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그리고 그리움
- 예쁜 소정이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참 멋진 후배 소정이들이다. 오랜만에 가슴 울리던 옛 시절을 떠올려 본다. 얼마나 예쁜 청년들인가. 고향을 알고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따뜻하다. 나는 소정이의 활동을 보면서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임계를 떠나보지 못했다. 문래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임계중학교를 다녔다. 그러면서 가까운 정선읍내도 강릉시내도 꿈으로만 보았던 시절이 있었다. 동면 덕우리가 고향인 어머니가 정선읍내를 얘기할 때면 귀를 쫑긋 세웠다. 서울을 다녀오신 아버지가 비스킷과자를 사다주셨을 때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먹을거리도 있음을 처음 알았다. 그렇게 임계를 벗어나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았고, 그곳을 가보고자 꿈을 꾸었다. 어린 나에게 꿈을 실천하기에는 나를 막고 있는 고개가 너무 컸다. 정선읍내로 가는 길도 강릉으로 가는 길도 고개에 닿기 전에 아버지의 매가 더 일찍 다가왔기 때문이다. 어린 아들이 먼 길을 가다가 힘들어할 것을 알고 아픈 매로 나를 말렸다. 하기야 백여 리 넘게 발품을 팔아야 갈 수 있던 시절이었으니, 어쩌면 부모님의 마음엔 당연한 일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나와 친구들은 바다가 보고 싶었다. 학교에서 말로만 듣던 바다를 직접 보고 싶었다. 내가 태어난 문래리에서 바다로 가기에는 쉽지 않았다. 노고개를 지나 버들고개와 삽당령, 서른 몇 개나 된다는 재말랑(고개마루)을 넘어가야 바다를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어른들 몰래 그 많은 고개를 넘을 꿈을 꾸지는 못했다. 언젠가 들은 어른들의 얘기가 떠올랐다. 마을 뒤에 있는 조개봉과 태양봉에 오르면 동해바다가 보인다고 했다. 우리가 넘어야할 또 다른 고개이야기였다.
부모님 몰래 도시락을 싸서 어깨에 둘러매었다. 물론 그날은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었다. 그렇게 세 명의 친구는 의기투합 바다를 보러 떠났다. 참 먼 길이었다. 땀이 나 미끄러워진 검정고무신은 연신 벗겨졌다. 발바닥에 흙을 묻히고 풀을 뜯어 새끼를 꽈서 고무신을 동여매어도 얼마 가지 못했다. 숲은 우거차서 한낮인데도 산길은 어두웠다. 금방 어디선가 호랑이라도 나타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산길에는 소나무가 보이지 않고 활엽수만 보였다. 참 많이 올랐던 모양이다. 어딘지는 모르나 우리는 산꼭대기에 올랐다. 그러나 바닷조개가 보인다는 조개봉 꼭대기에는 키 낮은 나무와 풀들만 있었다.
우리는 환호를 질렀다. 드디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개 너머 다른 세상을 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곧 환호는 실망으로 다가왔다. 선생님이 얘기하던 바다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푸른 물결이 거대하게 넘실거린다는 바다는 거짓이었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아주 많은 산 능선 너머에 있다는 바다는 새까맣고 길게 드리워진 커다란 띠였다. 그렇게 맑은 날인데도 우리 눈앞에 펼쳐진 바다는 검은 띠였다. 아니 그것도 우리의 짐작일 뿐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수많은 산을 넘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각자 싸 온 도시락을 내려 밥을 먹었다. 감자와 강냉이가 섞인 밥 위에 고추장을 한 숟갈 넣은 소박한 도시락을 꿀맛처럼 먹었다.
어두컴컴했을 때 집으로 돌아왔다.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팔다리 어느 곳 성한 곳이 없었다. 온통 풀에 긁혀 핏자국이 이리저리 나 있었다. 쓰리고 아렸다. 그날 밤 나는 다시 바다를 꿈으로 보았다. 이처럼 어린 시절 정선 고라데이는 고개로 막혀 꿈으로만 대처를 갈 수 있었다. 오죽했으면 아라리에도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라 했을까.
세월이 참 많이도 지났다. 그 많은 고개를 이제는 자유롭게 넘어 다닌다. 비행기도 넘기 어렵다는 비행기재는 낮은 언덕이 되었다. 이젠 고개를 넘고자 애쓰던 그 시절이 그립다. 그런데 나는 이 순간 나에게 물어본다. 나는 내가 정말 꿈꾸던 고개를 넘었던 것일까. 그 고개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아직도 꿈으로만 고개를 넘어 대처로 가고 있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