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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說의 長壽, 그러나
이원우(전 노인학교장/ 전 교장/ 소설가)
암 수술을 받았었다. 강남 S 병원에서. 이제 1년 반이 지났고, 도중 몇 번의 혈액 검사 결과도 썩 좋게 나왔다. 앞으로는 6개월에 한 번씩 병원에 와도 좋다고 주치의가 말했다.
“효자암(孝子癌)이란 말 들어 보았지요? PSA, 즉 (전립선 특이 항원) 수치가 0.02로 나왔으니, 안심해도 될 겁니다. 수술 당시 5.60이었고. 운동 열심히 하고 체중 관리 잘하세요.” “감사합니다. 교수님의 저서 <전립선암의 완치 설명서>를 항상 머리맡에 두겠습니다.”
“마음 편히 갖고, 일상생활을 물 흐르듯 하시면 됩니다.”
“아, 참. 제가 미역귀를 몇 달 전부터 먹고 있는데, 그건 어떨까요?”
좋단다. 거기 암세포의 자살을 유도하는 성분 후코이단이 들었다는 것. 다만 섭취율이 떨어지니, 차라리 토마토나 마늘 등을 꾸준히 먹도록 하는 게 도움이 된다고 한다.
사람들은 효자암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전립선암은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얕잡아 본다. 그 까짓것 가만두어도 몇 년은 더 살 수 있다고도 한다. 딴은 맞는 말인지 모른다. 처음 암 선고를 받을 때 의사가 하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용인 S병원(서울 S병원 분원)에서였는데, 의사는 부산 출신 즉 동향인이어서, 며칠 사이에 아주 친해진 상태였다.
“교장 선생님, 수술 받으시면 최하 10년, 안 받으셔도 5년은 생존하실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수술이 정답이지요. 요즘 로봇 수술이 대세니까 그쪽을 택하십시오. 수술비 1,500만원이 부담이긴 하지만…….거의 재발(再發)없습니다.”
하나 내가 짐짓 엄살을 피우고자 하는 게 아니라, 전립선암도 암은 암이다. 호사가들이야 무슨 억지춘향인들 왜 만들어내랴. 그래도 그렇지, 암과 효자를 짝 짓다니.
내친김에 수술 후에 겪었던 우스꽝스러운 일화(?) 하나.
또 다른 중병(重病)에서 회복된 지 대여섯 해라, 사실 건강에 대해 남다른 걱정을 많이 하던 참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고 했다. 아주 사소한 증세(?)를 느껴도 그걸 들춰내어 전문의를 찾아가기 예사였으니…….예 하나. 나이 일흔에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 게 많은지, 흉몽을 며칠 계속해서 꾸면 그만 혼비백산한 상태가 된다. 그리고 정신의학과 문을 두드린다.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으니 남의 아내(아니 보통 여자)를 탐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은 하는데, 그게 녹록할 리 만무다. 꿈속에서 심심찮게 간음(?)-생각만으로-하는 바람에 묘한 정서에 빠져서 허우적댔다. 어느 정도? 아서라, 그것까지는 그만두자. 아무튼 주님의 꾸지람을 들을 만큼은 된다는 선에서 이 변명을 접고 싶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에 맞닥뜨린 것은 수술 직후였다. 흉몽이 대폭 줄어들었는가 하면, 그 잘난 ‘간음’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게 아닌가? 나는 나지막이 혼잣말을 뱉어내었다.
“그렇지 전립선이야말로 남자의 가장 중요한 상징물 중 하나지. 그게 없으니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을 겪고 있는 거야.”
방사(房事)가 힘들다는 친구들도 더러 있어서, 별로 충격이 오지 않았다. 나도 비슷한 시기에 그 집단에 합류하는가 싶어 실소가 나왔지만. 패배 의식이나 좌절감에도 안 빠졌고. 주치의가 비아그라 처방을 해 주었으나, 약국에 가지 않고 찢어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오랜만에 노래방에 간 꿈을 꾸었다. 교장 시절이었던 모양으로, 직원(교사)들이 다투어 내게 마이크를 건넸다. 나야 뭐 거절할 사람이 아니니 몇 곡조 뽑았고말고. 다시 기기(器機)에 ‘남포동 블루스’가 떴다. 1324번. 김수희 노래. 네온이 춤을 추는 남포동의 밤/ 이 밤도 못 잊어 찾아온 거리/ 그 언젠가 사랑에 취해 행복을 꿈꾸던……
순간 어느 여교사가 손을 내민 것이다. 블루스를 추자는 것이다. 어지럽게 박수 소리가 터지는 가운데, 둘은 몸을 밀착한 대로 좁은 공간을 누볐다. 수술 후 처음으로 아랫도리에 물리적 반응이 오는 게 아닌가? 그러다 잘못하여 동료 교사의 발을 밟았던 모양으로, 둘은 기우뚱하며 바닥에 쓰러졌고. 그 바람에 깨어나 잠든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댔다.
“세상에, 블루스의 ‘블’자도 모르는 위인이 그렇게 날렵하게(?) 블루스를 추다니…….”
쩝쩝 입맛을 다시며 뒤척이다가 새벽을 맞았다. 아내에게는 그저 흉몽만 꾼다는 이야기를 해 왔던 터이므로, 고백(?)하기가 무엇해 입을 닫았다. 그러나 내가 천주교 신자로서 고해 성사는 봐야 했으므로, 서울 병원에 올라간 김에 명동 성당을 찾았다. 아니 본당(本堂) 신부는 내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으니, 용기가 나지 않아서였다고 하자. 어쨌든 고해소에 들어가 성호경을 그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이 모기소리 만했다. 그러나 입을 열고 보니 조금 안심이 되었는지,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신부가 이야기했다.
“쯧쯧, 예민하시군요. 하여튼 잘 고백했습니다. 들으세요. 마태오 복음 5장 28절입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지난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남자는 다 그렇지요. 우리 사제(司祭)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무조건 성전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성체 앞에 앉아 기도드립니다. 욕정을 잠재워 달라고 말씀드리면 너무 직설적 표현이지요.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감사합니다. 신부님.”
“신부도 남잡니다. 기억하세요. 나는 젊고 전립선을 가지고 있고 젊어요. 형제님보다 더 자주 고해성사를 볼지도 모릅니다. 보속으로 묵주기도 10단을 마치도록 하세요.”
나는 주임 신부가 정말 너그럽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간음’을 했는데 묵주 기도 10단이라니…….아무튼 무거운 짐을 하나 내려놓은 느낌이었다.
아무튼 나는 중요한 장기 하나가 없어졌으니, ‘중성(中性)+장애인’일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었다. 평생 앞을 못 보다 돌아가신 엄마를 생각했다. 겉으로는 조그맣게 보이는 로봇 수술 흉터를 만지작거렸다. 이상하게 촉감이 좋았다. 그러다 나는 자문자답했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데 말이야. 어느 정도 살 수 있을까?”
“누가 알아? 너 하기에 달려 있지.”
지금은 거의 결론을 내린 상태다. 의사의 말이 아니라도 잘하면 10년은 끄떡없으리라. 그 이상, 예를 들어 20년? 아서라,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을 좀 여유 있게 해석하자. 나는 기필코 십년 버틸지언정, 그 이상 다시 열 손가락으로 세월을 세는 법이 없도록 주님께 기도로 매달리리라. 무슨 뜻? 그건 말미쯤에 상징적으로 표현하기로 하고.
수술 당시로 되돌아간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 했지만, 두려움은 별로 없었다. 의사나 간호사에게 농담도 곧잘 건넸다. 자신이 생각해 봐도 얄미울 만큼 담담한 표정을 짓고 마취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호흡기를 통해 뭔가 들이마시고…….이윽고 나는 깊은 잠에 빠진다. 아주 오랜 시간. 여기저기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일 처음엔 간호사가 뭐라 이야기하며 반가워했다.
“&*^%$#@…*&^%.?”
당최 알아듣지 못하겠다. 그렇게 실랑이가 계속되자, 아내가 가까이 들어와서 거든다.
“이 양반 부산 출신, 표준말 억양을 못 알아들어요. 저한테 다시 한 번 얘기해 보세요.”
간호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몇 마디 하는 모양이고, 아내가 통역(?)을 하는 기상천외의 일이 벌어졌다. 쯧쯧, 흉식(胸式)호흡. 가슴으로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 뱉어야 유해 가스가 쉬 빠져 나간다는 뜻인 것을…….그래야 일찍 회복되고 예후도 좋아진다나?
그러나 그건 여간 힘든 노릇이 아니었다. 공황 장애에 몇 년 시달렸던 적이 있는 나로서는, 절대 고쳐지지 않는 습관이 있어서였다. 복식호흡, 그렇다. 자나 깨나 배로 숨을 쉬었으니까. 그런 소동 끝에 이윽고 회복실을 거쳐 병실로 옮겨졌다. 다인실(多人室)이 비지 않아서였음은 물어보나마나. 기운이 부쳐 눈까풀을 슴뻑거리기조차 힘들었다. 잠깐 졸았는가 싶었는데 병실 간호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던진다.
“할아버지, 조금 있다가 복도에 나가서 가볍게 운동을 시작하세요.”
“아니, 몇 시간 전에 깨어났는데 운동이라니?”
“괜찮아요. 아니 운동부터 하셔야 합니다. 로봇이 아주 정밀하게 전립선을 드러냈거든요. 밖으로 보 이는 상처도 워낙 작아서…….무리라면 제가 권하지도 않습니다.”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간호사가 나이도 들어 보이고 경력도 만만찮을 것 같아 나는 간호사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부산의 문인 김*우 침례 병원 이비인후과 과장에게 슬쩍 전화를 넣어 봤다. 그도 간호사가 시키는 대로 하나는 게 아닌가?
링거가 여러 개 달린 스탠드를 한 손으로 붙잡고, 아내와 함께 복도로 나섰다. 단박에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다리도 후들거렸다. 그렇게 혼신의 힘을 복도에 쏟고 내 방으로 돌아오니 파김치가 따로 없었다. 간호사가 뒤따라와 링거 줄에 항생제인지 뭔지를 넣은 주사 바늘을 꽂으면서 내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인다. 나는 억지 미소로 답하는 수밖에. 이런저런 처치 끝이라, 나는 정신없이 수술 첫 날밤을 깊은 잠으로 보냈다.
다음 날에도 나는 부지런히 운동을 했다. 딴은 서붓서붓 걸으려고 애를 쓰지만 그게 어찌 제대로 되겠는가? 아내가 부축이 큰 도움이 되어서 그렇지, 아니면 몇 번이나 기우뚱했으리라. 간호사들도 마치 내가 대견스럽기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어서 용기백배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한 시간쯤 지나 나는 다시 병실 문을 열었다. 호흡부터 한결 수월해져 있었다. 내가 암 수술을 받은 사람인가, 스스로 의아심을 가질 만큼 기운도 차려져 있었고. 오른쪽으로 꺾어서 끝까지 걸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맞은편을 바라보는데…….휠체어에 앉은 어떤 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젊은 아주머니가 붙잡고 밀고 있는 휠체어에 할아버지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마치 달리기라도 하는 듯 할아버지에게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나는 반사적이지만 힘들게 허리를 굽혔다. 자그마한 키에 적당한 몸집, 맑은 얼굴과 깨끗한 표정을 지닌 분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자세를 가다듬고, 조심스레 말을 건네었다. 여든 살은 좀 넘겼으리란 선입견을 가지고서.
“선생님, 어디 편찮으신가요?”
“그렇소. 심장에 스텐트를 끼우는 수술을 받았어요.”
“아니 스텐트(Stent)라면 심근경색증이신가요?”
“맞아요. 그걸 받았다오. 어제. 지금 회복 중입니다.”
내친김에 나는 평소의 버릇대로 할아버지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아니 연세가 얼마신데, 마취도 하고 심장 수술도 받으셨다는 말씀이신지…….”
맞춰보라는 그분의 말씀에 난 선입견대로 여든 살쯤이라고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분이 침묵하는 대신, 간병인 아주머니가 마치 폭탄 같이 들리는 대답을 하는 게 아닌가?
“이분은 남*혁 원장님. 금년에 만으로 쳐서 103세 되시는 분입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서초구에서 한의원을 개업하시다가, 바로 얼마 전에 폐업 신고를 하셨습니다.”
나는 내 눈과 귀를 의심치 않을 수 없었다. 나보다 서른 살이나 많은 할아버지가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이다. 난 일찍이, 그러니까 83년도부터 무료 노인학교를 불과 서너 해 전까지 운영해 왔었다. 연(延) 수만 명의 노인 학생들을 만나서 더불어 지낸 터였다. 그 25년 동안, 할머니는 몰라도 백세를 넘긴 할아버지를 만난 건 오늘이 처음 아닌가? TV에서야 더러 보아왔지만. 지난 세월의 흔적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난 그저 놀라는 표정으로 그분을 바라볼 수밖에. 이윽고 내가 딴은 조심스럽게 던진 말씀이다.
“저, 84년부터 11년까지 무료 노인 학교를 토요일 오후마다 운영해 왔었거든요. 방학도 공휴일도 없이 문을 열었었지요. 1,511번 수업으로 막을 내리고 용인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래요?”
장수하다가 저승에 먼저 간 학생 넷이 생각난다고 했다. 그제야 그분은 자못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당연히 그분으로부터 그의 일생에 대해 세이공청(洗耳恭聽)해야 했으나, 내가 먼저 말씀드리기는 것도 예의다 싶어 입을 열었다. 나중에 하다못해 그분이 장수 비결이라도 일러 주겠지, 그런 기대가 깔려 있었다.
손*일 할아버지.
남학생으로서는 최고령자였다. 크지 않은 키에 단단한 몸, 수염을 길게 길렀고, 눈이 부리부리했다. 나중 97세에 입적(入寂)한 할아버지. 그분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였다. 남녀 학생 몇몇과 찾아뵈었는데, 얼굴이 별로 수척해 보이지도 않았다. 딱 13일 동안 병실에서 버티다가 괴롭히던 설사도 멎고 해서 귀가했는데, 귀가한 후 며칠 만에 눈을 감았다.
막내아들이 예비역 육군 대령, 서울서 살았다. 아침에 서울 행 기차를 타고 올라가 용돈 좀 얻고 손자들 얼굴도 본다. 바로 저녁에 밤차로 하부하기 예사. 귀가해서 자고 나면, 바로 도시락을 싸서 버스를 타고 멀리 떨어진 문현동 경로당 행. 덕천동에는 유(類)가 없으니 당연하다. 일흔 남짓한 할아버지들이 까마득한 연장자를 모두가 어려워할 수밖에.
서른 두 개의 치아, 그러니까 사랑니까지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 아흔 두 살 때였다던가? 사이다 병마개를 어금니로 땄더라는 것. 그만 그 이의 끝이 조금 부러지는 바람에, 그런 무모한 짓을 안 했다던가? 비결은 서른여덟 살 때부터 해 온 소금 양치질.
아흔 다섯 살 때의 어느 날이었다. 할 말이 있다면서 손을 들기에 나오게 했더니,
“보소, 아주마시들요. 내가 얼마 전까지 60대 중반 되는 할마이를 하나 구해 같이 살았다 아닌교? 세상에 내 눈이 어둡다고 도망을 갔어요. ‘밤일’은 얼마든지 가능했는데…….”
모두가 소스라쳐 놀랐다. 일흔 살이 넘기 무섭게 성불구자(?)가 되기 예산데, 아흔 중반에도 ‘성생활’을 했다니 그게 어찌 예삿일인가. 더구나 그분은 방 두 칸짜리 시영(市營) 아파트에 셋째 아들 내외와 기거하고 있다지 않던가!
며칠 뒤에 학생회 간부들과 그분의 자택을 방문하게 되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이었다. 그분은 머리맡에 이쑤시개를 잔뜩 쌓아 놓고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도 성냥개비 양끝을 문방구 칼로 다듬어 이쑤시개로 만드는 것이었다. 하도 심심해서 그런다는 그분의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이었다. 미닫이문을 조심스레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나보다 스무 살이나 많아 보이는 또 다른 노인이 꿇어앉는 게 아닌가? 근무 시간이 되어서 교대를 하러 간단다. 어디 경비원으로 있는 모양이었다. 처연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쉰을 겨우 넘긴 나이였다. 그런 내가 아흔 중반의 학생과 양반다리를 하고 있는데, 일흔을 넘긴 그의 아들은 꿇어앉다니. 마치 내가 예우를 받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연세가 들어도 품격 높은 ‘정선 아리랑’을 정확하게 부르는 그분 생각이 났다. 민요 가수들조차 누구를 사사(私事)했는지 ‘팔람구암자’를 ‘팔만 구 암자’라고 한다며 한탄하던 그분이었다. 그분이 그리워서 나는 남*혁 원장 앞에서 ‘정선아리랑’ 첫 부분을 뽑아 올렸다. 암 수술 환자라는 걸 잊고서 말이다. 강원도 강산 일만 이천 봉 *팔람구암자(八藍九菴子) 유점사 법당 뒤에 칠성단 도두 뫃고(모으고)/ 팔자에 없는 아들딸 낳아(낳게 해달라고의 뜻) 석 달 열흘 *노구메/ 정성을 말고 타관 객리 외로이 난 사람 괄시를 마라……
때 아닌 민요잔치(?)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일단 여기서 끝내야 했다. 간호사가 그분의 병실 앞을 기웃거렸기 때문이다. 나도 기운이 부쳤고. 다시 만나기로 하고 나도 다시 발걸음을 뗄 수밖에. 참, 이 말씀 드리는 건 잊지 않았다.
“다음엔, 원장님보다 열세 살 연상인 여학생 이야기를 드렸으면 합니다.”
“설마하니 백열여섯 살 할머니가 제자였다니, 그게 사실이오?”
그러면서 그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사실을 전해 드리려는데 미리 미심쩍어하는 것 같아 약간은 섭섭했다. 그날 오후엔 남*혁 원장을 만날 수가 없었다. 병실 문이 닫혀 있고, 안으로부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들이 의사라던가? 가족들이 온 것 같았다.
다시 날이 밝았다. 열한 시가 되었을까? 복도로 나섰는데, 이번에는 왼쪽 끝에 남*혁 원장의 모습이 보였다. 휠체어의 손잡이를 잡은 간병인 아주머니와 함께. 나는 어김없이 허리를 깊게 굽혔다. 서른 살이나 아래인데 오히려 꾀죄죄한 나를 보고, 그분은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거짓말 안 보태어 나는 신선을 보는 느낌이었다. 세상에 할아버지의 미소가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단 말인가?
내가 양해부터 얻었다. 어제 그 여학생의 경우를 말씀 드려도 괜찮겠느냐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그분 앞에서 나는 한*화 학생과의 인연을 웃어가며 소개했다. 정확하게 말하자. 나는 83년 4월초부터 새로 부임한 초등학교의 교실 한 칸을 빌려 소위 노인학교라는 걸 열었다. 23평짜리 서민 아파트, 교문에서 엎어지면 코가 닿을 만한 지척에 살면서…….토요일 오후니까 내 근무 조건에는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아내는 청소를 하고 아들과 딸은 각기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그야말로 한 가족이 총동원된 사교육기관(?)이었다. 민요를 주로 가르치고, 그 민요 가사를 통해 우리글을 깨우치게 하는 일에 우리는 신바람을 냈다. 중풍 뒤끝에 실어증에 걸린 여학생이 ‘아리랑’ 부르는 흉내를 내는 눈물겨운 일 따윈, 오히려 비일비재했다고 하자.
한*화 학생도 최고령자로 입학을 한다. 1세기를 넘게 산 학생. 그분도 노래를 좋아하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노래보다 그 노래에 맞춰 춤추는 데 거의 미치다시피 하였다. 나는 40대 중반이었으니, 2를 곱하고 다시 15를 보탠 제자를 두었다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고.
일이 묘하게 되려고 해서 그랬을까? 우리는 전세로 있던 그 아파트에서 두 평을 늘린 이웃 아파트 1층으로 옮겼다. 자연히 4층에 사는 그분과 아침저녁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여느 때처럼 운동을 하고 현관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한데 그분과 맞닥뜨린 것이다. 그런데 그분의 표정이 심상찮다. 게다가 치맛자락이 불룩하다. 이상한 냄새가 나기도 하고.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 나가는 그분의 모습 너머로 한창 개발 중인 서민 아파트 사이의 공터가 드문드문 보였다.
그날 퇴근하고 나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누가 방문을 두드린 것이다. 안*화 학생이었다. 커다란 보따리에 무언가를 한가득 담고 서 있던 그분이 하는 말이다.
“선생님요. 미안합니데이. 아침에 요강 단지를 감추느라고. 상추엔 오줌이 제일 아닌교. 채전 밭에 상추를 좀 심었는데, 내가 오줌으로 가꾸었지예. 보드랍고 맛이 최고라예.
아하 그랬었구나! 한데 아닌 게 아니라 상추는 그분 말씀대로 맛이며 씹히는 질감이 나무랄 데 없었다. 그 뒤로부터 그분은 수시로 상추 보따리를 들고 우리 집을 찾았다. 물론 아이들에게까지 먹일 수는 없었지만. 덕분에 가계에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면 허풍일까? 그러다가 그분은 구포 3동으로 이사를 갔고, 부산 최고령자로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여기까지 듣던 남*혁 원장이 입을 여는 것이었다.
“대단한데요, 그분이. 아주 부지런했군요. 공터를 일구어 밭을 만들고, 오줌을 주어 채소를 가꾸고. 거기다가 노래와 춤을 일상화했네요. ‘낙천’과 ‘긍정’ 사이엔 등호를 그을 수 있습니다. 하나 백열여섯이란 나이는 미심쩍어요. 이 교장의 각색인가 싶기도 하고, 허허허.”
우리는 걸음을 나란히 하여 반대쪽 끝까지 갔다가 오기를 몇 번 반복했다. 그러곤 각자의 병실 문을 열었다. 물론 오후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말이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는 혼자서 내 병실을 나섰다. 복도에서 걸었다. 마침 남*혁 원장도 휠체어에 앉은 채 한쪽 팔을 번쩍 들어보였다. 우리는 앞서서니 뒤서거니 하면서, 복도 끝을 향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거기에는 아파트 발코니처럼 만든 공간이 있었다. 우리는 문을 열고 그리로 나아갔다.
“기 막히는 이야기를 내가 들었으니 나도 한 마디 하리다. 나는 본래 황해도 장연군 출신입니다. 육이오 이듬해 중공군 남하 소식을 듣고, 신주 단지처럼 모시고 있었던 한의학 서적을 품에 넣고 남쪽으로 내려왔어요. 마흔 두 살 때였지요. 홀어머니를 두고서 말입니다.”
그분은 여기서 잠깐 숨을 몰아쉬는가 싶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다칠 상(傷), 찰 한(寒), 논할 논(論), 해석 주(註). 즉 <상한주론(傷寒論註)>의 일본어 판 이게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책입니다.”
나는 그분의 입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경이로운, 아니 경악스러운(?) 말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분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고향에서 농업학교를 졸업한 그분은, 30대 중반까지 수의사로 일했단다. 한의사였던 외조부 밑에서 의술을 익히고, 일어로 번역된 책으로 한의학을 그렇게 공부했다. 한의사 면허를 딴 이후에는 서양의학까지 공부했고. 듣고 있는 내 입이 다물어질 턱이 없다. 실제 그가 삶을 포기한 말기 위암 환자를 약으로 살려낸 적이 있단다. ‘믿거나말거나’는 내 판단이고말고.
슬하에 아들딸을 두었단다. 그들의 효도를 받고 손자들의 재롱 속에서 살아가니, 더없이 행복한 일상을 보내는 셈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내가 질문을 던진다. ‘장수 비결’ 말이다.
고개를 끄덕인 그분은 잔기침을 두어 번 뱉더니, 말문을 열었다. 첫째가 긍정적인 생각을 갖는 거라고 했다. 긍정은 낙천과도 통한다. 누구든지 특별한 사람 외엔 소식(小食)이 건강관리의 으뜸 덕목이요, 운동 또한 기본. 금연, 절주(節酒) 등은 더 말할 나위 없단다. 여기까지는 나는 적이 실망하고 있었다. 그 정도야 시중의 장삼이사한테서도 들을 수 있는 거 아닌가? 내 표정을 읽는가 싶었는데, 그분이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남의 허물을 잊을 줄 알아야 합니다. 실수한 걸 갖고 모욕적인 언사로 후려지는 건 안 됩니다. 또 남을 용서해야지요. 난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난 마치 둔기로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핑 돌았다. 남 허물 잊기니 용서니 하는 덕목은, 내가 가톨릭 신자인 나에게 항상 멍에가 되어 괴롭혀 왔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분께 허리를 굽혀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갖고 간 메모지에다 대충 옮겨 적었고말고. 이윽고 우리는 각자의 병실로 돌아갈 시간이 됐다. 나는 뜬금없이 말씀드렸다.
“원장님, 원장님을 뵈니까 ‘노랫가락’ 한 마당이 떠오르는군요. 노인 학생들과 그 옛날 줄기차게 부르던 겁니다. 원장님의 삶을 예찬하고 싶군요. 한 번 불러볼까요?”
다행히 그분은 반겼다. 손뼉으로. 이렇게 해서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나는 서울에서도 큰 병원인 S 병원의 7병동 복도 끝 발코니에서, 두 번째 혼신의 힘을 실어 목소리를 드높인 셈이다. 무량수각(無量樹閣) 집을 짓고 만수무강(萬壽無疆) 현판 달아/ *삼신산(三神山) 불로초(不老草)를 여기저기다 심어 놓고/ 북당(北堂)의 학발양친(鶴髮兩親)을 모셔다가 연년익수(年年益壽)……
가사가 워낙 좋아서 그랬으리라. 그분도 수술한 최고령 노인답지 않게 크게 박수를 보냈다. 다음 날 만나서 남은 전설의 장수 노인 둘의 삶을 들려 드리기로 했다. 나는 혼자서 웃어가며 이야기를 재구성하느라 애를 썼다.
그러나 당일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분은 오후에 퇴원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한데 어쩐지 찝찝하다. 안*화 학생의 백열여섯 살을 여전히 미스터리로 여기고 떠날 텐데 싶어서였다.
무심결에 며칠 전에 딸애가 마련해 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얼핏 뭔가 두드려 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 것이다. 나는 검색창에다 ‘부산 최고의 고령자 안*화’라고 열한 자를 띄웠다. 근데 이윽고 뜻밖에 내 사진과 함께 오래 전에 제자가 발행하는 <밀양신문>에 그분을 소재로 한 내 수필 전문이 실려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바로 문*혁 원장에게 달려가려다가 잠시 멈칫거렸다. 이건 내 이야기지 객관적인 증거(?)가 아니지 않는가?
나는 다시 ‘부산 최고령자 투표권 행사’ 비슷한 글자를 두드려 넣었다. 한참 그렇게 훑어나가는데, 아, 2004년 4월 15일자 <부산 연합뉴스>에 ‘116세 최고령자 투표하다’라는 기사가 뜨는 것이었다. 야호 비명을 지르며 그걸 들고 문*혁 원장의 병실을 찾아가, 그분에게 내밀었다.
“원장님, 제가 거짓말한 게 아니라는 게 밝혀졌으니 홀가분합니다.”
나더러 집념이 대단하다는 인사를 끝으로 문*혁 원장은 떠났다. 일주일 후 나도 짐을 꾸려 병원 문을 나섰고. 그리고 1년 반 넘은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런 대로 건강은 유지하면서 지난 세월을 되돌아본다. 특히 전설의 장수 노인들을 생각하면 추억이 따로 없다.
참,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찾아야 할 곳이 있다. 바로 엄마 아버지가 누워 계신 내 안태 고향 밀양의 성당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밀양 성당 천상낙원에 들렀다가, 성당 부설 노인대학에서 한 시간 수업을 하는 것이다.
반세기 동안이나 안태 고향인 단장면 국전리 산기슭에 위태위태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두 분의 유해를 성당 봉안당에 모신 지 일고여덟 해가 되었다. 부산에 살면서 틈만 나면 혈육과 함께 두 분을 뵈러 올라오곤 했다. 나는 가끔 금요일 노인 대학에서 수업을 했었고. 천상낙원에서 교육관까지는 정말 손닿을 거리다. 해서 내가 수업하는 소릴 두 분은 낱낱이 들으신다. 두 분께 일흔 살이 되어 버린 늙은(?) 아들의 재롱을 보여 드리고 싶어, 세상 우스갯소리까지 가리지 않고 쏟아 놓는다. 민요도 대중가요도 가리지 않고 부른다.
지금의 타관살이가 서럽다. 아무리 마음먹어도 1년에 두 번 이상은 두 분을 찾아뵙기가 힘드니까.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해도 왕복 열 시간 이상 걸린다.
그보다 내 모습을 보면 두 분의 가슴이 미어지시기 때문에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롭다. 거기 무슨 저승과 이승의 구분이 있을까? 그렇게 부지런히 두 분을 찾아뵈었었던, 착한 내 혈육이 나보다 더 이승을 먼저 떠난 것이다. 천상낙원 바로 밑에 있는 화장장에서 녀석이 서른 살을 일기로 한 줌 재와 연기로 변해 하늘로 갔다. 봉안당에서 두 분이 내려 보셨지 않은가? 게다가 거슬러 올라가면 당신 두 분이 고향에서 유택을 옮기면서 한 번 거쳐 가셨던, 그 불화로에 담긴 채였다. 나처럼 모진 인연으로 점철된 사람도 드물리라, 탄식이 절로 나온다.
그래도, 아니 그래서 이번에 또 가야 한다.
엄마 아버지가 사무치게 그립다. 눈물이 온통 얼굴을 적신다. 망발이랄 할지 모르지만,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속담을 떠올린다. 학생들은 모두가 엄마 아버지, 그리고 나와 있는 인연 있는 고향 사람들이다. 만나는 게 예의다. 물론 문*혁 원장에게 못다 했던 ‘장수 노인’. 고*엽 ‧ 임*아 두 학생의 경우 그 중 하나를 학생들에게 구연(口演)해야지. 배꼽을 잡게 하는 재미와, 건강에 도움을 주는 실익(實益). 이 두 가지가 노인 학교 수업의 필요충분조건이니까.
그리고 다음 번 내년 봄 수업.
우선 백 세 즉 일세기를 살다, 열반한 고*엽 학생. 키가 훨씬 컸다. 젊었을 때 쌀장사를 하면서 웬만한 장정들도 힘들어하는 쌀가마니를 번쩍 들어 올렸던 여장부였다. 큰 수탉을 을 한 마리 잡으면 혼자서 국물까지 비워야 직성이 풀리던 분이었다. 한데 결혼을 해도 배태(胚胎)를 못했다. 남편을 여의고 양자를 들였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해 인물이 반듯한 규수 하나가 집을 찾아온 것이다. 그러고서 하는 말
“시골에서 사정이 있어 집을 나왔어예. 먹이고 재워주시면 이 댁 가족이 되고 싶어예.”
첫눈에 야무져 보이기도 하였다. 워낙 표정도 진지해서, 그만 속는 셈치고 가족으로 들여 놓았다. 아들과 잠자리를 같이 마련해 주었고. 그러고서 수십 년 화목한 가정을 이루면서 지냈다. 91년도에 내가 노인 학생 87명을 인솔하여 대북으로 여행을 갔을 때 아흔 한 살이었지만, 인솔자인 내 이야기 따라 가장 재빠르게 움직이던 분. 밀양 성당 노인학교에서 누가 묻는다 치자. 그분의 장수 비결이 무어냐고? 내가 대신 대답하리라.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잘 먹는 것, 그리고 대차게 살았고, 죽으면 썩어질 몸이라 생각하고 부지런히 움직였던 점 등등이겠지요.”
세 번째는 임*아 학생. 하동군 악양면에 살다가 97세를 일기로 소천(昭天)한 분이다. 세상에 생전 열한 남매를 낳아서 하나도 잃지 않고 다 키워, 모두가 내로라하는 가정을 이루게 했다. 다섯 자가 채 안 되는 단신(短身)이었다. 막내를 가졌을 때 맏며느리와 둘째 며느리가 출산을 했다니 우스꽝스러운 일이 한둘 아니었다. 그 뭐 있잖은가? 그 옛날엔 아가가 응가를 하면 ‘오요오요’하고 강아지를 부른다. 그러다가 자칫하면, 강아지가 사내아이 불알까지 싸잡아 핥아버리는 바람에 고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슬쩍 끼워 넣는다.
다시 시어머니 임*아. 할머니의 강아지 호출이 끝나면 가끔은 맏며느리와 둘째 며느리가 물은 열고 동시에 하던 말이다.
“어머이, 강생이 여기도 좀 보내 주이소. 오요오요…….”
임*아 학생은 평생 아파 보지 않았단다. 아니 딱 한 번 피부병이 났는데, 피부과에 가서 약을 지어다 딱 한 첩을 복용하고 났더니 씻은 듯이 나았다.
그분은 거의 거르지 않고 매주 노인학교에 나왔다. 시외버스를 타고서 말이다. 물론 아들들 딸 손자들이 부산에 살아서 겸사겸사 그런다 했다. 그래도 귓속말로 전하는 본인의 고백을 들으면, 오히려 눈물겹다. 그들을 만나는 것보다 노인학교에서의 시간이 좋다는 것이었다. 걱정이 있어도 절대 가슴에 품어 놓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교회에 다니며 하나님께 의탁하고. 그게 임*아 학생의 장수를 뒷받침했음은 물어보나마나.
그러던 그분도 끝내 이승에서 97년밖에 버티지 못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은 배꼽을 쥘 만큼 우습기도 하다. 구포 제일교회 부설 노인학교에서 그분의 증손부(曾孫婦))를 만났었는데, 이 소식을 전한 것이다.
“작년 요강에 앉다가 미끄러지셔서 고관절이 부러지셨는데 그길로 돌아가셨어예.”
세상에 요강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고도 하다니…….노인과 요강, 아직도 남아 있는 이 시대 마지막 함수로구나, 하하.
그 뒤의 밑천? 별 걱정은 않는다. 다섯 전설 속의 장수 노인 외에도 나는 25년 동안에 주워들은 장수(長壽) 일화들을 적지 않게 갖고 있으니까. 비중이 다섯 분에는 못 미치지만 말이다.
중언부언하지만 이승과의 내 마침맞은 종언(終焉)이 문제다. 용인 S 병원 의사가 귀띔한 하한선이 항상 머리를 지배한다. 어쩌면 그보다 일찍 혈육에게 가서 녀석을 보살펴야 하는 게 죄 많은 아비로서의 도리 같기도 하고. 물론 예순 살을 겨우 넘겨 각각 입적하신 엄마 아버지도 뵈어야 하고. 그 절묘한 시점이 10년이다. 8년 반쯤 남은 셈, 주님의 개입을 간절히 기도하지 않고 어찌 배기랴.
1차 교정 2014. 10.24 17:15
330행
* 팔람구암자-팔만 구암자(八萬九庵子)라고 흔히 그러는데 천만에 금강산에 암자가 팔만 개가 넘는다? 아니다. 팔람(八藍) 구암자가 맞다. 이때의 남(두음법칙 참조)은 큰절의 뜻이다. 유점사 등등.
* 노구메-산천의 신령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놋쇠나 구리로 만든 작은 솥에 지은 메밥
* 삼신산(三神山)-중국 전설에 동쪽 바다 복판에 있어 신선이 산다는 산, 봉래산 ‧ 영주산 ‧ 방장산. 진시황이 여기에다 (童男童女) 수천 명을 보내어 불로초를 구하려 했다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