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이는 우리 민족사의 위대한 영웅 ‘광개토태왕’의 시호다.
“광활한 영토를 개척했고(廣開土境) 백성을 편안케 보살피다(平安) ‘국강상’에 묻히신(國岡上) 하늘같이 큰 왕(好太王)”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흔히 시호를 줄여 ‘광개토대왕’이라고 부르지만 “광개토태왕‘이 맞는 말이다. 태왕은 중국의 황제, 일본의 천황에 대응하는 자주적 호칭이라 할 수 있다.
광개토태왕은 재위기간에는 ‘영락태왕(永樂太王)’이라고 불렸다.
서기 391년, 18세의 어린 나이에 왕좌에 오른 고구려 19대 왕인 광개토태왕은 재위 21년동안 고구려의 역사를, 한민족의 역사를 크게 뒤바꿔 놓았다.
광개토태왕은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 때부터 줄기차게 추진해온 고구려의 ‘대외팽창정책’을 계승한 왕으로 고구려 역사상 가장 눈부신 업적을 세웠다.
광개토태왕이 왕좌에 오를 무렵 고구려의 사정은 극도로 악화돼 있었다. 당시 고구려의 상황을 살펴보면 후연이 서쪽에서 압박해 들어오고 있었고, 남으로는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을 막고 있었다.
북으로는 거란과 동부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고구려는 사방이 적대국들에 둘러 싸여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
즉위와 때를 맞춰 본격적인 영토확장에 나선 광개토태왕은 가장 먼저 백제와 동맹관계에 있던 후연을 고구려 편으로 돌려놓는 외교적 수완을 발휘한다.
또한 후연과 동맹관계를 맺고 신라를 속국으로 만들어 백제를 압박하게 된다. 이후 그는 본격적인 백제 정벌에 나서 잘 훈련된 기.보병과 수군을 이용, 한강 및 금강 상륙작전으로 한강 이남으로의 진출에 성공한다.
광개토태왕은 백제를 정벌하는 동안에도 친히 군사를 이끌고 북쪽의 거란족을 정벌하는 용맹성을 보였다. 그는 거란족 정벌을 통해 후연을 견제하는 한편 서쪽으로의 영토확장을 꾀했다. 또 동쪽에 있던 나라인 숙신을 정벌해 동부여를 압박했다.
대륙진출의 초석이 된 거란족 정벌 이후 광개토태왕은 요서지방 및 유주 지역의 태수들을 복속시켜 후연을 압박하도록 했고 후연에 대한 본격적 공격에 나서 결국 괴멸시키게 된다. 후연은 북연으로 바뀌고 고구려의 위성국이 된다.
광개토태왕은 또 신라에 대한 공격을 일삼던 왜를 정벌한 다음 임나연정(현재의 대마도에 위치)을 만들어 신라, 백제, 왜를 통제케 했다. 그는 또한 동부여를 정벌해 한반도, 만주, 중국의 요동·요서지역, 일본열도까지 관할하는 동북아시아의 대제국을 건설했다.
이후 광개토태왕은 중국대륙을 모두 정복하기 위해 당시 북중국의 강자 북위에 대한 정벌을 준비하던 중 갑자기 3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광개토태왕이 영토를 크게 넓히고 동북아시아를 지배하는 대제국 건설이 가능했던 이유는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광개토태왕은 뛰어난 전략·전술가였다. 광개토태왕은 백제정벌을 위해서 수군을 양성했고 수륙양면작전으로 백제 지역을 귀속시킬 수 있었다. 또한 후연과 북위에 대한 공격에 앞서 주변지역을 먼저 정벌했다. 이를 통해 그는 사방에서 동시에 공격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던 것. 이는 광개토태왕이 모든 상황을 멀리 내다 볼 수 있는 혜안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둘째, 광개토태왕은 탁월한 외교능력을 갖고 있었다. 백제와 동맹관계에 있던 후연에 대해 적극적인 외교공세를 펴 후연이 고구려와 동맹관계를 맺게 되는 상황반전을 이끌어 낸 것.
또 후연의 지배 하에 있던 요서지방과 유주지역의 태수들을 외교수단을 동원, 복속시켜 후연을 공격하는데 이용하기도 했다.
셋째, 광개토태왕은 대외 팽창 정책 못지않게 내치에서도 한 치의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선대왕인 소수림왕과 고국양왕 등이 갖춰 놓은 법과 교육, 문화 제도를 이어받아 백성들이 편안하게 사는 나라를 만들었다.
“그의 은혜와 혜택이 하늘에 가득 찼고, 위엄과 무공은 온 세상을 덮었으며 못된 자들을 없애 치우고 생업을 편안케 하니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넉넉하고 오곡이 풍요롭게 무르익었다.”는 광개토태왕비 기록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넷째, 광개토태왕은 자주적 인물이었다. 그는 4~5세기 당시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수많은 나라들이 경쟁을 벌이고 있던 시점에서 민족적 자부심과 자주성을 바탕으로 동북아 질서를 재편했다.
광개토태왕이 즉위 후 ‘영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와 ‘태왕’이라는 호를 반포한 것은 동아시아의 패자로서 독자적인 천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국가를 운영했음을 말해준다.
국내성에서 동쪽으로 4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태왕향(太王鄕) 구화리(九華里) 대비가(大碑街)라는 곳에 광개토태왕비(이하 태왕비)가 있다.
태왕비는 동북아시아의 위대한 제국, 고구려의 군주 광개토태왕의 정신과 업적을 역사에 길이 남기기 위해 그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비석이다.
높이가 6.39미터에 이르고 무게가 37톤가량으로 추정돼 규모면에서 세계에서 으뜸이다. 높이만 3층 높이 건물과 맞먹는다고 한다. 방추형(方錐形)의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비석의 배면 너비는 1.46미터,1.35미터,2미터,1.48미터로 각 면이 다른 크기, 다른 모양을 갖고 있다. 이는 채석장에서 캐어 다듬은 석재를 사용한 것이 아니고 자연석재를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인데, 역사가들은 자연 돌을 사용한 이유에 대해 태왕비에 고구려의 거석숭배문화가 반영됐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또 그 모양이 남성의 생식기 모양이라 하여 생식기 숭배 사상과 연결 짓는 사람들도 있다. 광개토대왕릉과 장수왕릉에서도 이런 거대 자연석들이 발견돼 고구려의 거석숭배문화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태왕비에 사용된 석재는 회색 응회암이다. 이 응회암은 화산구 부근에서만 발견되는 석재로 태왕비가 있는 지안 인근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현지 학자들은 백두산 천지 인근에서 옮겨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태왕비는 대석과 비신의 구조로 돼 있다. 땅에 비석을 고정시켜 주는 대석은 가로 3.35미터, 세로 2.7미터의 직사각형 모양이지만 3개면이 깨어져 그 형체만 겨우 유지하고 있다. 비문을 새겨 넣은 비석의 몸통 부분을 비신이라 칭한다.
태왕비 비신의 4개면 모두에는 1천775자의 비문이 음각돼 있다. 고구려 특유의 호방한 필체로 쓴 비문의 내용은 시조 주몽의 건국과 광개토태왕의 즉위에서 사망까지, 광개토태왕이 주변 국가를 정벌하고 영토를 확장한 내용, 광개토대왕릉을 지키는 묘지기의 배정과 준칙 등 3개 부분으로 돼 있다.
태왕비는 '광활한 영토를 개척하고(廣開土境) 백성을 편안케 보살핀(平安) 하늘과 같이 큰 왕(好太王)‘의 업적을 기록한 기념비인 것이다. 또 현재의 우리에게는 우리민족의 고대사와 고구려사를 정립시켜 준다는 점에서 역사학적 가치가 크다.
태왕비는 특히 ’삼국사기‘ 등 중국 위주로 기록된 그동안의 다른 사서들과 비교해 고구려가 동아시아에서 갖고 있던 위상을 재 정립시켜 줘 우리 중심의 역사를 가질 수 있도록 해주는 귀중한 유산이다.
태왕비는 중국 당국이 2003년 비석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비석 주위에 설치한 어두운 투명 플라스틱 보호막 때문에 현재 제 모습을 확인하기 어렵다.
플라스틱 보호막 설치 이전까지만 해도 가까이서 비문을 읽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인들의 혼이 담긴 글씨를 가까이서 보고 느낄 수 없음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전문가들은 플라스틱 보호막이 바람은 막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주변 기온에 비해 보호막 내부 온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에 비석에 악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또 혹자는 중국이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비문에 대한 접근을 막기 위한 술책으로 보호막을 설치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어두운 플라스틱 보호막 너머로 보이는 태왕비는 한눈에도 많이 훼손돼 있음이 역력했다. 군데군데 금이 가고 터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비문의 여러 부분도 뭉개져 글씨를 알아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1200년의 세월 속에서 훼손 된 부분도 있겠지만 재발견된 시점에서 잘못 관리한 것이 태왕비 훼손의 결정적인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청나라가 200여년간 요동지역을 사람의 출입을 금하는 ·봉금지역‘으로 설정해 태왕비의 존재가 잊혀졌다. 흙 속에 묻혀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태왕비가 다시 발견된 것은 1877년경.
중국 당국은 태왕비의 흙과 청태(이끼)를 제거를 위해 비석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한다.
이 와중에 청태는 사라졌지만 비석에 금이 가고 터지게 되었으며 많은 비문이 사라지게 됐다는 것.
게다가 일제가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기 위해 석회탁본 등을 하며 비석의 일부를 변조·훼손한 것도 태왕비 훼손의 또 다른 원인이다.
대륙을 굽어보며 고고하게 1600여년을 견뎌 온 고구려의 역사를 전해주는 태왕비가 인간의 욕심에 금가고, 깨어지고, 훼손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혼이 무너지고 있었다.
첫댓글 광개토대왕이라고 알고 있었던 고구려 19대 위대한 왕, 광개토태왕이시군요.. 39세로 아깝게 세상을 떠난 뛰어난 전술전략가이자, 능한 외교술을 지니고 백성들을 편안히 다스리던 큰 인물이 우리나라 역사상 길이 빛나야 할텐데 중국당국의 플라스틱 보호막에 가려 시들어 가는 것이 안타깝네요..잘 읽고 갑니다..^*^
이제 훼손되고 무너진 고구려의 혼을 되살렸으면 좋겠네요. 광개토태왕비의 자료를 보면서 많이 안타깝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