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
•2023년 홋카이도 국제문학상 등 수상
•경맥예총 회장, K국제펜문학회 회장,
나 자신이야 보잘것없지만 나에겐 훌륭한 친구들이 많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친구들도 여럿이지만, 요즘은 지금 나와 함께 동행해주시는 국제적인 문학 단체에서 진심 어린 애정을 베풀어주시는 여러 작가 선생님이야말로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내가 가장 존경하는 훌륭하신 친구분들이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그러하듯이 역시 마음 편한 친구들에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작하여 중·고등학교와 대학에 이르기까지의 학창 시절 친구들이 많다.
뒤늦게 의사 선생님이 되신 내 친구 황 박사, 닥터 황은 나의 초등학교 동기이다. 내가 나온 대구 한복판의 수창초등학교는 이쾌대, 이인성 미술가를 비롯하여 백 년 만의 스타 강신성일 영화배우도 졸업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 초등학교이다. 현 대구소
한솔 이효상 기념사업회 회장 등설가협회장님도 필자가 자랑하는 후배이시다. 고 박준규, 이만섭 두 분의 국회의장을 비롯한 빼어난 정치가분들도 많이 계셨다.
중학교 때부터 입시를 치르던 그 당시 우리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라고 불렀다)는 명문 중학교 합격자도 대거 배출하였다. 초등학교 시절 나와 닥터 황은 같은 반에 있었는데, 우리는 학교에서 항상 최상위 성적을 유지하였다. 그런데 나는 운 좋게도 명문 K중학교에 합격하였으나 황 박사는 뜻밖에도 낙방하여 2차인 D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라디오방송으로 합격자 발표를 듣던 나는 너무 좋아서 팔짝 뛰며 울어버렸는데, 황 친구 본인 그리고 자녀에 대한 학구열이 남다르던 친구의 부모님께서는 실망이 컸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닥터 황의 성실함과 좋은 머리가 어디에 가나? 3년 뒤 그는 K고등학교에 거뜬히 합격하여 우리는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다시 3년 뒤 그는 S대학교 상과대학에 합격하여 자신이 수재임을 그대로 입증하였다. 나아가서 그는 일찌감치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하여 고위 공직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국비 유학생으로 해외유학을 다녀오는 혜택을 누리기도 하였다.
황 박사가 개성공단 관리위원장으로 근무할 시 나는 기업체의 간부로서 개성공단을 방문하게 되었다. 공단에 도착하여 황 박사를 찾아뵙겠다고 하였는데, 항상 겸손하고 다정한 우리 친구 말씀이 공단이 너무 넓어서 찾아오는 사람은 길을 잘 모를 것이니까 황 박사 자신이 나에게 찾아오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공단 내 식당에서 만났는데, 북한 여성 종업원들의 미모가 대단했던 기억이 난다. 이는 베이징의 식당에서 만났던 다른 북한 여성들도 마찬가지였고, 짓궂은 농담도 척척 받아들이던 이들 북한 종업원들은 신분과 미모와 어학 실력이 출중한 사람들만 뽑혀 온다고 하였다.
직업공무원으로서는 정부에서 최고위직까지 지내신 황 박사는 이후 소리 소문 없이 의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하였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학업에 방해가 될까 봐 일부러 서울과 대구를 피하여 전라북도에 있는 모 국립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을 다녔다. 그래서 아들 같은 동급생들과 피눈물 나는 공부를 한 끝에 전문의 자격증까지 획득하였다. 그리곤 환갑이 넘어 아프리카 말라위 공화국으로 건너갔다. 아프리카에서 급여 한 푼도 없이 순전히 의료 봉사만의 활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후 닥터 황과 연락이 닿아서 내가 적지만 후원금이라도 좀 보내 드리겠다고 하였더니 한사코 사양하였다. 그는 한국의 대양상선그룹 정유근 회장님이 건립한 대양누가병원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병원에서 숙식을 해결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그 병원에는 아프리카에서 30년 넘게 봉사하며 아프리카의 천사라고 불리는 우리나라 출신의 시스터 백 즉, 백영심 간호사도 계신 곳이었다. 백영심 간호사의 헌신에 감명받으신 대양상선 회장님께서 병원을 지어주셨다고 한다. 정유근 회장님, 백영심 간호사님 그리고 우리 친구 닥터 황, 너무도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그리고 우리 친구 닥터 황을 따라서 아프리카까지 동행하여 묵묵히 봉사하시는 닥터 황의 부인님,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