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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6:14-30
찬송가 86장 ‘내가 늘 의지하는 예수’
욥의 고난은 재산을 모두 잃게 되고, 아내에게 버림 받으며, 자녀들의 죽음을 목도한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누구 하나 자신의 괴로움을 동정할 이가 없다는 사실에 욥은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욥의 고난은 그의 친구들로 인하여 좀처럼 끝나지 않고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4)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
전능자에서 친구로 (14)
욥의 말은 이렇습니다: 자신과 같이 어려움에 빠진 사람이 비록 하나님을 경외하든 말든, 당장에 필요한 것은 애처로운 자신을 동정할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한데, 자신에겐 그런 친구 하나 없다는 말입니다. 욥은 심정이 얼마나 답답했던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걸로 보입니다. 14절을 히브리 원문으로 보면, 하나의 매끄러운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는 ‘낙심한 자’ ‘그의 친구’ ‘동정’이라는 단어를 짤막하게 내던지며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그랬던 이유는, 욥의 친구들이 극심한 고난을 마주한 욥에게 ‘동정’을 베풀지 않고,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비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4절에 나온 ‘동정’은 우리에게 친숙한 단어인 친절과 자비를 나타내는 ‘헤쎄드(חֶסֶד)입니다. 다윗이 사울에 의하여 억울함을 당하여 갖은 고난을 당하는 순간에도 그의 친구인 요나단이 그를 믿어주며 고난을 피할 길을 마련해준 친절이 바로 헤쎄드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서 한걸음에 그를 찾아온 우정을 보였을진 몰라도, 정작 낙심한 자에게 가장 필요한 친절과 자비를 주지 못했습니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자신의 신학적 견해로 욥이 당한 상황을 멋대로 난도질하기에 바빴습니다.
어찌 보면 엘리바스는 욥기 4장에서 5장이라는 아주 긴 지면 동안에 욥의 친구의 위치에 있었다기 보단, 전능자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전능자라는 말은 구약에 48번 등장하는데, 그 중 무려 31번이 욥기에서 나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차마 해석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그 너머에 전능자의 손길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만, 욥과 친구들이 전능자에 대해 수많은 대화를 하며,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자신의 생각의 틀에 가두어 놓고, 그 분을 규정 지어보려 무던히 애를 썼다는 의미도 됩니다. 그로 인해 욥기 말미에 하나님은 폭풍속에서 나타나 그 모든 말이 ’무지한 말‘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그들의 입을 단번에 막아버리십니다(욥 38:2).
우리는 주변에 낙심한 자를 위하여 전능자의 위치에서 헤쎄드를 베푸는 친구의 자리로 내려와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정신입니다. 그는 가장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신 전능자였지만, 우리의 질고와 아픔을 동정하기 위하여 친히 이 땅 가운데 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시 소외받고 낮은 자들의 친구가 되셔서 ’죄인들의 친구‘라는 별명까지 얻으셨던 분입니다. 우리가 믿는 전능자의 행적은 전능자의 위치에서 동정하는 친구로서의 전환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십시다. 하나님 경외하기를 그칠만큼 낙심한 자에게 어떠한 동정을 베푸셨습니까? 우리는 그동안 낙심한 자에게 표정을 따뜻하게 하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위로 해주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도 그러하였습니까? 비록 겉모습은 최대한 부드럽고 따뜻하게 만들어 보였을지라도, 우리 내면은 엘리바스처럼 전능자가 되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낙심한 자를 정죄하며 거친 비난의 생각을 붙들고 있진 않았습니까? 익히 아시다시피, 하나님이 이러한 우리 중심의 폐부까지 모조리 살피시는 전능자이십니다. 그 분에게 전능자의 위치를 내어드리고, 낙심한 자를 향하여 친절과 자비의 헤쎄드를 베푸는 친구의 자리로 내려오는 저와 교우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본문 15절부터 20절은 욥에게 동정으로 다가가 친절하게 위로하고 그에게 격려를 주기보다, 하나님의 관한 견해를 심장이 아릴만큼 내세운 친구의 모습을 은유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15-20)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누나 얼음이 녹으면 물이 검어지며 눈이 그 속에 감추어질지라도 따뜻하면 마르고 더우면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지나니 대상들은 그들의 길을 벗어나서 삭막한 들에 들어가 멸망하느니라 데마의 떼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스바의 행인들도 그것을 사모하다가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러워하고 낙심하느니라
변덕스러운 개울같은 친구(15-20)
욥은 자신의 친구들을 친구 이상의 존재인 형제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변덕스러운 개울이었습니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가깝다 생각한 존재가, 실상 그렇지 않은 모습을 목격할 때만큼 마음이 상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잔잔한 호수가 되어주기 보다, 건기에는 마른 강바닥을 보이다가 우기가 되면 격렬한 급류로 흐르는 개울같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당시 개울의 모습은 물이 불어나 있을 때 튼튼한 강줄기를 형성하여, 외적으로 끊임없이 마르지 않고 흐를 것처럼 보여, 물이 필요한 농경지까지 충분히 닿아 물을 공급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개울은 그 일을 성실히 하지 못하기 일쑤였고, 물을 농경지에 공급하기도 전에 말라 버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욥은 물을 얻지 못해 농사가 망한 농부의 심정으로 친구들을 개울로 비유합니다.
뿐만 아니라, 욥의 친구들은 녹아 없어진 얼음이었습니다. 당시 욥의 지역은 지중해성 기후를 가지고 있기에 우기와 건기가 뚜렷하게 구분되는 사막 기후였습니다. 따라서 겨울에 저지대에는 눈이 내리지 않지만, 레바논 산맥의 고지대는 눈이 덮이고는 했습니다. 기후가 따뜻해져 눈이 녹으면 일정 기간 개울을 만들고, 눈이 녹으며 주변의 흙이나 암석과 함께 흘러내려 주변을 검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따뜻해진 날씨 탓에 개울은 얼마 못 가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졌습니다. 따라서, 얼음이 녹아 일시적으로 만들어진 검은 개울은 정작 필요한 여름철에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버려 농부에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재미있게도 이러한 물은 농부에게 뿐만 아닌, 여행객들에게도 허탈함만 안겨다 주었습니다. 본문 18절에서 19절에는 카라반(Caravan)이라는 여행객이 나옵니다. 그들은 무역을 주된 업으로 살아가는 자들이었고, 오랜 기간 여행을 위해 가죽물통에 상시 물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여행을 하다보면 물이 바닥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까운 개울을 찾았고, 개울의 흔적이 보이면 개울이 흘러 내려온 상류를 추적해 올라가 개울 웅덩이에서 물통을 가득 채우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수고롭게 올라간 그곳에서 말라버린 개울을 발견한 카라반들은 물을 얻지 못해 죽음의 위험을 맞이했습니다. 이것이 욥이 그의 친구들에게 한 비유입니다. 현재 자신은 물이 절실히 필요한 여행객이자 농부인데, 친구들은 자신에게 물을 공급하지 못하는 변덕스러운 개울물에 지나지 않다고 말입니다. 변덕스러운 개울이라는 욥의 비유는 그의 친구들에게 적절했습니다. 그들은 욥이 고난에 처한 소식을 듣고 달려와 칠일칠야(욥 2:11-13)동안 함께 금식하며 애통했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자신들의 신학적 견해와 신앙적 잣대를 내세우며 욥에게 무섭게 맹비난을 쏟았기 때문입니다. 욥은 영적인 고통을 넘어 정신적인 고통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어디로 어떻게 튈지 모르는 럭비공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은 신실함에 있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항상 그 자리에 계신 분이십니다. 변덕스러운 개울이 아니시며, 우리에게 잔잔하고 넓은 호수가 되어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신음에 귀를 가까이 기울이심과 같이, 낙심한 자의 입술에 우리의 귀를 가까이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거친 입술을 잠잠히 하고 그저 귀만 기울이는 모습 말입니다. 또한,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하나님 아버지가 그곳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심 같이(시편 23:4), 절망의 골짜기를 지나고 있는 자에게 묵묵히 그 곁을 지켜줌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닮은 자녀됨을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친절과 자비를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낙심 가운데 그 헤쎄드를 받아본 자녀들로써 낙심한 자들에게 헤쎄드, 동정을 흘려보내야합니다.
낙심자 욥이 원했던 것은(21-23)
사실, 일반적인 경우에 어떤 사람이 차마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 없는 낙심에 휩싸이게 되면 상대방으로부터 하나님에 관한 견해를 듣기 원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욥은 3장에서 자신이 태어난 사실에 가슴을 치며 통탄해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죽음을 사무치도록 그리워하며 절규합니다. 그러는 순간에도 욥은 자신에게 이미 찾아온 친구들에게 자신의 고통을 해석해달라 간구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엘리바스가 하나님 앞에서한 욥의 절규에 끼어들어 그의 고난을 해석했던 것입니다. 욥은 친구들의 해석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본문 21절에서 23절이 그 사실을 확증해 줍니다.
(21-23) 이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로구나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 내가 언제 너희에게 무엇을 달라고 말했더냐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을 선물로 달라고 하더냐 내가 언제 말하기를 원수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폭군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욥은 친구들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한순간에 무너져버린 재정을 일으켜달라는 의미로 재물을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떻게보면 자신의 인생을 극심한 고난으로 이끈 원수였던 사탄으로부터 자신을 구해달라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바란 것은 그저 친절과 자비로 점철된 동정이었을 뿐입니다. 낙심한 자의 요청이 참으로 간단명료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적극적으로 행동을 취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개의 경우, 우리가 낙심한 자에게 열어야 할 것은 입이 아닌, 귀입니다. 귀를 기울이는 동정입니다. 그러한 동정은 낙심한 자에게 재물보다 더 값진 선물이며, 원수를 이길 수 있는 그 어떤 군사적인 힘보다 더욱 막강한 힘이 됩니다. 우리는 낙심한 자에게 이러한 선물을 전해줄 수 있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창문을 열어 하나님을 바라봄은 그의 귀가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 우리의 귀를 어떻게 그리고 어디로 기울여야 할지 본받는 모습이 자녀의 삶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누가 누구의 의를 판단할 수 있는가?(24-30)
우리는 한 가지를 깔끔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낙심한 자가 당한 고난을 제대로 해석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의 눈에 그 고난이 그의 잘못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것 역시 우리가 모를 일입니다. 그와 하나님만이 아는 부분입니다.
(24-30)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너희가 남의 말을 꾸짖을 생각을 하나 실망한 자의 말은 바람에 날아가느니라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친구를 팔아 넘기는구나 이제 원하건대 너희는 내게로 얼굴을 돌리라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돌이켜 행악자가 되지 말라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속임을 분간하지 못하랴
욥은 왜 그리도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것입니까? 심지어 자신의 의가 ’건재하다‘라고까지 표현하며, 친구들에게 자신의 고난을 해석하는 너희가 잘못되었으니, 그런 잘못을 범하지 말고 자신의 주장으로 돌아오라는 당당함 마저 보여줍니다. 이것은 욥이 절대적으로 의롭다고 주장하는 발언은 아닙니다. 그의 친구들이 자신의 고난에 대해 여러 해석을 내놓지만, 그들의 말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말에 불과하다는 말이며, 그들이 주장하는 특정한 죄들을 욥은 하나님 앞에서 짓지 않았다는 단호함이었을 뿐입니다.
욥은 자신이 억울하다는 주장을 통해 친구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일방적인 선입견으로 자신의 신앙을 재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자신의 생각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욥의 입술에 귀를 기울였다면, 욥은 거센 주장을 펼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의가 건재하다, 다소 오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주장을 내세울 수 밖에 없었음은, 친구들이 자신이 아는 하나님,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 자기 관념속에 계신 하나님을 욥에게 밀어붙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구역모임을 하고, 신앙을 나누는 것은 각자가 경험한 광대하신 하나님의 조각들을 한 자리에서 나누어 맞춰보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욥의 친구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조각이 마치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그림인 듯이 내세웠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자입니다. 전능자의 온전한 그림을 한 개인이 가지고 있을 수 있다면, 교회 공동체는 애초에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조각이 완성된 그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겐 구역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곳에서 내 옆 지체와 하나님만이 나누고 알 수 밖에 없는 신앙의 신비를 엿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신비에 성급히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됩니다. 그때는 오히려 그가 가진 신앙의 신비에 귀를 기울여 내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그림을 한 조각 더 맞춰보는 때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겸손함을 지니며 옆 사람에게 귀를 기울여야합니다. 이것이 친절과 자비로 이루어진 헤쎄드의 첫걸음입니다. 내가 전능자의 모든 행적을 다 알 수 없다는 겸손함, 나는 낙심한 자에게 결코 전능자의 위치로 부름받지 않았다는 겸손함. 그에게 필요한 것은 친절과 자비인 동정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겸손함 말입니다. 그러한 동정으로 마음이 상한 자에게 치유를, 약한 자에게 강함을, 낙심한 자에게 소망을 전하는 저와 교우님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낙심한 자였던 욥에게 필요한 것은 뾰족한 해석도 아니었고, 재물이나 원수를 구원할 수 있는 실질적인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겐 친구들의 따뜻하고 친절한 동정이 필요했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우리의 잣대로 그들의 아픔을 가중한 것은 아니었는지, 얼굴은 부드럽고 따뜻하게 지었을지라도, 속으로는 그들을 나만의 신앙관념으로 판단하고 있었다면,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창문을 열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셔서,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인 곳에 귀를 기울이는 아버지의 자녀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낙심한 자는 친구로부터 친절과 자비의 헤쎄드, 동정을 얻길 바랬습니다(14). 우리 주변에 하나님을 경외할 힘마저 잃어버린 자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2. 욥은 가장 가깝다 여긴 친구들을 어떻게 비유하고 있습니까(15-20)? 욥의 친구들은 왜 이런 비유를 들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어떠한 모습을 닮아야겠습니까?
3. 낙심한 자에게 위로가 될 만한 것은 재물도,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는 능력도 아니었습니다(21-23). 욥의 친구들은 실제적인 해결책을 주려했을지는 몰라도, 욥의 원함에 먼저 귀를 기울이진 않았습니다. 우리의 귀 기울임은 현재 어떤 모습입니까?
4. 욥은 친구들에게 자신은 의롭다 말하며 친구들의 해석에 억울함을 토로합니다(24-30). 내 신앙으로 상대의 신앙을 재단한 적은 없습니까?
(작성: 김대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