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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야기 |
<조선시대>- 제21대 영조, 임오화변이 부른 사도세자의 죽음,
| > 개설: 조선21대 영조 왕, 재위 1724∼1776. 이름은 이금(李昑),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 숙종의 세 아들(景宗·英祖·延齡君) 중 둘째이며, 어머니는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이다. 비는 서종제(徐宗悌)의 딸 정성왕후(貞聖王后)이고, 계비는 김한구(金漢耉)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임오화변 결국 영조가 추구한 탕평은 노론을 중심으로 정국의 안정을 꾀한 후에 노론과 소론을 골고루 기용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신유대훈과 을해옥사 이후 노론의 정치적 우위가 더욱 심해지면서 탕평의 기본 취지는 퇴색되었다. 그런 가운데 노론 척신 세력이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다시 척신 계열과 비척신 계열로 나뉘어 반목했다. 이러한 분열의 중심에는 세자의 장인인 홍봉한(洪鳳漢)이 있었다. 특히 홍봉한은 점점 심각해지는 세자의 비행이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고, 그 과정에서 입막음용 뇌물을 주고받는 등 무리수를 두기도 했다. 이러한 홍봉한에 대해서 공세를 취한 세력을 공홍파(功洪派)라고 하고, 옹호하는 입장에 있던 세력을 부홍파(扶洪派)라고 불렀다.
공홍파와 부홍파의 세력 다툼이 한창일 때 사도세자의 죽음이라는 참극이 벌어지고 말았다. 세자가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굶어죽는 동안 공홍파든 부홍파든 나서서 말리는 신하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유교적 대의명분이나 의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당파적 이해관계만이 있을 뿐이었다. 왜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여야만 했을까? 사도세자는 영빈 이씨 소생으로 정빈 이씨 소생의 효장세자가 10세의 나이로 요절한 후 2세의 어린 나이에 세자가 되었다. 그런데 평소 성격이 조급하고 민첩했던 영조에 비해 세자는 말수가 적고 행동이 느린 편이었다. 영조는 그런 세자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게다가 영조는 천인 출신의 어머니 그리고 경종 독살설에 대한 부담감을 안고 왕위에 오른 탓에 오로지 자신의 혐의를 벗고 왕으로서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데만 골몰한 외골수였다.
스스로 근신의 태도를 잃지 않았던 영조는 세자에게도 매우 엄격했다. 세자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영조의 인정을 받기는 힘들었다. 이에 세자는 성년이 되면서 부왕에 대한 반발심으로 점차 엇나가기 시작했고, 비행을 일삼게 되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가 급격히 나빠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은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후부터였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이 정치적 견해 차이로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영조는 노론 중심으로 정국을 이끌어 갔고 세자는 거기에 불만이 많았다. 노론 역시 자신들이 하는 일에 반대하고 나서는 세자를 정적으로 간주하고 그를 끌어내리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그들은 세자의 비행을 알고도 이를 왕에게 알리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결정적인 순간에 세자를 공격할 빌미로 삼기 위해서였다.
한편 영조와 노론으로부터 배척당하는 세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일부 소론 인사가 나서기는 했지만 그들에게는 이미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 그러던 중 공홍파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羅景彦)이 형조에 세자의 비행을 알리는 고변을 했다. 이 고변은 영의정인 홍봉한에게 먼저 올라갔다. 홍봉한은 고민 끝에 고변의 내용을 영조에게 알렸다. 더 이상 세자를 감싸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세자의 비행을 알게 된 영조는 진노했다. 고변을 한 나경언과 세자의 비행에 관련된 인사들을 모조리 죽이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영조는 마침내 세자를 폐위했다. 심지어 세자 앞에서 칼을 휘두르며 자결을 명령하기도 했다. 세자가 그 앞에서 죽으려 했으나 신하들이 만류했다. 세손(정조)은 울며 아비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이 돌아선 영조는 기어이 자신의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굶어죽게 만들었다. 이것이 1762년(영조 38)에 일어난 임오화변의 전말이다.
임오화변 이후 세자의 죽음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던 홍봉한은 공홍파의 공세에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영조의 비호로 홍봉한과 부홍파는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영조가 홍봉한을 비호한 것은 결국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것에 대한 연대의식 때문이었다. 홍봉한의 혐의를 인정한다면 자신의 과오도 인정하는 꼴이 된다는 것은 영조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재위 기간 내내 경종 독살설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던 영조는 이제 자신의 아들을 죽였다는 죄의식 속에서 살아야 했다. 결국 영조가 오래 살았기 때문에 아들을 죽이게 된 셈이었다. 대권은 두 사람이 나누어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
고맙습니다.
쏠쏠한 재미 좋은글 사랑합시다.
전주향교/鶴田/옮김/한문희총대장 감사합니다.
본래의 마음,자유인 한문희총대장, 백두대간의 전설 자유인 백두대간종주대한문희총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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