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생가에 도착하여 우리는 스케즐 때문에 제일 먼저 다도체험을 했단다.


얌전하게 앉아서 어떻게 차를 만들고 마시는지에 대한 설명도 듣고,,,



차를 마시는 예법도 익히고 마셔도 보고,,,

다른친구는 어떻게 마시나 보기도 하고,,,ㅎㅎㅎ

어떻게 마시는지 봤으니 나도 마셔볼까???



















다도체험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우리는 정약용이 설계한 배다리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단다^^

당시 조선에는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없었다. 그는 뚝섬에 배다리를 놓아 사도세자의 유골을 옮기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때 축적한 기술을 바탕으로 1795년 대규모 왕실행렬이 수원을 방문 할 때 공사기간을 대폭 단축해 노량진에 배다리를 놓아 말 779필과 인원 1779명이 건너갔다고 한다.






정약용 묘

여유당
다산 정약용의 생가인 여유당은 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에 있다. 당시는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였는데 지금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75의 1번지로 변경되어 있다.
이곳을 그 옛날에는 소내 또는 두릉 이라고 했고, 다산의 5대조부터 여기에 자리를 잡았다. 여유당은 지금은 팔당 호숫가의 집이지만 당시에는 그윽한 강마을의 저택이었다.
다산은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고 이집 뒷산에 묻혔다. 다산 정약용이 살던 여유당은 1925년 대홍수 때 떠내려갔고, 팔당댐이 생기면서 옛 마을은 모습을 잃게 되었다. 그러다가 1975년에 20칸만 복원한 것이 지금의 여유당이다.
다산은 1800년 정조 서거 후,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겨울 시내를 건너듯 신중하게 하고 사방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는 노자의 말을 빌려 ‘여유당’이라는 당호를 짓고 칩거했다.
그렇게 조심했던 다산이었건만, 결국 유배객이 되어 강진에서 18년간 귀양살이를 보내고 나이57세가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75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여유당에 머물며 자신의 학문을 정리하였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열심히 자료집을 풀고 있는 친구들...
얼마나 열심히 하던지 자료집에 있는 문제가 부족하다고 더 많이 만들어 달라고............와우~~!!

자료집 문제를 모두 풀고나서...
헉!!! 이제는 사회교과서로 수업까지 했다는...............


답사를 떠나기 전날
남한산성 답사는 무척 힘들꺼라고 해서인지 너희들이 생각보다 덜 힘들어 하는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쵸코렛과 젤리와 그리고 사탕 등등으로 너희들을 유혹(?)해서 끝까지 답사를 잘 마친것에 대하여 쌤은 기쁘게 생각한단다.
뭐든지 열심히 하는 고인돌 친구들 정말 멋지고,,,
다음달은 1박2일 답사지???
우리 다음달에 김해답사에서 건강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만나자^^
더운데 건강에 신경 많이 쓰고 부모님께 효도하는 착한 아들.딸이 되렴....
싸랑한다 고인돌 친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