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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비전 인생 (2) / 하나님 은혜로 이기라!"
+ 본 문 : 고린도후서 12장 1절 - 10절(신약성경 298쪽)
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아멘!
미국의 LA 라는 도시의 남단에 있는 지역에, 오렌지카운티란 곳이 있습니다.
그 유명한 릭 워렌 목사님이 개척하여 세계적인 교회로 유명한 새들백교회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내쇼널 지오그래픽 잡지는 이 오렌지카운티를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곳 지명이 오렌지카운티가 되었을까? 하고 궁금해서 물어보았더니 이유가 있었습니다.
1850년경에 신대륙인 미국 서부에 금광이 발견되자, 사람들이 너도나도 서부로 발길을 향합니다.
그런데 서부는 사막지대가 많아 야채와 과일이 별로 없고, 자연히 신선한 과일이 부족했습니다.
그로 인해 수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그 원인이 비타민 C가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곳에 오렌지 나무를 많이 심게 되었고, 그곳을 오렌지카운티라고 부르게 되었답니다.
1497년 ‘바스코다가마’ 가 동인도로 항해하는 도중에, 선원의 약 60% 가량이 이유 없이,
죽어갔습니다. 나중에 그 이유가 밝혀지게 되었지만, 그들이 죽어간 병명은 괴혈병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랜 항해로 싱싱한 야채와 과일을 전혀 섭취할 수 없어, 비타민 C가 부족했던 것입니다.
이 사막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비타민 C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비타민 G 입니다. 비타민 G 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G 자로 시작하는 Grace,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구원도 얻을 수 없고,
이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죄인 된 우리 인생들에겐 단 하루도 살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이 비타민 G,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섭취하시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이렇게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비전 인생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약함과 강함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오히려 약해졌을 때,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는 더 풍성하게 임하고, 하나님의 영광은 더욱 드러납니다.
우리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화가로 유명하신 운보 김기창 화백이 있습니다.
이분은 8살 때, 학교 운동회 날 장티부스에 걸려 죽을 뻔했으나, 어머니의 간호로 생명을 건졌으나,
높은 열로 청신경 마비를 가져와,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 후천성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
그 후로부터 그는 그림 그리기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그림에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그 분의 작품들 중에 다른 사람에 비해 특이한 것은, 예수님의 전 생애를 그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서양인을 중심으로 한 예수 상 대신, 전통적인 한국인 복장을 한 예수님의,
전 생애를 그려서 한국적 이미지의 예수 상을 그렸습니다. 갓 쓴 요셉, 한복 입은 마리아...등등
그는 이렇게 자신의 심정을 고백했습니다. "듣지 못하면 울부짖고 싶고, 아무거나 때려 부수고,
싶어집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터질 듯한 가슴의 응어리들을 그림에 쏟았어요. 지금은 내 자신이,
귀먹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을 때가 있어요. 귀가 들렸다면 오늘의 내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죠.
고통도 있었지만, 폐쇄된 소리의 공간이 있었기에, 한 작업에 몰입, 집중할 수가 있었어요..."
이분이 귀머거리 된 것은 개인적인 엄청난 고통이었지만, 이 고통을 통과하는 중에,
그는 자신 안에 하나님이 주신 천재적인 재능을 발견했습니다. 이를 사용해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은 귀머거리라는 한 연약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위대한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사실 이 분이 위대하기보다는, 이런 사람을 쓰셔서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이 더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세상적으로 볼 때, 약하고 부족한 사람을 통해 영광 받으시는 것이 전공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이 약한 상태에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러분을 통해 영광 받으실,
준비를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묻습니다.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까?" 나름대로 여러 가지 답이 가능합니다. 그 중에서 한 가지,
분명한 답은 '내가 약해졌을 때' - 나의 그 약함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자신의 약해짐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렸던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유명한 사도 바울입니다. 오늘 본문 7절 말씀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멘! - 사도 바울의 약함은 육체의 질병이었습니다.
이렇게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스러운 것을 볼 때, 이것은 분명히 사단의 방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육체의 질병을 가시라고 표현 한 것을 보면, 엄청난 고통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였기 때문에, 너무나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너무 힘들기 때문에 바울은 이것은 '사단의 사자' 라고까지 말했습니다. 바울을 넘어지게 하고,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사단의 방해물로서, 지독한 육신의 고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문제 때문에 하나님께 나가는데 방해되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 영광 가린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습니다. 질병일 때는 더 고통스럽습니다.
이것만 없으면 정말 멋있게 주님의 일을 할 텐데, 그것이 족쇄요. 올무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원망입니까? 불평입니까? 한탄입니까? 아니면 포기입니까?
바울은 어떻게 했을까요? 너무나 견디기 힘들어서 세 번이나 주님께 이 문제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질병을 가져가 주십시오." 이렇게 처음 기도했을 때,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두 번째 기도하고, 세 번째 기도했는데, 세 번째 기도 후에야 응답이 왔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기도한 내용과는 전혀 다른 응답이었습니다. "내 육체의 가시를 없애주십시오."
하고 질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했는데, 질병을 없애주기는 커녕 "지금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니라." 하는 대답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기도응답은,
위로의 말도 아니었습니다. "종아, 힘들지. 보는 나도 힘들단다. 좀 참아라." 이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동정의 말도 아니었습니다. "지금 네가 육체의 질병으로 정말 힘들어하는 것을 보니,
나도 마음이 아프구나. 그러나 나는 네 옆에 늘 같이 있단다." 이런 말씀 좀 하시면 안 됩니까?
그렇다고 격려의 말을 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찌 보면 너무도 인정사정없는 말씀 같습니다.
나는 지금 고통스러워 죽겠는데, 하나님은 내가 그렇게 고통당하며 있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런 저런 얘기도 설명도 없이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이런 경우를 당한 경험이 참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의 상황으로 너무 고통스럽고, 이 문제로 죽을 지경인데, 기도하면 하나님은 침묵하시거나,
그냥 그대로 지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무 힘들어 하루도 못살 것 같은데 계속 견디라 합니다.
이럴 때는 참 맥이 빠지고 짜증이 납니다. 그래서 아마 신앙생활을 그만두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도 그런 응답을 받았을 때, 보통사람 같았으면 실망하고, 낙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8절 말씀을 보게 되면, 사도 바울은 오히려 기뻐하고 자랑했다고 했습니다.
그냥 기뻐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크게 기뻐했다.' 고 했고, '약한 것들을 자랑했다.‘ 고 했습니다.
보통 약한 약점은 숨기는 게 정상이고, 할 수 있으면 드러내지 않고 할 수 있으면 감추려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약한 것들을 오히려 자랑했다고 했습니다. 상황이 변한 것은 없습니다.
기도응답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고통은 계속되고 있고, 자신은 더 약해졌는데, 인간적으로 볼 때,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는 오히려 이것들로 인해 크게 기뻐하고 약점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해가 안 되는 구절은 오늘 본문 10절 말씀입니다. 여기서는 자기 삶에 있는,
안 좋은 것들만 골라서 얘기하면서, 나는 기뻐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 이런 것들은 자랑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알면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숨겨야 할 것들이요. 없애버리고 싶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것들로 인해서 오히려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사람입니까 신입니까?
어떻게 이런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한 일들로 기뻐하고 자랑할 수 있습니까?
쉽게 말해 하나님이 해주신 것이 하나도 없고, 된 것도 없는데, 뭐 좋다고 자랑할 게 있습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분명히 이 일로 인해 기뻐하고, 자랑까지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를,
괴롭히는 고난 가운데서도 그렇게 기뻐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바울이 깨달았던 하나님을 우리가 깨닫는다면, 우리도 바울처럼 고백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고난에 메이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 고난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비록 하찮은 것이라도 우연히 이루어지는 일은 없고,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알았습니다. 오늘 본문 7절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고난을,
언급하면서 두 번씩이나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시려고, 나를 쳐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려하심이니라." 아멘! - 사도 바울은 지금 자신이 받은 질병의 고난에는,
자신이 너무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분명한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고난은 이유 없는 고난이 아니라, 이유 있는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고난은 좋은 것은,
아니지만 고난만이 이룰 수 있는 일이 있기에, 하나님은 아픔지만 기꺼이 고난을 주신 것입니다.
살이 썩어 죽어 가는 사람에게는, 수술해서 썩은 살이 다른 곳으로 번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아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즐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고통을 당하여 신음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셔서, 자신이 먼저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 대신 고난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실 때에는,
그 무엇인가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신비한 이유가, 우리 하나님에게는 분명히 있습니다.
이처럼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 속에는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 때,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괜한 시간낭비나 헛수고가 아닌, 의미 있는 고난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당하고 있는 모진 시련과 고난은, 시간낭비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기막힌 계획이 있습니다. 적어도 재수 없어서 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고난을 주신 것은, 그 고난을 통해서 겸손하게 만들어 하나님께서,
계속 쓰시겠다는 의도가 있으셨습니다. 교만하면 끝입니다.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쓰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시를 줘서라도 겸손케 하여, 계속해서 쓰시겠다는 하나님의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시가 있다는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사도 바울은 고난은 결국 네게 유익을 가져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가 견디기 힘든 고난 가운데 있을 때에, 제일 속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괜한 고생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입니다. 고난 때문에 손해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은 절대 헛수고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성경 말씀대로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우리가 지독하게 겪고 있는 개개의 사건을 놓고 보면, 내게 유익이 없고 상처와 아픔만 주는,
것만 같았는데, 이 모든 것을 합해서 보면, 그 나름대로 큰 유익이 네게 있음을 알게 됩니다.
지금 고난 중에 있습니까? 이 고난을 통해 앞으로 경험하게 될 유익과 축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지금 고난도 견딜만해집니다. 그리고 반드시 이길 힘도 얻게 되는 것을 체험합니다.
가끔 오해를 받고, 억울한 말을 들으면 무척 스트레스가 되고 힘이 들기도 합니다.
같이 맞서 싸울 수도 없고, 가만히 있자니 너무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도저히 참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기도 할 때면 "주여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는 기도만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내 사정, 내 형편을 하나님 앞에 다 털어놓고, 그냥 참고 견디면서 며칠 앓고 나면 괜찮아지고,
괜찮아지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제 경험으로 보면, 이렇게 고난을 당하고 나면,
그 다음에 반드시 좋은 일이 생겨집니다. 그래서 지금 애매한 고난을 당하면, 괴롭고 힘들지만,
괴롭고 힘든 가운데서도 무엇인가 기대가 됩니다. '이번에는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이런 일을 경험하면서 제가 깨달은 게 있습니다. 내게 임하는 고난은 깨닫는 자에게는 은혜요.
또 지금 임하는 고난은 축복의 통로라는 것입니다. 고난 없이는 하나님의 축복은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고난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오고, 이 통로를 거친 사람에게만 고난이 축복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고난은, 파멸이 아니라 유익이요. 축복입니다.
셋째로, 사도 바울은 고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본문 9절 중간과 하반 절 말씀을 보시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백하며 말씀합니다.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질병으로 고통가운데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바울 안에 예수 그리스도는 더욱 드러났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은 우리가 약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더욱 드러나게 됩니다.
강한 자가 존중받는 것은 세상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약한 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사도 바울의 평생 소원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약해져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면,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기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질병이나 고난이나 시험으로 약해졌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염려는 무엇입니까?
정말로 믿음이 있는 성도는 ‘나 때문에 하나님 영광 가리우면 어쩌나?’ 하는 것입니다.
내가 병이 들면 믿는 사람들이 아프기도 자주 한다고 할 것이고, 내가 가난하면 믿는 사람도,
하나님의 복을 못 받아 가난하다고 말하고, 내 자녀들이 잘 안 풀리면 손가락질 할 것 같고.....,
그런데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약한 것은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라고 말입니다.
병약한 사람을 들어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지를 보여줌으로 인해 영광 받으시고,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을 통해 부자나 학식 있는 자들이 못하는 일을 하게 하여 부끄럽게 하고,
개망나니 같은 사람을 변화시켜 새 인생 살게 하심으로, 주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의 한계를 느끼고, 좌절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는 고난을 만날 때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문제가 많고, 고난 받는,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가를 알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바울은 고난을 통해 약하게 만드는 것이 결국 강하게 만듬을 알았습니다.
오늘 본문 10절 하반 절입니다.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믿습니까?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 나는 약해질 데로 약해졌는데, 그때가 가장 강해진 때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나를, 지금의 여러분을 만드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영원한 약자는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그 약함이 도리어 강함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들어서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기에, 하나님 손안에서는 영원한 약점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약함이 강함 되는 하나님의 역사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은 이런 일에,
전문가이신데, 정작 우리 사람들이 자기들의 약점을 하나님께 내어놓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숨기려고만 합니다. 하나님은 약점을 강점되게 만드는 전문가입니다. 약한 것을 내어놓으십시오.
여러분! 성경의 믿음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약점을 하나님께 드려서 강해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은 약점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약점을 하나님께 드렸던 사람들입니다.
위대한 음악가 베토벤은 귀가 먹고 나서, 더 위대한 작품들을 만들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병치레를 많이 하는 사람이었지만,
목숨 걸고 종교개혁을 이루어 냈습니다. 그가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 개신교가 있게 되었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장애인이었지만, 지금까지도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카터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무능한 대통령으로 불렸으나, 은퇴 후 전 세계 어느 곳이나,
분쟁이 있는 곳에는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었고, 북한도 인정하는 지도자 중 한 사람입니다.
제니라는 미국인은 얼마나 못생겼는지, 그 외모 때문에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던 사람입니다.
심지어는 부모조차 딸이 죽어버리면 좋겠다고 할 만큼 못생겼습니다. 거기다 너무 살이 쪄서,
뒤뚱거리며 걷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못난 여인을 들어서 한 교회의 주일학교를,
크게 부흥시켰습니다. 8백 명의 아이들이 다니는 주일학교를, 3만 3천명으로 늘려놓았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가시 때문에 못살겠다고, 가시만 제거해 주시면 정말 기쁘겠다고,
하나님께 구하며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가시를 제거해 주지 않고, 오히려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가시를 갖고 있으면서도 기뻐하고, 더 즐거워하고, 자랑까지 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가시가 있는데도 즐거운 사람, 고통이 있지만 그것 때문에 더 자랑하는 사람, 더 강해진 사람,
이런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믿음을 가진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바로 그런 그리스도인임을 믿으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고난, 어떤 시련 가운데 있습니까?
그 고난과 시련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해도, 지금 여러분을 더 약해지게 만드는 고난은 무엇입니까?
"이 고난만 없어지면 춤이라도 추겠는데, 이 고난만 해결되면 하나님 영광 드러날 텐데..." 하는,
고난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이런 것을 없애지 않고도 여러분들로 춤추게 하고 강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주어진 고난을 받아들이십시오. 고난은 자아를 깨뜨리기 위해 사용하는,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주어진 고난을 수용하고, 순종하고, 감사할 때,
지금의 못나고 연약하고 한없이 부족한 나의 자아는 깨어지고, 하나님의 은혜는 임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거부하고, 도망가려고 하면, 원망하게 됩니다. 불평하게 됩니다. 죄 짓게 됩니다.
그리고 고난은 하나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은 더 강한 족쇄로 나를 조여 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주신 삶이 여러분에게 주신 최선의 삶임을,
믿으십시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필요하기 때문에 주신 것이라 확신하고 믿으십시오.
우리가 약할 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히 드러나는 때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찬양하겠습니다. / “약한 나로 강하게.....”
♬ 1.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 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 당한 어린 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2. 내가 건너야 할 강, 거기서 내 죄 씻겼네. 이제 주의 사랑이, 나를 향해 흐르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 당한 어린 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