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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서산 64코스 제1부
홍성 궁리항-서산A지구 방조제-간월암-간월도항-간월암 입구
20230913
1.간월도 간월암에 비치는 달빛 풍경
8월 23일 서해랑길 63코스와 62코스를 역방향으로 탐방하기 위해 궁리항에 온 뒤 3주만에 64코스와 65코스를 탐방하기 위해 궁리항 궁리어판장 앞에 다시 왔다. 그날도 비가 내렸는데 이번에도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이 지역은 길손에게 영원히 비의 인상으로 맺어지는 것일까? 투명한 천수만 해안을 조망하려는 욕망은 다시 물거품이 되고 가을비의 나그네가 된다.
64코스 13.2km와 65코스 15.3km, 총 거리 28.5km, 주어진 시간은 9시간, 서울 출발 시각은 태안군 남면 신장리 몽산포탐방지원센터 앞에서 오후 6시 20분이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식사 시간을 고려한다면, 점심 시간을 포함하여 오후 5시에는 몽산포 해변에 도착하여야 한다. 우산을 펼치고 서해랑길 안내도와 함께 기념 사진을 찍은 뒤 부슬부슬 내리는 남당항로를 따라 탐방을 떠난다. 먼 길을 떠나는데 비가 내리지만 마음은 날아갈 듯이 가볍다. 미지의 먼 길은 언제나 호기심과 새로운 발견으로 초대되기 때문에 마음이 부풀려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탐방 또한 지난 번처럼 마음껏 비의 나그네가 되어 '가을비 우산 속에'를 즐기자.
이번 64코스와 65코스는 천수만 북쪽 해안을 거쳐 태안군 남면 태안해안국립공원으로 나가는 길이다. 그동안 보령시에서부터 함께해 온 천수만과 태안군 남면 당암리 당암포구에서 작별하고 태안군 남면 신온리 태안해안국립공원 해안으로 나간다. 이 중 64코스는 홍성군 서부면 궁리 궁리항을 출발하여 서산A지구 방조제,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 간월암, 간월도항, 간월도리-창리 제방길, 서산시 부석면 창리 포구를 거쳐 서산B지구 방조제 천수만로의 태안군 남면 당암리 태안군관광안내소에서 끝나게 된다. 이 탐방길에서 볼 것이 간월호와 간월암, 부남호만을 말하는 탐방객에게 이 길손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천수만의 아름다움은 멀리 떨어져 관심 밖인가? 걸어온 천수만 남쪽이 길손에게는 끊임없이 눈길을 끌었다. 비가 내려 운무에 가린 천수만 해안과 바다 풍경을 상상으로 그리며 길손은 자꾸만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 풍경을 다 담을 수 없지만 64코스의 아름다움은 천수만 풍경의 아름다움에도 있다. 천수만 북쪽 부남호에서 끝나는 64코스를 2부로 나누어 구성한다.
궁리항에서 출발하여 궁리항 소형어선선착장으로 가는 길에 북서쪽으로 서산A지구 방조제와 천수만 간월도 앞 작은 섬의 간월암이 손짓한다. 서산A지구 방조제 제방길을 걸어 홍성에서 서산으로 넘어가 간월도 간월암을 거쳐가는 64코스 탐방 행로가 한눈에 보인다. 간월암에는 25년 전에 한 번 와 보았던 기억이 있지만 그 주변은 분명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움을 안고 저곳으로 간다. 뒤돌아서 남쪽을 바라보면 63코스에서 걸었던 해안이 흰색과 회색이 혼합되어 뭉그러진 색채로 해안 풍경을 그린다. 공사 중인 속동전망대, 어사리 해변, 남당항, 홍성방조제, 천북굴단지를 어림하며 천수만 해안이 이어지는 굴곡을 눈길로 따라간다. 그날 지금보다 훨씬 비가 세차게 내렸었지. 보령시 천북면 사호리 천수만 해안의 산길과 간석지길, 사호리 열호마을에 퍼붓는 비, 그 모습 속에 천수만의 보령시 보령항과 오천항이 환하게 솟아오른다.
서산A지구 방조제 천수만로 인도교로 올라가 자전거길을 따라간다. 이 방조제는 대교천(大橋川) 하구 물길을 막아 홍성군 서부면 궁리와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를 잇는다. 이 간척사업은 정주영 현대 회장의 "가지 않는 자에게는 길이 없지만, 가는 자에게는 없는 길도 만들어 간다."는 진취적인 모험정신을 보여주는 대역사(大役事)였다. 거센 물살 때문에 물막이 공사가 난관에 부딪치자 정 회장은 유조선 공법을 생각해 폐선박 유조선을 가라앉혀 물막이 공사를 성공리에 끝냈다고 한다. 고정관념의 틀을 깬 이 기발한 공법은 '정주영 공법'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방조제의 정확한 명칭은 서산A-1지구 방조제이며, 서산A-2지구 방조제는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와 창리를 잇는 방조제이다. 방조제 명칭을 A지구, B지구라고 하는 대신에 방조제에 의해 생겨난 담수호 이름을 따서 간월방조제, 부남방조제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간월호는 물과 운무가 혼합되어 부옇게 떠있다. 그 북쪽에 섬처럼 떠있는 도비산이 곡선을 그으며 풍경 속으로 들어온다.
천수만로 간월교차로에서 천수만로 횡단보도를 건너 간월도1길을 따라 간월암으로 향한다. 간월도1길은 천수만 해안을 따라가는 길로 날씨가 맑으면 천수만의 풍경이 투명하게 조망될텐데, 비와 운무에 가린 천수만 풍경은 모든 것들이 혼합되어 회색빛으로 무화된다. 그럼에도 탐방 기억은 회색빛을 헤치고 되살아나 추억의 흔적을 한 올씩 풀어낸다. 이 순간에는 그 풍경이 잿빛이건 투명하건 중요하지 않다. 그 풍경을 체험한 길손의 마음 속에서는 구체적 현장의 아름다움을 한 올 한 올 걷어올리며 아득한 그리움을 품는다. 천수만의 아름다움이 비와 운무와 햇살로 빛난다.
간월도 어리굴 기념탑 옆에 어리굴 캐는 아낙네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어리굴 기념탑보다는 어리굴 캐는 아낙네 조형물이 더 예쁘게 가슴을 울린다. 길손은 이 조형물 앞에서 할머니와 어머니, 이웃 아주머니 모습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평안해지며 또 삶의 고단함도 느낀다. 그 모습은 지난 시절을 연상시키며 오늘의 현장을 떠올리게 한다. 어제의 고통은 오늘에 사라지지 않고 다른 형태로 바뀌었을 것이다. 어리굴 캐는 아낙네 조형물 지대석 앞면에는 간월도 어리굴젓에 대한 설명과 간월도 어리굴탑 건립 의의를 밝히는 글이 새겨져 있다. 25년 전에는 어리굴 캐는 아낙네 조형물만 있었던 것 같다. 어리굴 기념탑은 그 이후에 세워졌을 것이고, 어리굴 캐는 아낙네 조형물 옆으로 해상보도교가 최근에 설치된 듯하다. 해상보도교를 통하여 천수만 바다로 나가 가까운 간월암과 천수만을 조망할 마음만 품고는 그냥 그 앞을 지나친다.
간월도 거리는 여러 맛집과 음식점이 즐비하게 늘어났다. 관광객을 위한 설치물과 지역 홍보를 위한 조형물 등과 함께 간월도는 변화하였다. 그 모습은 간월도 주민과 외지인들이 노력하여 간월도의 자연과 잘 어우러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캠핑장과 카페와 펜션과 음식점들이 천수만 풍경과 친화한다는 길손의 생각이 천수만의 자연을 오직 자연의 풍경으로 사랑하는 탐방객들에게는 부정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천수만은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이다.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며 자연을 사랑하는 간월도 주민의 마음을, 천수만 어리굴젓 사랑 속에서 길손은 분명히 느꼈다. 인간의 숨결이 없는 자연만의 진공 상태는 오직 원시 자연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자연과 공존하며 친화하는 간월도 풍경이 지금도 사랑스럽게 펼쳐진다.
서해랑길은 간월도 어리굴 기념탑 앞에서 간월암과 간월도항을 거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만약 서해랑길을 단축하고자 하면 어리굴 기념탑 앞에서 천수만 해안을 따라 서산A-2지구 방조제로 나가면 된다. 길손은 서해랑길 정코스를 따라 간월암 방향으로 길을 잡아 언덕으로 올라갔다. 언덕에서 내려보는 간월암(看月庵)은 작은 섬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 바위섬을 원통대(圓通臺)라 이른다고 한다. 원통대 간월암(看月庵)은 밀물 때는 간월도 본섬과 갈라져 섬이 되고, 썰물 때는 걸어서 들어갈 수 있다. 25년 전 간월암(看月庵)에 첫 번째로 들어간 이후, 두 번째로 간월암(看月庵)으로 걸어서 들어간다.
간월암을 창건했다고 전하는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의 고향은 경남 합천군 삼기면인데, 무학과 관련한 여러 설화에는 무학의 출신지가 서산시 인지면 애정리 쑥댕이마을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서산시문화원에서는 무학의 부모가 합천 지역에 살다가 어떤 사정으로 서산으로 옮겨 무학을 낳은 뒤 합천으로 돌아간 것으로 본다고 한다. 무학대사와 간월암에 대한 설명글을 읽으며 간월도 간월암에 대하여 살펴본다.
"전언에 의하면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달을 보고 홀연히 깨쳤다고 하여 암자 이름을 간월암(看月庵)이라 하고 섬 이름을 간월도(看月島)라 하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수행하던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李成桂)에게 보낸 간월도 어리굴젓이 궁중의 진상품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1530년(중종 25) 찬술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간월도만 언급되어 있고 간월암은 언급되어 있지 않아 간월암은 조선 후기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말엽에 폐사되었는데 1941년 승려 만공(滿空)이 다시 창건하였다."(디지털서산문화대전) "간월암은 과거 피안도(彼岸島) 피안사(彼岸寺)로 불리며 밀물 시 물 위에 떠있는 연꽃 또는 매화와 비슷하다 하여 연화대(蓮花臺) 또는 낙가산(落伽山) 원통대(圓通臺)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려 말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수도하던 중 달을 보고 홀연히 도를 깨우쳤다 하여 암자 이름을 간월암(看月庵)이라 하고, 섬 이름도 간월도라 하였다. 이후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간월암이 폐사되었던 것을 1941년 만공선사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간월암 설명안내판)
역사 기록으로, 간월암은 조선 후기에 창건되었다가 조선 말엽에 폐사되었는데, 만공선사(滿空禪師, 1871~1946)가 1941년 중창한 것으로 본다. 반면에 민간에 구전되는 간월암 관련 설화에 의하면 간월암은 무학대사가 고려말이나 조선 초기에 창건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문화는 상상력과 설화에 의해 아름답게 윤색된다. 간월암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역사적 기록과 상관없이 달을 보고 진리를 깨우친 간월암 이야기는 시대와 공간을 건너 뛰어 퍼져나가 더 큰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간월암은 작은 섬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바다에 떠 있다. 간척사업에 의해 하루에 두 번 썰물 때는 걸어서 간월암에 들어갈 수 있는데, 이것이 간월암을 더 신비하게 하는 것 같다.
현재의 간월암은 예전의 간월암과 달리 여러 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그 시설물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어민들의 풍어와 안녕을 기원하는 제각인 용왕각이다. 용왕각의 유리창을 통하여 천수만 바다의 죽도가 빤히 보인다. 자연물로는 종무소 앞 팽나무와 그 앞의 사철나무이다. 수령 150년의 팽나무는 무성한 푸른 잎들을 펄럭이며 자잘한 붉은 열매를 자랑하고 있다. 수령 250년의 사철나무는 맑은 초록잎들을 반짝이며 자잘한 연초록 열매들을 고이 키우고 있다. 이 사철나무를 간월암에서는 무학대사 지팡이라고 설명안내판에 적어놓았다. 겸손한 탐방객들은 이것을 믿기도 하겠지만, 현실에 충실한 길손은 오직 사철나무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동한다. 그래서 간월암을 대표하는 것은 팽나무와 사철나무의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이 길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간월암 일주문을 통하여 내려와 간석지를 건너 간월도 본섬 언덕으로 올라왔다. 다시 한 번 간월암을 바라보았다. 간월암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을까? 간월암의 구성 요소인 팽나무와사철나무가 아름다움을 대표한다고 하지만, 간월암 전체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 길손은 환각에 빠진다. 간월암 서쪽 하늘에 이글거리는 낙조가 펼쳐진다. 바닷물이 차올라오고 간월암이 떠오른다. 낙조를 배경으로 하여 간월암이 배가 되어 바다를 둥실둥실 떠간다. 낙조가 사라진 뒤 사위가 고요와 적막 속에 어둠이 깃든다. 동쪽 하늘에 달이 떠올라 달빛이 간월암을 비춘다. 바다에 둥실둥실 떠있는 간월암에 달빛이 빛난다. 이 풍경이 간월암 통째의 아름다움이 아니겠는가? "千江有水千江月(천강유수천강뭘) 萬里無雲萬里天(만리무운만리천) 천 개의 강에 물이 있으니 천 개의 강에 달이 비치고, 만 리에 구름이 없으니 만 리가 하늘뿐이로다." 환각의 간월암 풍경은 아름답다. 그 풍경은 바닷물이 차오르고 달빛 비치는 때에 분명히 감각할 수 있을 것이다.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3.67km 중 6.31km
전체 탐방 시간 : 3시간 27분 중 1시간 29분
홍성군 서부면 궁리 궁리어판장 건물 옥상의 낚시하는 사람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왼쪽 보령해양경찰서 궁리출장소 건물 앞에 서해랑길 63·64코스 안내도, 오른쪽 화장실 건물 오른쪽 전봇대에 서해랑길 64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붙어 있다.
서해랑길 64코스는 거리 13.2km, 소요 시간 4시간 30분, 난도 매우 쉬움이라고 적혀 있다.
홍성군 서부면 궁리 궁리어판장 앞 광장 북쪽에 세워진 서해랑길 63·64코스 안내도와 함께 64코스 탐방 출발을 기념한다.
왼쪽 전봇대 기둥에 서해랑길 64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붙어 있다. 남당항로를 따라 하리마을 앞을 통과한다.
남당항로에서 서해랑길 64코스 출발지를 뒤돌아보았다. 궁리어판장, 보령해양경찰서 궁리출장소, 화장실 등이 위치해 있다.
남당항로를 따라 왼쪽 뒤 소형어선 선착장 방향으로 이어간다.
남당항로에서 왼쪽 궁리어판장과 옥상의 조형물, 그 오른쪽에 궁리항과 방파제를 바라본다.
중앙 뒤에 궁리항 소형어선 선착장, 어선 뒤에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 왼쪽 뒤에 태안군 안면도가 보인다.
궁리항 소형어선 선착장은 오른쪽에 길게 이어져 있는 서산A지구 방조제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남당항로 소형선박 선착장 앞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홍성 조류탐사 관학관, 그 옆에 수산물웰빙사업관이 언덕에 있다.
소형어선 선착장 위쪽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서산A지구 방조제 배수갑문이 보인다.
서산A지구 방조제가 홍성군 서부면 궁리에서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로 길게 이어진다.
서산A지구 방조제가 끝나고 중앙에 간월도가 보이며, 그 왼쪽 뒤로 안면도가 이어진다.
위와 같은 곳에서 궁리항 소형어선 선착장을 뒤돌아본다. 뒤쪽에 안면도가 흐릿하게 조망된다.
남당항로 하리교차로에서 왼쪽 궁리포구 자전거길로 진입한다.
궁리항 궁리어판장에서 남당항로를 따라 소형어선 선착장을 거쳐 하리교차로로 이어왔다.
하리교차로에서 궁리포구 자전거길을 따라서 바로 앞 서산A지구 배수갑문교를 건넌다.
궁리포구 자전거길을 따라서 서산A지구 배수갑문교를 건너 오른쪽 궁리교 아래를 통과한다.
궁리교 아래를 통과하여 서산A지구 방조제길 천수만로로 올라간다.
오른쪽 간월호를 바라바며 궁리포구 자전거길을 따라 서산A지구 방조제 '천수만로'로 올라간다.
맨 오른쪽 홍성군 서부면 상황리 속동전망대 앞쪽 궁리항 궁리어판장에서 출발하여 궁리포구 자전거길을 따라오고 있다.
중앙에 건설 중인 홍성군 서부면 상황리 속동전망대가 보이며, 그 앞쪽에 궁리항, 오른쪽에 궁리항 소형어선 선착장이 있다.
천수만로 북쪽 보도와 자전거길을 따라간다.
홍성군 서부면 궁리에서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로 넘어간다. 서산버드랜드는 이곳에서 6.3km 거리이다.
오른쪽 천수만 홍성군 서부면 일대 궁리항, 속동전망대, 남당항을 가늠한다.
천수만로에서 간월호, 그 오른쪽의 홍성군 서부면과 그 뒤쪽의 갈산면 일대를 조망한다.
서산A지구 방조제에 의해 도당천과 간월호는 천수만과 분리되었다. 중앙 뒤로 서산시 고북면과 해미면 일대를 가늠한다.
대교천(大橋川)이라고도 불리는 도당천(島堂川)은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도당리에서 발원하여 운산면, 해미면을 지나 간월호로 흘러가는 금강 서해권 수계에 속하는 지방하천이다.(위키백과)
서산A지구 방조제는 대교천을 가로막아 드넓은 간월호가 형성되었다. 서산시 도심이 간월호 뒤쪽에 있을텐데 보이지 않는다.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을 흐르는 금강 서해권 수계 하천인 대교천(大橋川)은 도당천(島堂川) 또는 용두천(龍頭川)이라고도 부른다. 대교천과 교량의 이름은 대교리[지금의 유계리]에서 유래하였으며, 『조선지도(朝鮮地圖)』, 『해동지도(海東地圖)』, 『동여도(東輿圖)』,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대교(大橋)가 묘사되어 있다. 특히, 조선 후기 한경춘(韓慶春)·한여현(韓汝賢) 부자가 편찬한 충청남도 서산의 사찬 읍지인 『호산록(湖山錄)』에 “대교천은 군 동쪽 15리에 있다. 다리 아래나 다리 위가 모두 흰 돌의 맑은 내인데 다리도 역시 돌다리이다. 만일 다리 아래에 발을 멈추고 맑게 흐르는 물을 굽어보면 눈빛 같은 고기떼가 수도 없이 대열을 따라 올라가고 혹은 내려가며 내 가운데서 노니는 모양을 볼 때에 스스로 티끌 세상에 의사가 없는 듯하다.”고 나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산 간척지는 바다를 막아 옥토를 일궈낸 無에서 有를 창조한 현대정신의 진수를 보여주는 역사적인 현장입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 정주영, 우리나라 공업화의 거인 정주영 회장은 좁은 국토의 확장과 식량 자급자족의 소망을 담아 농업분야에서도 또 하나의 기적을 이루어 냈습니다. 1980년대에 시작된 서산 간척지사업은 총길이 7.7km의 방조제를 축조하여 총면적 4,660만평의 간척지를 조성하는 엄청난 대역사였습니다. 그러나 방조제공사의 마지막 물막이 단계에서 9m에 달하는 조수간만의 차와 초당 8.2m의 빠른 유속으로 더 이상 뚝을 쌓을 수 없는 최악의 난관에 부딪쳤습니다. 승용차만한 바위덩어리조차 흔적도 없이 쓸어내 버리는 거센 물살은 어떠한 장비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러한 때 1984년 2월 정주영 회장은 그 특유의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떠 올렸습니다. 세계 토목건설사상 유례가 없는 유조선 공법을 생각해낸 것입니다. 그는 고철로 쓸 23만톤급(길이 322m, 높이 27m) 폐선박 유조선을 끌고 와 물을 가득 담아 가라 앉혀 물막이 공사를 성공리에 끝냈습니다. 고정관념의 틀을 깨는 이 기발한 공법은 '정주영 공법'이란 이름으로 세계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공사기간이 단축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사비도 절감되었으며, 총 면적 101,046㎢(3,400만평)를 얻는 개가를 올렸습니다. 이것은 단일경영농장으로는 세계최대 규모로 우리나라 벼 재배 전체 면적의 1%에 해당되며, 선진 과학영농으로 50만명이 1년간 먹을 수 있는 쌀을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가지 않는 자에게는 길이 없지만, 가는 자에게는 없는 길도 만들어 간다."는 정주영 회장과 현대인들의 진취적인 모험정신의 승리를 우리는 여기서도 볼 수 있습니다.
천수만로에 서산 천수만이 세계적인 철새도래지임을 알리는 홍보물이 세워져 있다.
도당천(島堂川)을 가로막은 서산A지구 방조제에 의하여 형성된 간월호는 천수만과 분리되었고, 왼쪽 뒤에 도비산이 있다.
도당천(島堂川)이라고도 불리는 대교천(大橋川)은 양대산과 은봉산 줄기에서 발원하여 성암저수지로 모인 후 다시 남쪽으로 흐르면서 원벌리와 삼성리 등에서 많은 실개천을 합류하며 남쪽으로 흐르다가 해미면에서 흘러오는 해미천을 받아들여 간월호로 유입한다. 또한 동쪽의 덕문천이 흘러와 남쪽의 대교천에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르면서 간월호로 유입된다. 대교천은 유계리 앞에서 활처럼 굽으면서 흐르고, 유로의 길이가 길고 수심이 깊은 편에 속한다. 도당천은 물이 맑아 수초와 물고기가 많이 자생하고 있으며, 뿔논병아리 같은 희귀 조류와 천연 기념물로 지정된 고니 등이 서식·도래하고 있다. 대교천은 하천의 양안에 넓은 충적지를 형성하여 논으로 이용하고 있다. 대교천은 성암리의 성암저수지에서 공급받은 물을 이웃 운산면까지 연결하여 관개용수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대교천의 굴곡부에는 높이 2~5m 정도의 달걀 모양의 바위가 6~7개 모여 있는 용유대(龍遊臺)가 있는데, 이는 음암면의 음암팔경 중 제7경으로, 광해군의 난정으로 인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 단구자(丹丘子) 김적(金積)[1564~1646]이 노닐던 곳이다. 용유대는 주변의 소나무와 어우러져 수려한 경관을 이루고 있으며, 서쪽 강 옆의 큰 바위에는 “단구김선생유상고허적(丹丘金先生遊賞古墟積)”이라는 글귀가 세로로 새겨져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수문 때문에 자전거길은 천수만로와 떨어져 간월호에 맞붙어 이어진다. 안면도 쥬라기박물관 홍보판이 세워져 있다.
수문 앞 자전거길을 따라 걸어왔다. 뒤쪽에 보이는 산은 홍성군 갈산면 삼불산(왼쪽)과 계봉산일 것이라 추정한다.
천수만로 북쪽의 보도와 자전거길을 따라 간월교차로 방향으로 이어간다.
천수만로에서 간월호와 간척농지, 그 뒤에 솟은 도비산을 조망한다.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취평리에 있는 도비산(島飛山)은 바다 가운데 ‘날아가는(飛) 섬[島]’ 같다 해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매년 봄이면 산 전체에 복숭아꽃이 만발해 복숭아 ‘도(桃)’, 살찔 ‘비(肥)’를 써서 ‘도비산(桃肥山)’이라고 한다는 설도 있다. 도비산은 금강 북쪽의 산줄기로 금북정맥에 속한다. 도비산 일대를 구성하고 있는 지질은 원생대의 태안층으로, 태안층은 서산층군에 속하는 편암류 및 편마암류 위에 부정합으로 놓여 있다. 도비산 동쪽에는 천수만이 있고, 천수만의 간석지는 현재 간척이 되어 논으로 이용되고 있다. 도비산은 정상에서 보이는 서해의 조망이 뛰어나다. 특히 등산로에 해돋이 전망대와 해넘이 전망대가 함께 있어 매년 등산객이 많이 찾는다. 도비산 산행은 부석사 입구에서 시작되어 30여 분을 올라가면 부석사에 닿고, 이곳에서 20여 분 오르면 능선에, 15분 정도 더 걸으면 정상에 이른다. 정상에서는 천수만 간척지, 넓은 들판과 서해 바다를 볼 수 있다. 옛 서산 읍지인 『호산록(湖山錄)』에는 날씨가 쾌청할 때 도비산에서 서해를 바라보면 중국의 청제(淸齊)[지금의 산둥 반도]의 지경을 볼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비산에는 석천암, 동사, 부석사 등의 절이 있으며, 부석사에는 템플 스테이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주변에는 안면도, 간월암, 수덕사 등 관광 명소가 산재해 있어, 여름철 가족 산행지로 적격이다. 또한 겨울이면 간월호와 부남호의 철새를 볼 수 있다. 도비산 정상에는 봉수대가 축조되어 있었는데[해발 340m] 지금은 봉수대 안에 고압선 철탑이 세워져 있으며 손상이 많이 된 상태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 간척농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중앙 뒤의 산은 부석면 지산리 도비산이다.
서해랑길은 간월교차로에서 길을 건너 왼쪽 뒤에 보이는 간월도 방향으로 이어간다.
서해랑길을 단축하려고 하면 천수만로를 계속 따라가면 된다. 앞에 보이는 마을은 간월도리 큰말이라고 가늠한다.
간월도는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포구 마을이다. 본래는 천수만 내에서 안면도에 딸린 황도와 더불어 가장 큰 섬이었다. 그러나 1982년 10월 26일 물막이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대대로 갯가에 의지하여 살아온 간월도는 뭍으로 변했다. 자연 마을로는 큰말·벗말·달박골·갱말 등이 있으며, 이 가운데 30여 호가 거주하는 큰말은 간월도의 중심지로서 부석초등학교 분교가 자리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천수만로 간월교차로에서 천수만로를 건너 간월도2길을 따라 간월도 방향으로 이어간다.
천수만 해안 간월도2길을 따라 간월도 방향으로 진행한다. 오른쪽 건너편은 주차장이며 전기차충전소가 있다.
간월도2길을 따라 수제맥주양조장 '오 비어&카페' 앞을 통과한다.
간월도2길 '오 비어&카페' 옆으로 음식점들이 있다.
홍성군 서부면 궁리 궁리항에서 출발하여 서산A지구 방조제를 통하여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 천수만 해안으로 나왔다.
동쪽은 홍성군 서부면 어사리항, 남당항, 홍성방조제, 서쪽은 태안군 안면도가 감싼 천수만 바다, 중앙 오른쪽에 죽도가 있다.
맨 뒤쪽에 태안군 안면도가 천수만 서쪽을 감싸고, 맨 오른쪽에 간월도, 그 뒤에 황도가 보인다.
천수만 바다의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에 간월암이 자리하고 있다. 그 뒤에는 태안군 안면읍 황도 섬이 보인다.
오른쪽 들녘 건너편에 간월도캠핑장 역마차펜션, 왼쪽에 '카페 드르와'가 있다. 서해랑길은 간월도2길을 따라 직진한다.
간월도2길이 간월도1길과 만나는 지점에 간월도 어리굴 기념 조형물과 간월도 어리굴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어리굴 기념탑 옆에 어리굴 캐는 조형물을 세우고 지대석 벽면에 어리굴 기념탑 건립 의의를 적었다.
이곳 간월도는 서산군 부석면의 남쪽 천수만 내에 위치한 총면적 8.27㎢의 작은 섬마을이었으나 1983년 10월에 천수만 간척사업으로 인근에 있는 창리와 방조제가 연결되어 섬마을을 면했으나 교통수단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옛날 그대로인 바로 이곳이 그 유명한 간월도 어리굴젓의 특산지이다. 마을사람들의 구전에 의하면 간월도 어리굴젓은 그 맛이 뛰어나서 식탁의 명찬으로 고려 말기부터 조정에 알려지기 시작하여 조선조에 와서는 태조대왕의 왕사이시던 무학대사께서 이곳 간월암에서 수도하실 때 처음으로 태조대왕에게 진상하여 임금님의 수라상에 올려져서 이때부터 진상품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고 전한다. 간월도의 굴은 다른 지방의 굴과 자라는 과정이 특이하여 어릴 때에는 돌과 바위 등에 붙어 석화로 자라다가 완전히 자란 뒤에는 돌과 바위에서 떨어져 갯벌에서 사는 토굴 土花로 변했을 때 이를 아낙네들이 채취하여 어리굴젓을 담그는데 특히 굴의 색깔이 검고 몸에 물날개(굴알에 난 미세한 털)가 많이 돋아있기 때문에 양념이 골고루 묻어 발효가 잘 되어 특유의 맛을 낸다고 한다. 제조과정을 보면 주민들이 지금도 조상전래의 재래식 방법을 그대로 지켜서 만들고 있다. 먼저 바다에서 채취한 굴을 까서 맑은 해수에 깨끗이 씻어 대바구니에 받쳐 물기를 뺀 다음에 천일염으로 간을 맞추고 질그릇에 넣어 섭씨 15도의 서늘한 곳에 2주간을 발효시킨 다음 다시 대바구니에 받쳐 물끼를 없애고 잘 빻아진 고춧가루와 맑은 육수(陸水)를 부어 알맞게 잘 버므려서 옹기에 담아두면 맛 좋은 어리굴젓이 된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을 우리의 전통음식문화로 전수, 보존해 온 간월도리 주민의 긍지를 드높이며 조상대대로 이어온 어리굴젓의 제조방법을 후손들에게 전수계승케 하여 우리 서산군의 특산물인 간월도 어리굴젓의 명성을 오래오래 간직하고자 이곳 간월도리에 이 기념탑을 세운다. 1990년 12월 글씨 黃晳捧(황석봉) 조각 車相權(차상권)
어리굴 기념탑이 어리굴 캐는 아낙네 조형물 바로 옆에 있었을 것인데,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서해랑길은 간월암 방향으로 이어가는데 단축하고자 하면 이곳에서 뒤돌아서서 천수만로 제방 방향으로 나간다.
간월2길에서 간월1길로 나왔다. 서해랑길을 단축하고자 하면 해미읍성 왕꽈배기 간월직영점 앞에서 해안을 따라 나간다.
서해랑길은 왼쪽 간월암 방향으로 올라가 간월암과 간월도항을 돌아서 오른쪽 길로 나은다.
간월도는 서산방조제가 축조되면서 육지화되었다. 서해랑길은 간월암과 간월도항을 거쳐 왼쪽 길로 나와 해안을 돌아나간다.
간월도 남쪽의 작은 섬은 간월암이 차지하고 있으며 간조 때에 걸어서 들어갈 수 있다.
만조 때는 걸어 들어갈 수 없다. 다행스럽게 간조 때여서 간월도 간월암을 들렀다 나온다. 저곳을 원통대라 이른다고 한다.
간월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물은 원통대(圓通臺) 위에 지은 간월암이다. 본래 원통대는 간월도 남쪽 끝자락에 좌정한 작은 섬이었으나, 천수만 방조제가 들어서면서 뭍으로 연결되어 썰물 때는 걸어서도 왕래할 수 있다. 이 절은 무학대사와의 인연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구전에 따르면 애당초 무학이 머물렀던 절은 안면도[태안군 안면읍] 승언리 젓개[傍浦] 북쪽이었다. 젓개 곁에는 자그마한 산이 솟아 있는데 그 중턱에 무학이 수도를 했던 절이 있었다. 그런데 절을 지은 뒤 이곳을 지나가는 선박이 암초에 걸려서 좌초되는 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그 까닭은 악천후에 포구 앞을 지나가던 선박이 무학의 절에 켜진 불빛을 보고 등대로 착각하여 불빛을 따라 항해하다가 암초에 부딪친 것이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무학은 절을 버리고 간월도로 옮겨 갔고, 그 뒤로는 배들이 암초에 걸리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와 같이 간월암은 안면도에서 옮겨온 무학이 수도를 위해 창건한 사찰로 구전되고 있지만 기록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가 학인된 것은 아니다. 『호산록』의 기록을 보면 조선 후기에도 사찰이 존재했음은 분명한데 폐사된 시기는 알 수 없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간월암 가는 간석지에서 건너편의 황도를 살핀다. 황도는 그 뒤쪽의 안면도와 황도교로 이어져 있다.
어느 쪽으로 가도 무방하지만 왼쪽으로 가서 천수만 바다를 살피고 간월암으로 올라가 일주문으로 나오기로 한다.
일제 강점기에 예산 수덕사를 중흥시킨 만공(滿空)[1871~1946] 스님이 이곳에 절을 세우기 위해 여러 차례 간월도를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는 이미 안면도에 사는 사람이 묏자리로 길지라는 풍수설을 믿고 조상의 묘를 쓴 상태였다. 그래서 당시 서산군수 박동래와 안면 면장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 묘를 다른 곳으로 이장시키고 1941년 지금과 같이 암자를 세웠다. 간월도에는 숱한 무학대사의 자취가 서려 있다. 간월도에서 굴을 따서 연명하던 여인이 낳은 아들이 무학이라는 출생담이 바로 「학이 날개로 보호한 어린아이」이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이러하다. 옛날에 간월도에 살던 한 여인이 임신을 한 채 홀로 되었다. 생활이 어려웠던 여인은 서산장으로 굴을 팔러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여인이 인지면에 이르렀을 때 산기가 있어 풀밭으로 가서 아들을 낳았다. 여인이 아기를 눕혀 놓고 굴을 팔고 급히 와서 보니 학이 날개로 어린아이를 덮어 보호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무학이라 지었다는 것이다. 무학은 어머니를 지성으로 모시다가 돌아가신 뒤에 중이 되었다고 한다. 또 무학은 자란 후에 토굴에 기거하며 도를 닦았는데, 달을 보고 문득 도를 깨달았다 하여 그 섬을 간월도라 했다고 한다. 쌀바위에 얽힌 전설인 「쌀 나오는 구멍」도 흥미롭다. 무학대사는 동자 하나를 데리고 수도를 할 때 쌀이 나오는 구멍에서 쌀을 받아먹으며 지냈다. 그런데 대사가 간월도를 떠난 후에 다른 중이 와서 보니 구멍에서 나오는 쌀이 너무 적었다. 중은 쌀이 적게 나오는 것은 구멍이 작기 때문이라고 여겨 그 구멍을 크게 팠다. 그러자 이제부터는 쌀은 나오지 않고 물이 흐르게 되어 더 이상 쌀이 나오지 않았다. 한편 「간월암 유래」 이야기에서는 무학대사가 떠날 때 생생한 나무 하나를 잘라 꽂으며 동자에게 “이 나무가 살아 있으면 내가 살아 있는 줄 알고, 나무가 죽거든 내가 죽은 줄 알라.”라고 이른 뒤에 떠났다고 한다. 그 나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는데, 수백 년이 지나서 다시 잎이 난 적이 있다고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간월암 일주문 아래에 간월암에서는 조용히 하라는 안내문을 詩文으로 적어 놓았다.
옛 선사 달 보고 깨우친 간월암에/ 잔잔한 염불소리 울리면/ 바닷새, 파도마저 소리를 낮추고/ 지나던 나그네는/ 발걸음도 조심한다네./ 간월암에서는 입과 마음을 잠시 쉬고,/ 마음의 평안과/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며/ 귀한 시간, 귀한 걸음/ 헛되이 하지 마소서.
간월암 일주문 아래에 간월암 가람배치도와 간월암의 유래 설명안내판이 있다.
간월암은 과거 피안도(彼岸島) 피안사(彼岸寺)로 불리며 밀물 시 물 위에 떠있는 연꽃 또는 매화와 비슷하다 하여 연화대(蓮花臺) 또는 낙가산(落伽山) 원통대(圓通臺)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려 말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수도하던 중 달을 보고 홀연히 도를 깨우쳤다 하여 암자 이름을 간월암(看月庵)이라 하고, 섬 이름도 간월도라 하였다. 이후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간월암이 폐사되었던 것을 1941년 만공선사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만공선사는 이곳에서 조국해방을 위한 천일기도를 드리고 바로 그 후에 광복을 맞이하였다고 전한다. 간월암은 밀물과 썰물 때 섬과 육지로 변화되는 보기 드문 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특히 주변의 섬들과 어우러진 낙조와 함께 바다 위로 달이 떠올랐을 때의 경관이 빼어나다.
유홍준 교수가 추천한 답사지로서 추사고택, 서산마애불, 보원사 터, 간월암, 개심사를 소개하고 있다.
간월암은 간월도 남쪽에 이어진 작은 섬인데, 서산방조제가 축조되면서 간월도는 육지가 되고 간월암은 섬으로 남아 있다.
간월도는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포구 마을이다. 본래는 천수만 내에서 안면도에 딸린 황도와 더불어 가장 큰 섬이었다. 그러나 1982년 10월 26일 물막이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대대로 갯가에 의지하여 살아온 간월도는 뭍으로 변했다. 자연 마을로는 큰말·벗말·달박골·갱말 등이 있으며, 이 가운데 30여 호가 거주하는 큰말은 간월도의 중심지로서 부석초등학교 분교가 자리한다. 예나 지금이나 간월도를 대표하는 특산품은 어리굴젓이다. 간월도 어리굴젓은 조선 시대 임금에게 진상되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을 만큼 전국에서 이름난 특산물이다. 현재 마을 내에는 어촌계에서 운영하는 무학표 어리굴젓을 비롯한 세 개의 생산 라인이 있으며, 곳곳에는 어리굴젓 매장과 이를 특화한 음식점이 성업 중이다. 또한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대보름[음력 1월 15일]에 부녀자들이 주관하는 굴부르기 행사를 갖는다. 어리굴젓과 더불어 간월도의 상징은 원통 모양의 바위섬인 원통대(圓通臺)에 사뿐히 내려앉은 간월암(看月庵)이다. 조선 전기 왕사(王師) 무학대사(無學大師)[1327~1405]가 거처하며 수도를 했던 간월암은, 무학과 관련된 다양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한 폭의 그림과 같은 풍광을 지닌다. -디지털서산문화대전
왼쪽에 서산A지구 방조제, 중앙으로부터 오른쪽으로 홍성군 서부면 궁리, 상황리, 어사리, 천수만 해안이 이어지고 있다.
홍성군 서부면 남당항으로부터 홍성방조제와 보령시 천북면으로 천수만 해안이 이어지고, 오른쪽 바다에 죽도가 떠 있다.
왼쪽 끝에는 보령시 천북면과 오천면 천수만 해안이 있을 것이고, 오른쪽에 태안군 안면도 해안이 길게 남쪽으로 벋어간다.
앞에 간월도항 방파제와 홍등대, 중앙에 부석면 간월도리와 창리를 잇는 제방길, 오른쪽 뒤에 도비산이 가늠된다.
천수만이 서쪽으로 이어지고 중앙 끝에 태안군 안면대교가 있을 것이다. 왼쪽에 황도, 중앙에 토끼섬, 그 오른쪽은 창리항이다.
태안군 안면도가 남쪽 보령시 원산도 방향으로 길게 이어지며 천수만 서쪽 해안을 형성한다. 맨 오른쪽은 황도이다.
중앙 맨 끝의 동쪽 보령시 보령항과 서쪽 태안군 안면도 영목항 사이로 바다가 파고 들어 천수만을 형성한다.
용왕각 앞에서 간월도 간월암 산신각과 원통전을 살핀다.
전언에 의하면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달을 보고 홀연히 깨쳤다고 하여 암자 이름을 간월암(看月庵)이라 하고 섬 이름을 간월도(看月島)라 하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수행하던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李成桂)에게 보낸 간월도 어리굴젓이 궁중의 진상품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1530년(중종 25) 찬술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간월도만 언급되어 있고 간월암은 언급되어 있지 않아 조선 후기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말엽에 폐사되었는데 1941년 승려 만공(滿空)이 다시 창건하였다. 간월암 북동쪽으로 간월호가 있으며 남쪽은 천수만과 연결된다. 밀물과 썰물에 따라 육지도 되고 섬도 되는 주변 경관과 어울려 장관을 이룬다. 관음전과 요사채, 산신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관음전에는 용이 되어 의상대사와 부석사를 지켰다는 선묘와 흡사한 형태의 불화가 모셔져 있는데 바다를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무사귀환의 염원이 담겨진 그림이다. 2007년 9월 20일 충청남도 유형 문화재 제184호로 지정된 서산 간월암 목조보살좌상은 나무와 종이로 틀을 제작한 뒤 금칠을 입힌 불상으로 관음전에 안치되어 있다. 양식적으로 볼 때 1600년 전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갸름한 타원형의 얼굴에 높이 솟은 보계, 부드러운 옷 주름 등에서 형식화하기 시작하는 임진왜란 이후의 보살상과 차별성이 있다. -디지털서산문화대전
용왕각을 새로이 조성한 것 같다. 천수만 바다 남쪽을 향하여 있는데 죽도가 가까이에 있다.
용왕각 유리창 뒤로는 죽도가 보인다. 어민들의 풍어와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제각인 것 같다.
충청남도 유형 문화재 제184호로 지정된 서산 간월암 목조보살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원통전은 관음전이라 불렸던 것 같다.
종무소 앞에 수령 150년이 넘는 팽나무와 바로 앞 수령 250년이 넘는 사철나무가 간월암의 명물이다.
무학대사 지팡이(사철나무) 설명안내판의 1,300년 전 간월암 창건 기록은 역사적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다.
내포 도비산(島飛山)의 줄기가 바다 가운데에서 우뚝 솟아나 하나의 작은 섬을 이루었다. 옛 명칭은 피안도(彼岸島)이고, 지금 이름은 간월도(看月島)이다.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 원효조사께서 처음 창건하셨고 조선 초에 무학국사께서 중창하시고 '간월암'이라 하셨다. 무학국사께서 손수 짚고 다니시던 지팡이를 꽂아 놓으시며 "이 나뭇가지가 다시 살아나면 불교가 다시 흥왕하리라."고 예언하셨다는 전설이 있다. 이 역사적 고찰에 우매한 중생이 법당을 옮기고 그 자리에 분묘를 쓰게 되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 그 고목나무가 다시 살아나서 잎이 피어나니 만공선사께서 이 사실을 직접 보시고 "凡所有相이 不免輪廻로다."(일체 모양이 있는 것은 윤회를 면하지 못한다.) 하시고 이에 간월암 중창을 굳게 결의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모든 분묘를 이장한 후에 수덕사, 정혜사, 견성암의 대중들이 힘을 모아 세존 응화 2968(1941)년 1월에 착공하여 그 해 8월 그믐에 봉불식을 거행하고 지은 계승은 다음과 같다. “兩聖古蹟振十方, 往事無非一夢中, 叟山月面還多事, 分咐森羅無文印." 원효와 무학 두 성인의 옛 자취 사방에 진동하고, 왕래하는 일이 모두 꿈 아님이 없네. 수산 월면스님이 돌아와 많은 일을 하니. 삼라만상의 무늬 없는 도장을 분부하시네.) 정혜 중수기중 간월암기(看月庵記) 1946년 3월 15일 중은 지음
종무소 앞 탁자 옆면에 게송(偈頌)이 붙어 있다.
千江有水千江月(천강유수천강뭘) 천 개의 강에 물이 있으니 천 개의 강에 달이 비치고,
萬里無雲萬里天(만리무운만리천) 만 리에 구름이 없으니 만 리가 하늘뿐이로다.
250년 수령의 사철나무가 간월암의 품격을 알린다. 뒤쪽의 해안에서 간월암으로 올라오는 입구에 범종각이 있다.
간월암 일주문을 통과하여 간월도 본섬으로 올라간다.
간월암에서 간월도 본섬으로 올라와 왼쪽 간월도항으로 내려간다.
왼쪽 뒤의 마을이 보이는 섬은 황도로서, 황도교에 의해 그 뒤의 안면도와 이어진다.
간월도항 남방파제에서 간월암을 바라본다.
간월도(看月島)에 있는 간월암(看月庵)은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무학대사가 어렸을 때 공부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나, 조선 초기까지는 왜구 출몰에 따른 도서 거주 금지 조처에 의해 거주자가 없었다. 1530년(중종 25)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간월도가 추가로 기록되어 있어 도서 지역 금지 조치가 해제된 것으로 보이지만, 1759년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와 1871년 편찬된 『호서읍지(湖西邑誌)』에는 간월도의 호구 수가 기록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여 조선 후기까지는 거주자는 없었던 것으로 나타나며, 포구에 대한 기록도 없다. 일제 강점기에 예산 수덕사를 중흥시킨 만공(滿空)[1871~1946] 스님이 이곳에 절을 세우기 위해 여러 차례 간월도를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는 이미 안면도에 사는 사람이 묏자리로 길지라는 풍수설을 믿고 조상의 묘를 쓴 상태였다. 그래서 당시 서산군수 박동래와 안면 면장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 묘를 다른 곳으로 이장시키고 1941년 지금과 같이 암자를 세웠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방파제 뒤쪽에 토끼섬과 그 오른쪽 뒤에 서산시 부석면 창리항, 오른쪽에 제방길, 중앙에 서산버드랜드가 보인다.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에 있는 지방 어항인 간월도항은 충청남도 서산시 남쪽의 관문으로 1988년부터 서산문화원의 지원을 받아 음력 정월 대보름 만조시 부녀자들이 포구에 모여 굴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던 굴부르기 군왕제가 재현되고 있다. 1995년 10월 30일 지방 어항으로 지정되었으며 서산시장이 시설·관리한다. 그러나 간월도 주변의 수산업 종사자가 감소하고 있어 간월암과 어리굴젓 기념탑, 간월호, 천수만과 접목시킨 어업·레저 종합 관광 단지를 조성할 계획에 있으며 간월도항도 다기능항으로 개발할 계획에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해랑길은 간월도항 부두 횟집거리를 거쳐 돌아나간다. 오른쪽에 태안해양경찰서 간월도출장소가 보인다.
태안해양경찰서 간월도출장소와 간월도항 부두 횟집거리를 거쳐 나간다.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에서 창리로 이어지는 제방길이 길게 이어지고, 왼쪽에 토끼섬과 그 앞에 창리 포구가 있다.
간월도항 남방파제와 홍등대 뒤쪽에 안면도가 이어지고, 서방파제(오른쪽) 뒤쪽에 황도가 보인다.
간월도항 남방파제에서 내려와 간월도항 횟집거리를 거쳐왔다.
간월도항에서 간월도1길을 따라 간월도항 입구의 횟집거리를 거쳐 나간다.
간월도항에서 입구의 횟집거리로 나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았다.
간월암으로 올라가는 입구로 되돌아왔다. 서해랑길은 간월도1길을 따라 해안으로 이어간다.
간월도1길과 2길이 만나는 지점에 간월도 어리굴젓 기념탑, 그 왼쪽 해안에 어리굴젓 따는 아낙네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다.
서해랑길은 간월도1길을 따라 천수만로 방향으로 이어간다.
서해랑길은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 천수만 해안을 따라 왼쪽 뒤의 천수만로 간월, 영농교차로로 이어간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간월, 영농 교차로에서 간월도리와 창리를 잇는 제방길을 따라 왼쪽 서산시 부석면 창리로 이어간다.
천수만 해안이 천수만로 제방길에서 왼쪽으로 돌아 창리 포구로 이어지며, 중앙에 서산버드랜드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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