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최명길의 졸기를 보면, 그가 동시대에 선비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의 인물 됨됨이를 가리쳐 실록 찬자(撰者- 글을 지은 사람)는 “기민하고 권모술수에 능했다”고 했다. 더욱이 화의론을 주장하여 선비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내용까지 노골적으로 쓰고 있다. 남한산성의 변란 때에는 척화를 주장한 대신을 협박하여 청나라에 보냄으로써 개인감정을 풀었고, 환도한 뒤에는 바르지 못한 사람들을 등용하여 사류와 알력이 생겼다고 했다. 그러나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하였으니, 역시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 평가했다.
최명길의 졸기는 척화론의 영수였던 김상헌의 졸기와 비교해 볼 때 초라하고 평가절하된 모습이 역력하다. 최명길은 인조반정의 핵심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조 묘정에 배향되지도 못했다. 세월이 흘러 숙종이 인조 묘정에 다시 배향하라고 했으나, 사헌부의 반대로 끝끝내 배향되지 못했다. 반면, 김상헌의 척화론은 송시열의 숭명배청(崇明排淸) 이데올로기로 이어지면서 노론 정국 속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자손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주역이 된 반면, 최명길의 후손은 증손자대 이후로는 크게 현달하지 못했다. 실록 찬자는 김상헌의 길고 긴 장문의 졸기 말미에 그를 가리켜 “문천상(文天祥)이 송나라 삼백 년의 정기(正氣)를 거두었다고 하는데, 문천상 뒤로는 동방에 오직 김상헌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라고 극찬했다.
서인정권의 외교 실책과 병자호란
인조반정의 가장 큰 명분 중의 하나는 친명반청(親明反淸)이었다. 광해군을 밀어내고 정권을 잡은 세력들은 ‘도덕적 가치’를 내세운 정권답게 광해군의 중립외교 대신에 명과의 의리를 중시하는 도덕외교를 구사했고, 이는 결국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으로 일어났다. 정묘호란으로 후금과 조선은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최명길은 이 시기부터 후금과의 화친을 주장하였다.
정묘화약을 맺은 이후 후금군은 철군했다. 그러다가 1636년(인조 14년) 중원을 장악한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는 종전의 입장을 바꿔 조선에 ‘군신관계’를 강요했다. 청조의 요구에 불쾌한 인조는 청과 일전을 불사르겠다는 일념으로 척화파를 지지하였지만, 채 전의를 갖추기도 전에 청군은 압록강을 넘고 있었다. 청과의 일전에서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간파한 최명길은 인조가 강화도로 하루빨리 옮겨가기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36년 12월 8일 압록강을 넘은 청군은 6일 만에 서울 근교까지 진출하였고,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하게 서울과 강화도를 연결하는 길을 차단했다. 강화도행을 포기한 인조는 우왕좌왕하면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갔고, 남한산성의 항전은 청군의 위협 외에도 거센 눈보라와 맹추위와도 싸워야 하는 악조건 속에 진행되었다. 이제 조선 정부는 전쟁을 계속할 것인지, 청과 강화를 맺어야 할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1637년 1월 23일 밤, 청군은 남한산성의 공격과 함께 강화도를 공격했다. 강화도가 점령되고 위기감이 고조되자 성내는 척화에서 강화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결국 강화가 성립되어 결국 1월 30일 인조는 항복 의식을 거행하는 수모를 겪었다.
항복 문서를 쓰다
최명길이 강화를 청하는 국서(國書)를 지은 날이 1637년 1월 18일이었다. 척화파인 김상헌이 그 글을 찢고 대성통곡하여 울음 소리가 임금의 거처까지 들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김상헌은 최명길을 향해 “그대의 아버지는 자못 명성이 사우(士友) 간에 자자하였는데, 공은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하는가.”라며 꾸짖었다. 최명길은 “어찌 대감을 옳지 않다 하겠소. 그러나 이는 곧 부득이한 것입니다.” 하고, 빙그레 웃으며 “대감은 찢었으나 나는 이것을 주워 붙여야 합니다.” 라고 하면서 청(淸)에 보내는 답서를 다시 주워 모았다.
강화를 향한 최명길의 의지는 단호했다. 당시 항복 문서를 작성하는 최명길을 만난 김류는 “내 뜻은 그대와 다를 것이 없으나, 다만 선비들의 공론은 어찌하겠는가?” 물었다. 이에 대해 “우리들이 비록 만고의 죄인이 될지라도 차마 임금을 반드시 망할 땅에 둘 수는 없으니, 오늘의 화친은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 답했다.
최명길의 강화론은 간단했다. 청군에 대항해 봐야 힘이 미치지 않는데, 만약 싸우게 되면 나라가 절단난다는 것이다. 비록 비굴한 모양새를 취하더라도 나라만은 지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그는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후금의 사신을 불필요하게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그의 외침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없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싸우자는 소리만 외칠 뿐이었지 실제로는 아무런 방책도 없이 우왕좌왕 할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수많은 백성들의 시체가 산처럼 높아져만 갔다.
심양에서 만난 척화파 김상헌과의 화해
강화가 이루어 진 뒤 최명길은 명나라 황제에게 ‘조선이 청과 강화를 한 것은 종묘 사직을 위하여 보존하기를 도모한 것일 뿐’이라는 내용의 자문(咨文- 외교문서)을 보내고자 했다. 요동을 지키는 청의 눈길을 피해 바닷길로 은밀하게 보내야했다. 1638년 가을에 강가에서 경비하던 군사가 독보(獨步)라는 이름의 중을 데리고 왔는데 최명길은 이 사람에게 명나라에 자문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겼다. 자문은 마침내 명나라 황제에까지 전달 되었다.
최명길은 1642년(인조 20)에 명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청국에 소환되었다. 최명길은 용골대의 심문을 받았다. 그는 왕은 모르는 일이고 자기가 전적으로 한 일이라 했다. 이윽고 수갑과 쇠사슬이 채워진 상태로 심양 북관(北館)에 갇혔는데 북관은 사형수를 가두어두는 감방이었다.
이듬해 4월 최명길은 북관에서 남관으로 이관되었는데, 당시 남관에는 김상헌이 수감되어 있었다. 주화파와 척화파의 대표가 나라를 위하다가 청나라의 감옥에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운명적으로 다시 만난 것이다. 최명길은 김상헌이 명예를 위하는 자라 판단하고 정승 천거에서 깎아버리기까지 하였는데, 같이 구금된 상황에서 죽음이 눈앞에 닥쳐도 확고하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고 드디어 그의 절의를 믿고 탄복하였다. 김상헌도 최명길을 남송(南宋)의 진회(秦檜)와 다름 없는 인물로 보고 있었는데, 그가 죽음을 걸고 스스로 뜻을 지키며 흔들리거나 굽히지 않는 것을 보고 그의 강화론이 오랑캐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두사람은 서로 마음을 풀고 시를 지으며 우정을 나눴다.
양대의 우정을 찾고 / 從㝷兩世好 백 년의 의심을 푼다 / 頓釋百年疑
김상헌의 시를 받은 최명길이 답시를 주었다.
그대 마음 돌 같아서 끝내 돌리기 어렵고 / 君心如石終難轉 나의 도는 둥근 꼬리 같아 경우에 따라 돈다네 / 吾道如環信所隨
머나먼 타국에서 옥살이를 하는 동안 그들은 서로 방법이 달랐을 뿐, 나라를 위한 마음은 같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화해한 것이다.
마침내 최명길은 1645년(인조 23) 3월에 풀려나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60세. 이제 병들고 늙은 몸만 남아 있는 노인이었다. 귀국한 지 2년 후 병으로 누운 뒤 인조가 직접 문병을 갔으나 일어나지 못하고 5월 17일 62세를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후세의 평가
경기도 광주 출신의 실학자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은 훗날 광주부지를 만들다가 남한산성의 일을 떠올리며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서 최명길을 가리켜 ‘나라 팔아 먹은 자’라 했다. 그가 죽은 뒤에도 조선시대 사류들이 어떤 평가를 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생각하면 그 옛날 최 승상은 / 憶昔崔丞相 오랑캐 추장을 자주 가 만났는데 / 頻頻使虜酋 초구 내린 황은이 중하다고 / 貂裘皇恩重 절 세 번에 아홉 번 머리 조아렸네 / 三拜九叩頭
(중략) 오랑캐 세력이 아무리 무섭다 해도 / 虜勢雖云怕 명 나라 은혜는 잊지 말았어야지 / 皇恩不可忘 일단 군대를 모집하여 / 徵兵一段事 힘으로 싸웠어야 할 것 아닌가 / 當以力爭防
우리 나라가 삼백 년 동안 / 聖朝三百載 선비 양성하여 어진 신하 있었건만 / 養士得賢臣 마침내 지천(최명길) 같은 자는 / 到底遲川子 결국 나라 팔아먹은 사람이지 / 竟將國賣人 (출전 : 한국고전번역원 )
최명길 만큼 후세의 논란이 많은 인물도 많지 않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조선사회는 더욱더 의리나 대의명분을 중요시하는 사회가 되었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객관적일 수 없었다. 최명길의 손자 최석정은 할아버지의 묘지명을 남구만(南九萬, 1629~1711)에게 부탁하면서 ‘의리’라는 이름으로 할아버지 최명길의 행적을 변호하고자 했다. 최석정의 간절한 부탁을 받은 남구만은 최명길의 묘지명을 쓰긴 했으나 끝내 ‘의리’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최석정은 남구만의 비문을 버리고 박세당(朴世堂, 1629~1703)에게 다시 묘지명을 써달라고 했다. 반면에 서포 김만중은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키는 것은 지나친 일이라 하고 최명길을 ‘자기가 맡은 직분을 다한 자’라 평가했다. 그러나 현실은 조선후기 정치의 장에서 소외된 인물이었고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그의 양명학적 사유나 상수학(象數學)은 그의 아들을 거쳐 손자인 최석정으로 계승되었지만, 조선후기 주류 사상은 되지 못했다. |
첫댓글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가면 최명길 선생의 묘소와 신도비를 볼 수 있음.
한시대를 풍미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후세에 역사가 말해주는 것...실리냐 대의명분이냐...보는 관점에 따라 각인각색...
영의정 남구만이 쓴 호패비는 도끼로 쳐 조각이 난 것을 쇠로 보호대를 해서 서있었는데 그 분의 글씨는 개성이 너무 강하더군.. 그래도 영상인데.. 아마 안진경체로 기억이 나던데..목베고 밥 먹나 ?실리를 취한 것은 잘 한일이지. 노론이 잘한 것이 있겠지만 지금 평가로는 글쎄다 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호란은 없었겠지 않았을까!
잘 읽었네 419 516 다 병자호란 상황의 인물들의 역사 아닌가 518도 같은 맥락
역사는 이긴자의 기록이고 산자의 명분 아니던가 사천재훈 글자 키우 라고 돋보기도 잘 안보인다 건강해라 한가할 때 한바람하자
회덕송공 석균교감 고정칼람 하나 맞게나? 대문의 이름을 지어 이곳에 답을 쓰게 ,삼일 이내에 댓글이 안 오르면 내가 작명하여 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