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과 제자도 피할 수 없는 승부의 세계
반상(盤上) 승부세계는 냉엄하다.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강한 세상이다. 천재지변을 맞닥뜨리지 않는 한 정해진 대결을 피할 수 없다. 부모상을 당해도 대국날짜를 지켜야 하고, 형제와 부자간에도 피치 못할 대결을 벌여야 하는 세계다.
1986년 조치훈 9단은 기성전 방어전을 열흘 가량 앞두고 전치 25주의 중상을 입었지만 깁스한 몸으로 ‘휠체어 대국’을 펼쳤고, 1999년 부친상을 당했을 때는 파리에서 기성전 도전기를 치른 다음에야 빈소를 찾을 수 있었다. 이세돌과 이상훈(형)은 2000년 신인왕을 놓고 형제대결을 벌였다.
갓 입단한 무렵의 이창호. 오동통한 볼살과 체형은 당시 인기를 끌었던 애니메이션 ‘똘이장군’을 연상케 했다. 아기였을 때 우량아선발대회에 나가 입상한 바 있다.
바둑의 승부세계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세계라지만 그래도 사람이 벌이는 승부다. 부자나 부녀, 형제자매의 대결을 피하도록 조 편성 때 결승에나 가야 만날 수 있게 배려한다. 그렇지만 스승과 제자 사이는 ‘에누리’가 없다. 30~40대에 은퇴하는 스포츠 분야에 비해 바둑은 승부연령이 길다보니 사제(師弟)가 마주앉아 콧김을 쐬며 대국할 일이 많다.
음악 같은 예술세계라면야 사제가 한 무대에 올라 하모니를 이루는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할 수 있겠으나 바둑은 반드시 승패를 가려야 하는 승부세계. 제자가 스승과의 대결에서 이기면 바둑계에서는 이를 ‘보은(報恩)’이라는 말로 치장하기는 하나 가르친 스승이나 배운 제자나 피차 어색하고 괴롭긴 마찬가지다. 그렇다. 바둑사상 최강의 사제로 불리는 조훈현 9단과 이창호 9단의 얘기를 할 참이다. 이들의 승부가 곧 한국바둑의 역사인데, 이것이 참으로 묘한 역사이기도 하다.
승부의 길로 들어선 이상 상대를 불문하고 이기고 지는 것은 기사(棋士)로서 받아들여야할 운명이니 순응한다 치자. 하지만 조훈현-이창호 사제가 연출한 한국바둑사의 명승부를 얘기할 때, 승부사가 아니면서 이들보다 더 처절하고 고역스런 순간을 온전히 견딘 반외(盤外)의 내조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이창호 9단이 ‘작은엄마’라 부르는 조훈현 9단의 부인 정미화 씨다.
한국바둑사에 찬연히 빛나는 한 굽이에서, 바둑세계이기에 가능했던 ‘승부의 아이러니’랄까. 남편을 따르자니 손수 밥을 지어 먹이는 ‘수양아들’이 마음에 걸리고, ‘수양아들’을 생각하자니 남편이 안쓰럽기만 했던, 한국바둑사에 ‘조-이 사제시대’로 양각된 15년 일인자 공방전이다. 잠시 정미화 씨의 처지에서 조-이 사제의 백년전쟁을 들여다보면 더욱 묘미가 있다. 굳이 아이러니란 표현을 쓴 까닭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조훈현이 호랑이새끼를 키운 까닭
1984년 조훈현 9단이 한국바둑계 처음으로 이창호를 내제자(內弟子, 스승의 집에서 살며 배우는 제자)로 받아들였을 때 “조국수가 호랑이 새끼를 들여놓았다”는 농이 퍼졌다. 실제로 이창호는 몇 년 지나지 않아 15여년이나 군림해온 스승의 시대를 무너뜨리고 한국바둑계에 일대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이런 두 사제를 정미화 씨는 도전기가 있는 날이면 새벽부터 서둘러 따뜻한 아침밥을 지어 먹이고 나란히 승용차에 태워 대국장에까지 데려다주었다. 늦은 밤 귀가하는 두 사람 가운데 한명은 반드시 패자일 수밖에 없다. 불혹이 다 된 남편의 체력은 예전 같지 않은데 내제자의 기세는 욱일승천하니 더욱 착잡할 수밖에. 종일 대국에 지친 남편이 세상모르게 곯아떨어진 새벽, 그 시간에도 2층 내제자의 방문 틈새로 불빛이 새어나오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따악딱, 돌 놓는 소리는 부메랑처럼 작은엄마의 가슴을 섬뜩섬뜩 파고들었다.
“앞으로 나 혼자로는 힘들어!” ‘전주 바둑신동’ 이창호를 내제자로 받아들일 무렵 조훈현 9단은 둘째 출산을 한달여 앞둔 만삭의 아내에게 대놓고 말을 못하고 밑도 끝도 없는 한마디를 불쑥 들이밀었다. 머지않아 바둑계도 세계화가 될 텐데 지금부터 든든한 후진을 키워 놓지 않으면 일본, 중국 애들에게 먹히고 만다. 국제대회에 대비하려면 창호 같은 애들을 받아 한시바삐 다듬어야 할 것이다. 한국바둑이 언제까지 2류 국가로 멸시 받아서야 되겠냐는 말이었다.
이때 조9단의 나이 서른둘밖에 되지 않았다. 제자육성은 은퇴 후에 하거나 전성기를 지났을 때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토너먼트 기사로서 한창 나이이고 한국바둑을 한손에 죄다 움켜쥐고 있는 절정기에 결심한다는 건 보통일이 아니다.
내제자시절 바둑대회 행사장에서 아버지 이재룡 씨, 스승 조훈현 9단과 함께. 워낙 어린 나이에 나이 많은 선배들과 대국해서인지 늘 무표정했고 말수가 없었다.
나와는 스타일이 달라!
그렇게 받아들인 내제자였고, 스승 내외는 맹모삼천 하듯 주거하던 화곡동에서 연희동으로 이사했다. 식구가 늘어 집이 좁기도 했거니와 어린 내제자가 종로에 있는 한국기원을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다닐 수 있게 신경 쓴 것이었다.
대우(大愚)가 곧 대현(大賢)이란 말이 맞다면 이창호가 딱 이런 유형일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생이 혼자 머리를 못 감는 것은 그렇다 쳐도 세수조차 제대로 못했다. 이 바람에 정미화 씨는 1~2년 간 손수 목욕을 시켰다. 운동화 끈이 한번 풀어지면 며칠이고 풀린 채로 지렁이 매달고 다니듯 신고 다니는 통에 아예 찍찍이 신발만 사 신켰다. 원체 무감각, 무신경한 아이였다. 그러나 바둑에 대한 열정만큼은 집요했다. 세상만사 본시 일정 분량의 주어진 몫이 있다는 '총량의 법칙'이 성립한다면, 이창호는 아홉 가지에 무신경한 대신 그 양이 바둑 한가지로 죄다 발현되었다고 해야 할지.
세계최강의 사제 조훈현 9단의 바람대로 공들여 키운 제자 이창호가 뒤를 든든히 받쳐주었고, 두 사제는 국제무대에서 한국바둑의 신화를 써나갔다. 사진은 1996년 4회 진로배에서 한국의 우승을 이끈 조-이 사제가 김인 단장과 우승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모습.
조9단이 이창호를 내제자로 받아들인 이유로, ‘한국바둑을 위해 한시바삐 후학을 양성해야겠다’는 의무감 외에 또 하나가 있었다. 이건 승부를 하는 사람으로서 저도 모르게 끌리는 호기심 같은 거랄까. 조9단은 어린 창호와 두 번에 걸친 시험기에서 자신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 정반대 성향의 싹을 발견했고 가능성의 냄새를 맡았던 듯하다. 두 판의 시험기를 둔 뒤 “내 스타일이 아니야”라고 말하면서도 나와는 다른 이 놈이 커서 어떻게 될까, 하는 궁금함, 기대감 같은 것 말이다.
1989년 응씨배 제패로 ‘바둑황제’란 별칭을 얻기 전까지 조훈현 9단의 별명은 ‘조제비’였다. 제비처럼 가볍고 날렵한 바둑, 바람보다 부드럽고 빠른 창, 이것이 조훈현의 바둑이었다. 전광석화(電光石火)는 가장 어울리는 단어다. 명장 밑에 약졸 없고, 왕대밭에 왕대(大竹) 난다는 말이 있다. 이창호는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였다.
그러나, 성격이나 기풍은 딴판이었다. 돌다리를 두드려 보고도 바로 건너지 않고 우회해 가는 어린아이의 바둑에 어른들은 ‘졌다’는 표정을 지었고, ‘애늙은이’, ‘강태공’이란 별명이 붙었다. 승부가 유리하건 불리하건 도대체 표정이 없고(포커페이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아(不動心) ‘돌부처(石佛)’로 불렸다.
조훈현은 타고난 천재, 이창호는 만들어진 천재
“바둑계 최고의 천재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바둑기자가 많이 받는 질문 가운데 하나다. 그럴 때마다 필자는 망설임 없이 조훈현 9단을 일순위로 말한다. 조훈현 9단은 타고난 천재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두뇌회전이 빠르고 번뜩이는 유형의 천재다. 조9단의 비상한 승부감각을 엿볼 수 있는 일화 하나.
젊은 시절 유럽바둑대회에 초청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때 동양에서 온 바둑 9단에게 유럽인들은 체스를 소개했다. 그 지역 체스고수가 조9단에게 기본 행마법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한두 판 시범을 보인 뒤 직접 한판 둬보자고 청했다. 바둑은 당신이 귀신일지 모르나 체스는 갓난애가 아니겠느냐는 듯, 장난기가 섞인 대국제안이었다. 그런데 기절초풍할 일이 벌어졌다. 즉석에서 배운 조9단이 이겨버린 것이다. 어떻게 이길 수 있었을까.
“시범대국을 할 때 딱 한가지 이기는 코스를 눈여겨뒀었지요. 그런데 그 체스마스터가 바로 그 코스로 오더군요. 재수 좋았지요. 세상에 처음 배운 놈이 어떻게 이길 수 있었겠어요. 하하.”
조훈현에 견준다면, 이창호는 타고난 재능의 양보다는 부단히 노력하여 만들어진 천재에 가깝다. 실은 이런 유형의 천재를 만나기가 더 어려운 건지 모른다. 조훈현 9단의 지하실 서재에는 일본 유학시절부터 탐독했던 귀한 바둑책이 수천 권 있었다고 하는데, 이창호가 스승의 집에서 독립할 무렵엔 이걸 숫제 머릿속에 다 담아가지고 나왔다고 한다. 열정과 노력, 근기(根氣)에 대해서는 혀를 내두를 만했다.
하지만 조훈현 9단이 지금도 고개를 갸우뚱하는 미스터리 한가지는, ‘바둑신동’ 소리를 듣는 제자가 그날 낮 자기가 둔 바둑을 복기(復棋)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었다는 사실. “얘가 분명 내 스타일이 아닌 것만은 자명한데, 이거 내가 잘못 봤나…?”
일본기원 연구생시절 프로의 바둑을 동시에 세 판이나 기록하기도 했거니와 심지어 몇 년 전에 둔 바둑을 인화하듯 복기해 내는 총기를 보인 스승으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행태였을 터이다. 이창호 9단은 후일 세계챔피언이 된 뒤에도 자기 바둑을 제대로 복기하지 못하고 헤매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으니, 전주시절 그를 다듬은 전영선 사범의 말마따나 겉으로 번쩍이는 것은 실제 큰 재주는 아닐지 몰랐다. 누구나 알아보는 재주는 큰 재주일 리 없으니까.
이러한 우려와는 달리 이창호의 바둑 느는 속도는 무척 빨라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들어간 지 1년반 만에 가장 먼저 1급으로 승급했고 다음해인 1986년 8월 연구생입단대회에서 입단했다. 내제자로 입문한 지 2년 만에, 만 열한 살의 나이로 프로기사가 되었다. 스승(아홉 살)보다 2년 늦은 나이의 입단이었지만 60년대와 80년대는 바둑계의 수준과 층이 달랐다.
그렇기는 해도 바둑계의 시각은 제자가 스승의 아성을 위협하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5년은 걸릴 것이라고 봤다. 한국바둑의 모든 기전을 전부 차지하는 전관왕(全冠王)을 무려 세 차례나 달성한 조훈현 9단이다. 줄잡은 5년의 기간도 이 정도 시간이면 도전권 언저리에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어림짐작이었지 훌쩍 뛰어넘으리라 예견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랬는데, 입단 이후 ‘똘이 장군’ 이창호의 행로는 ‘아우토반’이었다. 입단 햇병아리에 불과한 소년기사가 ‘된장바둑’으로 불리는 서봉수 9단을 연속 다섯 번이나 이기는 등 연일 장안을 떠들썩하게 하더니 한달음에 제28기 최고위전(1988년) 도전권까지 거머쥐었다. 입단 2년 만에 이룬 고속질주였다.
서봉수 9단이 누구인가. 비바람이 거세면 일시 몸을 숙였다 다시 일어서는 들풀처럼 조훈현 10년 왕국을 게릴라 전법으로 줄기차게 두드려 대던 스승의 최대 라이벌이다. 화려한 ‘칼춤’을 자랑하는 스승조차 완전 제압하지 못한 라이벌을 제자가 ‘둔도(鈍刀)’를 스윽 휘둘러 제압한 셈이다. 그러고선 서9단이 그랬던 것처럼 조훈현 왕궁의 성문 앞에 서기 시작했다.
바둑사에 유례가 없는 15년 사제도전기
바둑사에 전무후무한 첫 사제도전기 1988년 12월 24일 부산에서 두어진 제28기 최고위전 도전1국 장면. 단 80수 만에 제자가 돌을 거두면서 ‘단명 도전기’로도 화제가 되었던 바둑이다.
조훈현-이창호 9단의 첫 사제도전기인 1988년 제28기 최고위전은 이후 2003년 12월 제34기 명인전 도전기까지 15년 간 치열한 공방을 벌였던 ‘사제 백년전쟁’의 선전포고였다.
역사적인 첫 사제대결은 1988년 12월 24일, 성탄 전일에 두어졌다. 대국장에는 참으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부산 광안리에 자리한 시사이드호텔 특별대국실. 바둑판을 사이에 하고 스승은 곤혹스런 웃음을 연방 지으며 천정을 쳐다봤고 제자는 무슨 큰 죄를 지은 사람마냥 방바닥만 응시하다 대국에 들어갔다.
제자의 부담이 컸을까. 사제간의 첫 대국은 80수 만에 제자가 돌을 거두면서 단명국으로 끝났고, 이 도전5번기는 스승이 3-1로 아퀴 짓고 타이틀을 방어했다. 5년은 걸릴 것이라는 예상을 2년이나 단축하며 도전장을 내민 용맹정진은 가상하나 아직 스승을 상대하기에는 역불급, 시기상조라는 게 대다수 관전평이었다.
어색하고 곤혹스런 사제대결 이창호-조훈현 사제대결은 세인의 관심을 끌었지만 당사자들은 참으로 곤혹스럽고 어색한 자리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제자 이창호는 이기건 지건 언제나 죄인마냥 몸둘 바를 몰랐다. 사진은 첫 사제도전기였던 제28기 최고위전. 1989년 1월 26일 운당여관에서 두어진 도전4국에서 스승은 제자를 3-1로 물리치고 타이틀을 방어했다. 조훈현 9단의 100번째 타이틀 우승이었다.
다만 난공불락으로 여겼던 스승에게 마냥 무기력하게 물러서지 않고 1승을 거두었다는 점은 높이 샀다. 그러면서도 도전3국에서 올린 ‘반집승’을 행운의 승리로 여기는 기류가 강했다. (이창호 9단이 스승에게서 거둔 첫승은 공교롭게도 ‘반집승’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결코 공교로운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제28기 최고위전 도전기를 벌이는 와중에 제자는 제24기 패왕전에서도 도전자가 되어 1988년 말에서 1989년 초 겨울시즌에 스승과 두 개의 기전에서 동시에 도전기를 치렀다. 소년 이창호가 한 기전에서 도전자가 된 것만으로도 ‘바둑계가 혼절할 일(당시 바둑잡지의 표현)’인데 양 기전에서 도전자로 나섰으니 바둑계가 경악할만했다. ‘쿠데타’란 표현까지 나왔으나 3-1(최고위전), 3-0(패왕전)으로 첫해 소년의 쿠데타는 진압되었다.
세계 최연소 타이틀 획득 입단 3년 만인 1989년, 3단의 이창호가 제18기 KBS바둑왕전에서 김수장 7단을 꺾고 우승해 바둑계를 놀라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스승 조훈현 9단의 반응은 “악”하는 외마디 비명이었다.
일직선으로 스승에게 달려들었다 패퇴했지만 입단 3년 만인 1989년 여름, 소년 이창호 는 제18기 KBS바둑왕전에서 김수장 7단(당시)을 꺾고 첫 타이틀을 획득했다. TV방송 속기(速棋) 기전이었다. 하지만 아직 보송보송한 솜털도 채 가시지 않은 만 열세 살의 나이에 거둔 우승이었고, 이는 세계바둑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연소 타이틀 획득 기록이었다.
집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스승은 “악!”하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타이틀을 딴 제자가 장하기는 했지만 ‘벌써?’라는 의미가 담긴, 스승조차 깜짝 놀라게 만든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타이틀 사냥의 신호탄에 불과했다. 언젠가 창호가 군마를 휘몰아 밀어닥쳐올 것이라 생각은 하고 있으나 곧장, 자신이, 진짜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게 될 줄 짐작이나 했을까.
소년 이창호는 첫 타이틀을 딴 여세를 몰아 그해 가을, 최고의 전통을 가진 제33기 국수전 도전권을 획득해 스승과 세 번째 도전기를 펼쳤지만 3-1로 물러섰다. 그런데 이번에 올린 1승(도전3국)도 딱 반집승이었다. 국수전 도전기를 끝낸 지 한 달 만인 1989년 12월11일, 제자는 지난해에 이어 또다시 최고위전(29기)에 도전장을 던졌다. 2년 새 벌써 네 번째 사제도전기다. 마치 터진 봇물마냥 밀어닥치고 있었다. 제자가 이렇게 빨리 커버릴 줄, 그리하여 피차 곤혹스런 대결을 그토록 길게 펼치게 될 줄 스승도 미처 몰랐다.
또 창호야? - 네 번째는 달랐다
네 번째 사제대결의 흐름은 달랐다. 도전1국을 제자가 가져간 것이다(흑 6집반 승). 도전2국은 스승이 흑불계승으로 반격해 앞서 보이던 대결 흐름으로 돌아가는 듯했으나 해를 넘겨 두어진 도전3국에서 제자가 다시 힘을 내 2-1을 만들어버렸다. 졸지에 막판에 몰린 스승이 혼신을 다해 도전4국을 거두면서 2-2, 승부는 단판승부로 판가름 나게 되었다. 70년대 중반부터 무려 15여년 간 조훈현의 독주가 이어져왔고, 간간이 서봉수가 제동을 걸어온 승부판도에 식상해 있던 바둑팬들은 열광했다.
도전 네 번째 만에 스승을 꺾은 제자. 1990년 2월, 제29기 최고위전 도전5국. 2-2로 팽팽한 가운데 맞은 도전5번기 최종국에서 제자는 또다시 스승을 반집으로 꺾고 타이틀매치 네 번째 만에 ‘보은(報恩)’을 했다. 바둑계에서는 제자가 스승을 이겼을 때, 가르침에 대한 보답을 했다 하여 ‘보은’이란 표현을 쓴다. 그렇지만 당시 소년 이창호의 승리는 보은을 운운할 차원이 아니라 ‘파천황’을 거론할 정도의 메가톤급 사건이었다.
도전5국은 1990년 2월2일 한국기원 4층 특별대국실에서 열렸다.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오후에는 동료기사들과 보도진이 빽빽이 들어차 승부의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바둑은 중반 이후 조훈현 9단이 국면을 이끌어가는 형세. 그렇지만 언제나 그렇듯 두 사제의 대결은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를 연상케 하는 흐름을 보이곤 한다.
스승의 경쾌한 발놀림과 날카로운 속사포가 천둥번개처럼 전반전을 휘몰아친다면, 후반전은 제자의 ‘기다림의 바둑’이 묵직한 진가를 드러내는 양상. 스승이 빠르되 엷다면 제자는 단단하되 느리다. 스승은 ‘싸움의 신(戰神)’이라 불릴 정도로 치열하고, 제자는 ‘신산(神算)’이란 별명대로 정밀한 형세판단과 계산력으로 끝내기에서 승부를 보는 기풍이다.
그런데 이날은 막판의 중압감 때문인지 실리에 민감한 조훈현 9단이 세력바둑을 구사했고, 도전자인 이창호 4단(당시)은 평소 두터운 기풍과는 달리 초반부터 실리만 파다가 중반까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조훈현 9단의 아킬레스건은 끝내기였다. 바둑은 집중력의 싸움인데 이 점에서 한창 나이인 10대, 20대를 당해낼 수 없다. 지난해(1989년 5월) 최고의 우승상금(40만 달러)이 걸린 응씨배를 우승해 초대 ‘바둑황제’에 등극했다지만 서른일곱이면 생물학적으로 절정기를 지난 나이다. 더군다나 면전의 상대는 ‘슈퍼컴퓨터’, ‘신산’으로 불리는 계산바둑의 대가다. 아니나 다를까, 종반으로 갈수록, 대국시간이 길어질수록 조훈현 9단이 정확한 끝내기 수순으로 매조지하지 못하고 야금야금 추격당하더니 급기야 ‘눈터지는 반집’ 싸움이 되었다.
(218~262) 262수 끝, 흑 반집승
262수를 끝으로 계가를 하니 반집. 도전자의 극적인 반집 승리였다. 모든 이의 예상을 뒤엎고 입단 4년밖에 안된 열네 살의 소년기사가 한국바둑의 거인 조훈현을 3-2로 꺾고 ‘기가 막힌 보은(報恩)’을 했다. 한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한시대가 열리는 분기점이었다. 언론은 파천황(破天荒)의 사건이라고 썼다. 아침에 두 사람을 대국장에 태워다 줬던 ‘작은엄마’는 저녁에 귀가한 수양아들에게 “창호, 다 컸네…”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스승을 넘어 활짝 연 이창호 시대. 1990년 2월 최고위를 획득한 열다섯 살 소년기사 이창호는 이후 파죽지세로 스승의 영지를 공략했다. 이 해 가을 쌍십절(10월 10일)에는 최고의 전통을 자랑하는 제34기 국수전까지 거머쥐어 ‘이창호 시대’가 왔음을 만방에 알렸다. 사진은 붉은 여드름이 덕지덕지 난 15세 국수 이창호가 아버지와 함께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모습.
역사는 돌고 돈다 - 최고위전에 얽힌 업과 인연
최고위전이 세계바둑사 최초의 사제도전기가 된 점도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1963년 일본으로 바둑유학을 떠났던 조훈현 9단은 1972년 병역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귀국한 후 그 길로 눌러앉았다. 일본에서 돌아온 ‘바둑황태자’는 “곧장 큰일을 낼 것”이란 기대와 달리 2년간 뜸을 들이다가 1974년 비로소 타이틀 개시를 하게 되는데, 그것이 부산일보가 주최하던 최고위전이었다. 최고위전을 교두보로 각종 기전을 본격 공략하기 시작하자 바둑계는 ‘조훈현이 드디어 한강다리를 건넜다’는 표현으로 조훈현시대의 도래를 알렸다.
기록상 KBS바둑왕전이 이창호 9단의 첫 타이틀(1989년 8월)로 기록되어 있기는 하나 이벤트 성격이 강한 방송 속기전이다. 당시 바둑계에서는 신문사가 주최하는 기전을 본격기전이라 하여 온전한 타이틀로 쳐주는 분위기였는데, 그렇게 본다면 이창호 역시 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최고위전이 첫 도전무대(28기, 1-3 패)였고, 첫 번째로 딴 본격기전 타이틀(29기, 3-2 승)이었다. 제자 또한 부산을 거점으로 일어서 한강다리를 건넌 것이다. 16년 전 스승이 천하통일의 발판으로 삼았던 타이틀을 이번엔 제자가 스승에게서 직접 넘겨받아 새 왕조를 구축했다. 이 역시 승부세계의 아이러니랄까. 무서운 업(業)이요 인연의 끈이다.
2005년 현대바둑 60주년 기념식에 나란히 참석한 조훈현-이창호 9단
한국바둑 일인자의 자리를 놓고 세계바둑사에 유례가 없는 치열한 사제대결을 펼친 조훈현-이창호 두 사람은 1988년 12월부터 2003년 12월까지 무려 15년 간 69번의 타이틀매치를 벌였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승부의 저울추는 1992년을 고비로 제자 쪽으로 현격히 기울어 조훈현 9단이 20승 49패로 뒤지고 있지만 실로 바둑사에 영원히 남을 승부다. 이 기간 매년 평균 20국씩 총 300합을 겨룬 것도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지금까지 통산전적은 이창호 기준, 310전 191승 119패(승률 61.61%).
재미있는 것은, 경마에서의 저릿저릿한 ‘코차이’ 승부처럼 이창호 9단이 스승에게 거둔 반집승부의 횟수와 내용이다. 타이틀전에서 거둔 반집승부만 세면 17승 5패다. 통산대국을 통틀어서는 스승에게 총 20번의 반집승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17번이 타이틀전 승부였으니, 조훈현 9단으로서는 어찌 하늘을 원망치 않았겠으며, 이창호 9단을 일컬어 하늘이 내린 ‘신산’이라 칭하지 않을 수 있을까. 청출어람(靑出於藍)은 흔히 제자가 스승보다 더 나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다. 하지만 위대한 스승이 있지 않고서야 어찌 뛰어난 제자가 있었을 것인가?
글 정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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