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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합 왕 시대에 선지자 엘리야의 등장이 갖는 의미와 하나님께서 그의 입을 의탁하여 선포하신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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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2)
- 선지자 엘리야의 등장과 선포 -
열왕기상 17장 1절 /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인 아합이 통치하던 시기에 엘리야를 선지자로 등장시키신 까닭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합은 유다 왕 아사 제38년에 이스라엘 왕이 되어서 22년을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였습니다. 그런 그는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를 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바알은 자연의 세계를 지배하는 태양의 신으로 섬겨지고 있었는데 비와 풍년을 가져다준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아합이 바알 사당을 세워 바알을 비와 풍년의 신으로 섬기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는 길르앗 지역의 디셉 마을에서 선지자 엘리야를 아합에게 보내어 그의 입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어 선포하게 하였습니다.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신 분이심을 말하며 그 하나님을 걸고 맹세하여 말하였습니다. 앞으로 자신이 다시 비가 오도록 기도하기 전에는 이스라엘 땅에 수년동안 비는 물론이고 이슬조차도 전혀 내리지 않는 무서운 재앙이 있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합 왕 때에 있은 가뭄의 재앙은 3년 6개월이란 긴 기간에 걸쳐서 있게 되었습니다. 이 긴 가뭄의 재앙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물과 양식의 고갈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고통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참으로 사는 것이 힘들 수 밖에 없으며 때로는 죽는 것이 평안하다고 여길 만큼 고생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재앙은 왜 있게 되었으며 어떤 성격으로 있게 된 것일까요? 이스라엘 땅에 있은 3년 6개월의 긴 가뭄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로 주어진 재앙이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선포한 이 재앙이 아합이 바알을 숭배하여 이스라엘로 하여금 섬기게 한 때에 있게 된 사실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바알 숭배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을 포기하고 가나안의 종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바알 숭배는 다윗의 씨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해 나가시려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무산시키려는 간악한 사단의 공작에 따른 것임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세벨의 꾀임을 받아 아합 왕이 이 일을 주도해 나가고 있으며 이스라엘 전체가 바알을 숭배함으로써 남왕국 유다인과 똑같이 다윗과 맺은 언약 안에 있음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적 관계’를 배반하여 깨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언약적 관계를 지속해 나감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누릴 복을 받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언약적 관계를 깨뜨려 배반할 경우는 저주를 내리실 것이라는 사실에도 주목하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지금 선지자 엘리야를 통해서 선포되고 있는 긴 가뭄의 재앙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를 깨드리고 배반한 데 따른 하나님의 저주로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선포되고 있는 하나님의 저주로 주어지고 있는 재앙과 이를 선포한 엘리야 간에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엘리야라는 이름의 뜻은 ‘나의 신(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입니다. 지금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떠나 잊고서 사는 사람들 앞에, 바알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면서 다만 육체의 정욕을 좇아서 사는 죄악의 사람들 앞에 ‘나의 신(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라는 이름의 선지자가 나타나서 재앙을 선포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엘리야가 섬기는 신이 하나님이시라면 이스라엘 백성이 섬기는 신 또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리야의 활동을 보면서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떠올리게 되고, 하나님의 그 거룩하심 앞에서 그들의 수치스러운 죄악상이 낱낱이 드러나 자신들의 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에 가히 그 충격은 큽니다.
더욱이 선지자 엘리야는 이스라엘 땅 전역에 그가 비가 오기를 기도하는 일을 하지 않는 한에는 다시는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며 이슬조차 볼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함으로써 이제 온 이스라엘이 겪는 심한 기근과 기갈의 재앙이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를 한 결과인 하나님의 저주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사실을 선포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충격은 가중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합의 통치를 따라 지은 죄는 이제까지 어떤 선대 왕들을 따라 지은 죄보다 큰 것이었습니다. 과거 솔로몬은 나이 들어 예전과 같이 지혜롭지 못하여 자기의 아버지 다윗처럼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거슬리는 일을 하였는데 이방여인들을 가까이 두었습니다. 그 결과 이방여인들의 꼬드김에 빠져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솔로몬은 시돈 족속의 여신 아스다롯과 암몬 족속의 우상 밀곰, 모압 족속의 우상 그모스와 암몬 족속의 우상 몰렉을 위하여 예루살렘 동족에 있는 산 위에 산당을 지어 그의 아내들이 자기들의 신에게 분향을 하고 제물을 바칠 수 있게 배려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솔로몬에게 두 번씩이나 나타나셔서 이방신들을 섬기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하나님의 이 명령을 어기고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크게 진노하셔서 솔로몬에게 벌을 내리셨는데 그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으므로 그의 통치권을 빼앗아 그의 신하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행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다윗을 생각하셔서 그의 생전에는 참고 있다가 솔로몬의 아들이 왕 위를 이어 받았을 때 그렇게 하셨으며, 다윗과 약속한 것을 생각하고 또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영원한 도성으로 선택한 것을 생각해서 유다 지파를 그의 아들에게 남겨 두었습니다. 그에 따라서 르호보암 때에 이스라엘 왕국은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갈라졌으며 유다와 베냐민 지파만 남왕국 유다에 남고 열 지파는 모두 여로보암을 좇아 그를 왕으로 추대하고 북왕국 이스라엘을 이루어나갔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된 여로보암은 하나님을 금송아지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여 벧엘과 단에 두고 섬기게 하였으며 전국 각처에 산당들을 짓고 레위인이 아닌 일반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아 섬기게 하였습니다.
이 여로보암의 악행은 후대 왕들이 좇는 죄악의 본이 되었습니다. 후대의 왕들이 여로보암이 한 일들을 좋게 여겨서 따라 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로보암을 좇아서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그러한 우상숭배는 혼합 종교의 성격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형상화 하지 말라는 제2계명을 어기면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제1계명을 거슬리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는데 하나님을 우상화하여서 섬겨 나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다른 우상들을 함께 섬기는 종교 정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합이 저지른 우상숭배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아예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을 쫓아내고 우상 바알이 하나님의 자리에 들어와 앉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합은 율법의 첫 번째인 “나(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부터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합 왕의 마음에 있지 않기에 아합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고 섬기는 일을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엄하신 말씀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법의 첫 번째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두고 섬기는 일을 하였습니다. 아합은 혼합 종교도 아닌 처음부터 여호와 종교에서 떠나 바알 종교를 섬겨 나갔습니다.
그럼으로써 아합과 그를 왕으로 두고 좇는 모든 이스라엘은 이방인 가나안을 섬기는 가나안의 종이 되었습니다. 본래 가나안 족속은 함의 후예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족속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족속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가나안 족속의 아비인 함이 셈과 야벳과 함께 노아의 자손이었으나 그 아비 노아를 욕보인 일로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될 것이라는 예언에 따라서 함의 후예인 가나안은 그 형제 셈과 야벳의 종이 되었습니다. 함의 아들 중에 가나안만 저주를 당한 것입니다. 함의 아들인 가나안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그 삶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이 단지 육체의 정욕으로 색정을 좇아 음란하게 살았습니다.
이러한 가나안의 저주받은 삶은 바알과 아세라의 숭배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인하여 가나안 족속은 셈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셈의 후예인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들어오게 하셨고 이곳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이루게 하여 가나안 족속이 하나님이 저주하신 대로 영원히 이스라엘을 섬기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을 거스려 오히려 가나안의 종으로 들어가는 일을 아합이 한 것입니다. 그것도 말입니다. 아합 스스로가 바알을 받아들이고 그 바알 앞에 나아가 제사를 드려 무릎을 끓어서 말입니다. 그렇게 바알에게 복종하고 바알에게 속박되는 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이 다 함께 바알에게 복종하여 그의 종이 되어 섬기게 하였으며 나아가 가나안의 종이 되어 섬기게 하였고, 그 배후의 실세요 조종자인 사단의 종이 되어 섬기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아합과 이스라엘 앞에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엘리야의 등장은 이스라엘 앞에 “나[이스라엘]의 섬기는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는 그들은 엘리야의 활동에서 그동안 그들이 외면하고 떠나 있던 하나님을 봅니다.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으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의 마음에서 떠나 있고, 그래서 마음속에서 죽어 있는 하나님이 사실은 그들의 곁을 떠나 있으며 그들의 마음에 죽어 있는 대로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참 하나님’으로 그들 눈앞에 나타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의 등장은 아합과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책망하는 것이요 여호와 종교의 신앙을 회복시켜서 바알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바알 종교를 신앙하는 가나안이 이스라엘의 종이 되어서 섬기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엘리야의 등장은 또한 바알을 심판하는 일을 하십니다. 아합과 이스라엘이 바알을 비와 풍요의 신으로 숭배하고 있기에 사실 이스라엘의 생명을 살펴 보호해 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전역에 3년 6개월의 긴 세월을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게 재앙을 내리시는 일을 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은 참 신이십니다. 이 하나님에게서 생명의 힘이 나옵니다. 비를 내리시고 비를 오지 않게 하는 신은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바알 우상보다 강하십니다. 그 사실을 이스라엘은 기근과 기갈의 재앙이 가져다주는 고통을 겪으면서 아주 절실히 알 수 있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서 기근과 기갈의 재앙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여 그들의 죄를 엄히 물어 징계하여서 죄를 깨달아 알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불러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겪는 기근과 기갈의 재앙은 바알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바알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하여 자유한 자가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게 구별 받은 자답게 살게 하십니다.
우리는 아합의 죄악과 함께 선지자 엘리야의 등장과 하나님께서 그의 입에 의탁하여 선포한 말씀에서 다음의 사실을 교훈 받습니다. 이와 관련하여서 볼 수 있는 구절을 여러 곳에서 취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요한계시록 2장 20-23절에서의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말씀과 에베소서 4장 17절-5장 20절을 그 성경 구절로 삼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말씀에서 우리는 다음의 경고를 받습니다. 신(新) 이세벨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그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을 별거 아닌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닌 것처럼 스스럼없이 말하여 성도를 미혹하고 실제 그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짓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세벨의 미혹에 성도들은 쉽게 넘어갑니다. 당시 두아디라 교회에 침투한 이세벨은 스스로 자신을 선지자라고 말하고 다니면서 주님의 종[주님을 섬기는 자]들을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 앞에 바쳤던 제물을 먹게 하였습니다. 당시 두아디라 지역에는 각 직종마다 잘 발달된 ‘동업조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업조합에는 그 나름대로의 수호신을 두고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직종에 종사하든지 동업조합원은 그 조합의 수호신을 섬겨야 했습니다. 동업조합은 매년 자신들이 섬기는 수호신을 섬기는 축제일을 가졌는데 이때에는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행합니다. 그런 후에는 우상에게 바쳐진 그 제물을 나눠 음식을 먹는데 이때에 행음의 파티가 벌어집니다. 그것은 이방의 제사에는 여자들이 수종드는데 그 여자들과 통간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상 제물을 먹고 행음하는 것이 이방의 세계에서는 보편적인 풍속으로서 그 시대에서는 아무런 죄악이 되질 않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서 두아디라에 살고 있는 사람은 어떤 직종에서 종사하든지간에 우상제물을 먹는 것과 행음을 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일을 하고 살아가려면 관련이 안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에게서 우상을 섬기는 축제일에 참가하고 우상제물을 먹고 행음을 하는 것은 배신(背信)하는 것이요 배교(背敎)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꺼려할수 밖에 없고 극도로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이세벨이 교회에 들어와 성도들에게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이나 행음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소위 두아디라 주민이고 동업조합원으로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처신하는 것이지 그게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막는 것도 아니고 이미 영혼의 구원을 받았는데 그런 행위가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라는 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세벨의 말에 주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은 쉽게 미혹되어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행음하고 우상제물을 먹는 악을 행하여 그들의 주이신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쉽게 이세벨의 미혹을 받아 죄악을 저지른 것은 이세벨이 자칭 선지자임을 말하면서 행음과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이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한 거짓 가르침을 따른 데 있기도 하지만 사실 그와 같이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른 것은 그들 자신들이 탐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세벨의 미혹이 왔을 때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호응을 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는 이 더럽고 탐욕스런 사람은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보다는 이 세상의 것을 더 사랑하고 숭배하는 그는 우상숭배자인데 이런 그가 세상에서는 그리스도를 배척하며 우상숭배자로 살고 장차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탐심에 사로잡혀 있던 우상숭배자!, 성도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아 성도로 부르심을 받기 이전에 본래의 모습은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랬던 성도는 자신들이 이제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받은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압니다. 죄에서 구원받아서 다시는 정죄가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이렇게 정죄가 없기 때문에 죄가 자신들을 어떤 악행으로 이끌어갈지라도 그 죄가 자신들을 결코 멸망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렇기에 다시 또 구원받기 전의 사람인 그 옛사람의 모습을 띠고서 다시 악을 행하여 죄를 지으면서 살고 싶은 그런 마음은 이제 없어야 합니다. 이제는 칭의를 입었기 때문에 의의 사람으로 살아갈 일들이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남은 날을 세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활을 요구받고 있는 성도는 더 이상 구원받지 못할 자들이 사는 방식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행음을 하고 우상제물을 먹는 것을 비롯하여 육체의 정욕을 좇아서 살던 악한 모습인 옛사람은 부패한 자화상 아니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이제는 새사람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옛사람과 전혀 다른 새사람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하고 새사람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면서 사는 것이 나쁘고 그래서 악한 것인지를 압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참으로 좋고 그래서 선한 것인지를 압니다. 옛사람이 자기의 탐심을 좇아서 사악한 마귀의 이용을 받아서 행음하고 우상제물을 먹고 거짓말을 하여 남에게 상처를 입히고 분을 내고 도둑질을 하고 독설을 하고 멸시하고 비난하고 저급한 말을 일삼고 하던 것을 이제 새사람이 되었는데도 그래서 새사람인 지금도 그대로 하면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이 얼마나 선한 분인지를 이야기하고 감사를 드리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향기로운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바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다른 사람을 한마음으로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된 아합이 선대 왕을 좇아서 우상숭배 하는데, 이방 여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탐욕을 좇아서 쾌락을 즐기는데 빠져 바알을 섬기고 이를 이스라엘 전역에서 행하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종교에서 떠나게 한 그 죄악의 현장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 재앙을 선포하게 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내리시며 살아 계신 참신 하나님을 나타내 보여 나가신 데서 오늘날 우리는 이를 교회적인 교훈으로 받습니다. 우리는가 하나님을 살아 계신 참 신으로 보고 있어야 하고 그 의식을 잃지 말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대에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새로운 이세벨의 침투에 따른 거짓된 가르침에 항상 주의하고 우리 자신의 삶을 항상 하나님 나라적으로 살아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