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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대 비유에서 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자
누가복음 14장 25-30절 / 25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하나님 나라의 잔치 자리에 참석하여 주인이 준비한 음식을 맛보는 사람은 참으로 복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복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말씀합니다. 그들은“무릇 내게 오는 자”,“누구든지 나를 따르는 자”에서 말씀되고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는 기쁨을 맛보고자 하면서도 그 나라의 주인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래서 그 나라의 주인을 따르지 않고서는 정작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는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주인이 청하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는 자가 어떤 자인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발걸음을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는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큰 군중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운명인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입니다. 곧, 죽으시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으로 말미암아 있게 될 부활과 승귀, 그리고 성령강림을 통해서 자신에 의해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를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와 그리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확장시켜 나가실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온 세상으로부터 불러낸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벌어지는 한 자리에 참석하게 하여 하나님께서 준비한 잔치 떡을 먹는 기쁨에 있게 하실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온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맛볼 자들은 그 나라의 주인이 초대하는 청을 따라 주인이 보낸 아들을 따름에 있어야 합니다. 이들은 아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맛보는 자리에 참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맛보려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보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큰 군중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서 예수님이 보고 계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는 자들은 여기에 준비된 떡을 먹는 기쁨을 누리는 복 있는 자일 것인데, 예수님과 함께 이 복을 누릴 것이 기다리고 있는 운명에 기꺼이 동참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동참하지 못하게 하는 온갖 무거운 것과 얽매인 끈들이 이들을 묶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 모두를 끊어버리라고 명령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예수님의 뒤를 좇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는 있지만, 곧 예수님으로부터 모두 흩어져 떠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 잔치는 이들에게서 한갓 기대로 끝날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이들은 말입니다.‘큰 잔칫집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배경인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맛보는 자는 복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예수님이 비유를 들어 대답해 주시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인 예수님을 따름에 있는 것보다는 이 세상의 밭이나 소를 더 사랑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보다는 자기 부모나 처자식이나 형제자매를 더 사랑함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모든 소유를 버리고/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결코 따를 수가 없습니다(마 19:21-22). 즉,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서 까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자기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그들은 율법에서 나타내 주시고 있는 탐욕에 있는‘자기 부인[부정]’의‘의’에, 곧 하나님의 요구에 만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복을 맛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들의 것이 결코 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큰 잔칫집 비유’에서의 주인이 말한 바인“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에서 보는, 주인의 청을 받아 주인이 마련한 잔칫집에 참석한 자들의 것입니다. 여기에 주인의 청함을 받아 잔칫집에 참석한 자들로 비유되고 있는“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은 밭과 소를 사고 결혼하여 신부를 얻고 하는 자들과는 전혀 반대가 되는 형편에 있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는 것보다 더 사랑할 것의 소유가 없는 자들입니다. 망대 비유를 통해서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것을 청함을 받을 때 이것에 맞서 거부할 아무런 힘이 없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것의 청함을 받을 때 아무 거부 없이 받아들임에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잔치 자리에 참석하는 사람은 참으로 복이 있습니다.”라고 하는 생각대로 과연 하나님의 나라 잔치 자리에 참석하는 사람은 참으로 복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누가 과연 하나님의 나라 잔치 자리에 참석하는 복이 있는 사람인지요.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밭보다 더 사랑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가축 소보다 더 사랑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결혼하여 얻은 신부보다 더 사랑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모나 처자식이나 형제자매보다 더 사랑하는 자입니다. 누가, 그리고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는지요. 우리가 소유하고 함께 하고 있는 그 모두를 버리고 내팽개쳐서 할 수 있는 것인지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몰상식하고 패륜의 의도에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모두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함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인 한에는 예수님이 유일한 길이요 유일한 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소유한 밭이나 소가 그 댓가를 지불하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부모나 처자식이나 형제자매가 주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따를 것을 알려 주신 하나님의 뜻을 따름에 있습니다. 우리가 소유한 밭이나 소, 그리고 부모와 처자식과 형제자매를 사랑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여 하나님께서 준비한 음식을 맛보는 것은 신명기 6장 4-5절에서 말씀하신“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에, 그리고 이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신“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에 있습니다. 우리가 밭이나 가축의 소나 부모와 처자식과 형제자매 그 모두를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그래서 그 모두를 소유함에 있는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영원한 생명과 그 생명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를 얻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지요. 우리가 생명을 잃어버리고서, 하나님의 나라를 잃어버리고서 이것의 가치를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마 16:25-26). 예수님은 우리가 소유한 그 모두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함에 있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하나님의 의’요‘천국의 의’로 오셔서‘우리의 의’가 되어 주십니다. 이‘의’앞에서 우리가 소유하고 우리가 함께 하고 있는 모든 의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그야말로 배설물에 지나지 않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가장 존귀히 여기게 하십니다. 무엇으로 말인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데 있어서는 오직 이 하나님의 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이심을 인정하고 그 믿음에 있게 하시는 것에서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이 하나님의 의를 입음에 있는 권세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있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름에 있는 것이요, 하나님의 나라 잔치의 기쁨을 맛봄에 있게 하시는 청함을 따름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그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라도 얻을만한 가치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해주시기 위해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두 가지를 들어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그 중에 하나가‘망대 비유’입니다.
누군가가 망대[건물]를 세우고자 할 때는 먼저 건축하고자 하는 도면의 설계를 하고 여기에 소요되는 비용의 견적을 뽑아 보고 자기에게 소요되는 그 건축 비용을 지불할 돈이 충분한지를 검토해 보고 나서 비로소 망대를 세우는 건축을 시작합니다. 이 모두에 대한 아무런 생각도 없고 준비도 없이 무작정 망대를 세우기 위해 건축 공사를 시작하면 기초만 서둘러 세워 놓고 막상 완성할 돈이 없어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을 보고 주위 사람들이 그를 어리석다고 얼마나 비웃겠는지요. 사람들은 공사를 겨우 시작만 해 놓고 정작 진행은 하지 못하고 있다며 저러고서야 어찌 공사를 끝낼 수 있겠느냐며 조롱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망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서“하나님의 나라는(나를 따르려는 것은) 마치~와 같다.”를 알게 해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망대를 세우기 위하여 주인이 여기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을 지불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의 전 재산을 건축하고자 하는 망대를 위해서 쏟아 붓는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자기의 전 재산을 지불하고서라도 소유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망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고 이 나라에 참석하는 기쁨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름에 있는 것은 우리가 소유한 밭이나 가축 소, 그리고 부모와 처자식과 형제자매를 사랑한 것에서 더 나아가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라고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에 있는, 곧 자기 목숨보다도 더 예수님을 사랑함에 있는‘자기 부인[부정]’에 있는 것이요, 이는“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2)라고 하신 것에서 보게 되는‘한 분 주인’을 따르며 그 섬김에 있는 것에서 말해지고 있는‘자기 십자가를 짊어짐’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에 있는 것인지를 잘 알고서 그에 대한 생각을 충분히 하고서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는 지불, 곧 모두의 부인에 있고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말이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에 있으면서 밭, 소, 가정 그 모두에 묶여서“나는 지금 예수님을 따라 갈 수 없습니다.”라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 잔치에로의 부르심을 받은 자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는 그 모든 여정에 자신도 함께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시작에서부터 그동안 소유하고 사랑해 왔던 밭, 소, 가정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묶어 두지를 못하며,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그의 발을 묶어 두지를 못합니다. 심지어는 예수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신 십자가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생명까지 요구할 때도 자기 목숨보다도 더욱 예수님을 사랑함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 자기 목숨을 내어놓습니다. 자기 목숨까지도 그 자신을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지를 못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걷는 시작은 이미 자기 부정과 함께 자기 십자가를 짊어짐에 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소유해 온 모두인 밭, 소, 가정, 그리고 자기 목숨을 예수 안에서 내어놓은 그 모두가 지닌 가치는 그 모두 보다“백 배로/여러 배를 받을 것이다.”(마 19:29; 막 10:30; 눅 18:30) 라고 하는 가치로 말해지는 새로운 것으로 그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 이곳에 참여 받은 믿음의 식구들과 영생으로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이것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망대 비유’에서 말씀되고 있는 것처럼 계산이 끝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감에서 장차 다가올 영광이란 밭이나 소나 부모와 처자식과 형제자매, 그리고 자기 목숨까지도 그 모두와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이신 예수에게서 이를 보고 있는 히브리서 기자는“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당시의 믿음의 형제들에게 말합니다.“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이런 분이시니[천사보다, 모세보다, 성전보다, 대제사장보다, 율법보다 더 나은 분이시니] 우리가 얻은 바 구원에 큰 확신을 갖고 마음에 힘을 얻어 더욱 용기를 내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끝까지 달려가 마칩시다! ”라고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