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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축성築城한 언어의 견고한 향유享有
- 오영미 시집 『굴포운하』의 시 세계
구재기(시인,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해설>
축성築城한 언어의 견고한 향유享有
- 오영미 시집 『굴포운하』의 시 세계
구재기(시인,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 들어가면서
시에 있어서의 소재는 보편성, 객관성과 참신성에 따라
주제에 알맞은 기준을 어떻게 선택하여야 할 것인가에 의
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이 중에서 보편성普遍性은 가장 강조
되어야 하는 것으로 이에 상반되는 특수성이 있다. 특수성
은 개성과 독창성 등을 의미하고 있지만 보편성의 범위 안
에서 다분히 의도되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다. 다음으로는
객관성客觀性이다. 시는 가장 확실하고 타당성 있는 소재의
선택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에
근거한 소재를 선택하여 시의 주제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
어야 한다는 것이다. 끝으로 참신성嶄新性이다. 보편성의 범
위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참신한 소재를 선택으로 창작되
어 진 시작품은 쉽게 공감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
라서 시에 있어서의 참신성은 소재 선택 시에 가장 신경 써
야 할 핵심 요소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오영미 시집의 표제로 등장한 『굴포
운하』는 순간적으로 번쩍 띄게 한다. ‘굴포’라는 지명이 그
렇고, 이에 따라 ‘운하運河’가 가지는 의미가 적어도 필자에
게는 참신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운하運河는 사람이나 물
건을 실어 나르기 위해 만든 인공수로이다. 원래는 선박 항
행航行 이외에 관개 · 급수 · 배수 등의 목적으로 축조된 인
공수로人工水路를 총칭한다. 통상적으로는 수운輸運을 하기
위한 인공수로를 말한다. 시에 있어서의 운하는 인간과 인
간 사이의 시적 불소통不疏通을 뚫어주는 가장 큰 지름길이
아닐까.
굴포운하掘浦運河, 또는 가적운하加積運河는 충남 태안군 태
안읍 인평리와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 간의 7km에 달하는
운하유적을 말한다. 태안군 태안읍에 접해 있는 천수만淺水
灣과 서산시 팔봉면과 접해 있는 가로림만加露林灣을 연결하
는 운하 유적이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곡창 지대인 호
남 지방에서 생산되는 곡물을 서해안 바닷길을 통해 한양
으로 운송했다. 그러나 곡물을 수송하는 조운로漕運路는 자
연재해가 심했으며, 특히 지금의 태안군 앞바다에 해당하
는 안흥량 해역은 선박의 피해가 심한 곳이었다. 항해 기술
이 발달하지 못해 외해로 나가는 것이 어려워 안흥량을 지
나는 대신 태안반도를 관통하는 방식인 운하를 건설하려
했다. 그 지역은 현재의 태안군과 서산시의 경계 지역에 해
당한다.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wiki/[굴포운하]
원래 충남 태안지방의 근흥면 안흥량安興梁은 삼남지방192
의 세곡미稅穀米를 조운漕運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조류가 빠르고 풍랑과 조석간만의 차가 심해 해난사고가
잦았다. 이곳의 해난사고는 인명과 세미稅米의 손실은 물
론, 조역漕役의 기피현상, 새로운 조운선 제조에 따른 국민
부담의 증가, 세미손실에 따른 환징換徵 등의 피해였다. 이
때문에 운하를 건설하기 위한 시도가 몇 번 이루어졌던 것
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이 때문에 운하를 건설하기 위한 시도가 역사적으로 몇
번 이루어졌다고 하였거니와, 시 또한 시인과 독자 사이의
교화함도 이와 같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오영미가 가지는
운하길[運河路]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1. 역사적 소명 의식
오영미는 몇 해 전 그리스 발칸반도를 여행하고 있을 때
만난 수에즈운하, 파나마운하와 함께 세계 3대 운하 중 하
나인 코린트운하’를 여행하고는, 여행이 끝난 후 어렴풋이
알고 있던 상식으로 줄곧 서산의 굴포운하를 생각했다고
한다. ‘미완으로 끝난 상태로 팽개쳐진 듯 볼품없이 현존
하는 모습이지만 수에즈운하보다 752년 앞섰고 파나마운
하보다 671년이나 앞서 시도했던 아직도 역사가 살아 있
는 전설 속 운하가 바로 ‘서산 굴포운하’라면서, 이 굴포운
하는 충남 서산에서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최초로 운하
건설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건설을 시도했다는 것은 참으
로 감격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는 193
단순히 역사를 읊조리는 것을 떠나 대한민국의, 충남의,
서산의 소중한 보고寶庫로 발현發顯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오영미는 ‘시간을 거슬러 굴포운하의 역사를 재조
명하고 현장을 찾아 현재의 모습을 시 창작으로 승화시키
고 싶었다’면서 ‘역사의 현장을 수십 번 찾아 그들의 희생
과 노력에 대하여 깊이 있는 연구를 하고자 시도했고, 많은
자료들을 확보하고자 시간을 할애했다’고 한다. 바로 오영
미 시인으로 하여금 역사적 사명 아래 『굴포운하』라는 한
권의 시집으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연결하는/운하유적이 미완성
으로/아가리를 다물지 못한 채/충남의 손길을 기다리
고 있다/인종 12년(1134년)에 착공하여/현종 10년(1669
년)까지 530년 동안/총 7km 중 4km만 개착開鑿 상태
다//1134년 이후/미완의 3km 굴착을 시도하였으나/
토목기술이 자연환경을 이기지 못해/1412년과 1669
년 거듭 포기를 해야했다/이에 충남과 서산시에 제안한
다//태안읍 인평리와 서산 팔봉면 어송리 간幹/그 경계
의 운하 건설/호남 지역 곡물을/서해안 바닷길을 통해
한양으로 운송하고자/노력한 흔적 모아 다시 복구해 보
면 어떨까//터널 뚫는 기술은 세계 최고라 자부한다/전
세계인을 불러 모아 잔치를 하자/우리 충남의 문화유산
살리기에/‘힘쎈 충남’이 다시 도전해 볼 일이다//세계
적 파나마운하와 수에즈운하보다/훨씬 앞선 고민이 우
리 대한민국, /891년 동안 침묵하고 있는 굴포운하가/194
여기, 글로벌 충남 지역 서산에 있다/
- 시 「굴포운하」 전문
이 시작품을 처음 대하는 사람이라면 짐짓 이 시작품에
서 찾아볼 수 있는 ‘깊은 생각, 훌륭한 소리, 또는 생생한
이미저리imagery’ 등을 엿볼 수 없어 조금은 당혹스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몇 번 되풀이해 읽다 보면 시인 오
영미가 얼마나 ‘굴포운하’에 대하여 얼마나 원대한 사명감
을 가지고 있는가를 쉽사리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시인에게
는 미완未完으로 끝난 굴포운하에 발자국을 거듭으로 새길
때마다 자신에게 역사적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
이다. 그러한 가운데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연결하는/운하
유적이 미완성으로/아가리를 다물지 못한 채/충남의 손길
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그러한 굴포운하의
모습을 ‘아가리’라는 비속한 단어를 시어로 사용하고 있
다. ‘아가리’란 곧 ‘입’을 비속하게 이르는 말이다. 굳이 ‘입’
이라는 표준어를 쓴 것이 아니다. 비속어를 사용함으로써
화자의 다른 어떠한 왜곡진 목적을 가진 역사적이요 부도
덕적인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순수하고 바람직한 행동 규
범에 따른 소명 의식을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굴포운
하’에 따른 역사적인 소명을 ‘충남과 서산시에 제안’하고
자 하는 까닭이다. ‘태안읍 인평리와 서산 팔봉면 어송리
간幹/그 경계의 운하 건설/호남 지역 곡물을/서해안 바닷
길을 통해 한양으로 운송하고자/노력한 흔적 모아 다시 복
구해 보면 어떨까’하고 제안하기 위한 진실한 마음의 표현195
이 아니겠는가.
시인은 ‘터널 뚫는 기술은 세계 최고라 자부한다/전 세
계인을 불러 모아 잔치를 하자/우리 충남의 문화유산 살리
기에/<힘쎈충남>이 다시 도전해 볼 일이’라고 당당한 의지
를 돋보인다. 그리고 ‘굴포운하’는 ‘세계적 파나마운하와
수에즈운하보다/훨씬 앞선 고민이 우리 대한민국,/891년
동안 침묵하고 있는 굴포운하가/여기, 글로벌 충남 지역
서산에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외침은 오
늘날 여러 가지 시적 표현의 힘으로 위장된 채 범람하고 있
는 오늘날의 시 세계에 새로운 극점極點을 보여주고 있으면
서, 한편으로는 역사적 소명 의식을 드높여 주고 있는 모습
이기도 하다.
시인은 또 「오해와 확신」이란 시작품에서조차 ‘굴포운
하’를 향하여 ‘우수경칩이라네요/겨우내 언 마음을 풀어야
합니다/아직 당신은 나에게 얼음입니까’라 물으면서 ‘나는
당신에게 물레방아입니다/서로 흐르고 돌아/멈추지 않는
사랑이어야 합니다’라는 답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운하는
아직도 동면冬眠입니까’라는 절규적인 몸부림의 모습을 그
려주기도 한다.
이와 같은 화자의 역사적 소명 의식은 일제가 약탈한 서
산 부석사의 ‘금동관세음보살’이 2023년 10월 일본 대마
도 관음사에 소유권이 있다는 대법원의 판결함에 따라 결
국 2025년 1월 24일부터 5월 5일까지 약 4만 명의 불자,
시민이 친견하게 됨에 이를 지켜본 결과로 나타난다. 화자
는 ‘약탈의 약탈로/약탈을 위한 약탈은/약탈이 될 수 없는 196
것인가’라면서 ‘왜 나만 정직한 거 같은가/왜구에게 도난
당한 당신/100일간의 귀향만 허락되다니’라면서 비극적
인 역사적 사실 앞에 통탄하는 모습을 사실 그대로 시작품
「100일 동안의 제자리」에 그려놓고 있기도 한다. ‘네가 나
에게로 와서 물방울 되듯/굴포운하 어귀쯤 너를 기다릴 수
만 있다면/장맛비에 키 큰 억새가 휘청휘청/그 빗물로 나
는 흐르고 흘러/가로림만과 천수만 거기쯤에서 만날 것’(시
「장마」 중에서)을 확신하기도 한다. 이는 ‘뽀얀 속살이 가지런
히 누워/나를 유혹하는 것을 즐기는 나는/망설임 없이 안
부를 묻고 깐 쪽파를 모두 사곤 했다/지금은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미리내/이것이 미르의 시작’(시 「서산시장 풍경」 중에
서)이라는 애향 정신으로까지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정신은 ‘첫 연인의 추억이 있는 소라와 멍게/이런
수산물이 싱싱한 수족관에서/생물로 유혹하는 향기/이 맛
을 지나칠 수 없어/찰박과 주꾸미를 검정 비닐봉지에 담는
다/어찌 이 해산물을 보고 한 잔이 그립지 않을쏘냐/오늘
저녁은 딱 운하 한 병만’(시 「등대수산」 중에서)을 말하고 있는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도 역사적 소명 의식에 따라 ‘운
하’라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뚜렷이 육화肉化되어 나타난다.
2. 근원적 삶에의 추구
다양한 삶의 제 방식은 순간적으로 동시성을 획득하면서
한 편의 짧은 작품 속에 응집하여 나타난다. 일상생활로부
터 어느 한순간 생활 둘레에서 수없이 표출되는 생활에서197
의 각종 비젼과 더불어 영혼의 비밀한 마음, 즉 생각과 지
각과 감정 등을 직접적으로 이해하거나 전달하는 능력을
발휘하면서 어떠한 존재와 사물과 동시에 교감할 수 있는
것을 제공받음으로써 한 편의 시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게
된다. 시가 만약에 단순한 삶의 과정에서만 이루어진다면
삶 그 자체만도 못한 결과물이 될 수가 있다. 그러나 시는
삶, 그 이상을 뛰어넘어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받기도 하
고, 또 새로운 삶 그 자체를 재생산하여 그 가치를 높여주
기도 한다. 이때 바로 한 편의 시는 가장 산만하고 가장 이
완된 일상의 삶에 동일성同一性을 획득하게 함으로써 일상
의 삶에 동시성同時性을 추구하게 하고, 또 그만큼 일상의 삶
을 윤택하게 이루어 주기도 한다. 시집 『굴포운하』에 함께
한 울을 이루고 있는 시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허기가 닿아도 마음뿐/혼자 식당 문을 열지 못한다/지
나며 힐끗 곁눈질/아무런 걱정 없는 표정으로/소주 한 병
국밥 한 그릇/수저를 놓으면/소주잔이 허공에 매달리고/
소주잔이 내려오면/수저가 국밥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런 풍경 보며 두어 발짝 떼다/들어가 볼까 망설이는
데/그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세상 슬프지 않군/저잣거리
군중들이야 자기 소관이고/소주 한 병으로 허기를 달래
는 데 문제없으니/너도 한번 해보라는 듯/몽롱하고 편안
해 보이는 얼굴로 유혹한다/혼술 혼밥이라는 것/처음이
어렵지 별거 아니야!/배고프면 들어와 섞여 봐/대중 식
사가 대충 식사는 아니거든/소머리국밥 김치찌개 된장찌198
개/차림표만으로 창자까지 도달한 비애를 안고/대중 속
출입문을 벌컥 열었다
- 시 「별거 아니야」 전문
화자는 ‘혼술 혼밥이라는 것/처음이 어렵지 별거 아니
야!’라고 진술하고 있으나 일상의 삶 속에서 ‘혼술 혼밥이
라는 것’은 사실 별거가 된다. 인간의 삶에서 먹는 것만큼
큰일도 없으리요마는 오늘날 현대인이 살고 있는 독거獨居
생활의 한 단면적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혼술 혼밥’이야말
로 전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보다 많은 사회적 문제를 야
기할 수 있는 큰일이 아닐 수 없다. ‘허기가 닿아도 마음
뿐/혼자 식당 문을 열지 못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한 사
회적 삶의 단면을 말해주고 있다. 당연히 한 가정 속에서
식솔과 함께 ‘허기가 닿’으면 함께 나누어야 할 식사를 하
지 못하고 살아가는 독거 생활의 아픔은 바로 가족적인 삶
을 이루지 못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 홀로 ‘혼밥’을 먹
는다는 그 자체에서 삶의 균형은 깨어진다.
화자는 혼자 먹는 ‘혼밥’이 왠지 두려워진다. 그래서 음
식점 앞을 지나다가 주저하다가 겨우 ‘힐끗 곁눈질’을 한
뒤에서야 ‘아무런 걱정 없는 표정으로/소주 한 병 국밥 한
그릇/수저를 놓으면/소주잔이 허공에 매달리고/소주잔이
내려오면/수저가 국밥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본
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참으로 가슴 벅찬 희열로 반
전을 이루는 행운이라니! ‘두어 발짝 떼다/들어가 볼까 망
설이는데/그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는 것이 아닌가. 마주199
치는 순간 ‘세상 슬프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는 비로
소 ‘혼술 혼밥’에서 벗어날 수 있는 행복의 순간이요 지극
히 정상적인 삶의 모습이다. ‘저잣거리 군중들이야 자기
소관이고/소주 한 병으로 허기를 달래는 데 문제없으니/
너도 한번 해보라는 듯/몽롱하고 편안해 보이는 얼굴로 유
혹한다’. 아니 이렇게 유혹당하는 상황이야말로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의 기쁨에 젖는 일이다. 이에 따라 ‘혼술 혼밥
이라는 것/처음이 어렵지 별거 아니야!/배고프면 들어와
섞여 봐/대중 식사가 대충 식사는 아니거든/소머리국밥
김치찌개 된장찌개/차림표만으로 창자까지 도달한 비애
를 안고/대중 속 출입문을 벌컥 열었다’는 것이다. 즉 알고
보면 ‘혼술 혼밥’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요 일상적인 삶에 젖어 지극
히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평범한 삶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는, 삶의 진리로서 「별거 아니다」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① 나의 존재감을 느끼게 하는 터/나는 창 너머로 익어
가는 감을 바라본다/거칠고 마른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
린/감, 너의 하루 일과는 어떤 거야?/그냥 궁금해졌어
- 시 「감나무를 바라보다」의 끝부분
② 나라면 너처럼 웃지 않겠다/그까짓 주식에 하루/빨
간불 들어왔다고 좋아한들/허구한 날 파란불로 곤두박질
친/손해가 복구되진 않는단다
- 시 「모르는 척」 둘째 연200
③ 텃밭에서 자라나는 채소와/집 주변에 심어놓은/감
밤 대추 은행나무 /주렁주렁 매달린 열매가 소용없네
- 시 「빈집」 5연
④ 내 생각과 다르다고 무시하지 말기/내 뜻과 맞지 않
는다고 놓치지 말기/내 말을 잘못 알아들어도 핀잔하지
말기
- 시 「별거 아닌데」 셋째 연
위에 예시한 4편의 시작품에서 각각 그 일부를 살펴보면
단편적인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시가 굳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면서 시는 모든 삶의 숨결이자 삶의 정수精髓를 말해주는
것이라는 것이 새삼 확인됨을 알 수 있다. ①의 시작품 「감
나무를 바라보다」가 문득 화자 스스로의 존재감을 느낌으
로써 하루의 삶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그까짓 주식에 하루’
를 보냐면서 ‘빨간불’이나 ‘파란불’의 희비에 좌지우지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냉정한 삶의 자세를 보이고 있는 ②의
시작품 「모르는 척」에서, ‘폼나는 큰집 짓고/품 넓게 공간
넓어지면/사랑도 커져 행복할 줄 알았’는데 결국에는 ‘텃밭
에서 자라나는 채소와/집 주변에 심어놓은/감 밤 대추 은
행나무/주렁주렁 매달린 열매가 소용없’다는 것을 뒤늦은
깨달음으로 읊은 ③의 시작품 「빈집」은 시란 삶을 육성시키
고, 그러고 나서 매장시키는 지상의 역설임을 확인할 수 있
게 한다. 또한 시의 세계에 들어온 근본적인 삶의 원리는 쉽201
게 붕괴되는 것이며, 어떠한 오류를 범하였다 하더라도 크
게 문제가 되지 않음은 물론 영속성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
을 ④의 시작품 「별거 아닌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위와 같이 살펴본 4편의 시작품에서도 알 수 있거니와,
화자는 일상의 삶 속에서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떠오른 삶의
가치에 따른 참뜻을 발양發揚함으로써 일반적인 시의 감성
으로부터 탈출함은 물론 삶을 비감성화非感性化 시키면서 근
원적인 삶을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3. 야성野性으로의 반전反轉
인간은 의사소통 수단으로 언어를 가지고 있다. 그 언어
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고 의사를 소통한다. 그런 가운데 언
어가 가지는 소리와 의미로 임의적인 사회적 약속 속에서
이전에 없던 말로 무한한 가치를 창조하는 능력을 가진다.
따라서 “인간은 그의 마음과 언어에 의해서만 가치가 주어
지는 그런 존재이다. 그것을 빼면 인간에게는 피에 젖은 보
잘 것 없는 육체의 성城밖에 남는 것이 없다”(C.V.게오로규의
《마호메트의 생애》 중에서)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가운데 시는
야성野性 그대로를 가진다. 자연 또는 본능 그대로의 성질
을 가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는 언제나 시 자체만을 위한
표현으로 창조되고 앞으로도 그렇게 탄생되어질 것이다.
몇 편을 임의로 뽑아 살펴보기로 한다. 202
근질해지기 전 미리 긁어줘야겠다/땅 위에 쑥쑥 자란
쑥을 캐는데/손주 손녀의 여린 몸이 생각났다/키가 크려
면 연골 마디가/근질거리기 마련이고/아무렇지 않다가/
갑자기 생장통을 느끼잖은가/봄이면 쑥대밭 되는 묵정
밭/풀만 자라는 거 같아 눈길을 주지 않았지/마음 돌려
자주 둘러보니/쓸모 있는 동반 약초 식물들이 지천이다/
냉이 캐고 나니 쑥이 쑥쑥/우슬뿌리 캐노라니 꾸지뽕나
무뿌리가 뽕뽕/화살나무 가지를 전지하자/쏜살처럼 손
뻗친 나의 동반 사랑들/아이야, 내가 이곳에 정 두노
니/쑥 캐며 가려웠던 땅바닥 호미로 긁어주노니/아가야,
맨발로 뛰놀며 쑥쑥 크거라
- 시 「쑥쑥」 전문
이 시작품에서 ‘쑥쑥’이란 중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
다.‘쑥’이란 식물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지만, 첩어疊語로 사
용하면 의태어擬態語가 된다. 즉 ‘사람이나 사물의 모양 또
는 움직임 따위를 흉내 내어 만든 말’로 갑자기 자라거나
크는 모양을 나타내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따라서 ‘쑥’은
식물의 이름을 일컫는 것이요, 모양이나 움직임을 가리키
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화자는 이런 쑥을 캐면서 ‘손주
손녀의 여린 몸이 생각났다’는 것이다. ‘쑥’은 언어의 상대
적인 존재, 즉 시의 대상이 되어 있지만, 이를 시속에 창조
되어 ‘손주 손녀의 여린 몸이 생각났다’는 것이다. 이는 화
자의 이쪽에서 야성 그대로를 본능 그대로의 성질로 환치
되면서 ‘손주 손녀’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된다. 그 사랑은
곧 ‘키가 크려면 연골 마디가/근질거리기 마련이고/아무203
렇지 않다가/갑자기 생장통을 느끼’면서 구체적으로 확산
된다. ‘봄이면 쑥대밭 되는 묵정밭/풀만 자라는 거 같아 눈
길을 주지 않았지/마음 돌려 자주 둘러보니/쓸모 있는 동
반 약초 식물들이 지천’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곧 시가
가질 수 있는 궁극적인 가치 기준을 고양해 주는 역할을 하
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쑥’에 만 머
문 것이 아니라 ‘냉이 캐고 나니 쑥이 쑥쑥/우슬뿌리 캐노
라니 꾸지뽕나무 뿌리가 뽕뽕’, 즉 ‘쑥쑥’이 ‘뽕뽕’으로 확
산되면서 첨어가 가지는 리듬 감각을 솟아나게 하면서 첩
어가 가지는 리듬감으로 촉진 시켜주어 시에서 맛볼 수 있
는 즐거움을 한층 드높여 주고 있다.
이 시는 서사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화자는 어느 날 성
장할 때의 간지러움을 느끼면서 ‘땅 위에 쑥쑥 자란 쑥을 캐
는데/손주 손녀의 여린 몸이 생각’을 하게 된다. 갑자기 성
장통을 떠올린다. 그러다 보니 그동안 ‘풀만 자라는 거 같
아 눈길을 주지 않았지/마음 돌려 자주 둘러보니/쓸모 있
는 동반 약초 식물들이 지천’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발견하
게 되고, 이로 인하여 ‘봄이면 쑥대밭 되는 묵정밭’을 확인
하게 된다. 그리하여 ‘꾸지뽕’으로 ‘뽕뽕’ 전이됨은 물론 ‘화
살나무 가지를 전지하자/쏜살처럼 손 뻗친 나의 동반 사랑
들’까지도 만난다. 그리하거니와 어찌 화자의 소망이 피어
오르지 아니하겠는가. ‘아이야, 내가 이곳에 정 두노니/쑥
캐며 가려웠던 땅바닥 호미로 긁어주노니/아가야, 맨발로
뛰놀며 쑥쑥 크거라’고 빌어본다. 이 ‘쑥쑥’이라는 시작품
이야말로 시가 가지는 모든 시적 요소와 함께 서사적 구조204
로 시적 가치를 높여주고 있거니와, 이 시집 『굴포운하』에
서 가장 돋보이게 하는 작품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화자는 말한다. 발걸음 곁에 피어난 「오이꽃」을 예리한
시선으로 ‘무슨 설움 갖고 태어났을까//온몸 가시 품은
채//무슨 사연 그리 많았을까//꼭지에 노란 별 매단 채//
누굴 기다리고 있을까//뾰족뾰족 독이 올라 약 오른 채’(시
「오이꽃」 전문) 피어나고 있음을 바라보면서, ‘시간에도 틈이
있다//당신과 나 사이//하늘과 바다처럼//풀과 꽃처럼//
간극間隙의 거리 닮은 뜸//세월에도 틈이 있다//당신과 나
사이//주름과 주름처럼//생각과 생각처럼//좀처럼 좁혀
지지 않는 틀’(시 「당신과 나 사이」 전문)에서처럼 삶의 간극을 발
견하기도 한다. 특히 ‘번지다 번지다/퍼지다 퍼지다/찍힌
점 하나 눈물 점 하나//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
까/묵향이 국민의 목소리 되어 함성으로 번질 때/나는 당
신의 목덜미와/나는 당신의 귓볼에서 흐르는/서러움 한
방울 닦아줄 수 없는 짝사랑입니다’(시 「묵향墨香」 전문)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화선지 위에 ‘찍힌 점 하나 눈물점 하나’
하나가 「묵향墨香」으로 번지어 마침내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묵향이 국민의 목소리 되어 함성으로 번질
때’ 엄청난 삶이 펼쳐지는가 했더니 화자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와 ‘나는 당신의 목덜미와/나는 당신의 귓볼에서 흐르
는/서러움 한 방울 닦아줄 수 없는 짝사랑입니다’라 말하
는 이러한 시적 반전反轉은 화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시를 함께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보여
주는 화자의 야성野性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4. 밝은 세상으로의 지향志向
시의 소재를 찾기 위해서는, 무엇을 쓸 것인가를 위해서
는 우선 무엇인가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관찰
하여야 함을 우선으로 하고, 자기가 알고 싶은 대상 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에서 무엇을 찾아 나서
고, 무엇을 찾아 안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의한 정신작용에
따르기 마련이다. 좋은 시는 좋은 시의 소재와 만남의 순간
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많은 시인들은 새로운
소재를 꾸준히 준비하려 한다. 그 소재를 찾기 위하여 낯선
곳으로의 발걸음을 재촉하기도 하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자아 성찰의 철학적 사고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
다. 그래서일까. 시집 『굴포운하』 시작품에서 여러 지명이
시의 제목으로 나오고, 현실적 삶에서의 자기성찰의 모습
을 보이기도 한다.
곁에 있던 당신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습니다/탑새기*
처럼 둥둥 떠다니다가/하루살이 되어 장난을 치기도 하
고/거미줄로 칭칭 감은 듯/검은 그림자로 검은 구름으로
나를 괴롭힙니다/나는 당신을 잡으려야 잡을 수 없습니
다/눈동자를 움직일 때마다/눈앞에 서성이기에 내게로
온 줄 알았습니다/착각은 훨훨 날아/저 너머 바람처럼 언
덕으로 줄행랑치는 것이/내게서 잊힐 연습하는 거라 생
각했습니다/나는 이미 늙어가고 아픈 허리 뒤틀려/눈마
저 빙글빙글 중심 잡지 못하니/당신을 어찌 붙들 수 있겠206
습니까/모든 그림자는 검게/내 눈에서 당신이 멀어지듯/
치밀하여 차마 붙들지 못하고/허공에 헛손질만 하고 있
습니다/내가 이렇게 당신을 보지 못하고/실명에 이르러
야 하겠습니까
* 탑새기 : 충청도 사투리로 ‘먼지’라는 의미
- 시 「비문증飛蚊症」 전문
「비문증飛蚊症」이란 ‘날파리증’이라 하여 눈앞에 먼지나
벌레 같은 뭔가가 떠다니는 것처럼 느끼는 증상으로, 하늘
이나 흰 면 등 밝은 면을 볼 때, 하나 또는 여러 개의 점을
손으로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고, 시선의 방향에 따라 날파
리가 눈앞에서 날아다니는 듯이 보이는 일종의 질환이라
고 한다. 10명 중 7명 정도가 경험할 정도로 상당히 흔한
질환으로, 대부분 나이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이기 때문
에 대부분 문제가 없다고는 하지만 이 증상이 나타나면 혼
란스럽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화자는 이 비문증으로 인하
여 ‘곁에 있던 당신이 보이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눈앞에
서 ‘탑새기처럼 둥둥 떠다니다가/하루살이 되어 장난을 치
기도 하고/거미줄로 칭칭 감은 /검은 그림자로 검은 구름
으로 나를 괴롭’히고 있다. 그러므로 ‘눈동자를 움직일 때
마다/눈앞에 서성이기에 내게로 온 줄 알았’고, 그 ‘착각은
훨훨 날아/저 너머 바람처럼 언덕으로 줄행랑치는 것이/
내게서 잊힐 연습하는 거라 생각’하기도 한다. 이는 곧 현
실에서 멀어져 있는 화자의 내면적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직시하고자 하는 눈 뜬 자의 고독한 삶의 한 모습이라207
고도 할 수 있다. 화자는 ‘나는 당신을 잡으려야 잡을 수
없’으며 ‘눈동자를 움직일 때마다/눈앞에 서성이기에 내게
로 온 줄’로 ‘착각’을 하여 ‘저 너머 바람처럼 언덕으로 줄
행랑치는 것이/내게서 잊힐 연습하는 거라 생각’하기도 한
것이다. 이는 곧 현실에서 멀어지고 있는 자기소멸 또는 자
기 해체의 모습이다. 화자는 마침내 ‘나는 이미 늙어가고
아픈 허리 뒤틀려/눈마저 빙글빙글 중심 잡지 못하니/당
신을 어찌 붙들 수 있겠’느냐고 자포자기에 이른다.
‘모든 그림자는 검게/내 눈에서 당신이 멀어지듯/치밀
하여 차마 붙들지 못하고/허공에 헛손질만 하고 있’는 자
아의 발견, 그리고 ‘내가 이렇게 당신을 보지 못하고/실명
에 이르러야 하겠습니까’하고 모순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
는 현대인의 절망에 찬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자기소멸 또
는 자기 해체의 삶을 지향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의
비극적 현실의 생존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화자는 현대적 삶의 생존방식으로 ‘지금은 과거
는 묻지 않고 말하지 말자//내일도 말하지 말자/내일은 없
으니까 우리는/오늘만 살자 해서 꼭 붙들고 다녀/진정 사
랑하는 아우에게 할 말 있네/늙은이 푸념이라 생각해도 좋
으니/내 말 꼭 들어주게’(시 「육성肉聲, 오늘만 살자」 끝부분)고 말했
다가도 ‘주변을 살피며 느리게 느리게 걷고 싶다/느림의
미학을 느끼며/오래도록 진한 감동을 주는, 어쩌면/참 바
보 같은 사람이 되어 보는 것도 재미있다’(시 「육성肉聲, 오늘만
살자」 끝부분)고 역설적으로 긍정적 삶의 방식을 지향하고 있
다. 이에 따라 화자는 ‘난 주중이 좋아요/남들 다니지 않고 208
일할 때/골라서 놀러 다니려고요/어떡하면 편히 인생 즐
길 수 있을까/그러려고 매일 술래잡기 놀이에 매달려요’(시
「오늘도 나는 술래」 끝부분)에서 와 같이 밝은 세상을 지향하고 있
음을 보여주고 있다.
■ 나오면서
지금까지 필자는 오영미 시인의 91편의 시작품과 함께하
면서 ‘과연 시란 무엇인가’를 하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
다. 오영미의 시는 이미 우리의 삶 속에서 이미 익숙해져 있
고 이미 단련된 삶의 방식으로부터 가까운 곳에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명백한 현실에 비하여, 보다 무엇인가 비현실
적인 삶을 요구하면서 그것을 시 속에 용해鎔解시켜 놓고 있
다. 그렇다면 언어의 한 방법에 의하여 재구성하여 이룩한
또 다른 삶의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가운데 시인 오영미는 자기 자신이 설계하여 이룩한 언어
의 성城 안에서 삶을 어떻게 육성하고 있으며, 어떻게 활성
화하여 향유하고 있는가를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무릇 시는 시인의 정신 영역 속에서 숙성시키고 발
효시켜 이룩한 언어의 성城 안에 굳건하고 내밀內密한 성역聖
域을 구축해 놓고, 견고하게 향유享有하고 있는 가운데 어엿
하게 자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인 오영미가 긍정적
으로 시인이란 이렇고, 시란 이렇다고 축성 해놓은 언어의
성城이 더욱 견고해지고 찬란해지기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