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지은 성당이다. 저번에 갔을땐 공사중이더니 거의 완공이 된 모습이다.
십자가의 길이다.
막연하게 교회를 다니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천주교 성지를 둘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제 1 처 : 예수님께서 사형선고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제 2 처 :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제 3 처 : 예수님께서 기력이 떨어져 넘어 지심을 묵상합시다.
제 4 처 :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만나심을 묵상합시다.
제 5 처 :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 짐을 묵상합시다.
제 6 처 : 베로니카 수건으로 예수님이 얼굴을 닦아 드림을 묵상합시다.
제 7 처 : 기력이 다하신 예수님께서 두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제 8 처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을 묵상합시다.
제 9 처 : 예수님께서 세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제 10 처 : 예수님께서 옷 벗김 당하심을 묵상합시다.
제 11 처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묵상합시다.
제 12 처 :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제 13 처 : 제자들이 예수님 시신을 시자가에서 내리심을 묵상합시다.
제 14 처 :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을 묵상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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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朴) 프란치스코(1835-1868년)
1835년에 태어난 박 프란치스코는 장성한 뒤 오(吳) 마르가리타와 혼인하여 충청도 청주에서 살았다. 그 후 이들 부부는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안전한 곳을 찾아 아들 4형제를 데리고 진천 절골(현 진천군 백곡면)로 이주하여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였다.
프란치스코의 가족은 절골에서 약 2년 동안 평온하게 생활하면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나 1868년에 이르러 박해가 더욱 거세어지면서 다시 위험에 처하게 되었고, 그 해 9월 5일(음력 7월 19일)에는 마침내 경기도의 죽산 포졸들이 절골로 들이닥치게 되었다.
이때 프란치스코의 가족은 포졸들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산중으로 피신하던 도중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 중에서 프란치스코의 아내 마르가리타는 어린 자식을 업고 산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많은 매를 맞아야만 하였다.
한편 가족들의 사정이 궁금해진 프란치스코는 동정을 살피기 위해 산에서 내려온 후 그 동네의 한 비신자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러자 그 비신자는 프란치스코에게 ‘내 집에 자면서 동정을 살피는 것이 마땅하다’고 안심을 시켰다. 그런 다음 밤중에 뒤로 빠져나가 포졸들에게 프란치스코를 밀고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체포되어 아내 마르가리타와 함께 죽산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후 프란치스코는 옥중 생활을 하는 동안 동생 필립보와 맏아들 안토니오에게 소식을 전하였는데, 특히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당부가 들어 있었다.
“어린 조카들을 잘 보살피면서 진정으로 천주님을 공경하고, 천주님께서 안배하시는 대로 순명하여 나의 뒤를 따라오도록 하여라.”
그 후 이 편지는 집안에 남아 있던 성물과 함께 박해 중에 소실되고 말았다고 한다.
프란치스코와 마르가리타 부부는 이후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켰다. 그런 다음 1868년 9월 29일(음력 8월 13일) 죽산에서 함께 순교하였으니, 당시 프란치스코의 나이는 33세였다.
오(吳) 마르가리타(?-1868년)
오 마르가리타의 출생지와 천주교에 입교한 사정은 알려져 있지 않고, 훗날 박 프란치스코와 혼인하여 충청도 청주에서 살았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다. 그 후 이들 부부는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안전한 곳을 찾아 아들 4형제를 데리고 진천 절골(현 진천군 백곡면)로 이주하여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였다.
마르가리타의 가족은 절골에서 약 2년 동안 평온하게 생활하면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나 1868년에 이르러 박해가 더욱 거세어지면서 다시 위험에 처하게 되었으며, 그 해 9월 5일(음력 7월 19일)에는 마침내 경기도의 죽산 포졸들이 절골로 들이닥치게 되었다.
이때 마르가리타의 가족은 포졸들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산중으로 피신하던 도중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 중에서 마르가리타는 어린 자식을 업고 산에 숨어 있다가 가장 먼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많은 매를 맞아야만 하였다. 한편 가족들의 사정이 궁금해진 남편 프란치스코는 동정을 살피기 위해 산에서 내려왔다가 한 비신자의 밀고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렇게 체포된 마르가리타 부부는 함께 죽산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후 남편 프란치스코는 옥중 생활을 하는 동안 동생 필립보와 맏아들 안토니오에게 소식을 전하였는데, 특히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당부가 들어 있었다.
“어린 조카들을 잘 보살피면서 진정으로 천주님을 공경하고, 천주님께서 안배하시는 대로 순명하여 나의 뒤를 따라오도록 하여라.”
그 후 이 편지는 집안에 남아 있던 성물과 함께 박해 중에 소실되고 말았다고 한다.
마르가리타와 프란치스코 부부는 이후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켰다. 그런 다음 죽산에서 함께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8년 9월 29일(음력 8월 13일)이었다. [출처 : 이상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2003년]
김 도미니코(?-1866년)
순교자 ‘김 도미니코’는 박해를 피해 깊은 산속에 숨어 평온히 주님께 의존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천주교 신자인 것을 안 마을 사람 10여명이 찾아와 열일곱 살 난 그의 딸을 겁탈하려고 딸을 내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힘이 센 김 도미니코의 둘째 아들이 누이동생을 데리고 산으로 피하며 따라오는 사람은 돌로 쳐 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순교자 김 도미니코에게 딸을 내놓지 않으면 포졸을 데리고 와서 너희 가족을 몰살하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그래서 순교자 김 도미니코는 여러 가족을 생각하여 할 수 없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딸을 그들 앞에 내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갖은 모욕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고수하다가 마침내는 순교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여기중(?-1866년)과 여정문(?-1867년)
순교자 여기중은 한 가족 3대가 한 자리에서, 순교자 여정문은 아내와 어린 아들과 함께 한날 한 자리에서 순교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국법으로도 부자를 한 날 한 시 한 장소에서 처형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죽산 순교성지에서는 부자가, 부부가 한 날 한 장소에서 처절하게 처형되었습니다. [출처 : 죽산순교성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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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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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용차> 중부 고속도로 일죽 IC를 나오며 바로 안성 방면으로 우회전 하면 왼편으로 광장 휴게소가 보인다. 휴게소 앞 첫 신호등에서 좌회전해서 약 800m 직진하면 죽산 성지가 나온다.
<대중교통> 1) 남부 터미널 : 안성행(죽산 하차, 1시간 소요) 2) 동서울 터미널 : 안성행(죽산 하차, 1시간 소요) - 죽산 하차 후 일죽행 시내버스를 이용 광장 휴게소에서 하차하여 도보로 이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