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기宋載記(?~1801)
송재기는 서울 동대문 안 훈련원 앞 황정동 (黃井洞) 에 살았다. 송재기의 직업은 도감청(都監廳)에 소속된 각수(刻手)였다. 「추안급국안」에는 그가 능화판(菱花板)을 새기는 전문가로 나온다. 송재기가 각수의 재능을 살려, 당시 수요가 빗발치던 기도문이나 성화를 책판에 새겨, 이것을 찍어 보급했을 가능성이 있다. 송재기는 능화판菱花板 조각을 직업으로 하며 문인과 교재하였다. 특히 정약종을 비롯한 남인계 서학자들과 교우하였다. 1801년 신유대박해 즈음 열성적으로 활약하였다. 황사영 알렉시오도 제천으로 도피하기 전 송재기의 집에 머물렀다. 송재기는 순조원년인 1801년 12월 26일 신유대박해에 순교하였다.
1801년 12월 26일 송재기와 함께 순교한 분들:
정광수, 홍익만 김계완, 손경윤,김의호,김귀동,최설애,김일호,장덕유,변득중,이경도 황일광,한덕운,홍연,권상향등의 신자들이 처형되었다.(야마구찌, 여진천 신부,황사영 백서 논문 선집,p 54)
각수(刻手) 송재기宋載記(?~1801)
성물 반입 어려워지자 기도문과 성화 책판에 찍어 보급하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초기 조선 교회에서 성화와 성상의 제작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1801년 봄, 신유박해가 시작되어 추국청이 설치될 즈음, 김의호(金義浩)가 송재기(宋再紀)의 집에 책판(冊板)을 찾으러 갔다가, 그 집에 피신 와 있던 황사영을 만난 이야기가 「사학징의」에 나온다. 송재기의 직업은 도감청(都監廳)에 소속된 각수(刻手)였다. 「추안급국안」에는 그가 능화판(菱花板)을 새기는 전문가로 나온다. 그의 집은 훈련원 앞 황정동(黃井洞)에 있었다.
능화판의 섬세한 문양을 새기는 각수의 집에 천주교 신자인 김의호가 책판을 찾으러 갔다는 대목이 탁 걸린다.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송재기가 각수의 재능을 살려, 당시 수요가 빗발치던 기도문이나 성화를 책판에 새겨, 이것을 찍어 보급했을 가능성이 있다. 신자들에게 나눠 줄 상본의 세밀한 윤곽을 그린 것으로 보이는 도상판이 「요화사서소화기」 속 한신애 집 압수 품목 속에서 나온 것도 이 같은 심증을 더하게 한다.
「사학징의」 속 이합규(李逵)의 공초에는 “첨례날에는 아래채 벽장 안에 예수상을 걸어놓고 장막을 드리워, 방석을 깐 뒤에 여러 사람이 사서(邪書)를 강습하였다”고 했고, 최필제(崔必悌)의 공초에도 “새벽에 김이우의 집에 갔더니 홍문갑(홍필주)의 집에서 신부를 모셔와서, 첨례를 한다면서, 벽장 안에 예수상을 걸고 장막을 드리운 채 방석 등의 물건을 펼쳐, 신부가 윗자리에 앉았고, 저희들이 벌려 앉았는데, 창밖에는 김이우 집안의 여인들이 또한 앉아서 강송하였습니다”라고 미사 드리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집회소에 내건 예수상은 정광수의 벽동 집처럼 새로운 장소가 생겼을 때는 중국에서 가져온 원본을 내걸 수가 없었다. 국경 검색이 까다로워지면서 성물의 반입이 점점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결국은 화상판으로 찍어서 여기에 채색을 입혀 예수상을 제작할 수밖에 없었고, 그 역할을 각수인 송재기가 맡았을 것으로 짐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