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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9 편
죄, 희생, 속죄
. 찬란한 저녁별
. 1934년
89:0.1 원시인은 스스로가 영들(spirits)에게 빚을 졌고, 죄의 값을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개인들이 보건대, 공정한 면에서 영들은 훨씬 더 많은 불운을 그들에게 안겨주었을 수도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개념은 죄와 구원의 교리로 발전했다. 혼은 원죄를 가지고―세상에 온 것으로 여겨졌다. 혼은 그 값을 지불해야 했다; 속죄양이 제공되어야 했다. 머리 사냥꾼은 해골을 숭배하는 것 외에 자기 목숨을 대신할 수 있는 희생자를 제공할 수 있었다.
야만인은 일찍이 영들이 인간의 불행, 고통, 굴욕으로부터 최상의 만족을 얻는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 인간은 오직 저지른 죄에만 신경을 썼으나, 나중에는 누락된 죄에 대하여 걱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의 모든 희생 의식은 이 두 가지 개념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이 새로운 의식 체계는 희생 속죄 의식을 준수하는 데 있었다. 원시인은 신들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 무언가 특별한 일을 행해야 한다고 믿었다; 오직 진보한 문명만이 한결같이 차분하고 자비로운 하나님을 인식한다. 속죄는 미래의 행복에 대한 투자라기 보다 눈앞의 불행을 막는 보험이었다. 그리고 회피, 액을 막고, 귀신을 쫓아내고, 강요, 달래는 의식은 결국 모두 서로 합쳐졌다.
1. 금기
89:1.1 금기를 지키는 것은 불행을 피하려는 인간의 노력이었고, 어떤 것을 피함으로써 귀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금기는 처음에는 종교성이 없었으나, 일찍부터 귀신이나 영이 간섭한다는 개념을 취하면서, 그리고 강화되면서, 법과 제도가 만들어지는 근원이 되었다. 금기는 의식 규범들의 근원이 되었고, 원시인들은 처음으로 자신을-통제했다. 금기는 사회 규제의 초기 형태였으며, 오랫동안 유일한 것이였다; 이것은 지금도 사회 규제 구조의 기본 단위이다.
이러한 금기 명령이 야만인의 mind(지성, 마음)에서 존중을 일으킨 것은 그것을 집행하는 자의 권력에 대한 두려움과 정확히 일치했다. 금기는 처음에 불행의 우연한 체험 때문에 생겨났다; 나중에는 추장들과 무속인들에 의해 제안되었는데, 그들이 영 귀신, 심지어 신에 의해 이끌린다고 여겼다. 영 보복에 대한 두려움은 원시인의 mind에서 너무 크게 자리 잡았고, 그래서 금기를 어겼을 때 때때로 원시인은 놀래서 죽기도 하였으며, 이런 극적인 사건은 생존자들의 mind에 금기를 유지하는데 대단히 강력한 것들이었다.
아주 일찍부터 있었던 금기는 여자와 타인의 재산에 손대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종교가 금기의 진화에서 비로소 더 큰 역할을 하게 되자, 금기 조항은 불결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 결과 신성하지 않은 것으로 여겼다. 히브리인들의 기록은 깨끗하고 부정하며 거룩하고 신성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하지만, 이런 노선을 따른 그들의 믿음은 다른 많은 민족에 비해 훨씬 덜 번거롭고 범위가 적었다.
달라마시아와 에덴의 일곱 계명은, 히브리인들의 열 가지 명령과 마찬가지로, 분명한 금기였고, 가장 오래된 금지 조항들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똑같이 부정 형태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이 규범은 앞서 있던 몇천 가지 금기를 대신했다는 점에서, 참으로 사람을 해방시킨 셈이다. 게다가 이 후일의 계명들은 복종의 대가를 분명히 약속했다.
먹을 것에 대한 초기의 금기는 주물 숭배와 토템 신앙으로부터 생겨났다. 돼지는 페니키아인에게, 소는 힌두인에게 신성했다. 돼지고기에 관한 이집트인의 금기는 히브리와 이슬람 신앙에서 지속되었다. 먹을 것에 대한 금기가 변형된 한 형태는 임신한 여자가 어떤 음식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면,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 음식을 닮게 된다는 믿음이었다. 그러한 식품은 그 아이에게 금기가 되곤 했다.
89:1.6 먹는 방법도 곧 금기가 되었고, 이렇게 현대까지 내려오는 옛날의 식탁 예절이 생겨났다. 카스트 제도와 사회 수준은 옛 금기의 잔재이다. 금기는 사회를 조직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지만, 끔찍한 부담이 되었다; 부정적 금지법 체제는 유용하고 건설적인 규제를 유지했을 뿐 아니라, 고리타분하고 낡고, 쓸모없는 금기도 유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대하고 잡다한 금기를 제외하고는 원시인에 대해 비평할 문명사회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금기를 지지하는 원시 종교가 없었더라면 금기는 결코 지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의 진화에서 많은 필수적인 요소들은 매우 비싸고 노력, 희생, 그리고 자제에 막대한 보물을 들였지만, 이러한 자제력의 성취는 인간이 문명의 상승 사다리를 오르는 진정한 디딤돌이 되었다.
2. 죄의 개념
89:2.1 우연과 불운에 대한 두려움은 문자 그대로 인간을 이러한 재앙에 대한 보험으로 추정되는 원시 종교의 발명으로 내몰았다. 종교는 마법과 귀신에서, 영과 주물 숭배를 거쳐, 금기로 진화했다. 모든 원시 부족마다 금단의 열매인 사과나무가 있었지만, 비유적으로 온갖 금기로 무겁게 매달린 나뭇가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금단의 나무는 항상 말했다. “너는 하지 말지어다.”
야만인의 mind가 좋은 영과 나쁜 영을 생각할 수 있도록 진화하는 동안에, 그리고 금기가 진화하는 종교의 엄숙한 지지를 받았을 때, 죄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할 준비가 되었다. 하늘에서 계시된 종교가 미처 나타나기도 전에, 세상에서 죄의 개념은 널리 보편화되었다. 오직 죄의 개념으로 말미암아, 원시인의 mind에 자연사는 이치에 맞게끔 보였다. 죄는 금기를 어기는 것이요, 죽음은 죄에 대한 벌이었다.
죄는 이성이 아닌 의식적인 행위였다; 생각이 아닌 행동이었다. 이 모든 죄의 개념은 이 땅에서 딜문(*)이라는 작은 천국이 있던 시절, 남아 있는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아담과 에덴동산의 전통은, 또한 종족들의 여명기에 한때 “황금 시대”에 대한 꿈의 실체를 부여했다. 이 모든 것은 나중에 인간이 특별한 창조에 기원을 두고 있고, 완전 속에서 그 생애가 시작되었으며, 금기를 어긴 것―죄―로 인해 나중에 불쌍한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는 믿음에서 표현되어 개념으로 확정되었다.
* 딜문 (Dilmun) : 달라마시아가 가라앉은 후 건설한 놋 종족의 고대 도시이며, 놋 후손들의 종족과 문명의 중심지가 되었다.
금기를 습관적으로 어기는 것은 부도덕이 되었다; 원시의 율법은 부도덕을 범죄로 만들고, 종교는 부도덕을 죄로 만들었다. 옛 부족들 사이에서 금기를 어기는 것은 범죄와 죄를 합친 것이 되었다. 공동체의 재난은 항상 부족의 죄에 대한 처벌로 여겨졌다. 번영과 의로움이 함께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악한 자들의 명백한 번영은 큰 걱정을 낳았고, 그래서 금기를 위반하는 자를 처벌하기 위해 지옥을 발명하는 것이 필요했다; 미래에 처벌을 받을 이 장소들의 수는 하나에서 다섯까지 늘어났다.
죄 고백과 용서의 개념은 원시 종교에서 일찍 나타났다. 사람들은 다음 주에 저지를 죄 때문에, 공식 석상에서 용서를 부탁하곤 했다. 고백은 다만 면제를 위한 의례적인 것이었고, 또한 더럽혀지는 것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것으로, “부정하다, 부정하다!”하고 외치는 의식행위일 뿐이었다. 그런 다음 정화하는 모든 의식 행위가 뒤따랐다. 옛날의 모든 부족은 의미 없는 이 의식들을 행했다. 옛 부족들의 위생적인 많은 관습은 대체로 의식행위였다.
3. 금욕과 굴욕
89:3.1 금욕은 종교의 진화에서 다음 단계로 왔다; 금식은 일반적인 수행이었다. 곧 여러 가지 형태의 육체적 쾌락, 특히 성적인 쾌락을 포기하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굶는 의식은 많은 옛 종교에 깊이 뿌리를 내렸고, 실질적으로 모든 현대 신학 사상 체계로까지 전해져 왔다.
야만인이 죽은 자와 함께 재산을 태우고 매장하는 소모적인 관행에서 회복하고 있을 무렵, 종족의 경제 구조가 구체화되기 시작할 무렵, 금욕을 강조하는 이 새로운 교리가 나타났고, 수만 명의 진지한 혼들이 가난을 친구로 삼기 시작했다. 재산은 영적 장애물로 간주되었다. 물질의 소유가 영적으로 위험하다는 이 개념을 필로와 바울의 시절에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고, 그 이후로 유럽 철학에 현저한 영향을 미쳤다.
가난은 단지 육체를 억제하는 의식의 일부였고, 이것은 불행하게도 많은 종교, 특별히 기독교의 기록과 가르침에 들어가게 되었다. 속죄는 이 어리석은 포기 의식의 소극적인 형태이다. 그러나 이 모두가 야만인에게 자제를 가르쳤고, 그것은 사회의 진화에서 가치 있는 진보였다. 극기와 자제는 초기의 진화 종교로부터 생긴, 가장 큰 두 가지 사회적 이득이었다. 자제는 인간에게 새로운 생활 철학을 주었고, 이기적 만족이라는 분자를 늘이려고 늘 애쓰는 대신에, 개인적 요구인 분모를 낮춤으로 삶의 분수를 높이는 기술을 가르쳤다.
스스로를 단련하는 이 옛 개념은 매질과 온갖 종류의 육체적 고문을 포함했다. 어머니 숭배교의 사제들은 육체적 고통의 미덕을 가르치는 데 특히 적극적이었고, 스스로 거세를 받음으로 본보기를 보였다. 히브리인, 힌두교 신자, 불교 신자들은 고행하는 이 교리를 열심히 추종한 자들이었다.
옛 시대를 통해서 내내, 사람들이 이 방법으로 신들의 기록부에 공적을 더하려고 애썼다. 어떤 감정의 압박을 받고 있을 때 자기를 부인하고 고행하겠다는 서약을 하는 것이 한때는 풍습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이 서약들은 신들과 계약하는 형태를 취했고, 그 의미에서, 이런 고행과 금욕의 대가로 신들이 무언가 분명히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면에서, 진화의 도약이었다. 서약은 부정적이기도 하고 긍정적이기도 했다. 오늘날 인도의 어떤 무리들 사이에서, 이렇게 해롭고 극단적인 성질을 가진 서약들이 가장 잘 준수된다.
89:3.6 금기와 굴욕을 하는 종교집단에서 성의 쾌락에 관심을 가진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전투에 들어가기 전 군인들 사이에 의식으로서 성욕에 대한 금욕 숭배가 비롯되었다. 후일에 이것은 “성자들”의 관습이 되었다. 이 종파는 결혼을 겨우 간통보다 덜한 악으로서 용인했다. 세상의 큰 종교들이 이 고대의 숭배로부터 나쁘게 영향을 받았지만, 아무것도 기독교보다 더 두드러지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사도 바울은 이 숭배를 받드는 신자였고, 그의 개인적 관점은 그가 기독교 신학에 묶어놓은 가르침에 반영된다: “남자가 여자를 손대지 않는 것이 좋다.”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결혼하지 않은 자와 과부들에게 내가 말하니, 나처럼 지내는 것이 그들에게 좋을 것이다.” 바울은 그러한 가르침이 예수의 복음의 일부가 아님을 잘 알았고, 이것을 인정했다는 것은 그의 진술에서 나타난다, “이것은 계명이 아닌 허락으로서 말을 한다.” 그러나 이 숭배는 바울이 여자들을 경시하도록 이끌었다. 이 모든 것이 딱한 것은, 그의 개인적 의견이 위대한 세계 종교의 가르침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천막 만드는 장삿꾼인 그 선생의 충고를 글자 그대로 보편적으로 순종한다면, 인류는 갑자기 영화롭지 못한 종말에 다다를 것이다. 게다가, 결혼과 가정, 사회의 참된 기반과 인간 진보의 기본 제도에 대한 종교의 개입은 전쟁으로 직결된다. 그러한 믿음이 다양한 사람들의 많은 종교에서 독신 사제직의 형성을 촉진 시켰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언젠가 인간은 방종이 없이 자유를 누리고, 포식하지 않고서 영양을 취하며, 방탕하지 않고 즐거움을 누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제는 극단적 극기보다 더 나은 인간의 행동 규제 정책이다.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이런 불합리한 관점을 가르친 적이 결코 없다.
4. 희생 제물의 기원
89:4.1 희생 제물은 다른 많은 숭배 의식처럼, 종교적 헌신의 일부로서 단순하고 단일적 기원을 가지지 않는다. 권력 앞에 절하고, 신비가 있는 가운데 경건히 찬미하는 태도로 엎드러지는 경향의 전조는 개가 주인 앞에서 아양 부리는 데서 나타난다. 숭배하는 충동으로부터 희생물을 바치는 행위까지는 겨우 한 걸음 차이일 뿐이다. 원시인은 자신이 겪은 고통으로 희생의 가치를 측정했다. 희생 제물의 개념이 처음 종교의식에 붙었을 때,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 제물은 가치 없는 것으로 보았다. 처음 희생물은 머리카락을 뽑고, 살을 베어내고, 절단하고, 이를 쳐서 뽑고, 손가락을 잘라 버리는 것과 같은 행위였다. 문명이 진보하자, 이 노골적인 희생 의식 개념들은 자기 절제, 금욕, 금식, 박탈 그리고 슬픔, 고통, 육체의 모멸을 통해 자신을 성스럽게 바치는 기독교 교리의 수준으로 올라갔다.
종교의 진화 초기에 희생 제물에 대한 두 가지 개념이 존재했다: 감사의 태도를 암시한 선물을 바치는 것과 구속 개념을 포함한 빚을 갚는 희생 의식이었다. 나중에는 대체 개념으로 발전했다.
그 후에, 여전히 사람은 어떤 종류의 희생물이건 간에, 그것은 신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전달자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고 상상했다; 희생물은 신의 콧구멍에 달콤한 향기와 같을 수도 있었다. 이것은 희생물 잔치로 발전되는, 향을 비롯한 희생 제물의 미적 특징을 가져왔고, 점차 정교해지고 화려해지게 되었다.
종교가 진화함에 따라서, 화해하고 달래는 희생 제물은, 회피와 구슬리기와 귀신 쫓기와 같은 낡은 방법들로 대체했다.
초기에 있던 희생 제물 개념은 조상의 영들에 의해 부과된 부당한 추징의 개념이었다; 나중에야 속죄 개념으로 발전했다. 인류가 종족의 진화적 기원 개념에서 벗어나고, 행성 영주와 아담의 체류 시절의 전통이 세월을 거치면서, 죄와 원죄의 개념이 널리 퍼졌고, 어쩌다가 저지른 개인의 죄에 대한 희생은 종족의 속죄를 위한 희생 교리로 진화했다. 죄악. 제물의 속죄는 알지도 못하는 신(god)의 분노와 질투까지 포함하는 총괄적 보험 장치였다.
89:4.6 기분을 잘 상하는 아주 많은 영과 욕심부리는 신들에 둘러싸여서, 원시인이 채권자인 신들과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영적 빚으로부터 그를 구하는 데는, 일생을 통해서 온갖 사제들, 의식행위, 희생물이 필요했다. 원죄의 교리, 곧 종족이 죄가 있다는 교리는, 사람마다 영 세력자들에게 무거운 빚을 지고 인생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선물과 뇌물이 인간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신들에게 바쳐질 때, 그것은 봉헌되거나, 신성시되거나, 또는 희생물로 불려졌다. 금욕은 속죄의 소극적 형태였다; 희생물을 바치는 것은 적극적인 형태가 되었다. 속죄의 행위는 찬송, 영화롭게 만들기, 아첨, 심지어 오락까지 포함되었다. 옛날에 속죄를 위한 숭배 단체의 이 적극적 풍습의 잔재가 현대식의 신성한 예배를 이룬다. 오늘날의 예배 형태는 다만 긍정적인 옛날의 속죄 기술을 단지 의식화한 것이다.
동물 희생 의식은 원시인에게 현대 종족에게 의미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했다. 이 야만인들은 이 동물들을 그들의 실제적이고 가까운 친척으로 여겼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은 제물을 바치는 데 영리해졌고, 일하는 동물을 바치는 것을 그만두었다. 처음에는 길들인 가축을 포함해서, 어떤 물건을 드리더라도 가장 좋은 것을 바쳤다.
어떤 이집트 통치자가 다음과 같은 제물을 바쳤다고 했을 때, 빈말로 자랑한 것이 아니다: 노예 113,433명, 송아지 493,386마리, 배 88척, 금 우상 2,756개, 꿀과 기름 331,702항아리, 포도주 228,380항아리, 거위 680,714마리, 빵 6,744,428덩어리, 동전 5,740,352자루. 이렇게 하려고 그는 땀 흘리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무겁게 부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전히 필요성 때문에 이 반 야만인들은 결국 그들의 희생물의 물질 부분을 먹게 되었고, 신들은 그들의 혼을 즐거워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이 관습은 옛적에 신성한 식사라는 미명 아래 현대 관습에 따른 성찬 예배로 정당하게 자리를 잡았다.
5. 희생 제물과 식인 풍습
89:5.1 초기 식인 풍습에 대한 현대적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초기 사회 풍습의 한 부분이었다. 식인 풍습은 현대 문명에서 전통적으로 끔찍한 것이지만, 그것은 원시 사회의 사회적, 종교적 구조의 일부였다. 집단의 이익은 식인 풍습을 강요했다. 그것은 필요라는 욕구를 통해서 성장했고, 미신과 무지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지속되었다. 그것은 사회, 경제, 종교, 군대의 관습이었다.
원시 인간은 식인종이었다; 사람의 고기를 즐겼고, 따라서 영들과 그가 섬기는 원시 신들에게 먹는 선물로 사람의 고기를 드렸다. 귀신 영은 단지 변형된 인간들이었고, 음식이 사람에게 가장 큰 욕구였으므로, 음식은 또한 영에게 가장 큰 욕구임에 틀림없었다.
식인 풍습은 진화하는 민족들 사이에서 한때 거의 보편적으로 퍼졌다. 산긱 종족들은 모두 식인종이었으나, 최초에 안돈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고, 놋 종족과 아담 종족도 그렇지 않았다; 진화 종족들과 크게 섞이기까지 안드 종족도 그렇지 않았다.
사람 고기에 맛을 들이면 그 입맛은 자란다. 배고픔, 우정, 복수 또는 종교적 의식을 통해 시작된 인육을 먹는 것은 습관적인 식인 풍습으로 이어졌다. 비록 이것이 근본적인 원인이 되지는 않았지만, 사람을 먹는 일은 식량 부족에 의해 생겨났다. 그러나 에스키모인과 초기의 안돈 사람들은 기근이 있을 때를 빼고, 사람의 고기를 먹은 적이 거의 없었다. 특히 중앙아메리카의 홍인들은 식인종이었다. 한때는 원시의 어머니들이 아이를 낳으면서 잃어버린 기운을 되찾으려고 제 아이들을 잡아먹는 것이 일반 풍습이었고, 퀸즈랜드에서 첫 아이는 아직도 이렇게 죽음을 당하고 잡아먹히는 일이 빈번하다. 근대에는 아프리카의 많은 부족이 하나의 전쟁 조치로서, 자기 이웃들을 무서워 떨게 만드는 일종의 끔찍한 짓으로서, 식인 풍습에 일부러 의존했다.
일부 식인 풍습은 한때 우월했던 종족들의 퇴행에서 비롯되었지만, 그것은 진화 인종들 사이에서 주로 만연했다. 사람들이 적에 대한 격렬하고 쓰라린 감정을 경험하던 시기에 식인 풍습이 시작됐다. 인육을 먹는 것은 복수를 위한 엄숙한 의식의 일부가 되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적의 귀신이 파괴되거나 먹는 사람의 귀신과 융합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한때 마법사들은 인간의 고기를 먹음으로써 힘을 얻는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89:5.6 어떤 식인 집단은 부족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생각되었던 거짓 영적 근친교배의 하나로 자기네 부족의 사람들만 먹곤 했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적의 힘을 빼앗는다는 생각으로 복수를 위해 적들을 먹기도 했다. 친구나 동료 부족 사람의 몸을 먹는다면 그 혼에 대한 영광으로 여겨졌지만, 한편 이처럼 적을 먹어치우는 것은 적에게 주는 처벌에 지나지 않았다. 야만인의 mind는 확고한 것에는 허세를 부리지 않았다.
어떤 부족들 사이에서 나이든 부모가 자식에게 먹히려고 애썼고, 다른 부족들 사이에서는 가까운 친척은 먹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그들의 몸은 팔거나 낯선 사람들의 것과 바꾸었다. 도살하려고 살찌운 여자와 아이들을 파는 상당한 거래가 있었다. 질병이나 전쟁이 인구를 통제하지 못할 때, 잉여 인구는 무작정 먹어 치웠다.
식인 풍습은 다음과 같은 영향 때문에 차츰 사라졌다:
1. 때로는 그 풍습이 공동체 의식, 곧 동료 부족 사람에게 사형을 가하기 위하여 집단으로 책임 맡는 것이 되었다. 피 흘린 죄는 모두가, 사회가 참여했을 때, 범죄가 되지 않는다. 아시아에서 마지막 식인 풍습은 집행이 끝난 범죄자들을 이렇게 먹어치우는 것이었다.
2. 식인 풍습은 아주 일찍부터 종교의식이 되었지만, 귀신 공포의 성장이 항상 식인습관을 줄이는 것은 아니다.
3. 결국 식인 풍습은 몸에서 겨우 어떤 부분이나 내장을 먹는 데까지 진보했고, 이것들은 혼을 담거나 영의 일부를 담고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먹었다. 피를 마시는 것은 흔했고, 몸에서 “먹을 수 있는” 부분을 약과 함께 섞는 것이 관습이었다.
4. 남자에게만 한정되었고, 여자는 사람 고기를 먹는 것이 금지되었다.
5. 다음에는 추장, 사제, ·주술사들에게 한정되었다.
6. 다음에 식인 풍습은 상위 부족들 사이에서 금기가 되었다. 사람을 먹는 데 대한 금기는 달라마시아에서 시작되었고, 천천히 세계에 퍼졌다. 한때 매장된 시체들을 파내서 먹는 것이 흔한 관습이었기 때문에, 놋 종족은 식인 풍습을 퇴치하는 수단으로서 화장을 장려했다.
7.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식인 풍습에 마지막 종을 울렸다. 사람의 고기가 우수한 사람, 추장들의 먹을 것이 되었으므로, 그것은 결국 갈수록 더 우수한 영들을 위하여 예비되었다. 그리고 가장 낮은 부족들을 빼고, 이처럼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효과적으로 식인 풍습을 멈추게 하였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가 충분히 확립되었을 때, 사람 잡아먹는 것은 금기가 되었고, 인간의 살은 오직 신들을 위한 음식이었다; 사람은 겨우 의식의 작은 부분인 한 성체만 먹을 수 있었다.
89:5.16 마침내, 제물 드리는 목적을 위해서 동물 대용품이 널리 쓰이게 되었고, 더 뒤떨어진 부족들 사이에서도 개를 잡아먹으면서 식인습관이 크게 줄어들었다. 개는 처음에 길들인 동물이었고, 가축으로서 또 먹을거리로서 높은 가치로 인정받았다.
6. 인간 제물의 진화
89:6.1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는 식인행위의 간접적인 결과였지만, 또한 식인 풍습을 고치는 처방도 되었다. 영 세계까지 가는 영 호송자를 마련하는 것은 식인습관을 줄어들게 했는데, 죽여서 바친 이 희생물을 먹는 것은 관습이 된 적이 없다. 어떤 형태로, 어느 때인가,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관습이 전혀 없었던 민족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안돈 종족, 놋 종족, 아담 종족들은 식인 풍습에 가장 적게 물들었다.
인간 제물은 거의 보편적이었다. 그것은 중국인·힌두인·이집트인·히브리인·메소포타미아인·그리스인·로마인의 종교 관습에서, 그리고 많은 다른 민족, 뒤떨어진 아프리카와 오스트랄리아 부족들 사이에서 요즘까지도 지속된다. 최근의 아메리카 인디안들의 문명은 식인 풍습으로부터 발전해 나왔고, 따라서 특히 중앙 및 남아메리카에서 인간 제물 풍습에 아주 익숙해 있었다. 갈대아인들은 일반적으로 사용된 인간 제물 관습을 처음으로 버린 사람들이었고, 동물로 대신했다. 약 2천 년 전에 마음씨 고운 한 일본 황제는 사람 잡아 바치는 것을 대신하려고 진흙 형상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이 희생이 북유럽에서 사라진 것은 1천 년이 채 안 된다. 어떤 뒤떨어진 부족들 사이에서는 자원자들에 의한 인간 희생제물 의식을 아직도 계속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종교적, 또는 의식을 통한 자살이다. 한때 어느 무속인이 어떤 부족에서 크게 존경받는 한 노인을 희생하라고 시켰다. 사람들이 반항했고, 복종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그 노인은 아들로 하여금 자기를 죽이게 하였다; 옛날 사람들은 이 관습이 진정으로 의미가 있다고 믿었다.
예붓다와 그의 외딸에 관한, 히브리인의 이야기보다 더 비극이고 애처로운 체험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이것은 오래되고 옛날부터 지켜 온 종교 관습과 진보하는 문명의 상반되는 요구 사이에 생긴, 가슴 아픈 투쟁을 잘 나타낸다. 보통 관습에 따라, 좋은 의도를 가진 이 사람은 어리석게 맹세하였고, 적들을 이기려고 어떤 값을 치르겠다고 찬성하면서 “전쟁의 신”과 협상했다. 이 값은 그가 집으로 돌아올 때 그를 맞이하려고 집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자를 바치는 것이었다. 예붓다는 충실한 노예들 가운데 하나가 이렇게 그를 맞이하려고 준비되었으리라 생각했으나, 알고 보니 그의 딸이자 하나밖에 없는 아이가 그를 집으로 맞아들이려고 나왔다. 그래서 그렇게 늦은 시절에도, 문명화되었다고 생각된 민족 사이에서, 두 달 동안 제 운명을 슬퍼한 뒤에 아버지가 이 아름다운 소녀를, 그 동포 부족 사람들의 찬성을 얻고서, 사람 제물로 실제로 바쳤다. 그리고 사람을 제물로 바치지 말라고 모세가 엄하게 명령한 마당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는 바보 같고 쓸데없는 맹세를 하는데 빠지며, 옛날 사람들은 그러한 모든 서약을 무척 거룩하게 여겼다.
옛 시절에는 어느 정도라도 중요한 새 건물을 짓기 시작할 때, “기초에 넣는 제물”로서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풍습이었다. 이것은 그 구조물을 감시하고 보호하는 한 귀신 영을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중국인이 쇳물을 부어 종을 만들려고 준비했을 때, 풍습은 종소리를 좋게 만들려는 목적으로 적어도 소녀 하나를 바쳐야 한다고 명했다. 뽑힌 소녀는 산 채로 녹은 쇳물 속으로 던져졌다.
노예를 산 채로 넣고 중요한 담을 세우는 것은 많은 무리가 오랫동안 가졌던 관습이었다. 후일에 북유럽 부족들은 새 건물의 담 속에 산 사람을 파묻는 이 관습 대신에, 지나가는 사람의 그림자를 담 속에 넣는 것으로 바꿔 치웠다. 중국인들은 담을 쌓는 동안에 죽은 일꾼들을 담 속에 묻었다.
89:6.6 팔레스타인에 있는 어느 옹졸한 왕은 예리고 담을 세우면서, “그의 맏아들 아비람을 잃고 그 기초를 세웠고, 막내아들 세굽을 잃고 그 대문들을 세웠다.” 그 시절에, 이 아버지는 그 도시 대문들의 기초 구멍에 두 아들을 산 채로 넣었을 뿐 아니라, 그의 행동은 또한 “주의 말씀을 따른” 것이라고 기록되었다. 모세는 기초에 바치는 이 제물을 금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가 죽고 나서 곧 이 풍습으로 돌아갔다. 장신구와 기념품을 새 건물의 초석 속에 집어넣는 20세기 예식은 원시의 기초 제물을 생각나게 한다.
첫 열매를 영들에게 바치는 것은 오랫동안 여러 민족의 관습이었다. 이를 지키는 것은 이제 어느 정도 상징이지만, 모두가, 사람 제물을 포함하여 옛날 예식이 남은 것이다. 첫 아이를 제물로 바친다는 개념은 옛사람들, 특히 페니키아인 사이에서 널리 퍼졌고, 이들은 그것을 마지막으로 버린 자들이었다. 제물을 바칠 때 “목숨 대신에 목숨을”하고 말하곤 했다. 이제는 죽음이 있을 때 너희는 “티끌에서 티끌로”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이 마지못해 아들 이삭을 바치는 광경은, 문명화된 감수성에 충격이지만,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새롭거나 이상한 개념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큰 감정의 압박을 받을 때, 첫아들을 바치는 것은 오랫동안 유행한 풍습이었다. 여러 민족이 이 이야기와 비슷한 전통을 가지고 있는데, 무슨 드물거나 특별한 일이 생겼을 때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필요하다는, 세계에 널리 퍼진 깊은 개념이 한때 존재했기 때문이다.
7. 인간 제물의 수정
89:7.1 모세는 대용물인 몸값을 지불하게 함으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풍습을 끝내려고 애썼다. 그는 그 민족으로 하여금 그들의 성급하고 어리석은 맹세가 낳는 최악의 결과를 피할 수 있게 만든 체계적인 계획을 세웠다. 확정된 값에 따라서, 땅, 재산, 아이들을 구제할 수 있었고, 이 값을 사제들에게 낼 수 있었다. 첫 아이를 잡아 바치기를 그만둔 무리들은, 이 끔찍한 행위를 계속한, 느리게 진보한 이웃보다 큰 이점을 곧 가져왔다. 그러한 뒤떨어진 많은 부족은 아들들을 이렇게 잃었기 때문에 크게 약화 되었을 뿐 아니라, 지도층의 계승조차도 가끔 끊어졌다.
아이를 제물로 사용하는 관습을 바꾸게 된 것은 장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집 문설주에 피를 문지르는 풍습에서 계기가 된다. 이것은 한 해의 신성한 축제와 연결되어 자주 행해졌고, 이 예식은 한때 멕시코에서 이집트까지 세계의 대부분에서 유행했다.
대부분의 집단이 의식을 위해 아이들을 죽이기를 중단한 뒤에도, 갓난아기를, 떨어진 광야에나 강물에 작은 배 속에 홀로 두는 것이 풍습이었다. 사르곤·모세·싸이러스·로물루스의 경우와 같이, 아이가 살아남으면, 신들이 그를 살리려고 간섭했다고 생각되었다. 그런 다음 첫아들을 신성하게 또는 희생물로서 드리는 관습, 즉 아이들이 자라도록 내버려 두고, 그다음에 죽이는 대신에 그들을 추방하는 관습이 따랐다; 이것이 식민화의 기원이었다. 식민화 계획에서 로마인들은 이 관습을 지켰다.
원시의 숭배와 관련되어, 성의 문란으로 생긴 많은 특이한 결합은 사람 제물과 연결해서 그 기원이 생겼다. 옛날에는, 여자가 머리 사냥꾼을 만났을 때, 몸을 제공함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나중에는 신들에게 희생물로서 성스럽게 바친 소녀는 몸을 일생동안 성전에서 신성한 성교 서비스에 바침으로 제 목숨 찾기를 바랄 수 있었다. 이 방법으로 그 여자는 몸 찾는 돈을 벌 수 있었다. 이렇게 몸값을 치르는 데 종사하는 여인과 성관계를 갖는 것을 사람을 무척 고상하게 만드는 일로 여겼다. 이 신성한 소녀들과 사귀는 것은 종교 예식이었고, 게다가 이 의식 전부가 평범한 성욕 만족을 위하여 그럴듯한 구실을 주었다. 이것은 소녀와 그 짝짓는 자들이 스스로 즐겁게 행한, 야릇한 종류의 자기기만일 뿐이었다. 문명이 진화할 때 사회적 관습은 언제나 뒤에 쳐져서 느리게 발전한다. 이처럼 진화하는 종족들의 관습, 오래되고, 야만인 같은 성 관습이 그런 식으로 지속되었다.
성전의 매춘은 결국 남부 유럽과 아시아에 두루 퍼졌다. 성전의 창녀들이 번 돈은 모든 민족 사이에서 거룩하게―신들에게 드리는 고급 선물로―여겼다. 가장 높은 부류의 여인들이 성전의 매춘 시장에 들끓었고, 번 돈을 온갖 종류의 신성한 서비스와 공익사업에 바쳤다. 상급 여인들의 상당수가 성전에서 임시로 몸 파는 서비스를 행하여 지참금을 모았고,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런 여자를 아내로 갖기를 더 좋아했다.
8. 속죄와 약속
89:8.1 희생물의 속죄와 성전 매춘은 실제로 사람 제물 바치기의 변형이었다. 다음에는 딸들을 거짓으로 바치는 일이 따랐다. 이 예식은 일생 동안 처녀성을 지키는 데 헌신함과 더불어 방혈하는 것이었고, 더 오래된 성전 매춘에 대한 도덕적 반응이었다. 후일에는 처녀들이 신성한 성전의 불을 지키는 봉사에 헌신하였다.
사람들은 결국, 오랜 관습인 인간 제물을 몸의 일부를 바치는 것으로 대치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신체를 자르는 것도 또한 괜찮은 대용물이라고 생각되었다. 머리카락, 손톱, 발톱, 피, 그리고 손가락과 발가락조차 바쳤다. 후일에 거의 보편적이었던 옛 할례 의식은 부분을 희생하는 의식의 산물이었다. 순전히 희생이었고, 거기에 위생을 지키려는 어떤 개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남자들은 할례를 받았고, 여자들은 귀에 구멍을 뚫었다.
나중에는 손가락을 잘라내는 대신에 함께 묶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머리를 밀고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도 마찬가지로 종교적 헌신의 형태였다. 내시를 만드는 것은 처음에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생각을 고친 것이었다. 코와 입술 뚫기는 아직도 아프리카에서 실행되고 있고, 문신은 예전에, 잔인하게 몸에 상처 내는 풍습이 예술로 진화한 것이다.
희생물을 바치는 관습은, 진보하는 가르침의 결과로서, 결국 신성한 약속의 개념과 연관되었다. 마침내 신들은 사람과 진짜 협정을 맺는다고 생각되었다; 이것은 종교의 확립을 위한 중요한 단계였다. 율법, 신성한 약속은 운, 두려움, 미신의 자리를 대신했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발전하여 우주 통치자들이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되는 수준으로 갈 때까지, 신과 계약하는 것을 결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인간이 초기에 가졌던 하나님의 개념은 너무 인격화되어서, 자기 스스로가 비교적 믿을 만하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존재가 될 때까지 , 그는 의지할 수 있는 Deity(신)를 꿈꿀 수 없었다.
89:8.6 그러나 신들과 언약을 맺는다는 생각이 마침내 도래하였다. 진화하는 인간은 그의 신들과 주제넘게 협상할 정도까지 도덕적 위엄을 결국 얻었다. 그래서 희생물을 바치는 사업은 사람이 철학적으로 하나님과의 협상 게임으로 차츰 발전했다. 이 모두가 불행에 대비해서 보험에 드는 새로운 조치, 아니 오히려 더 분명하게 번영을 사들이는 향상된 기술이었다. 이 옛날의 제물이 신들에게, 고마움이나 추수 감사의 표시로 자진해서 드리는 제물이라는 생각은 하지 말라; 그런 제물들은 참된 예배의 표현이 아니다.
원시 형태의 기도는 영들과 협상하는 것, 신들과 따지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탄원과 설득이 무언가 더 실속있는 비싼 것을 대신하는 일종의 물물 교환이었다. 종족들의 발전하는 상업은 무역으로 전환되고, 교환하는 눈치를 개발하였다. 이제 이 특성은 신을 숭배 방법에도 비로소 나타났다. 남보다 장사를 더 잘하는 상인이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보다 기도를 더 잘하는 자도 있다고 생각되었다. 의로운 사람의 기도는 높이 여김을 받았다. 의로운 사람은 영들에게 셈을 다 치른 자, 신들에게 모든 의식의 의무를 충분히 끝낸 사람이었다.
초기의 기도는 도저히 예배라 할 수 없었다; 기도는 건강, 재산, 목숨을 위하여 협상하는 탄원이었다. 그리고 많은 면에서 기도는 시대가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기도가 아직도 책에서 읽혀지고, 형식으로 낭독되며, 바퀴에 붙이고, 나무에 걸어 놓으려고 적으며, 거기서 지나가는 바람은 사람으로 하여금 기도하는 노고를 덜어 줄 것이다.
9. 희생 제물과 성찬
87:9.1 유란시아인의 의식의 진화 과정 전체에 걸쳐, 인간 희생은 식인 풍습의 피 흘리는 제사의식에서 더 높고 상징적인 수준으로 나아갔다. 초기의 희생 의식은 후일에 성찬 의식으로 이어졌다. 한참 후에는 사제가 혼자서 사람 희생물의 작은 조각이나 사람의 피 한 방울을 취하고, 그리고 나서 모두가 동물 대용품을 먹곤 했다. 이 초기의 대속, 속죄, 언약의 개념들은 후기 성찬식으로 발전해왔다. 이 모든 예식의 진화는 강력한 사회화 영향을 미쳤다.
하나님의 어머니 숭배와 연결되어, 멕시코와 기타 장소에서, 케이크와 포도주를 드는 성찬이 사람을 바치는 오랜 관습의 살과 피를 대신하였다. 히브리인들은 유월절 예식의 일부로서 이 의식을 오랫동안 지켜왔고, 이 의식으로부터 후기 기독교 형태의 성찬식이 기원을 갖는다.
고대 사회에서의 형제 사랑은 피를 마시는 의식에 기초를 두었다. 초기 유대인의 친교는 희생물의 피를 흘리는 행사였다. 바울은 “영원한 언약의 피” 에 새로운 기독교 종교집단을 세우기 시작했다. 바울이 피와 희생물에 대한 가르침으로 불필요하게 기독교를 성가시게 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인간이나 동물의 희생을 통한 속죄교리를 한 번에 종결했다. 그의 신학적 절충은, 하늘의 계시조차도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진화적 통제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마지막이자 온전히 충분한 인간 제물이 되었다; 신성한 재판관은 이제 충분히, 영원히 만족하신다.
그래서 오랜 세월 끝에 희생의 숭배는 성찬의 종교문화로 진화했다. 현대 종교의 성찬은 인간 제물의 충격적인 초기 의 의생 의식과 그 이전의 식인 의식의 정통 계승이다. 많은 이들이 여전히 구원을 위해 피에 의존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비유적이고 상징적이며 신비적인 것이 되었다.
10. 죄의 용서
89:10.1 옛날 사람은 희생물을 바침으로 겨우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현대인은 구원을 성취하는 새로운 자의식 기법을 개발해야 한다. 죄의식은 필사자의 mind 속에 지속되고 있고, 구원이라는 생각 형태는 죄의식에서 비롯된 낡고 구시대적인 것이 되었다. 영적 필요의 실체는 계속되고 있으며, 지적 진보는 mind와 혼을 위한 평화와 위로를 얻는 희생제물에 대한 옛 방식을 없애 버렸다.
죄는 신(Deity)에 대한 의도적인 불충성으로 재정의 되어야 한다. 불충성에는 정도 차이가 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부분적 불충성; 갈등으로 인한 분열된 불충성; 무관심 속에서 죽어 가는 불충성; 신이 없는 이상에 헌신함으로써 나타나는 죽은 충성이 있다.
죄의식이나 죄책감은 풍습의 위반에 대한 의식이다; 그것이 반드시 죄는 아니다. 신(Deity)에게 의식 없이 불충을 행했을 때는 진정한 죄가 아니다.
죄의 감정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인류에게 초월적 탁월성이 있다는 표시이다. 죄의식은 인간을 비열한 존재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인 위대함과 점점 더 높은 영광을 가진 존재로 구별짓는다. 그러한 불완전한 감정은 필사자의 mind를 도덕적 고귀함, 우주 통찰력, 영적 생활의 훌륭한 수준으로 확실하게 변화시켜야 한다는 믿음으로 이끄는 초기 자극이다. 이처럼 인간의 존재에서 생기는 모든 의미가 현세의 것으로부터 영원한 것으로 바뀌고, 모든 가치가 인간다운 것에서 신성한 것으로 높아진다.
죄의 고백은 불충성을 단호히 부인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시-공간의 결과를 어떻게든 완화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고백―죄의 본질에 대한 정직한 인식―은 종교적 성장과 영적 진보에 필수이다.
89:10.6 신(Deity)에 의한 죄의 용서는, 고의적인 반항의 결과로 관계가 단절된 것을 인간이 한동안 의식한 후에, 그 충성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용서를 구할 필요는 없으며, 오직 생명존재와 창조자 사이의 충성 관계가 다시 정착되는 의식으로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충성스런 아들들은 행복하고, 봉사를-사랑하며, 파라다이스로 상승하는 가운데 늘 진보를 이룬다.
[네바돈의 찬란한 저녁별이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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