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신라의 불교 (263/479~661)
1. 신라 불교의 도입과 신라 불교의 특성
신라 불교의 출발은 민중불교 재가불교로 출발하였다. 신라 불교의 도입 시기(263~479)를 두고도 설왕설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를 확실히 증명하게 된다. 육로로 중국을 접한 고구려와 바닷길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접한 백제와는 달리 한반도의 동남쪽 변방에 위치한 신라로서는 당시로서는 신문물의 보급처인 대륙과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관계로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낙후되어있었다. 신라는 당시로서는 신문물이자 외국 신흥종교인 불교를 접할 기회가 늦었다. 불교 도입을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 정체(政體)를 확립하여 국력 신장의 계기로 활용한 고구려 백제와는 달리 신라는 왕권 차원의 불교 도입 여건이 마련되지 못하여 불교를 통한 국력 강화는 늦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적 차원에서의 불교 도입은 늦었지만, 고구려와 백제의 접경지역을 통한 민간차원의 불교 전래는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는 신라 불교의 도입 시기를 살펴보면 알 수가 있다. 신라 불교 최초의 전래시기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학설이 존재한다.
1)제13대 미추왕(味鄒王262~284) 2년(263)에 고구려의 승려 아도(阿道)가 와서 불교를 전했다는 설,
2)19대 눌지왕(訥祗王417~458) 때 고구려의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러 불교를 전했다는 설,
3)21대 비처왕(소지왕炤知王479~500) 때 아도(阿道)와 시자(侍者) 3인과 같이 모례(毛禮)의 집에 있다가 전래가 여의치 못하자 아도는 먼저 가고 시자들이 포교했다는 설,
4) 고구려의 승려 아도(阿道)가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선산(善山)에 있는 모례(毛禮)의 집을 중심으로 은밀히 교화를 폈다는 설,
또 다른 문헌(文獻)들도 존재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눌지왕(417~458)과 비처왕(479~500) 시대라고 기록하고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서는 법흥왕(514~540) 때라고 기록하고 수이전(新羅殊異傳)에서는 미추왕(262~284) 때라는 기록 등이 있다. 어느 학설이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승려가 들어와 왕실(집권세력)의 도움 없이 정상적 외교를 통하지 않고 민중 포교를 시도했다는 점이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 전래와의 커다란 차별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포교환경이 여의찮아서 좌절의 시기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접경지역을 통한 민간불교가 자연스럽게 섭수(攝受) 되어 내려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전래시기를 두고 다양한 학설이 설왕설래하는 것을 보면 섭수불교 민중불교 전래설이 더욱 확고해진다. 시기를 두고도 213년(13대 미추왕 2년 263년~23대 법흥왕(法興王514~540)14년 527) 이상의 차이를 보이는 난맥상(亂脈相)이 나타나는 혼란을 야기(惹起)하는 것은 실질적으로는 이미 불교가 민중에 섭수되고 있는데 공식적(국가적)으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신라 불교는 왕실을 비롯한 특정 계층의 참여 없이 독자적으로 접경지대 평민을 상대로 점차 신앙 되어 오다가 민중불교로 토착화한 것이다. 신라에 불교 전래가 힘들었던 것은 지리적으로 변방에 위치하고 관계로 신문물을 접할 기회가 적어 상류 집권층들의 의식이 완고하고 배타적인 요인이 지적되기도 한다. 신라는 건국 초기부터 부족들이 모여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던 화백(和白)제도가 있어 국가의 중대사를 마음대로 결정하고 있었다. 이들 상류층 부족 중심으로 민간 토속이 강하게 전해오고 있었다. 이들 부족은 각각의 민간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각각의 서로 다른 제사(祭祀) 방법이 성행했다. 이들은 신흥종교인 불교는 민간신앙과 그 격을 달리할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새로운 세력이 형성되는 계기를 차단하기 위하여 불교 도입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실은 불교를 통한 왕권 확립과 국력 신장을 위해 불교도임을 은근히 유도하고 음성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왕실과 부족들 간의 갈등이 야기(惹起)하고 있었다. 신라라는 국호(國號)를 확정하고 왕(王)이라는 호칭(呼稱)을 도입하여 처음으로 사용하는 등 개혁의 군주로 칭송되는 지증왕 때는 왕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지증왕 때에는 아예 신국(神國)을 선포하기까지 하는데 이는 곧 기존 집권 세력 부족들의 자기 보호 행동이기도 했다. 신라의 불교 도입이 어려웠던 것은 집권 계층의 커다란 저항과 반대가 거세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라에 불교가 들어오기까지는 험난한 난관을 극복해야만 했다.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경로를 두고 여러 시차와 다양한 학설이 존재한다는 것은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려는 시도가 왕실 또는 민중에 의해서 여러 차례 있었다. 그때마다 집권 부족들과 토속신앙의 저항으로 실패를 거듭하다가 23대 법흥왕(法興王 514~540) 14년 527년에 이차돈의 순교(殉敎)로 비로소 불교를 공식적으로 수용한다. 재가인(在家人) 관리(官吏) 이차돈(異次頓)의 순교(殉敎)로 공식적으로 도입에 성공한 것이다. 이차돈의 순교는 신라 불교의 도입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불교로 자리매김한 통불교(通佛敎)가 형성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신라 불교는 213년을 거치는 과정에서 불법을 전수하는 스승 없이 민중에서 구전(口傳)되어온 관계로 뚜렷한 종파(宗派) 개념이 없다. 그럴 뿐만 아니라 민중에서 구전되는 과정에서 민속신앙과 병행(竝行)되기도 하다가 이를 수용하기도 했다. 신라 불교의 또 특징으로는 구법승(求法僧)불교이다. 수많은 수행자가 불법(佛法)을 구하기 위하여 불교 선진국인 중국으로 혹은 불교 종주국인 천축국(天竺國인도)를 향하여 구법의 여정에 나선 것이다. 신라 불교는 구법을 다녀온 이들의 수행(경험)에 따라서 종파가 형성되고 재편된 것이다. 현재 한국불교에는 헤아릴 수 없는 수백 개의 불교중단이 난립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종단은 불교 교리를 두고 대립하거나 논쟁을 벌이는 없다. 보편적인 기준에 따라 회통(會通)하고 있다. 수행과정과 의례 의식도 대동소이(大同小異)한 것으로 볼 때 종파 개념이 희박(稀薄)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한국불교에서 산신(山神)과 용왕신(龍王神)을 비롯한 온갖 신(神)들을 수용한 것은 신라 불교를 영향이라고 볼 수가 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