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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권동진(權東鎭 1861.12.15 - 1947.3.9) |
호 |
우당(憂堂) |
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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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충북괴산 |
주요활동 |
일찍이 조국 근대화와 부국강병에 관심을 갖고 19세때 사관양성소에 입학하였습니다. 여기서 2년의 군사교육과정을 마치고 육군초관으로 근무하였고, 이후에는 함안군수와 거문도 참사를 역임하였습니다.
이후 10여년간 일본에서 생활하였고 1906년 귀국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조국 근대화를 위한 계몽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교주 손병희의 영향으로 천도교에 입도하여 도사로 활동하면서 전도 및 개화운동을 펼쳤습니다.
나아가 한말 계몽운동단체로 대한자강회를 계승한 대한협회에 들어가 부회장으로 활약하였습니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천도교 전도 활동에 종사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앞장섰습니다.
특히 1918년 미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하자 이를 기회로 거족적인 민족독립운동을 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교주인 손병희의 지휘아래 오세창과 함께 3.1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오세창과 함께 천도교 내부를 추스르며 독립운동자금의 준비, 독립선언서의 인쇄와 배포, 민족대표들이 모여 '우리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는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3.1운동은 마른초원의 불길처럼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거족적이며 전국적인 민족독립운동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태화관에서 일경에 피체된 선생은 3년형을 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출옥뒤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자치운동을 전개하던 천도교 신파 지도자인 최린에 반대하여 오세창과 함께 구파를 이끌면서 민족운동을 지속적으로 편 것입니다.
1927년 좌우합작으로 신간회의 결성이 추진되자 천도교 구파의 대표로 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습니다.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민족협동전선으로 성립된 신간회의 창립에 주도적역할을 수행한 것입니다.
나아가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신간회 본부는 물론 각 지방 지회의 조직과 활동을 도왔습니다.
특히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자 신간회 중앙검사위원장으로 진상조사단을 파견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이를 통해 광주학생의 독립의지를 널리 알리고, 더 나아가 전국적인 독립운동으로 전파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서울에서 광주학생운동 진상보고 민중대회 개최를 시도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또 다시 고초를 겪었습니다.
광복후에도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하자 오세창과 함께 임시정부 환영 국민대회를 주도하고, 신한민족당 당수 및 민주의원등으로 활동하다가 1947년 3월 9일 서거하였습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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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인물 |
손병희, 오세창 |
가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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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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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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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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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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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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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참고 |
국가보훈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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