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은 일상생활와인과 투자등급와인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와인경매사에게는 투자등급와인 밖에 없지 않냐고 간혹 와인애호가들이 질문을 던진다. 경매사가 외치는 와인이야 투자등급와인이 주류이겠지만, 경매사 역시 식사 때마다 와인을 마시기 때문에 매번 값비싼 투자등급와인으로 식탁을 채울 수 없다. 그래서 일상생활와인을 즐겨 마신다.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 자리하는 일상생활와인은 비싸기 보다는 소박한 밥상에 어울리도록 저렴해야 제격인 그런 와인이 주종을 이룬다.
서양인 역시 저렴한 와인을 즐긴다. 매일 마시는 필수품의 기능을 하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들도 우리처럼 좋은 날 뜻 깊은 날에 시내 식당 혹은 레스토랑에 가서 분위기 잡고 멋지게 식사하고 싶어한다. 근사한 옷을 고르고 또 골라 꽃단장을 하고 길을 나선다.
미스터 비와이오비와 그의 부인은 결혼10주년 기념을 자축하기 위해 나설 채비를 서둘렀다. 부인이 시동을 켜 부르릉거리며 차가 막 출발하려는 순간, 비와이오비씨의 한마디, “잠깐만”. 싱크대 옆 찬장에 둔 와인잔 세트와 코르크 스크류 그리고 레드 와인 한 병을 깜빡한 것이다. 레스토랑에 식사를 하러 가는데 이런 것들을 들고 간다니 참 이상하다. 거기에 가면 다 있는 것들인데.
와인이 없어서는 안되는 곳 레스토랑. 그 레스토랑은 원기를 회복시킨다는 의미의 프랑스어 restaurer에서 유래되었다. 레스토랑은 건물의 외양, 인테리어, 서비스, 요리, 분위기 그리고 와인리스트로 구성된다. 미슐랭 가이드나 <와인스펙테이터>의 식당 평가 때에나 마찬가지로 와인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좋은 레스토랑은 이런 구성요소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데, 예를 들어 분위기로 본다면 손님들의 도란도란 속삭이는 소리 (절대 떠들고 소리치는 것이 아님), 포크와 나이프가 식기에 부딪혀 발생하는 맑고 투명한 공명된 소리, 눈처럼 흰 테이블보, 지글거리는 구이소리 등이 그것이다. 와인리스트를 볼 것 같으면, 거의 성경책 두께의 큰 메뉴를 건네준다. 처음부터 읽어보면 도무지 어떤 와인을 시켜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나라마다 특색이 있지만, 프랑스, 일본의 고급식당에는 샴페인, 스파클링 와인 다음으로 부르고뉴가 소개되는 것이 보통이며, 미국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 식당에서는 캘리포니아 와인을 맨 앞으로 도열시키기도 한다.
와인을 자주 마실수록 와인애호가가 빨리 되는 것 같다. 맛있는 와인을 많이 마시고 또 자주 마시게 되면 아무래도 그 매력을 일찍 깨닫기 마련이다. 와인애호가는 와인 관련 서적을 탐독하기도 하고, 와인관련 행사에 참석하기도 하며, 와인동호회에 가입 혹은 동호회를 결성하기도 한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애호가는 와인 가격에 대하여 그 속을 알게 된다. 와인샵에서 파는 값과 레스토랑에서 파는 값에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식당에서 주문하는 가운데 마음 속으로 ‘이거 6만원이면 사는데, 여기서는 10만원이네! 와! 비싸다.’ 이런 놀람은 식당이 고급스러울수록 그 정도가 심해진다. 와인붐이 일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애호가들은 웬만한 와인의 수입상과 가격을 손바닥 들여다 보는 것처럼 휜히 잘 알고 있다. 이러니 이들이 어떤 식당에 가서 와인을 주문할 경우에 가격의 차에서 오는 부담감을 얼마나 크게 느낄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서비스가 좋지 않은 경우에는 정말 다시 가고 싶지 않은 식당이 된다. 다른 나라의 와인애호가 역시 우리랑 비슷한 처지에 있다. 와인가게와 레스토랑의 가격차이로 인해 와인애호가들은 웬만한 일 아니면 레스토랑에 잘 가지 않게 된다. 따라서 레스토랑은 장사가 잘 안되겠지. 그러니 와인은 제쳐 두고 식사메뉴만 주문하는 손님을 쉽사리 볼 수 있다. 식당의 외양과 인테리어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붓고 매상 오르기만 기다리는 식당주인 입장에서 보면 참 딱한 노릇이다. 사람들에게 포만감을 주는 대가로 영위하는 식당이 아주 배가 고파서 외치는 마지막 한마디, BYOB (Bring Your Own Bottle). BYOB는 자신의 와인을 병째로 가져와서 마시게 하는 영미계의 마케팅 수단이다.
비와이오비씨는 오늘 월요일이 다행히 결혼기념일과 겹쳐서 여간 기쁜 것이 아니다. 평소에는 와인을 들고 가면, 30달러 정도를 서비스비용으로 지불해야 했다. 콜키지(Corkage)라는 것인데, 와인마개를 개봉해주고, 와인 잔을 각 자에게 주는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가이다. 하지만 오늘은 월요일이라서 그 30달러가 면제된다. 어렵게 구한 보게(Vogue)의 부르고뉴산 레드 와인 뮈지니(Musigny) 2001을 확인하고 뿌듯해 하는 비와이오비씨. 그는 그 식당에 피노 느와의 매력을 제대로 표현해 낼만한 잔이 없음을 알고 오늘을 위해 잔도 마련했다. 그러니 대형 도시락 가방 같기도 한 특수포장 속에는 그랑 크뤼 한 병, 튤립모양의 와인잔 두개, 그리고 혹시 몰라 코르크 스크류까지 챙겼다. 그 포장은 최근에 시판되고 있는 소위 BYOB Kit라는 것인데, 많은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발명품이다. BYOB가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고 있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나라에도 역시 BYOB를 여러 식당에서 시행하고 있다. 특급호텔 중에서는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그랑카페가 목요일과 토요일에 콜키지를 면제하며, 기타 요일에는 병당 이만원부터 콜키지를 받는데 와인가격에 따라 연동되는 시스템이다. 롯데호텔은 월요일과 토요일에 콜키지 면제를 실시하고 있다. 단 와인잔은 일인당 최고 세개만 제공한다. 삼청동 더 레스토랑과 청담동 타니에서는 십만원 이하의 와인은 삼만원, 십만원 이상의 와인은 오만원을 받는다. 압구정동 라미띠에는 일인당 오천원의 봉사료만 징수한다. 와인 잔을 교체하면 추가로 내야 한다. BYOB는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등에서는 일반적이지만, 프랑스에서는 거의 시행하지 않는다. 맨해턴의 프렌치 레스토랑 르 몽트라세는 매주 월요일에 콜키지를 면제하고 있다.
BYOB는 경제적인 이득 외에도 여러가지 장점이 있다. 우선 메뉴를 자세히 훑어보며 무엇을 먹을까 궁리하는 시간에 가져온 와인을 미리 따서 홀짝거릴 수 있다. 주문후 식사가 오기까지 마냥 기다려야 했던 이전보다는 훨씬 분위기가 좋아진 것이다. 또한 식당들간의 경쟁을 유발한다는 장점이 있다. 와인이 잘 구비된 고급식당은 와인과 요리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반면에 작은 식당은 보통 오너주방장의 솜씨에 기대어 요리는 제법 하는데 와인메뉴가 영 신통치 않다. 이런 경우에 BYOB는 작은 식당의 단점인 와인리스트를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 작은 식당과 고급 식당의 요리 경쟁이 선순환을 일으켜 미식가를 즐겁게 할 수 있다. 작은 식당은 음식만으로 고급식당에 도전장을 내던지는 효과를 보는 것이다. 주량이 약한 사람은 무리해서 와인을 다 마실 필요가 없다. 마개를 막고 집으로 가져가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와인을 좋아하지 않는 일행은 다른 음료를 주문하면 된다. 한편 와인 고르기에 서툰 사람도 평소에 즐기는 와인을 가져와서 마실 수 있어 좋다. BYOB는 또한 무명 와인회사의 홍보에도 일조한다. 즉 손님이 가져온 와인을 맛본 후 그 맛에 반한 소믈리에가 와인회사에게 납품요청을 하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 식당에서는 지역 와인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콜키지를 적용하는 것이 그 한 예이다.
혹자는 왜 와인만 되느냐? 맥주나 위스키는 가져오면 안되는냐고 질문하기도 하는데 주류 중에서 음식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 와인이라는 사실에 모두 공감하기 때문에 와인이 BYOB의 대상이 된다. 식탁 위에서 가장 빛이 나는 와인에 한해서 식당 주인의 마음이 열린 것이 바로 BYOB이다. 하지만 모든 테이블 와인이 대상이 되지 않는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집에서 본인이 직접 만든 와인 이른바 홈메이드와인 혹은 그 지방에서 생산된 혹은 판매된 와인에 한하는 경우가 바로 그것인데, 이런 때에는 특별함의 의미를 위해 BYOB가 존재한다. 경제적 이유가 아니고 말이다.
BYOB의 대상은 일반적으로 테이블 와인에 한한다. 즉 스파클링 와인이나 주정강화와인 등은 대상이 되지 않는다. 특히 스파클링 와인은 이동 중에 부글부글 끓어 레스토랑 안에서 터질 수도 있어 조심해야 한다. BYOB는 대도시 품격높은 문화인데 이는 시민의 혜택이지 특혜가 아니므로 지켜야 할 몇 가지 에티켓이 있다. 식당 주인 입장에서 보면 전체 매출이 줄어들기 때문에 흔쾌히 수용하지 않으려 하는데. 우선 아무리 콜키지가 없다고 해도 서빙해 주는 소믈리에에게 한 잔을 먼저 건네주어 주방장, 스텝 들이 맛보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맛의 경험이 경쟁력이 되는 소믈리에에게 가장 큰 선물은 바로 맛보게 해 주는 일이므로 식당 이용자는 이 점을 잘 살릴 필요가 있다. 자신에게 경쟁력이 되는 것을 선물하는 고객을 소믈리에는 잊지 않는다. 캐주얼한 식당에서는 가져온 병 전부를 다 올려놓고 마셔도 되겠지만, 고급식당에서는 한병만 식탁위에 올리고 나머지는 식탁 밑에 놓아 둔다.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인테리어에 대하여 과도한 양의 와인이 주는 아우라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병의 기준은 750ml임을 명심하자.
와인 음용(drinking)과 와인 시음(tasting)은 엄연히 다르다. 음용은 즐거움이지만, 시음은 노동이다. 요사이 우리나라 와인 관심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음용의 즐거움은 놔 둔채, 노동인 시음의 세계로 달려가고 있음을 본다. 와인이 우리 문화가 아니라서 어느 정도의 시음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하는 바이나, 시음을 강조하다 보니 와인이 가진 본질을 망각하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레스토랑 보다는 와인바가 개업경쟁을 벌이고 있고, 스치고 지나가는 시골길의 풀섶처럼 시음한 와인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아 그 와인, 마셔봤어. 그저 그래 등등의 표현만을 남겨 두고 그냥 지나간다. 이런 ‘마셔봤어’주의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매트릭스 구조로 얽힌 와인의 세계는 수평적으로는 전세계 약 사십 여 개국으로 펼쳐져 날줄을 만들고, 수직적으로는 매년 새로운 빈티지가 양산되어 씨줄을 형성하니 그 조합의 경우의 수는 막대하다. 빈티지의 상이함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어떻게 한번 시음해보고 다 알았다고 자평할 수 있는가? 연속해 시음할 경우 삼키지 않더라고 혀가 굳어 미뢰 세표가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하기 때문에 시음은 이런 역경을 극복해 내려는 훈련이 수반되어야 비로서 제대로 맛을 분간할 수 있다. 그래서 시음은 노동이다. 최고의 미각을 자랑하는 미국 와인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자신만의 비공개 노하우를 체득했는데 그는 매일 무려 80여가지를 시음할 수 있단다.
난 음용을 즐기는 와인애호가 늘어나기를 기대한다. 시음의 허세를 부리기 보다는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과 함께 나누는 와인애호가들이 많아지기를 원한다. 회식자리에서의 소수 즉 술이 약한 자 혹은 여성들이 소외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 자리를 즐길 수 있게 되는 날을 고대한다. 와인은 음식을 돋보이게 하는 빛나는 조연이다. 어떤 이는 와인은 마시는 야채 혹은 음식이라며 그 쓰임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1977년 샤토 라피트 로쉴드의 대를 잇게 된 에릭 후작은 취임을 기념하기 위해 식사와 함께 하는 시음회를 준비하였다. 최고의 음식과 함께 최고의 와인을 맛보게 함으로써 애호가로 하여금 라피트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체험하도록한 사려 깊은 행사라고 생각한다.
소믈리에를 두고 보석전문가로 오해하는 이도 더러 있다. 목에 찬 은그릇(타스트뱅 tastevin 은으로 된 작은 용기인데, 어두운 지하에서 와인의 맛을 보기 위해 휴대하는 도구)을 보고 품은 생각이리라. 소믈리에는 현대에 들어서 그 중요성이 더해지고 있는 직종인데, 레스토랑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직종이다. 아주 옛날 궁궐에서 왕에게 술잔을 따르는 역할이 조금씩 변하여 현대에 이르러 식당에서 와인의 구매, 재고관리, 서빙 등의 일을 관장하는 역할로 변모하였다. 국내에도 소믈리에 경연대회가 있어 격년제로 시행되는데 금년에는 여성이 1위에 선발되어 세심하고 세련된 서빙 실력을 뽐내었다. 레스토랑에 가서 와인리스트를 받으면 빼곡히 적힌 글씨와 타스트뱅으로 무장한 소믈리에의 태도에 주눅이 드는 것이 보통인데 제임스 본드는 그렇지 않았다.
1971년 개봉된 영국 영화 00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편에서는 소믈리에가 재미있는 소재로 쓰인다. 타스트뱅을 차고 소믈리에로 분장한 악당이 제임스 본드에게 주문을 받으러 오면서 가져온 와인은 샤토 무통 로쉴드 1955. 부자연스런 서빙태도를 이상하게 여긴 본드는 무통 대신에 클라레를 주문한다. 가짜 소믈리에로 분장한 악당은 클라레는 죄송하게도 없다고 대답한다. 이를 수상히 여긴 본드는 뭔가를 감지하고 무통이 대표적인 클라레라고 일침을 가한 후 위기를 모면한다. 12세기 영국왕 헨리 2세는 왕비 고향인 보르도의 와인을 마시면서 그 선명하고 투명한 빛깔을 예찬하며 클라레라고 불렀는데, 영국에서는 지금도 보르도 레드와인을 가리켜 클라레라고 호칭한다.
요즘 많이 회자되는 소믈리에는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극소수의 애호가들이나 알고 있던 단어. 호텔에서 소믈리에를 겨냥한 직원은 거의 없었다. 사실 어떻게 하다보니 지금의 소믈리에가 된 것이 현실이다. 이는 서양도 예외가 아니다. 맨해턴, 몬트리올의 잘 나가는 레스토랑의 소믈리에는 처음부터 작정한 사람이 아니다. 우연한 기회에 본인의 관심이 와인에 미치든지 아니면 뛰어난 미각을 나중에 발견하고 나서야 비로서 와인의 세계로 눈을 돌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홀과 셀러를 수 십번 왔다 갔다 해야하는 소믈리에는 튼튼한 체력이 필수요건. 특히 허리힘이 좋아야 한다는데. 사실 우리나라의 셀러는 거의 다 전용 냉장고이므로 이런 요건과는 상관없다.
소믈리에의 매력은 와인이라는 렌즈를 통해 문화를 바라볼 수 있다는 데에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은다. 또한 다른 분야와는 달리 마시는 즐거움 즉 시음의 기쁨이 있다. 소믈리에의 우수성은 와인 리스트 작성에서 일차적으로 드러난다. 요리는 대체로 비슷비슷하니 와인의 차별화가 바로 레스토랑의 차별화로 직결된다. 비싸고 좋은 것으로 채우는 거야 식은 죽 먹기. 흔하지 않고 맛 좋은 와인으로 구성하는 것이 바로 소믈리에의 경쟁력이다. 요즘의 레스토랑 이용자들은 와인에 대해 웬만한 상식은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소믈리에는 해당와인의 원산지, 양조기법, 기후적 특성, 품종 등에 대해 해박하게 안내를 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청담동의 레스토랑 팔레드고몽은 매일 오후 4시 해당 전문가를 초빙하여 와인교육에 힘쓰고 있다. 손님과 접점에 있는 소믈리에는 주방장의 요리철학을 와인과 함께 잘 혼합하여 손님에게 제공한다. 그날 먹을 요리를 웨이타에게 주문하면, 그 주문서 사본을 들고 나타나는 이가 바로 소믈리에. 그는 혹은 그녀는 순식간에 여러 조합을 머리에 넣고 두꺼운 와인리스트를 건네준다. 자신 없으면 소믈리에에게 예산의 범위와 취향을 말하면 적당한 와인을 추천받을 수 있다. 아니면 하우스와인 한잔을 시켜도 좋겠다. 특히 여행하는 중이라면 그 지방 음식과 하우스 와인이 좋다. 주방장과 소믈리에가 알아서 요리과 와인의 궁합을 미리 맞춰놓았기 때문이다. 식도락가를 위한 테이스팅 메뉴(tasting menu)도 권한다. 다섯 코스요리라면 코스에 맞는 다섯가지 와인을 미리 정해놓은 것인데, 저렴하게 다양한 와인을 맛볼 수 있다. 동경 긴자에 있는 에노테카 핀키오리는 글라스 와인 메뉴가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다. 이태리, 프랑스 와인세트가 가격별로 메뉴에 표시되어 있다.
레스토랑에서 와인주문하면 소믈리에가 와서 와인을 개봉해준다. 제거된 코르크의 냄새를 한번 맡고는 주문자에게 전달한다. 그래서 한번 맡아본다. 이런 행위는 사실 별 소용이 없다. 코르크 냄새를 맡고 와인의 상태를 추측하는 것은 흡사 헬스 클럽 사물함 근처에 버려져 있듯이 뒹굴고 있는 양말을 보고 신발을 알아 맞추는 것과 같다. 다만 육안으로 보아 와인이 얼마나 적셔져 있는지 혹은 침식, 부분손상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정도이다.
주문자에게 와인을 처음 따를 때에는 조금만 따른다. 주문자는 맛을 보면서 온도의 적정성과 와인의 상태를 체크한다. 이 순간에는 경험과 용기가 필요하다. 온도가 맞지 않으면 좀 기다리기만 하면 되지만, 상태가 안좋으면 마실 수 없다. 시어져 버린 와인은 산화된 탓인데 오래 세워두면 코르크가 마른다. 마른 코르크와 병 주둥이 사이에 틈이 생겨, 산소 입출입이 발생하고 그리하여 산화되는 것이다. 요즘의 레스토랑 와인관리 시스템은 대체로 양호하여 이런 산화된 와인을 만나기는 흔치 않다. 복병이 있다. 바로 콜키드 와인(corked wine). 코르크의 냄새가 와인에게 전이되어 와인에서 젖은 마분지 냄새가 나는 경우이다. 원래 코르크는 와인과 붙어 있어도 와인에게 어떠한 영향도 주어서는 안되게끔 만들어 졌다. 하지만 제작과정에서 코르크에 소량 묻은 물질에 곰팡이가 기생하여 와인에 이상한 냄새가 나게 될 때, 이 와인은 콜키드되었다고 한다. 필자는 독일 레스토랑에서 딱 한번 콜키드 와인을 만난 적이 있다. 이상하다는 내 표정에 소믈리에가 긴장하며 냄새를 맡더니 다른 와인으로 교체해 주었다.
외국의 와인관련 글을 읽어보면 대략 레스토랑 개봉 와인의 10% 정도가 콜키드라고 한다. 마시는 데에야 별 문제가 없지만 어찌 좀 찜찜하다. 만약 독자들이 와인을 시음하면서 이런 의문이 들 때에는 놀란 표정으로 “아! 이거 콜키드되었잖아! 바꿔줘요.”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제가 보기에는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소믈리에! 한번 맛좀 보세요.”라고도 할 수 있다. 점잖은 분이라면 후자의 표현으로 넌지시 이를 것이다. 레스토랑의 분위기를 살리면서 말이다.
오늘 밤 비와이오비씨는 아페리티프로 시킨 삼페인 속에 미리 준비한 금반지를 몰래 집어 넣고 결혼 기념을 축하하며 아내에게 사랑을 속삭일 것이다. 잔을 비우며 속에 든 반지를 발견한 부인. 짖궂은 장난같지만 준비한 성의가 놀라와 감동받는 부인. 깜짝 이벤트가 성공하여 기쁘고 행복한 비와이오비씨. 뮈지니를 커다란 튤립 잔에 쏟고, 그 넘치는 체리향와 자두향에 연신 싱글벙글해 하는 두내외. 부인 손가락에 낀 금반지가 샹들리에 불빛에 반짝 반짝. 이들을 바라보며 흐뭇해 하는 소믈리에의 눈
빛 역시 반짝 반짝. 밤은 깊어 가고 이들의 식사도 순서에 맞춰 착착 대령하고. 와인이 있는 식탁은 바로 삶의 기쁨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