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여인 연주곡
그 시절 롯데에서
롯데에 들어가 2달이 지났을 때 그룹연수가 시작되었다. 지금 내가 사는 대전을 그룹연수 과정 중에 처음으로 밟았다.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를 빌려서 한 그룹연수는 그 당시로서는 참 독특한 방식이었다. 어디 그룹을 가든 창업주의 신화 같은 이야기부터 연수는 시작을 한다. 롯데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에서 롯데의 신격호 회장이 맨 처음 한 사업은 커팅오일 생산이었다. 하지만 폭격을 맞아 공장이 불타고 말았다. 몇 번의 실패 끝에 화장품을 만들어 돈을 벌기 시작했고 그는 추잉 껌이라는 운명적 만남을 통하여 성공을 한다. 이어서 맛의 예술품’이라 불리는 초콜릿 기술을 터득하여 요즘 말로 일본에서 대박을 터트린다.
1976년 신격호는 기존의 주식회사 롯데와 롯데화학공업사를 해산하고 새로 자본금 3000만 원을 투입해 롯데제과주식회사를 설립함으로써 한국 롯데그룹의 새 역사가 시작됐다. 신격호는 한국 롯데 사장을 맡으면서 대표이사 회장 자리에는 유창순씨를 추대해 롯데제과의 경영을 맡겼다.
사회와 처음 마주한 나는 연수교육에 유창순 회장이 직접 참여하여 너무 놀라웠다. 그는 그 무렵 경제부총리를 지냈으며 1982년도에는 국무총리까지 역임한 분이다. 그의 당찬 포부에 담긴 말 하나하나에 나는 감격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롯데와의 인연 (그 소설집의 여주인공이 바로 롯데다.)그리고 가난한 유학생 유창순과 신격호 회장의 만남에 대한 일화는 삶에 대한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으며 내가 롯데에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생각나는 그의 말, "여러분 트럭 한 대에 껌을 몽땅 실으면 얼마가 될 것 같습니까.70만원 밖에 안 합니다. 다 남아도 70만원입니다. 그렇게 한 푼 두 푼 모으고 어렵게 노력을 해 지금의 롯데를 만든 겁니다. " 그렇게 시작한 롯데인데 요즘 항간의 뉴스는 온통 롯데의 탈세이야기다. 사실 나의 롯데와의 인연은 꽤 오래전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던가 옆집 누나 남편이 롯데제과 사장 집 운전사였는데 그가 찝차를 끌고 안양을 찾았을 때 웬 나비넥타이를 맨 아이들을 줄줄이 데리고 와 포도를 주면서 내게 소개시켜 주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키 큰 아이는 거의 한국말을 못했던 것으로 기억되는 것이 그들이 항간에 나도는 유명한 그들이 아닌가 싶어진다. 그 매형 덕으로 나와 친했던 옆집 형은 해군을 제대하자 바로 양평동에 공장에 취직을 했다고 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유창순 회장, 힘겹던 유학시절을 마친 그는 한국은행 도쿄지점장으로 부임했고 그 무렵 재일 한국인 사업가 신격호를 큰손 예금주로 다시 만났다. 당시 관계· 재계· 정계에 폭넓은 대인 관계를 가진 유창순은 회장 취임 이후 14년 동안 한국 롯데 성장의 큰 기둥 역할을 했다.
당시 일본 모리나가와 과자업체 쌍벽을 이뤘던 롯데는 일본에서 돈을 벌어 한국에서 군수품제조를 하려고 한다는 상대의 공세에 휘말려 당시 마음을 먹었던 중공업 분야를 포기하였으며 그 바람에 일본에서 껌 매출액만 줄었다고 그가 말했다. 지금도 내가 알기로 롯데가 중공업분야에는 투자를 안 하는 것이 다 그런 연유가 있는 것도 같다.
그런데 배포된 연수일정 시간표상에는 마지막 날 하루일과가 빈칸으로 되어 있었고 저녁만찬만 기재되어 있었다. 당일 날 아침 구보를 하고 나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롯데쇼핑 작업복 복장으로 모두 갈아 입게 하고 조별로 버스에 오르도록 했다. 버스 안에서 준 상품은 철 지난 앨범, 양산, 샤프... 그런 제품으로 우리를 어딘가에 투입을 해 물건을 팔아서 그 돈으로 점심도 먹고 차비도 해서 6시 이전까지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일 이른 시간 내 돈을 제일 많이 남긴 조에게 그때 돈 30만원을 부상으로 준다고 했다. 생전 처음 가는 대전시내 한복판인 흥명상가에 마치 죄수 마냥 롯데쇼핑센터 번호 달린 이름표를 달고 땡전 한 푼 없이 활보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마음은 사나운 일이었다. 우리 팀은 효율을 높이자고 두 패로 나누었는데 한 패는 텍사스 촌이라는 창녀촌동네로 잘못 들어가 모자를 여자들한테 빼앗기는 상황도 발생되었다.
한 사람이 기지를 발휘하여 병원을 하는 선배를 찾아내 물건을 반강제적으로 떠넘기는 활약에 힘입어 우리는 2등을 했다. 이후 이런 식의 연수는 대기업마다 펼쳐졌는데 예를 들면 사람이 제일 많이 모이는 곳에서 일장 연설을 하게 하던지 깜깜한 오밤중에 산에 올라 묘 근처에서 정해진 물건을 찾아오는 것 같은 담력 키우는 테스트를 꼭 연수교육에 끼워 넣었다.
이런 방식은 일본을 모방해 우리나라에 들여온 것들이다. 내 근무처는 당시 일본 사람들이 들어와 관리를 하였는데 당시 회사가 적자로 경영성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적자 업체를 흑자로 만든다는 것, 쉬운 일은 아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적자를 줄이고 흑자를 내는 데는 전적으로 소속한 사람들의 업무 자세하고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내가 롯데를 그만 두게 된 것은 당시 부여 조폐창에 발령이 나 그만둔 것이다. 건설회사에서 현장 나가는 게 당연한 것인데 그것을 마다한다면 당연 그만 둘 수밖에는 없다. 사실은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자꾸 벌어져 겁이 나 떠나기로 한 것이었다. 당시 0과장은 내가 싹싹해 보였는지 당시 롯데냉동, 롯데제과 현장을 자주 데리고 다녔다. 한창 도면을 보던 때라 현장구경은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현장에 가면 거기서 업무가 끝나는 것이 아니고 꼭 저녁 때 업자를 만나고 여자 있는 술집을 가는 것이었다. 앉히는 여인들은 나이 역순으로 앉혀서 내 차지는 꼭 늙은 마담이었다. 이렇게 물드는구나 하는 아득함이 우선 나는 두려웠다. 하루는 아래층에 내려가 서류를 받아오라고 해서 내려갔는데 만난 사람은 며칠 전 술집에서 만난 업자였으며 필시 돈뭉치로 보였다.
회사는 적자라고 직원들을 독려하고 야단인데 참으로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살펴보니 하청업체를 자기가 운영하면서 다른 사람 명의로 해놓고 일감을 주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업체와 짜고 도급금액 내역을 올려서 발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 부서에서도 편이 갈려 윗사람에게 잘 보이며 실속을 챙기는 사람과 근면한데 요령이 없는 듯 늘 따로 취급을 받는 사람도 있었다. 건설의 세계가 이렇구나 싶으니 마음이 불안해지고 조바심까지 이는데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조폐공사 발주에 많은 펌프가 소요되며 이 펌프들은 건설업체가 직접 납품하기로 했는데 0과장의 소개로 만난 펌프회사 부장님은 간이 대단히 부은 사람이었다. 5마력 짜리 펌프를 10마력으로 용량 선정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제품에는 10마력으로 써 붙이고 실제로는 제 용량인 5마력을 납품하겠다는 것이었다. 어이없는 그의 말에 소름이 돋는 상황인데 그는 태연히 윗사람들하고 이야기가 잘되었다고 하며 나를 부추겼다.
그런데 그 다음 날부터 0과장이 나를 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다. 현장도 데리고 가지 않았으며 말도 줄이고 잘 웃지도 않았다. 그 분의 이해 못하는 행위는 그것 말고도 또 있었다. 그때는 토요일도 근무를 하던 때인데 하루는 아침부터 그분을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방금 자리에 계셨는데 안계시니 다음에 전화를 하시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그 통화 내용을 들은 김대리가 부리나케 쫓아왔다.
다시 전화가 오면 충주공전 현장에 나가서 가을이나 되어야 복귀가 가능하다고 말을 하라는 것이었다. 조금 전 까지도 본 과장님을 그렇게 말하라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전화를 걸어 온 여자는 그의 부인이었다. 그는 그러니까 몇 달째 집을 안 들어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몇 달은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런 과장님은 차장님하고 사이가 너무 안 좋았다.
하루는 차장님이 나를 불러 업무 말고는 다른 것은 무시를 해버리라고도 했다. 그쯤 나는 서서히 그만 둘 생각을 했으며 다행히 81년 봄 대기업들의 공채 모집이 나왔다. 그리고 다른 직장으로 옮기고 나 2년쯤 지나서다. 종로에 롯데 내자호텔을 짓다가 보온재로 인한 화재 소식이 뉴스로 나왔다. 그 뉴스에는 내가 많이 듣던 한 분의 이름이 껴 있었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 당시 차장이던 분은 나중 본부장까지 되었다는 소리를 어디서 듣기는 했는데 이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당시 김대리는 은광여고 옆에 말죽거리 비닐하우스가 자기네 것이라 했으니 지금쯤은 떼 부자가 되어 있지 않을까. 당시는 얼굴이 빨개지고 만 이야기였는데 그 과장님은 단골식당에서 손에 대일밴드를 부친 여인에게 야! 세련됐네. 멘스를 손에서도 하는가 봐.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뜸 한마디 했었다.
매사 걸쭉하고 능청이 넘친 과장님은 속 차려 집으로 무사귀환 하여 본부인과 백년해로 하고 있지 않을까. 바람은 어디까지나 바람, 나이 들어서는 조강지처만한 존재는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는 없다. 나의 첫 직장은 아쉬움만큼이나 어찌 살아야 하고 산다는 소중함에 대한 많은 산 경험을 고스란히 남겨주었다. 35년도 지난 지금 그들은 모두 내게는 주현미의 ‘신사동 그 사람’ 노래처럼 모두 그리운 존재들이고 가고 싶은 그 시절의 제3 한강교 바로 건너 신사동 사거리, 잠원동 동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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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순씨는 그의 화려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한국은행 총재, 상공부장관, 경제기획원장관, 국무총리, 적십자사 총재 등을 역임했다. 그리고 재계에서는 전국경제인연합회장, 롯데제과 회장을 했다. 내가 아는 그에 대한 일화가 하나 있다.
1980년대 중반 롯데그룹의 자회사와 거래를 하던 거래자가 위험에 대비하여 모회사 격인 롯데제과(주)의 보증에 추가하여 그 회사 회장인 유창순 씨의 개인보증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롯데그룹의 실질적 오너는 신격호 씨이지만 그는 주로 일본에 머물고 있었기에 상징적인 의미에서 유씨의 보증을 요구했던 것인데 그는 거부했다. 이유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나는 고용 회장인데 뭐 이런 것까지" 하였을 것이다.
외국 금융기관에서 보증을 요구하면 아무리 재벌이라도 이유 없이 가져오던 시절이었다.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 같은 분은 수십 조원 규모의 보증서를 찍어주었기에 아마도 얼마나 발행했는지는 본인 자신도 잘 몰랐을 것이다. 보증서는 까다롭게 응해야 원래 값어치가 있다. 주력업체로서 신경을 써야 한다는 의미가 더 컸다.
거래자는 수차 요구했더니 결국은 보증에 싸인을 해주었다. 그리고 몇 년 후 그가 롯데그룹을 떠나게 되자 보증서를 회수하기 위하여 직원을 보냈다고 한다. 그룹의 회장을 하신 분들 중 이렇게 철저하게 관리하는 분을 처음 보았다고 그는 회고 했다. 우리는 이런 류의 보증서를 Moral Support(도덕적 책임)라 부른다. 그는 진정으로 도덕적인 책임을 진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