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은 한국 유학사에서 큰 별이라고 하는 퇴계 이황을 모신 곳이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선비들이 한번쯤은 찾아보기를 소원했던 곳이고 지금도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안동시에서 이곳에 이르는 비좁던 산길이 포장도로로 바뀌고, 건축물들이 말끔히 단장되어 선비의 배움터로서의 정취를 잃고 있는 도산 서원은 안동시에서 동북쪽으로 28킬로미터쯤 떨어진 도산면 토계동에 자리하고 있다.
도산서원을 살펴보려면 우선 안동으로 가야 한다. 안동은 태백산맥의 가지 하나가 감싸면서 이루어 놓은 분지에 형성된 고을로서 자연 환경은 그리 좋은 곳이 아니다. 이 지방의 허리에 걸친 낙동강은 농사짓는 데에 젖줄 노릇을 하면서도 안동댐이 건설되기 전에는 수시로 홍수를 안겨다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문화의 꽃이 피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서 많은 유학자들이 태어나 유교 문화의 본고장으로서 이곳 사람들은 선비 정신을 자랑하고 있다.
도산서원이 서원으로서 꾸며지기는 지금으로부터 4백 년 전인 1574년이다. 그러나 서원의 토대가 마련된 것은 그보다 조금 더 앞선다. 퇴계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그가 50세 때인 1557년(명종 12)이었는데 그가 다른 곳이 아닌 이곳에 터전을 마련한 것은 산수가 수려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서원이 자리한 곳은 뒤쪽으로 아담한 산등성이가 감싸고 있고, 앞으로는 낙동강이 구비구비 돌아 흐르며 저 멀리에는 푸른 평원이 아스라이 펼쳐지고 있어 절경 중의 절경이다. 그는 여기에 도산서당과 농운 정사를 꾸며 한쪽은 스스로 공부하는 곳으로 삼고, 다른 한쪽은 모여드는 후학들을 가르치는 강의실로 삼았다. 이곳에서 퇴계는 제자들과 10 여 년 생활하였다.
도산서원의 분위기는 퇴계의 사후 새로운 계기를 맞았다. 그를 흠모하던 제자들이나 고을의 선비들이 퇴계를 받들어 모시는 사당을 세워 서원으로서의 체제를 갖춘 것이다. 제자들은 기존의 건물에 상덕사, 진도문, 동재, 서재, 동광명실, 서광명실, 전사청, 장판각 등을 보완 증축하여 서원의 면모를 갖춘 뒤 이듬해 나라에 요청하여 도산 서원이란 편액을 하사받았다. 편액의 글씨는 한석봉이 썼다.
생전에 서원의 보급과 교육에 힘을 쓴 퇴계는 사후에도 서원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도산서원의 교육 활동이나 운영 세칙은 다른 서원에서 준행하였기 때문에 도산서원은 한국 성리학의 요람이었을 뿐 아니라 서원의 종주였다.
도산서원에도 많은 장서가 보유되어 있었는데, 907종, 4339책의 한적(漢籍)은 그동안 많은 선비들로 하여금 성리 철학의 진수를 맛보게 하였다. 특히 퇴계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먼저 이들을 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경내의 건물로는 상덕사(尙德祠), 전교당(典敎堂), 전사청(典祠廳),한존재(閑存齋), 동재(東齋), 서재(西齋), 광명실(光明室), 장판각(藏板閣), 도산서당,역락서재(亦樂書齋), 농운전사( 雲精舍), 유물전시관 등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기와집으로 된 상덕사는 서원의 사우(祠宇)로서, 이황과 제자 조목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전교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굴도리집으로 되어 있다.
전사청은 상덕사에 붙어 있는 건물로서 향례(享禮)때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며, 한존재는 원장의 거실로 사용하였다.
각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집으로 된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전교당 앞의 동서편에 위치하고 있다. 광명실은 장서고(藏書庫)로서 동서광명실로 되어 있는데, 1930년에 지은 동서광명실에는 이황의 문도를 비롯한 여러 유학자들의 문집을 모아두었으며, 현재 약 1,300여 종 5천여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다.
장판각에는 이황의 문집, 유묵과 《주서절요》 《이학통론》 《계몽전의》 등 여러 판본이 소장되어 있으며, 도산서당은 이황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역락서재는 제자 정사성이 처음 학문을 배우러 왔을 때 그의 아버지가 지어준 집이며, 농운정사는 도산서당과 함께 지은 집으로 당시에 제자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집이다.
유물전시관은 1970년에 보수를 할 때 지은 건물로서 이황의 유품인 자리 베개 등의 실내비품과, 매화연, 옥서진 등의 문방구, 청려장 매화등 투호 혼천의 등이 소장되어 있다.
이 서원은 사적 제 17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도산서원 전교당은 보물 제210호, 도산서원 상덕사 및 정문은 보물 제211호로 지정되어 있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7변 7두이다. 서원의 재단으로는 전답 대지 임야 등이 있다.
병 산 서 원
경상북도 안동군 풍천면 병산리에 있는 서원.
1613년(광해 5)에 정경세 등 지방유림의 공의로 유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본래 이 서원의 전신은 고려말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으로 풍산 유씨의 교육기관이었는데, 1572년(선조2)에 유성룡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1629년에 유진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1863년(철종 14)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존덕사, 입교당(立敎堂), 신문(神門), 전사청(典祠廳), 장판각(藏板閣), 동재, 서재, 만대루(晩對樓), 복례문(復禮門), 고직사(庫直舍) 등이 있다.
묘우(廟宇)인 존덕사에는 유성룡을 주벽으로 유진의 위패가 배향되어 있다. 존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기와집에 처마는 겹처마이며, 특히 기단앞 양측에는 8각 석주 위에 반원구의 돌을 얹어놓은 대석(臺石)이 있는데 이는 자정에 제사를 지낼 때 관솔불을 켜놓는 자리라 한다.
강당인 입교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입교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단층팔작기와집에 겹처마로 되어 있으며, 가구는 5량(樑)이다. 신문은 향사시 제관의 출입문으로 사용되며, 전사청은 향사시 제수를 장만하여 두는 곳이다.
장판각은 민도리집 계통으로 되어 있으며, 책판 및 유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각각 정면 4칸, 측면 1칸반의 민도리집으로 된 동재와 서재는 유생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문루(門樓)인 만대루는 향사나 서원의 행사시에 고자(庫子)가 개좌와 파좌를 외는 곳으로 사용되며 정면 7칸, 측면 2칸의 2층팔작기와집에 처마는 홑처마로 되어 있다.
그밖에 만대루와 복례문 사이에는 물길을 끌어 만든 천원지방(天圓地方) 형태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중정(中丁:두번째 丁日)과 9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은 4년 4두이다. 현재 사적 제 2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성룡의 문집을 비롯하여 각종 문헌 1,000여종 3,000여책이 소장되어 있다.
고 운 사 (孤雲寺)
경북 안동으로 가다보면 의성을 지나게 된다. 여기서 안쪽으로 굽어돌아가면 고운사라는 절이 나온다.
681년(신문왕 1년)에 의상이 창건하여 이름을 高雲寺라 하였는데 그 후 孤雲 최치원이 如智, 如事 두 스님과 함께 '가허루'와 '우화루'를 짓고 孤雲寺라 고쳤다.
948년 (고려 정종 3)에 운주조운(雲住照運)이 중창하였고, 1018년(현종 9)에 천우(天祐)가 3창하였으며, 1695년(조선 숙종 21)에 다시 중수했다.
그 후 1835년(헌종 1)에 불탔으나 만송, 호암, 수열 등이 재건하였다. 보물 246호인 석조석가여래좌상이 있다.
● 고운사 석조석가여래좌상
통일신라시대 이후 문화는 표현(감각)의 차이를 보였던 삼국의 미술을 하나로 통합하여야 한다는 숙명적 과제와 삼국병합을 계기로 밀접해진 나당관계를 배경으로 성당(成唐)문화가 급속하게 전래되어 바야흐로 황금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황금기인 8세기 중엽을 분수령으로 차츰 광채를 잃어서 석불에 있어서도 난조를 보이기 시작하여 인체 파악의 불철저로 인한 조형상의 부자연, 조각으로서의 생명인 입체성의 결여, 광배와 대좌에 집중된 지나친 장식성 등이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에 대하여는 혜공왕 이후에 나타나는 국정의 문란, 군웅의 할거, 그리고 선종이라는 새로운 사상 체계로 인한 조상의 약화, 풍수설 전래로 인한 잡신(雜信)과의 습합(習合) 등이 거론되고 있으나 그 중에서도 국정의 문란과 선종의 유행은 중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고운사 석조석가여래좌상은 바로 이러한 시기에 만들어진 석불이다.
이러한 경향은 신라에 국한된 일이 아니고 중국에 있어서도 당말의 혼란으로 인한 성당(成唐)양식의 붕괴와도 같은 현상으로 여기서 새로운 양식의 출현이 요청되었던 것이다.
고운사 석가석조여래좌상은 대좌와 광배를 다 구비하였고 손상도 거의 없는 완전한 형태를 갖춘 불상이다. 머리는 육계의 표현이 불분명한 나발이며 4각형에 가까운 상호에는 눈,코,입들을 작게 묘사하여 비만한 형태로 진전되고 있다. 목은 짧은 편, 삼도는 형식적인데 목에 직결된 어깨는 치켜올려져서 가슴이 발달되고 허리가 잘록해졌다. 결가부좌한 하체도 낮지만 전신이 위축되었고, 항마촉지인을 결한 양 손은 자연스럽지가 못하다. 우견편단의 법의는 주름이 얇은 평행세선이며, 다리나 팔 등에서는 도식적인 옷주름이 보이고 있다. 광배는 주형(舟形)으로 두.신광 안에는 보상화. 단초문이 화려한데, 두광의 중심에는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다.
대좌는 8각으로 상대는 반구형에 중판연화문이 암련으로 표현되었고 중대는 8각 간석(竿石)인데 모서리에는 柱形을 장식했다. 하대는 복련석에 복판연화문이 시원스럽게 조각되었고, 그 아래 지대석에는 각면마다 안상이 장식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이 불상은 머리,상호,동체, 의문 등이 8C 불상과는 현저히 구별되는 9C의 특징적인 양식이며, 그것은 대좌나 광배 등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보물 제 246호로 지정되어 있다.
봉 정 사 (鳳停寺)
안동시 서북쪽으로 16km 지점의 천등산(575m) 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신라 제 31대 신문왕 2년(682)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절이라고 하나 중건과 과정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만 옛적 의상대사가 삼국통일을 기원하는 화엄기도를 드리기 위해 이 산에 오르기 선녀가 나타나 횃불을 밝히고 청마가 앞길을 인도하여 지금의 대웅전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산 이름을 천등산으로, 절 이름을 청마가 앉았다 하여 봉정사라 했다고 한다.
우거진 수림에 둘러싸여 있어서 재화를 잘 피하였음인지 이 사찰의 건물들은 솜씨가 훌륭하고 오래되었다. 특히 극락전은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로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쌍벽을 이룬다.
● 봉정사 대웅전
극락전 동쪽에 나란히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기단은 석축이고 평면이 정면 3칸, 측면 3칸인 다포계에 속하는 팔작지붕 건물이다. 일반적인 불당과 같이 앞쪽 가운데에 세살분합문을 두고 그 양옆에 출입을 위한 협문을 2매씩 설치하였다.
불단 위의 보개는 닷집을 만들지 않고 양각된 조각품을 반지틀에 끼우는 형식으로 간소화시켰다.
이 건물은 사용된 부재와 조립, 가공 수법이 우람한 옛날 양식의 건물로서 오래된 단청문양까지 잘 남아있어 우리나라 다포계 건축에서는 그 유례가 드물게 흘륭한 건물이다.
보물 제55호.로 지정되어 있다.
● 봉정사 화엄강당
대웅전 앞뜰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곳에 있으며 뒷쪽은 바로 극락전의 앞뜰이 된다.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지붕은 맞배겹처마이며, 공포는 주심포계인 집이다. 정면 3칸에는 살문을 달고 있는데 북쪽 2칸은 4분합(分合)을 달았다. 내부에는 방을 꾸몄는데 기둥과 공포의 짜임 부재는 건물 규모에 비하여 비교적 굵은 편이다. 고금당과 같이 익공계의 형식과 유사한 점이 있어 그 조각수법은 조선초기의 특징을 보인다. 1969년 해체. 복원시에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588년(선조 21)에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보물 제 448호로 지정되어 있다.
● 봉정사 고금당
조선중기의 목조건물로 극락전의 앞뜰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고 있는 작은 건물.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공포는 주심포계,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건물 남쪽에 측면으로 불아궁이를 만들어 온돌방을 들였으며 근래에 수리하기 전에는 요사로 썼다.
정면에는 각 칸마다 세살문을 2분합으로 설치하고 있으며 공포는 주심포라고 하나 주두(柱枓) 점차 살미 등의 짜임이 익공계의 꾸밈과 비슷하므로 익공계 공포형식이 성행했던 조선중기의 수법과 같다.
1969년 중수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616년(광해군 8)에 중수하였던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보물 제 449호.로 지정되어 있다.
● 봉정사 극락전
극락전은 고려중 후기의 목조 건물로 대웅전과 함께 가람 동북편에 있는데 그 앞에는 3층 석탑이 있고, 서쪽에는 고금당이 동향하고 있다.
1972년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 상량문은 1625년(인조 3)에 중수하면서 써 넣은 것으로 능인대덕이 창건, 6대에 걸친 조사들이 중건하였으며 1363년에는 옥개부분을 중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음에 비추어 볼 때 그 창건은 1363년 이전일 것으로 여겨지며, 따라서 남아있는 목조 건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기단은 자연석을 쌓은 석조기단이며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4칸이고,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공포는 주심포계 형식의 건물이다.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자연초석 위에 배흘림기둥을 세워 가구를 7량집으로 꾸몄다.
내부바닥에는 전돌을 깔았고, 천정에는 빈자없이 가구가 보이도록 연등을 만들었으며 불단을 꾸며 부처를 모신 머리위에는 보개(寶蓋)로서 닫집을 꾸몄다.
또 전면의 출입문과 양측 붙박이 살창은 근래에 보수하면서 새 살창이 있었던 것을 바꾸어 복원한 것이다.
국보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다.
3.안동의성김씨종택
경상북도 안동군 임하면 천전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주택. 보물 제450호. 총 55칸으로 단층의 기와집이다. 현재 건물은 원래의 주택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김성일이 재건한 것이다. 이 집이 지리잡은 마을은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완사명월형국'으로 삼남사대길지의 하나로 전해 오고 있다. 뒤로 숲이 우거진 동산이 있는 터에 축대를 쌓아 한 단 높은 집터로 이 집의 평면배치와 구성는 샨 자형 사랑채와 "자형의 안채를 행랑채와 연결시킨 특이한 평면형태를 이루고 있다. 중문이 있는 행랑채는 서쪽 끝에서부터 마루.방.부엌.대문.마구간.마루.함실부엌.방.마루들이 일자로 되어 있다. 이 행랑채의 문간을 들어서면 동쪽으로는 안채가, 서북쪽으로는 사랑채가 서 있다. 안채는 "자형 평면으로 부엌.안방.대청.건넌방(윗상방.아랫상방)들과 헛간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사랑채는 정면 3칸,측면 2칸의 커다란 사랑대청과 사랑방.침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의 구조는 막돌허튼층쌓기를 한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굴도리를 받치는 민도리집 양식이다. 가구는 오량으로 앞뒤의 평주 위에 대들보를 걸고, 이 위에 접시받침만을 놓아 종보를 ㅉ치고, 종보 위에는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안채의 구조는 간결한 민도리집양식으로 안방의 전면에는 난간을 두른 툇마루가 있고 툇마루 밑에는 간결한 굴뚝을 내었다. 사당은 사랑채의 서북쪽 높은 언덕 위에 따로 담장을 쌓고 정면 3칸,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건축하였다.
4.안동 제비원 여래석불
보라빛 황혼빛이 은은하게 비껴 있는 안동 제비원 석불을 멀리서 바라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마치 꿈속에서처럼 아름답고 황홀한 마음의 울렁임을 금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바람에 보오얗게 석삭은 화강석 살결 위에 시시각각으로 변화를 일으키면서 혹은 보라색으로 혹은 연분홍색으로 환하게 피,어나는 너그러운 얼굴은 아마 누구의 기억에도 영영 잊혀지지 못할 것이다. 10m나 되는 높은 자연 석벽에 몸체를 부각하고 그 위에 2.43m나 되는 큰 얼굴을 싸로 새겨 얹어서 서향으로 앉힌 구상은 마치 자연과 인공의 미묘한 해화에서 오는 화음처럼 주위의 산천에 아름다움의 정기를 불어넣어 주었고, 부처님의 높은 공덕을 재다연의 공간과 시간 속에 메아리치게 해 주었다는 느낌이다. 생긴대로의 석벽에 욕심없이 손 가는대로 내려그은 옷주름 하며 밑도 끝도 없이 끝나 버린 부처님의 아랫도리 등을 보면 과연 잔재주를 모르는 욕심없는 백성의 것이로구나 싶어진다.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영주로 가는 신작로를 10리쯤 나가면 조그마한 능선을 넘는 고갯길이 있고, 3층석탑이 서 있는 고갯마루턱 서면의 한 절벽 위가 바로 이 부처님의 고장이다. 이러한 마애불이나 독립 석상은 한국 안의 도처에 남아 있지만, 이 여래상이 우리의 마음을 이렇게 사로잡는다는 것은 그만큼 이 부처님의 모습과 숨결이 우리 백성들의 마음에 스스럼이 없는 까닭이라고도 할 수 있고, 또 백성들의 선의와 몸짓과 동떨어지지 않은 너그럽고도 정다운 모습이 석양 놀에 비칠 때 향수에 젖는 인간들의 선의가 아마 이 부처님의 얼굴에 거울처럼 옮아 가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까지 너그럽게 드리웠고, 왼손은 왼편 가슴 위에 들어서 중품하생의 인계를 보인 점이라든가 서향 정립한 자세로 보면 아마 이 석불은 아미타여래상인 듯도 싶으나, 그 불명을 분명히 밝혀 주는 요건이 매우 희미한 점에 한층 한국 부처님다운 어수룩한 점이 서려 있는 것이라고 보고 싶다.
후삼국시대 때 일부 지역에서 나타나 눈길을 끌었던 괴상한 모양의 불상이 최근 들어 지방 곳곳에 거대한 규모로 조성되고 있어 화제를 낳고 있다. 이 돌불상은 그 모습이나 양식이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안동의 제비원 석불이나 관촉사의 미륵석불은 그 대표적인 예. 산꼭대기나 산기슭에 마을을 굽어보면서 서있거나, 또한 벌판 한가운데 똑바로 우뚝 솟아 있는 불상들은 매우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한편 이런 불상들의 대부분이 미륵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도 매우 흥미로운 점이다.
특히 관촉사의 은진미륵은 광종의 명령에 의해 혜명이라는 승려가 1백여명의 석공을 데리고 39년간에 걸쳐 만든 것이다. 18미터 높이의 이 석불은 얼굴과 곧바로 연결된 상체, 그리고 두 팔은 각각 다른 돌로 만들어 조립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사용된 돌은 수백 톤에 해당하는 것으로 매몰식 방법을 이용해 만들었다고 한다. 흙더미를 산처럼 쌓아 돌을 운반하여 올린 다음, 흙더미를 허물어 형체를 드러내게 하는 방식이다.
거대한 크기의 불상을 어떻게 만들었는가 하는 방법상의 문제도 관심거리이지만 불상의 모습이 보여주는 분위기가 그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이전 시대에 만들어진 불상은 인자하고 자비로운, 그래서 속세를 떠난 해탈의 경지를 보여주는 신비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만들어진 불상에서는 거대한 형체가 발산하는 강한 힘과 해탈의 부처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한 자연스러운 인상에 다부진 입술과 괴력을 발휘하는 눈매가 인상적이어서 보는 사람을 압도하고 있다. 또 관모나 갓까지 써서 매우 독특하다.
이런 새로운 모습의 불상들이 세워진 지역은 대체로 호족의 입김이 강한 지역들이다. 이 점을 들어 전문가들은 불상의 외형적 풍모가 지방민을 자신의 영향력 하에 끌어들이려는 호적들의 의지를 강하게 전하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또 여기에는 얼마 전 크게 유행했던 미륵사상의 영향도 있다는 설명도 있다.
이런한 맥락에서 보자면 최근의 관촉사 불상 조성의 경우처럼 국왕의 명령에 의해 괴불이 조성되고 있다는 점은 특히 주목을 끈다. 이는 아마도 왕실과 호족 사이의 타협과 결탁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왕실은 지방에 거대한 불상들을 만들면서 어느 정도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호적세력을 포섭해나가는 한편, 불력을 이용해 민심을 위무하려는 양면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한 시대의 문화는 결코 그 문화가 자리한 시대를 떠나서 이루어질 수 없음이 다시 한 번 확인된다.
5.신세동칠층전탑
경상북도 안동시 신세동 소재 통일신라시대의 전탑. 높이 17미터. 국보 제 16호. 한국 최고 최대의 전탑. 기단은 단층에 평면은 방형이고 현재는 지표에 팔부중상 또는 사천왕상을 양각한 화강석 판석을 1면에 6매씩 세우고 남면 중앙에는 계단을 설치하였으나, 팔부중상이나 사천왕상들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서로 제작연대에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배치순서도 무질서하고 기단 상면은 비스듬히 둥글게 시멘트를 칠하여 어느 정도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지 의문이다. 또한, 단층 기단 측면에 이렇게 많은 조상을 배치한 예는 없다. 탑신부는 각 층을 길이 약 28센치미터, 너비 약 14센치미터, 두께 약 6센치미터의 회흑색 무문전으로 어긋나게 쌓았다. 초층 옥신은 매우 높고 남면 중앙 하반부에 화강석으로 테를 둘러서 작은 감실을 개설하였는데, 내부는 위를 방추형으로 줄여 1면 48센치미터의 방형 구멍이 정상에 나 있어 찰주공으로 보인다. 2층 옥신은 1층 옥신의 높이에 비하여 약 4분의 1로 높이가 급격히 줄었을 뿐 3층 이상의 체감률은 심하지 않아 7층이라는 고층인데도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다. 옥개석은 전탑 특유의 형태로서 처마 상하에 층단이 나타나며 처마는 수평이고 각 층 옥개의 너비는 석탑에 비하여 현저히 감축되었다. 밑의 받침 수는 초층부터 9단.8단.7단.6단.5단.3단이고, 옥개상면의 층단 수는 초층부터 12단.10단.9단.8단.7단.6단.5단으로 상층으로 갈수록 차츰 체감되었다. 현재 낙수면에는 극히 일부에 기와를 입혔던 흔적이 남아 있음을 보면 당초에는 각 층 낙수면에 모두 기와를 입혔을 것으로 보이며 전탑에 앞서 목탑이 존재하였고 전탑은 목탑을 번안한 것임을 보여준다. 상륜부는 현재 노반만이 남아 있으나 <<영가지>>에 기록된 '부동5리'에 있다는 '법흥사전탑'이 이 전탑에 비정되고 있으니, 만약 그렇다면 법흥사전탑에 관하여 각주가 있음을 보면 원래는 금동 상륜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탑은 1487년 (성종18)에 개축된 바 있다.
6. 임청각,군자정
경상북도 안동시 법흥동에 있는 조선시대 중기의 별당형 정자건축. 보물 제182호. 이 건물은 1515년 (중종 10)에 형조좌랑 이락이 건립한 양반주택의 별당형 정자건축이다. 정자의 평면은 J 자모양이며, 서쪽으로 1칸 크기의 온돌방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두개 연이어 있고, 다음 1칸 크기의 마루방을 두고 그 북쪽으로 1칸의 온돌방을 두 었다. 일렬로 늘어선 방과 마루에 연이어 동쪽으로 정면 2칸,측면 2칸의 큰 대청을 두었으며 방과 대청 주위로 툇마루를 두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막돌허튼층쌓기를 한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주두를 얹었다. 주두 위에는 밑면이 초각된 첨자를 놓고 소로들을 얹어 굴도리밑의 장여를 받치며, 보방향으로는 쇠서 하나를 내밀어 초익공 구조를 이루고 있다. 기둥 사이에는 창방 위에 화반을 두고 소로를 얹어 굴도리의 장여를 받치게 되어 있다. 가구는 오량으로 앞뒤의 평주 위에 대들보를 걸고 그 위의 동자기둥에 첨차와 소로를 짜넣어 종보와 중도리를 받치고 있으며, 종보 위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게 하였다. 대청바닥은 우물마루로 마루 밑이 사방으로 터진 누마루식이며, 천장은 서까래가 노축된 연등천장이나 합각머리 아래만은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대청 서쪽의 온돌방과 마루 쪽에는 방주를 세운 굴도리집으로 간결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처마도 대청 쪽은 부연을 단 겹처마로서 팔작 지붕을 이루나 서쪽 방 쪽에는 홑처마로서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특히, 이 정자의 동쪽에는 조그마한 방지가 있고 방지 가운데의 둥글게 다듬은 돌에 의도적으로 구명을 세개 뚫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정자의 몸채는 정자 서쪽에 있는데 정승이 세 사라이나, 탄생하였다는 영실이 있고, 그 평면은 양택론에서 길형으로 말하는 쓸용 자형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