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07.
풀
기가 막힌다. 풀밭인지 콩밭인지 구분도 쉽지 않다. 그나마 콩잎은 넓적한 모양이라 드문드문 콩이 자라고 있음을 알 수는 있다. 풀들이 얼마나 튼실하게 자랐는지 콩은 대개가 웃자랐다. 줄기는 가늘고 길며 콩 이파리 수는 근처 다른 교육생의 것들과 비교하면 거의 반쪽이다.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나는 오른손잡이다. 쪼그리고 앉아 왼쪽 발과 발목, 허벅지에 체중을 싣는다. 오른쪽 다리는 균형을 잡기 위한 버팀목일 뿐이다. 겨우 20m가량의 짧은 두 개의 고랑만 작업했다. 콩대에는 상처 없이 풀만 골라 베어내야 한다. 조선낫으로 풀을 벤다. 낫은 날카롭고 힘이 좋다. 낫의 무게 또한 적당하여 손목 회전을 이용하기도 하고, 왼손 아귀로 한주먹 움켜잡은 가느다란 풀들은 살짝 잡아당겨도 싹둑 잘린다.
작은 생태공원을 보는 듯하다. 풀을 베어낸 자리에는 쥐며느리가 꿈틀거린다. 풀을 잡아끌면 어린 청개구리가 놀라 달아난다. 풀 아래 촉촉하게 젖은 몽글몽글한 부드러운 흙이 보인다. 지렁이가 살고 있다는 증거다. 귀에서 모기 나는 소리가 들린다. 뺨이 따끔하다. 물렸다. 늦은 걸 알면서도 내 뺨을 후려친다.
허리가 끊어질 듯 무겁다. 무르팍을 짚고 일어서는데도 허리가 뻣뻣하여 똑바로 서지도 못하겠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휴! 죽겠다.” 진짜는 죽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입이 착 달라붙은 오래된 감탄사의 일종이고 불평불만 늘어놓을 때 사용하는 접두사의 하나다.
작업한 양이 상당하다. 숱한 죽음이 발아래 겹겹이 쌓였다. 쓰러진 풀들을 보며 삶의 끝에 죽음이 있는 게 아니고, 삶과 죽음은 기차 철로처럼 나란히 동행하는 듯하다. 가끔 반대 철길로 옮겨타면 죽음이 되고. 풀 아니 잡초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너희들의 죽음 통해 아내의 기억 속에 나의 성실함이 부활하는 것이라고 믿어다오.”
엉거주춤한 모양으로 윗몸을 뒤로 젖히면서 잠시 주위를 둘러본다. 해는 서산 너머로 졌다. 교육생 숙소동에는 밝은 불빛이 여럿이다. 정자에는 남자 교육생 몇 명이 모여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다. 수돗가에서 장화를 씻는 사람, 텃밭에서 따온 방울토마토를 나누는 사람, 가지를 나누는 사람, 정자에 앉아 그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사람.
밀레의 <만종>이 스친다.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농부의 모습. 내가 밀레라면 귀농귀촌지원센터 정자와 함께 수돗가 풍경을 그렸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