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잠에 드는 누에 한 마리
공순해
인류 가운데 첫잠을 잔 존재는 누굴까.
살(Sal) 부인의 배가 심하게 불러오자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또 넷이 나오는 거 아니야? 그럼 살의 축구팀을 만들어도 되겠네. 웃자고 하는 말이니 서로 킥킥거렸다. 우리 가게와 같은 블록에 있는 제과점 A & S의 주인 살은 딸만 넷이다. 그것도 네 쌍둥이. 그러니 이웃들이 또 넷이 나오는 게 아니냐는 농담을 할 수밖에. 아이가 넷인데 왜 또, 내 궁금함은 그것이었다. 한데 알고 보니 이탤리언들도 한국인들과 심정적으로 비슷해서 아무리 딸이 많아도 아들에 대한 소망을 거두지 않는다고 했다. 살보다도 살 아버지가 주장한다고.
네 쌍둥이 맏이 마리아는 한국식으로 말하면 살림 밑천이었다. 그 애들을 초등학교 시절부터 봐 왔는데, 하교 후 마리아는 앞치마 입고 가게에서 일했다. 재료가 떨어지면 우리 가게에 오곤 하던 그 애는 어른스럽기 짝이 없었다. 내가 오후에 혼자 일하고 있으면, 오늘도 혼자 일해? 힘들지 않아? 묻곤 했다. 초등학생에게 받는 위로(?)가 좀 우스워, 넌 안 힘들어? 학교도 힘든데 집에 가서 쉬지, 라고 말하면 제가 언니이기에 힘든 부모님을 도와야 한다고 정색하고 말했다. 저희끼리는 2, 3초 차이가 차이냐, 티격거리면서도 정작 서열을 가릴 때는 무섭게 기강을 잡았다. 소위 K-장녀 같다고나 할까, 전형적인 이탤리언 장녀였다.
동네 초미의 관심사였던 살 부인의 해산은 해피 앤딩으로 마감됐다. 살을 꼭 닮은 살이 태어났다. 미간 찌푸리는 것까지 아버지를 닮은 어린 살은 아버지의 자부심이 됐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살은 자기가 운영하는 축구 클럽에 유니폼까지 입힌 아들을 꼭 데리고 다녔다. 가게 이름조차도 ‘(아버지 이름) 앤 썬 XX 스토어’라고 붙이는 이탤리언다웠다. 대를 잇는 게 남자들의 평생 과업일까.
살이 홈런을 첬다면 이런 경우도 있다. 남편이 뉴욕으로 오기 전, 어느 늦은 밤 앞집 이웃이 건너왔다. 술에 취해 있었다. 부인이 해산 임박한 때였기에 뭔가 불안했다. 형! 나는 왜 이리 되는 노릇이 없어. 뿜어내는 울음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딸이야! 그것도 둘이나.
육 남매의 외동아들이니 그는 여자 형제만 다섯이다. 그리고 딸 둘을 두었다. 한데 졸지 간에 쌍둥이 딸이 또 태어났다니. 우리 집엔 여자만 여덟이고 나만 남자야, 평소 하던 농담 속에 아들을 기다리는 마음이 선연했었는데. 남편도 외동이어서 둘은 의기가 통했다. 어린 시절부터 형제인 양 자랐다. 속을 풀 곳이 없어 우리 집에 왔겠지. 우리의 위로를 듣는 둥 마는 둥 그는 실컷 울다 갔다.
그런 그는 정작 딸들을 아낌없이 위하며 길렀다. 그 부부의 정성에 우리도 가끔 놀라곤 했다. 아이들이 장성한 뒤, 큰애는 시를 썼다. 시간이 훨씬 지나고 문단을 대표하는 시인 중 하나가 됐다. 한데 그 애의 시에는 늘 폭탄 같은 게 있었다. 끔찍이 사랑하고 키운 아이인데 도대체 그 상처는 어디에서 온 걸까.
그 애는 자신이 장자가 아니라 장녀로 태어났기 때문에 상처는 근원적이라고 시에서 고백했다. 문중에서 삼대독자인 아버지에게 대를 이을 양자를 들이라 종용했다고. 지금 세월이 어느 세월인데 양자라니. 아마 위로 오빠가 없는 대한민국 장녀들은 모두 이 비슷한 근원적 상처를 갖지 않을까. 존재를 부정당했다는 상처. 대를 잇는다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손자 손녀가 태어난 뒤, 며느리가 세 번째 임신을 했다. 요즘 세상에 둘이면 됐지, 우리 부부는 넌지시 아들 속내를 떠 보았다. 아들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제가 혼자다 보니 형제들끼리 어떻게 어울리며 자라는 건지 궁금했어요. 그 모습을 한번 엿보고 싶어요. 대를 잇는 것만이 다가 아니었구나.
아들도 외동이다. 아들에게 매우 미안했다. 어울려 살아감, 그 이야기가 필요했던 걸 몰랐구나. 내가 삶을 몰라도 너무 몰랐구나. 아들에게 삶을 배웠달까. 가끔 넌 장남도 있고, 차남도 있어서 좋겠구나, 농담하면 아들은 씩 웃고 만다.
오늘도 나는 한 마리 누에가 되어 잠에 든다. 내일의 소생을 위한 가사(假死)에 든다. 이제 내가 할 일은 그 대신 그 이야기를 이어주는 것이 돼야 하지 않을지.
잠의 어원을 찾아보면 누에가 잠(蠶)에 들다에서 잠들다란 어휘가 왔다고 한다. 누에가 잠에 들어야 허물을 벗고 성장을 이루듯 인간도 잠에 들어야 다음날의 활동 에너지를 만들어내기에 누에의 잠과 인간의 잠이 같은 의미라는 그럴듯한 얘기. 인간이 누에고치처럼 생긴 옹관 속에 들어가 고이 잠든다는(永眠) 비유도 그럴듯 여겨진다. 하여 누에가 넉 잠을 잔다고 하는데 그게 바로 이야기의 기승전결(起承轉結) 단계가 아닐지 생각을 비약시켜 본다.
그래서 가끔 궁금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인류의 첫잠을 잔 존재는 아벨일까, 아담일까. 피조(彼造) 직후 첫날의 산뜻한 잠을 잔 건 아담이겠지. 밤마다 가장 큰 배터리인 지구, 인간의 본질인 땅에 접속하여 충전 받았겠지. 하지만 첫 영면에 든 존재는 아마 아벨이겠지. 그는 형 덕에 일찍 죽었고 아담은 930살에 죽었다. 이렇게 인간의 이야기는 출발부터 뒤죽박죽이었고 배터리는 접속 불량이 됐다. 그러니 고치 뽑듯 이야기가 이어지며 히스토리가 됐겠지. 하지만 접속 불량을 수리하기 위해선 허스토리도 필요하다.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어야 땅이, 자연이 온전히 회복될 터.
온 곳으로 돌아가는 인생, 뿌린 대로 거두고 가는 인생. 이 간단한 과정을 그리도 복잡하고 고단하게 살아 가는구나. 이 미진한 인생은 오늘도 한 마리 누에가 되어 깜빡깜빡 잠(蠶)에 들며, 심청이가 이야기로 대를 잇듯 고치에서 실 뽑듯 인간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구나.
어화 넘차, 너화넘.
첫댓글 재미있어요. 장녀로서 공감도 되고. 저 때만 해도. 그런데 세상은 바뀌었어요.
7단락 '아마 위로 오빠가 없는 대한민국 장녀들은 모두 이 비슷한 근원적 상처를 갖지 않을까. '
~갖지 않았을까. 과거형으로 해야 할듯합니다. ㅎㅎㅎ
아들보다 딸을 원하는 세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