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항상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신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본질보다 실존을 중요하게 여기는 실존주의철학이 생긴 것이지요.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나타나심 곧 보이는 역사는 중요하게 여기고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존재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방언이 성령세례라고 광화문 광장에서 떠들고 있으니
이건 기독교를 무참하게 만들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 J라는 목사는 욕을 잘해서
문제가 아니고 기독교의 본질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정치는 천재이나 진리는 등신입니다.
고전12장은 성령의 역사와 그 존재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실 성령의 역사 곧 나타나심과 그리스도의 존재는 성격상 차이가 있습니다.
태풍의 핵과 태풍의 영향권과 월급의 본봉과 보너스의 비유가 적절하다고 봅니다.
근데 신앙의 초기에는 거의 표적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성령의 나타나심은 흔하지만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존재를 알고 믿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유무에 달려있습니다.
바깥 표적은 비밀이 아니지만 안의 표적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이신 겁니다.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 알아라(고전14:1)는 여러 가지 은사(4절)들을 알라는 말입니다.
신령한 것들 곧 나타나는 은사와 성령님의 존재자체와는 다릅니다.
그래서 신령한 것을 추구하다가 잘못하면 자신의 욕심으로 치우치고 말기도 합니다.
이웃의 것들을 탐을 낼 수 있어 탐심으로 열 번째 계명에 걸리고 맙니다.
그런 사람들 4-50년 전에 산에 가보면 많았는데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성경공부를 잘 못하면 지식으로 방법론만 공부를 하고 맙니다.
꾸준한 묵상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존재를 자신 안에 각인시켜(뇌를 훈련)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떻게 나아가는 지를 항상 의식하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경지식이 양식이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 지식에 머물고 양식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신령한 것들을 알아야 하는 이유(고전12:2)는 하나님의 기준을 모르고 사람이
정한 편견으로 잘 못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방언이 성령세례다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귀는 광명한 천사와 같으며 이 세상의 신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같이 흉내를 냅니다.
마귀는 모방의 천재입니다. 현혹해서 진리의 길에서 이탈하여 방황하도록 만듭니다.
신앙은 원리가 중요하므로 성령의 나타나심의 신령한 것들에 치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그 계명을 지키면 각종 은사가 나타나는 건 당연합니다.
설령 나타나지 않아도 피차에 때와 조건이 맞지 않기 때문일 뿐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신령한 것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잘못하면 우상숭배를 하듯이 끌려갑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열매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은 신령한 은사들은 전기가 흐르면 전기 자장이 전선 주위에 저절로 생기듯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모시고 그 분과 바른 관계를 정립하면
은사는 저절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자동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말씀사역만 하지만 어느 나라에 가든 연약과 질병을 보면
바로 거침없이 손을 얹습니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말 못하는 우상이라고 하는데 왜 우상은 말을 하지 못한다고 강조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고전12:3)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을 그의 영에 의해 시인하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그러나 역사만 믿는 사람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고전12:3)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말하는 자는 주님을 십자가의 저주의 예수라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개인의 주 예수라고 시인합니다. 저주 받으신 주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진리의 성령을 통해서 임재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시인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분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교수형을 당했다면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 그 분이 항상 교수대에 달려 있다고 말을 하겠어요?
그러므로 지금 천주교가 2000년 이상이나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있는데
이는 매우 잘못 된 처사이며 사단의 농간에 놀아난 세상 신에 의한 행위입니다.
누구든지 성령 안에서 말하지 않으면 ‘주 예수’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고전12:3절은 성령의 나타나심보다 그 존재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성령 안에서)
그러나 고린도교회의 관심사는 예수를 주로 믿는 것(3절) 아니라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성령의 은사에 있어서 그것이 문제의 원인입니다(4절)
그래서 고린도전후서의 결론은 고후13:5절이 됩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현재도 이 말씀에 걸리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존재만 내주 역사하심을 강조하면 그리스도가 충만하기 까지는
너무 밋밋하고 재미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새콤달콤한 것이 없어 또 방황합니다.
사람들이 그때까지 인내를 하지 못하니 중간에서 그만 현혹이 되고 마는 겁니다.
은사는 성령의 나타나심이고 직임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주어집니다.
그리고 역사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삼위 하나님의 역사입니다(고전12:4-6)
그런데 삼위 하나님 그 분들의 역할 분담인가 유기적인 연합인가?
조직신학도 직임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고
성령은 은사이며 역사는 하나님이 하신다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는 지식으로 공부할 수 없고 진리의 성령 안에서 체득이 되어야 합니다.
은사는 선물, 직임은 사명자의 입장 그리고 역사는 사역적인 입장입니다.
그리고 이 셋은 바로 하나이며 한 세트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이 은혜이며 그 은혜는 사명으로 다가옵니다.
만약 사역이 천부적인 재능으로 되어 진다면 그건 하나님의 은사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위대한 설교자는 천부적이라는 망발을 합니다만 그건 아닙니다.
그래서 사명은 자신의 소원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르바이트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소명이냐? 하는 이야깁니다.
사명자는 하는 일이 좋던 싫던 다른 것은 할 수 없습니다.
바울처럼 set apart이 됩니다(롬1:1) 그리고 성령의 역사는 사역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카리스마(은사)는 사명으로, 사명은 반드시 사역으로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사역은 카리스마뿐만 아니라 직임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전체적으로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개체의 존재로 서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카리스마만 있다고 바로 사역을 해서는 안 되고 사명이 있어야 합니다.
직임(사명)은 은사만 목적이 아니라 삶을 위해서입니다.
은사는 구원에 이르는데 유익의 요소가 있어 직임과 사역을 돕는 수단일 뿐입니다.
왜 세 분의 일하심을 구분하는가? 성령(은사 : 은혜로 주어지는 것),
주(그 분의 보내심을 받은 사명자) 그래서 사명자는 반드시 주인이 있어야 합니다.
사령관이 있어야 합니다. 없으면 안하무인이 됩니다. 한국에 그런 사람들 더러 있지요?
바울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종 된 나 바울은... 하고 자신의 관등성명을 대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 곧 그 분의 일이며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내적역사입니다.
이런 것이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겁니다. 서로서로 보완해서
끌고 가는데 어느 한쪽이 약하면 다른 부분이 보충을 하는 삼겹줄과 같은 겁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고전12:4) 어느 한정된 다수를 말하는데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예언, 영 분별, 방언, 통역
9가지 은사를 열거합니다(고전12:8-10)
그러나 반드시 이런 요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음악성, 예술성, 기교, 현실성, 초월성을 다 포함이 됩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이 무엇에 대한 전문가인지 잘 모릅니다.
부분 같으면서 전체를 알고 멍청한 것 같으나 매우 지혜롭기 때문입니다.
자유롭게 행하므로 비율법적인 것 같으면서 거룩하기 때문에
예수님 당시에도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도무지 알 수 없는 분으로 봤습니다.
그건 예수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로서 나타나지 않은 신성 때문입니다.
성령은 같다는 말은 은사의 본질은 다 같은 동질입니다.
사도바울의 체험과 무디의 체험은 서로 달라도 본질은 같습니다.
한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고전12:11)
은사와 직임과 역사를 분류해 보면 모든 것이 삼위 하나님 그 분들의 은사요
직임이며 역사입니다. 그러나 나타나는 성격이 개인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은사는 개인적으로 다르며 직임은 수동적이나 역사는 능동적으로 나타납니다.
지혜와 지식의 말씀은 직임에 의한 은사입니다.
신유와 능력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인해 능동적인 역사입니다.
믿음도 은사, 예언 방언도 다 은사적인 것들입니다.
서로 나눌 수는 없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의 기질에 따라 은사가 다르게 주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은사들이 다 한 성령의 나타나심은 틀림이 없습니다(고전12:7)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가 태풍의 핵이라면 성령의 은사는
태풍의 영향권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서 의와 평강
기쁨이 되시지만 사역을 할 때는 태풍과 같이 하나님의 역사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엔 성령’(in) 곧 안에 임하시는 그리스도의 영과 에피(on) 성령 곧 밖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의 차이는 지속적이냐 단회적이냐 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이젠 없다고 말하는데 맞는 말 같지만
설명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겁니다. 성령의 나타나심은 사람마다 단회적이며
사역을 할 때마다 나타나지만 존재이신 그리스도는 영원히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고전13장이 은사에 대한 말씀의 12장과 14장에 끼어 있는 이유입니다.
그 분의 존재는 우리 안의 빛이며 그 분의 나타남은 바깥의 빛이 됩니다.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셔서 8복이 이루어지면 바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됩니다(마5:13-14)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 곧 은사를 주신 목적은 자신의 구원을
위한 유익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유익하게 하려 하심입니다(고전12:7)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그리스도의 임재와 하나님의 역사를 알게 됩니다.
그로인해 큰 은사는 사모하고(고전12:31) 사랑은 추구하라(고전14:1)고 말씀하십니다.
첫댓글 아멘!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