들에 제 발로 몸을 내맡긴 거라고. 그런데 세계의 교정에서는 언제나 요절한 사람들이 더 성공한다. 그들이야말로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은 순수한 사람들이라고 학생들은 생각한다 - 예를 들면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죠플린과 시인 짐 모리슨, 그 해의 예를 들자면 말이다. 그밖의 그리고 그 이후의 다른 모든 것은 명백히 장삿속이다. 시장이란 사람을 하늘로 들어 올리기도 하고 쓰레기더미로 내동댕이치기도 한다. 아니, 혹 그렇지 않은가?
우리의 친구는 무언가 대꾸하기를 좋아한다. 일이 그렇게 간단할 수 없다는 점을 그는 시사하고 싶어한다. 그는 말이 뒤엉킨다. 실제로, 평가하지 않고 비교한다는 건 간단치 않다. 동쪽을 서쪽과 비교하는 것은 간단치 않다. 개방적인 사회의 한 현상을 폐쇄된 사회의 한 현상의 명칭으로 증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언제나 오직 예술 가운데서, 시 가운데서만 정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그런 식의 구실을 대곤 한다. 그리고 그 점에서 그가 옳기도 하다.
우리가 만들어낸 이 시인이 1989년과 1990년은 아주 침착하게 보내게 하자. 철의 장막의 붕괴에 감격하지만 그렇게 참여적이지는 않게. 그가 지원금을 탔다고 해보자. 독일 연방주들의 풍경안에는 그 비슷한 것이 많이 있으니 말이다. 그는 어느 작은 예술인촌에 앉아 있다. 이따금씩 그는 큰 세계를 내다본다. 그가 한번은 느긋하게 미국에서도 초대받아 텍사스 댈러스의 스틸 휠 콘써트에 간다고 해보자. 어느 대학의 초빙 시인이 롤링 스톤즈를 보러 가고 있다. 롤링 스톤즈를 보러 가는 초빙 시인 - 그게 지금 우리가 다루는 주제의 범위 안에서는 멋진 은유일 것 같다.
예술인촌에서부터 그는 나중에 다시 동독으로도 간다. 그가 머무는 동안에도 동쪽은 재빨리 변하고 있다. 녹색과 청색이 번쩍거리는 거대한 쥬유소가 있는 동독. 전에는 병맥주 뿐이었지만 이제 캔맥주가 있는 동독. 버거킹, 맥도날드 그리고 터키식 간이 음식점이 들어선 동독. 사탕색깔의 창녀들이 있는 회색거리들. 전에는 대상이 없어 잠복해 있던 낯선 것에 대한 증오가 이제 밖으로 터져 나온다. 이제 처음으로 외국인들이, 망명요청자들이, 무엇인가를 파는 사람들이, 사회구호비를 받은 사람들이, 너나 나처럼 보다 어두운 혈색을 띤 사람들이 정말로 눈에 보이게 오고 있다. 살인계획들과 살인이 벌어지고 있고, 이 사건은 신문에서 읽을 수 있으며 텔리비젼을 통해 전 세계로 방영된다. 광고는 비터펠트 상공의 하늘보다도 더 환하게 빛난다. 동독 축구 전국전이 한 개의 지역전이 된다.
우리의 시인은 유감스럽게도 축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2000년 6월 초 국제 펜 클럽의 한팀이 모스크바 협회와 겨루지 않았던가? 오히려 그 펜클럽은 모스크바에서 얻은 게 없었다. 아무튼 펜클럽은 체첸 전쟁을 시사는 했다. 그리고 한 가지 스포츠 종류에 경의를 바쳐, 대중은 서로 한 편이 되거나 서로 반대편이 된다. 그때그때 따라서.
독일 내에서도 그렇지만 놀라우리만큼 개방적인 국경을 넘어서도, 소위 문학업계는 매우 우호적인 업계라는 것을 시인은 배웠다. 고유한 행사들이 있다. 그런 행사들 중에는 물컵 하나만 앞에 놓고 하는 개인 낭독회가 그 시인으로서는 가장 마음에 든다. 그리고 또 소위 문학의 날 혹은 시의 밤 혹은 문학대화 혹은 문학 콩쿨들이 있다. 콩쿨은 공개적인 작품낭독경연으로 변질되고 있다. 그런 형식들은 그를 늘 매혹시키지만 또한 놀라게도 한다.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사업 자체는 실제로 대중에로 기울고 있다. 이곳에서 문학사업은 이벤트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개개인에게는 이따금씩 존폐가 달린 비탈길인데 말이다. 종종 우리는 무대에 속한 사람들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머리카락 속에 한 가닥 꿈의 잔재를 가지고, 자신의 책상을 떠나 있는 우리.
이 곳에서는 시인더러 확실히 보다 큰 스타인 록 스타 내지는 그 사이 훨씬 더 대스타가 된 매체의 스타 곁으로 조금 옮겨 가라고 한다. 여기서 시인은 텔리비젼에 적응해야만 한다. 독자가 언젠가 그를 실물로 보았을 때 느낄 전율이 틴에이져들이 기를 쓰고 외쳐대고 있는 무대 앞쪽 가장자리의 전율과 유사하리 만치 말이다.
혹은 “빅 브라더”라는 이름의 씨니컬한 프로젝트의 컨테이너 앞에서의 전율. 지어낸 이 허구의 인생 이야기 한복판에서 구토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벌써 그만큼 온 것이다. 불가피했다.
그러니까 나는 RTL II 텔레비젼 방송의 웹사이트를 클릭하여 빅 브라더 프로젝트1)에서 일어나고 있은 일을 라이브로 검색하고 있다. 젊은 사람들 몇이 한 동안 콘테이너 속에 살고 있고, 외부의 누구든 비디오 카메라를 통하여 아무때나 몰래 찾아가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나는 살갗이 갈색인 여자가 거기서 무얼 하는지를 찾아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가 아주 조용히 씹으려고 애쓰는 소리를 엿듣고, 이따금씩 음식에 관해 한 마디 하는 말을 엿듣는다. 별 것 아니다. 나는 충분히 인내심이 있다. 어쩌면 나는 무언가 보다 흥미로운 것, 자의로 감금된 사람들의 내밀한 생활에 대하여 내게 보다 많은 것을 누설하는 것을 건져낼 지도 모른다. 몸서리쳐질 정도로 끝간 데까지 와 있는 대중문화. 거대한 성공.
전체주의 국가에서 행해지는 전면적 감시에 대한 오웰의 표현, 여기서는 그것이 컬러 컴퓨터 스크린으로부터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나의 개념이 가는 전형적인 길. 즉 악의 총괄개념이자 불안의 환시(幻視)로부터 나와 표류하다가 그 개념은 불과 몇 년 안에 진부한 것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빅 브라더라는 개념 말이다. 그러나 내 자신이 비디오 카메라 하나를 택하여 여기서 나를, 관음증환자를 위하여 쑤셔넣어진 지원자들의 콘테이너 안이나 뜰 안을 보고 있는 동안은, 나 자신이 빅 브러더이다. 매체가 나에게 빅 브라더가 될 수 있는 권력을 주고 있다. 그리고 오웰이 환시속에 기술했던 그 불안이 다시금 여기 있다.
어쩌면 많은 청소년들은 화면에서 그와 똑같은 것을 동시에 보고 있는 동안, 불안과는 반대되는 감정을 느낄지 모른다. 그저 재미로 그들은 들여다본다. 마우스 클릭을 통하여 그들은 컨테이너 안에서 자기들이 제일 좋아하는 사람들을 정한다. 너무 적은 점수를 받은 사람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퇴출당한다. 다른 사람들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 언젠가는 쇼우가 끝난다. 2000년 6월에 이미 모든 것이 끝났다. 감각이 섬세한 이 게임의 “생존자”들은 돈도 벌고 어쩌면 이런 저런 스포트광고 계약 몇 개나 시트콤 계약을 따낼 것이다.
그런 매체작전의 미학과 정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사람은 아마도 자신의 재래식 취향만을 인정할 것이다. 이제까지 바로 독재자상으로 함의되었던 개념 하나가 유희적인 소극으로 다시 부활한다는 것 - 그걸 왜 나는 남들처럼 긴장을 풀고 웃어주지 못하는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내가 한 직, 간접의 경험들이 그러기를 가로 막는다. 익숙해진 특정보도 양식들, 뉴스 및 신문이미지들의 어떤 종류는 실로 빅 브라더와 비슷하거나 똑같은 방식으로 생성되고 있다. 실상 어떤 비매체적인 사건묘사와 매체적인 연출 사이의 차이는 이제 더 이상 본질적이지 않다. 화면이 옳다고 우리가 인정한다면. 대중이 옳다고 한다면. 종종 어리석음이 웅변으로 여겨지는, 서로 공유하는 최소한의 다양성 속에서의 삶을 포기할 수 없는 우리들 모두가, 우리들 자신이 옳다고 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것이 그걸까? 일의 흐름에서 아주 벗어나 버리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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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회에서 시인이 내는 목소리의 더듬거림은 텍스트의 진정성을 입증한다. 그렇다, 정말인가? 시나 소위 텍스트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문제는 퍼포먼스, 자기 표현의 방식이다. 잉에보르크 바하만의 이름을 딴 가장 유명한 독일어권 어느 문학경연, 산문은 제한되어 있던 그 대회에서 몇 년 전 한 작가가 낭독 도중에 면도칼로 자기 이마를 긋고 낭독을 계속했다. 카메라들과 신문들은 그 사건을 관심을 가진 대중속으로 실어날랐다. 짧은 명성. 만약 그것이 현실사회주의나 여타 독재 치하에서 있었던 일이라면 그런 행동은 정치적이었을 것이다. 거의 분신(焚身) 만큼이나 선정적으로 제반 상황을 시사했을 것이다. 만약 분신이었더라면 그에 대한 해석이 뒤따랐을 것이고 정확했을 것이다. 문학업계의 한 중심에서 그런 제스추어는 촛점이 흐려졌다. 여러 가지로 읽힐 수 있었던 것이다. 일각에서는 문학업계에 맞서는 절규로 읽힐 수 있겠지만. 우선적으로는 서방의 자본주의 논리 속에서 작동하는 대로 읽힐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작가는 자신을 대중속으로 내몰았다. 그는 시장의 법칙을 알아차리고 매체를 이용했다. 그는 영리했다. 어쨌든 당사자는 오늘날까지 그러하다. 그의 이름은 라이날드 괴츠이며 인터넷에 글을 쓰고 있고 팝 음악 등에서 현재의 유행을 다루고 있다. 그는 일부 유행하는 대중문화의 틀안에 그리고 그 가능성들 안에 있는 작가인 것이다.
기계는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다. 커다란 문이 활짝 열려있다. 그것은 영원 (명성의 영원, 얼마나 구식으로 들리는가, 독일 낙서화에서 명성이란 말은 그래서 영어 fame으로 쓰이고 있다)으로 들어가는 문은 아니다. 아니다, 그것은 그때그때의 매체가 담당하는 종류의 대중성 속으로 들어가는 대문이다. 자신의 삶의 한 부분이 흐릿한 텔리비젼 화면위에서 하나의 가면이 된다.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인습적인 문학방송과 잡지들은 그 독특한 매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 사이에 다른 모든 것처럼 매체 가운데서 “포맷”으로 표기되곤 하지만. 에릭 싸티는 80년대와 90년대 초에는 피아노 치는 문화저널리스트로 여겨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튼 독일 텔리비젼 방송국의 잡지 방송에 따라 판단하자면. 문학은 계속해서 먼지가 날만큼 건조하게 제시되며 어쩐지 우스꽝스럽다. 독일에는 단 하나의 줄기찬 예외가 있다. 매체의 사건으로서의 그 예외가 지닌 매력과 지위는, 그러나 이곳의 유명한 비평가들이 책에 대해서 토론한 데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이 비평가들 중 한 명이, 나라에서 제일 영향력 있는 비평가가 천재적인 엔터테이너라는 점에서 나온다. 금년에 80살인데, 오래도록 창가자리를 뜨지 않는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말이다.
그밖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
우리의 시인이 매체에서 시를 찾고 있다. 자기 자신의 시를 찾는 것이 아님은 자명하다. 설령 자신의 시의 도정이 하나의 평균적 예가 된다 하더라도. 그는 이따금씩 보수적인 신문들에서 시를 찾아낸다. 인터넷에서 그는 시를 찾아낸다. 새로 타이핑되어 넣어져 있고 그밖에 아무 것도 없을 경우, 종종 시답잖다. 옛 대가들이 새로운 매체에 인용되면 낯설다. 베를린의 인터넷 프로젝트 리릭라인Lyrikline이 미래를 위해 문학의 국제적 네트가 되겠다고 약속하는 곳에서는 환상적이다. 그것이 지금 벌써 어떻게 기능하는가, 그 점이 우리의 주제를 흥미 있고 다시금 은유적인 이미지 하나로 응축해 준다.
즉 여러분은 미국에서 만든 특정 멀티미디어 프로그램을 다운받는다. 그러면서 많은 선전을 보게 되고 결국은 크레디트카드로 지불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런 운산체계 끝에는 파울 첼란의 목소리가 실제로 여러분 컴퓨터의 사운드 시스템에서 울려나온다. 첼란은 아우슈비츠 이후 시대의 핵심적인 시, “죽음의 푸가”를 읊조린다. 이런 과정의 복잡성 말고 또 무엇이 20세기에서 21세기로의 비약을 더 분명하게 증거하겠는가? 복잡하다고 말하면서 나는 생각한다, 부조리하다!고.
그러나 어째서 시(詩인)가? 어째서 오락사회는, 굳이 무슨 문제꺼리가 없어도 될 사사로운 잡담, 즉 그런 사회에 걸맞는 채팅에 만족하지 않는 것일가? 그런 사회가 어째서 하필 입으로 말하는 의식(儀式) 적인 전통중 가장 오래된 표현형식을 위해 애를 쓰는 것일까? 어째서 주문(呪文)이나 동요로, 현대시나 서사시로 손을 뻗는 것일까? 이를테면 힙합 구절 속에는 운맞추기라는 전통적 수공이 다시금 청소년 대중문화의 문맥 속에서 되살아나 있어 장르에다 실제로 새로운, 무엇보다 입으로 말할 때의 신선함을 부여하고 있다.
아름답고 다채로운 세계는 회색의 새도 동시에 존경하고 있다. “시인”이라는 직업표기가, 아무튼 내 모국어에서는, 반어적인 느낌 없이 사용되는 일이 거의 없는데도 말이다.
봅 딜런이 어느 날엔가는 정말로 노벨문학상을 받을까? 예상 수상자 명단에 그이 이름이 올라 있다는 소문이 수 년전부터 돌고 있다.
내 생각으로, 대중문화와 시(詩)는 주제를 설정할 때 전제되었던 것처럼 그렇게 대립적인 것 같지는 않다. 내 자신도 처음에 가정했던 것처럼 그렇게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은 것 같다. 반대로 가장 널리 유포된 문화의 형식들이, 바로 죽었다고들 하는 영역으로부터 시를 거듭 되불러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블루스, 유행가, 록발라드에 가사와 그 태고의 구성성분이 없다면 무엇이겠는가, 고급문학에서 나온 서투른 모조품들 아니겠는가? 판타지 영화세계의 주인공과 마술사들은, 그들이 입을 열 때, 옛 세계문학시편이라는 소도구들 없이는 계속 진행해 나가지 못할 것이다. 로버트 그레브스나 시머스 히니같은 위대한 시인들과 시론가들이 그들의 이론적인 논문들에서 새로운 것 속에 있는 옛 것들에 관하여, 오늘날의 시의 유래를 확인해주는 깊은 뿌리들에 관하여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두 손안에 단순히 시 자체의 존속을 위한 열쇠 이상의 것을 들고 있게 된다.
언젠가 태양이 떴었고 활짝 핀 꽃들은 태양을 향했다는 것, 그 사실이 SF영화에서는, “사일런트 러닝”(1971)이나 “소일런트 그린”(1973) 같은 미국영화들에서 그렇듯, 바로 종말 이후의 지상의 세계가 그려지는 곳에서 환기된다. 위협받고 있거나 파괴된 아름다움의 이미지들을 눈앞에 보며 무언가 말을 한다면, 그 말이야말로 시어(詩語)일 것이다. 더 없이 평면적인 문맥에서도, 가장 단순화된 상투어에서도 시적인 발언은 그 힘을 증명한다. 그것은 물론 우리가 만들어낸 시인이 물에 대해서도 하고 있은 생각들이다. 그의 삶이 오래 지속되면 될수록, 또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지녔던 소박함으로부터 멀어지면 질수록, 쓰는 것을 그만둘 수 없게 하는 것, (시의) 힘을 그는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그의 고유한 행동은 부차적인 것에 머문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대중문화와 그 매체들의 숲속에서 외치고 있다. 그 숲을 통과하여 가는 것을 그는 어린아이였을 때, 청하는 이 없었건만 자명하게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어느 특정 회사에서 만든 자기 자동차 안에 이미 앉아 있다면 어떻게 그가 그 안에 앉아 가는 도중에 더이상 가기를 그만 두겠는가. 만일 그가 뭔가를 의미하는 아주 작은 문자가 적힌 아주 작은 천조각이 부착된 셔츠나 바지를 입고 있다면, 어떻게 그걸 입고 돌아다니기를 그만두겠는가. 천조각의 문자는 예컨대 이런 뜻이다. 넌 다른 사람들도 사는 것을 살 수 있을 뿐이야. 너를 보는 사람은 누구든 알아볼 수 있어, 네가 어느 회사 것을 혹은 어느 가게에서 사는지를. 그리고 네가 어떤 특정한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에 대해 이런 저런 말을 입밖에 낸다면, 네가 그 영화를 보았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겠지, 그 영화회사는 그 영화를 너를 위해 만든 거야. 그게 큰 회사인가 아니면 좀 작은 회사인가 하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아. 너는 어떤 음반가게에 다녀왔고 사운드트랙 하나를 샀지. 네가 여기 이 텍스트를 쓰고 있은 동안, 혹은 이 시를 쓰고 있은 동안, 너는 수 백만의 다른 사람들이 아는 음악을 듣고 있어. 네가 뉴스를 켜고 눈을 뗄 수 없는 이미지 하나를 보는 동안, 네게는 무엇인가가 일어났고, 그건 네가 수백만과 공유하는 것이야. 그 순간 현실 속에는 네가 존재하지 않았어. 네 한가로운 두 손이 놓여 있는 나무 책상도 존재하지 않았어. 너는 성서의 비유에서 나오는 공중의 새와는 조금도 닮지 않은 거야.
너는 이미지 하나를 보고 있다. 누군가가 네가 그걸 보기를 원했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것을 너를 위해 찍었고, 누군가가 그것에 대한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고, 누군가가 그걸 사고 또 팔고, 마침내는 누군가가 이런저런 포지션에서 뉴스라는 포맷으로 나타나도록 선택을 하지. 핑크 플로이드의 옛 힛트곡 구절을 빌려 말하자면 웰컴 투 더 머쉰이지.
우리의 시인이 한 편의 시에서 기계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그가 꿈에서 아직 본 적 없었던 기계들이 거대한 짐승처럼 움직이고 있은 깊은 협곡과 갱안을 깜짝 놀라서 들여다본다면, 그러면 실로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도 공명할 것이다. 어차피 이 글의 한 줄 한 줄에서 내비치는 것을 여기쯤서 강조해야겠다. 우리가 특별한 수집가가 아니라면, 혹은 예컨대 그때그때 새로운 대중문화와 그 유행이라는 나선의 소용돌이 속으로 아이들과 함께 휩쓸려 들어가는 특별한 부모가 아니라면, 우리는 초년의 소비수준에 머물러 있게 된다. 우리가 만들어낸 이 허구의 시인은 아직도 60년대와 70년대의 록 음악을 가장 즐겨 듣는다. 그에게 가장 깊게 와 닿았던 영화가 언제나 아주 예술적인 영화들인 건 아니다. 말하자면 그의 문화적 코르셋을 그리고 그의 취미와 그의 세계상을 본질적으로 함께 규정해준 것은 서부영화, 공상과학 영화 그리고 싸구려 연속물들이며, 그것들은 지난 몇 십 년 전부터 그리 대단히 보완되지도 확대되지도 않았다. 그러면 무슨 능력을 우리는 시인에게 그의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평균적인 세계 시민 한 사람의 능력일 뿐이다.
그 언덕 위의 바보는 내 자신에게도 이미 초기시 한 편 속에 들어와 있다. 우리는 범세계적으로 망라된 시선집을 만들어야 할 것같다. 어쩌면 우리 친구들의 도움을 약간 빌어서. 시 자체에 들어 있는 대중문화의 자취들. 고급문화 가운데서 대중문화의 반영에 대해 우리가 뭔가 배울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같은 전통이 어떻게 두 가지 문화속에 반영되는지를 아주 확실하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 모두는 주어진 많은 낮과 많은 밤을, 우리들 중 몇몇이 지칠 줄 모르고 저주하는 바로 그것 가운데서 살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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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인은 나이를 먹었다. 더 이상 여행이 매번 떠날 때마다 일종의 계시는 아니다. 더이상 비행기를 탈 때마다 저 높이 구름위에 앉아 있은 천사들을 고대하며 바라보지는 않는다. 세상이 얼마나 작은지를 그는 이해한 것이다. 동시에 그는 정말로, 자기가 조감할 수 있는 것에 자신을 한정하고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현실원칙이라고 일컬었던 것, 그것이 뒤늦게 만회한 서쪽에서의 사춘기의 결과로 그를 단단히 틀어쥐고 있다.
그가 살고 있은 그 곳, 서독의 명랑한 작은 대학도시에서 이따금씩은 상이한 사회화 과정을 겪은 사람들이 뒤섞인 채 아주 다양한 그룹들 가운데서 대화가 이루어진다. 동쪽에서 또 서쪽에서 온 사람들이 여기서 한데 모인다. 그들은 사회적 출신이 다양한 사람들이고, 직업도 다양하고, 은행빚 규모도 차이가 나며, 큰 자동차가 있기도 하고 작은 차가 있기도 한 사람들이다. 집주인들이 주거공동체에서 세들어 사는 이들과 함께 앉아 있다. 실험을 하나 해보자. 이 사람들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대화 하나를 상상해보자. 그들은 서로 알게된 지는 그리 오래지 않았지만, 바로 이 시점에서 함께 어떤 중립적인 단계를 넘어나갈 수 있을 만큼은 친숙하다. 우리는 그들의 대화를 퍼즐맞추기와 비교할 수 있다. 대화 파트너는 누구나 자기의 시각적 역사를 들고왔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억속에 존재하는 이미지들의 총계를 시각적 역사라고 부른다. 이 저장창고로부터 이제 누구든 항상, 그것이 대화의 흐름에 맞으면, 이미지 하나를 혹은 이미지 하나의 부분을 꺼낼 수 있다. 먼저 장소이야기를 할 수 있다. 도시들이며 풍경들에 대하여. - 거기서 산 적이 있어요. - 여기는 나도 한 번 지나갔는데요. - 아, 거기는 내가 벌써부터 언젠가 한 번 가보려던 곳이예요. 벌써 영화 이미지가 덧붙여진다. 인공 이미지 하나가. 뉴욕에 대해서 혹은 케이프타운에 대해서 혹은 이스탄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퍼즐은 금방 커진다. 그러나 모든 남녀 누구든 그 모든 장소에 가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저런 사람이 이미지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보낸 휴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자, 진짜 이미지들이기도 하고, 이스탄불이 일역을 담당하는 제임스 본드 영화에서 나온 것이라 하자, “가짜” 이미지들이기도 하다. 퍼즐이 커진다. 갑자기 유년시절이 화제에 오른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 게임에서 사람들은 놀랍게도 자주 자기들의 유년에서 나온 이미지들을 나열한다. 비교해보기 위하여. 부모며 유년을 보낸 장소들이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부분부분이 처음에는 제대로 안 맞을 수도 있다. 베를린 혹은 잘레 강변의 할레 혹은 포르츠하임 근처의 어느 마을, 어느 강과 어느 산, 어느 거대한 저택 그리고 마법에 걸린 어느 아주 작은 정원.
이제 그 이야기가 있다 - 20세기 중반에 내어난 사람들에게서는 아주 통상적인 경우인데 -, 언제부터 자기집 거실에 텔레비젼이 있었던가 하는 이야기. 방을 나와 갑자기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동쪽인가 서쪽인가가 갑자기 더 이상 그리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이미지들을 나열해 가다보면 다음과 같은 이름들로 된 퍼즐 하나가 이루어진다. “다카리”, “퓨리”, “래시”, “톰과 제리”, “스피디 곤잘레스”, “아욱스부르크의 인형상자”, 피에르 브리스와 렉스 바커가 나오는 “비네뚜”, 마를레네 디트리히와 제임스 스튜워드 공연의 “거대한 위선”, “카사블랑카”, “사이코”, 실로 대부분의 대화 파트너가 텔리비젼을 통하여 알게된 비교적 오래된 영화들이다. 동독 극장에는 결코 없었던 영화들이 우리의 시인에게 떠오른다. 예를 들면 모든 제임스 본드 영화와 “닥터 지바고”는 물론 타르코프스키의 “향수”. 그저 우연히 떠오르는 대로 꼽아보면 그렇다.
우연에서인 듯, 어떤 사람이 언제 보았거나 들었던 것 혹은 그밖에 다른 곳에서 의식과 무의식 속으로 흡수된 것이, 허구이지만 그러나 언제든 증명가능한 이런 소통의 구조가 된다. 퍼즐은 다채로워지지만 그 부분부분들은 이런 식으로 서로서로 맞추어진다.
현실에서 나온 이미지들 대신 점점 더 많은 인공적 이미지들이, 셀루로이드 이미지들이, 전자 이미지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비약적으로 가까와지면서 처음의 서먹함은 누그러진다. 시각적 역사에는 물론 언제나 그에 맞은 사운드가 있다. “릴리 마를렌”에서 “죽음의 노래”까지. 비틀즈의 “헬프”에서 짐 자무쉬의 마지막 영화 “고스트 독”의 힙합 사운드 트랙까지.
우리는 매우 특별하고 어쩌면 유일하다고 여기고 있는 우리들 자신의 기억과 삶의 이야기들을 더듬어 오른다. 그러나 퍼즐이 맞춰지는 동안, 우리가 지어낸 시인도 소통, 이해 그 자체, 즉 상이한 사람들이 서로 가까워지게 되는 바탕은 대중문화에 함께 참여하는 것임을 점점 더 깨닫게 된다. 이러한 인식의 한쪽에는 충격이 자리잡고 있다. 나는 더 많은 예를 들어가며 기꺼이 그것을 예증할 수 있다. 스피어민트, 다마고찌, 코카콜라, 리바이스, 몽쉬쉬, 레고, 아스테릭스, 포켓몬스터, 아디다스, 페라리 등등.
우리가 서로 교환하는 기호의 대다수는 대중문화에서 비롯되었거나 그에 상응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 헐리우드는 거대한 조작이며 우리가 보낸 어린 시절의 한 장소에 대한 동의어이다. 어떻게 그것이 작동되는지, 우리가 다시 각자의 아이들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우리 그저 잠깐 우리들 자신을 한 번 들여다 보자. 헐리우드에서 그리고 몇몇 비슷한 동아시아의 장소들에서, 인도와 유럽에서, 뮤직스튜디오와 웹디자인 사무실에서 우리들에게는 새로운 고향 하나가 주어진다. 그 점에서 우리는 저 세계에 살고 있는 오리지널들과 똑같은 좀비이다. 독창성이란 고도로 자기기만이다.
우리 어린이들의 이미지세계, 그들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그들이 듣고, 그들 방안 그들 침대 곁과 침대 안에 있는 것, 거기에 대해서 마침내 다른 아이들과 이야기하고 또 우리들과도 이야기하려 하는 것 - 그리고 이따금씩은 오로지 아직도 이야기할 수 있는 것 -, 그 세계가 대중문화이다. 어떤 조건도 이의도 없이.
바로 시작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지금에 와서 내가 어떻게 그만두겠는가? 우리가 만들어낸 주인공은 나이를 먹었다. 그의 작업보조 도구중 하나는 독창성이다. 그것은 확실히 저작권의 문제이다. 포스트모던이 조종을 울렸을 때 그는 만족하여 신음 소리를 냈다. 전통 및 대중문화의 고고학이라는 노천광산들 혹 다른 광산들을 완전히 채굴하는 일이 이제는 그렇게 가차없이 이론화되지 않을 것이다. 초라한 황금광들의 수은이 이제는 고급문화의 강을 그렇게 오염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이 말을 방금 내가 한번 썼던가? 그럼 그냥 놔두자.
나는 상상한다. 우리의 시인이 온 세상 수많은 남녀 동료시인들과 시 한 편을 함께 쓰고 있다고. 그 시는 대중문화보다 더 오래된 것이며 그보다 더 위대하다. 그 시의 뿌리는 인간이라는 종과 인간의 언어의 뿌리 만큼이나 깊게 뻗어있다. 그러나 동시에 시인은 그의 동시대인과 조심스럽고도 본질적인 대화를 나누며 살고 있다. 동시대인들의 이해력, 독해력은 그들이 지상에서의 통상의 행보로 각인되어 있다. 거기에는 시인의 일상적 발걸음도 포함된다.
2000년 6월 21일 튀빙엔에서
(번역: 전영애)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