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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주화론(主和論)을 이끈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은 조선사회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가장 암울한 시기에 활동한 정치가이자 학자이다. 그의 주화론은 척화론(斥和論)의 대표자인 김상헌(金尙憲, 1570~1652)과 줄곧 비교되면서 조선후기 사회를 유지하는 지표 역할을 하였다.
최명길이 살았던 시기의 조선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사상 모든 방면에서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현실적이고도 개혁적인 이념은 퇴조하고 보수적인 사림정치가 무르익어가면서 명분론과 예론(禮論)이 고개를 들기 시작할 때였다.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이 국토를 피폐하게 만들었고, 양반의 면세와 면역으로 국가재정은 궁핍해져 갔다. 신분 질서 또한 서서히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인조를 지지한 반정 1등 공신
최기남은 우계 성혼의 문인으로 1591년(선조 24) 정철의 건저문제(建儲問題- 선조 24년에 왕세자 책봉 문제를 둘러싼 동인과 서인간의 싸움)로 서인이 실각당할 때 이에 연좌되어 과거시험을 볼 자격을 잃기도 했으나, 1600년(선조 33)에 벼슬길에 들어와 왕자들의 사부로 임명될 정도로 학식을 인정받은 인물이다. 최기남은 모두 5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인 몽길이 일찍 죽고 그 아래 둘째가 래길(來吉)이며 셋째가 명길이다. 그 밑으로 혜길(惠吉)과 만길(晩吉)이 있다.
최명길의 묘는 충북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있지만, 태어나기는 1586년(선조 19) 금천에서 태어났다. 자는 자겸(子謙)이며,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지천(遲川)이다. 8세 때에 "오늘은 증자(曾子)가 되고 내일은 안자(晏子)가 되며, 또 그 다음 날엔 공자(孔子)가 되리라."라고 맹세해 부모를 놀라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항복(李恒福)과 신흠(申欽)에게 배웠고, 조익(趙翼)•장유(張維)•이시백(李時白)과는 절친한 사이였다.
최명길은 20세 때인 1605년(선조 38) 한 해에 소과와 대과시험을 모두 통과해 내는 천재성을 발휘했다. 중앙 정부에 진출하여 홍문관 전적이 되었지만, 북인의 권력독점이 심화되던 1614년(광해군 6)에 병조좌랑에서 삭직(削職-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명부에서 이름을 지움)되었다. 이후 선조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유폐되자 이귀(李貴)가 중심이 된 반정계획에 참여하였다. 인정반정의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그 공이 인정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후 반정 정권의 핵심 인물로서 이조좌랑에서 이조참판에까지 출세길을 달렸다.
사류 배척을 받은 인물
그러나 사류들의 배척과 달리 인조의 여전한 신임으로 이조판서가 되어 대제학을 겸하였고 호조와 병조판서를 역임하던 중 병자호란을 당하였다. 김상헌을 중심으로 한 척화론에 맞서 적극적으로 화의를 주장하여 또 한 차례 사류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지만, 위기에 대처한 공로로 우의정 및 좌의정 자리에까지 올랐다.
조선시대에 할아버지와 손자가 모두 정승 반열에 오른 인물로 15가문을 꼽을 수 있는데 최명길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숙종대 영의정을 지낸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이 바로 그의 손자이다. 최석정은 영의정을 무려 8번 역임한 인물로 할아버지의 학문을 이어받아 이념적으로는 양명학적 경향을 띠었고, 수학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던 인물이다.
최명길은 병조판서를 지냈고 인조조에 도원수를 지낸 장만(張晩, 1566~1629)의 딸을 아내로 맞았고, 이후 허린(許璘)의 딸을 후처로 맞았다. 장만은 사위와 함께 인조반정을 도왔고, 이괄의 난을 진압한 문관 출신의 장군이다. 최명길은 후량(後亮)과 후상(後尙) 두 아들을 두었는데, 후량은 동생 혜길의 아들을 양자로 들인 것이고, 후상은 후처에게서 낳은 아들이다. 손자인 최석정은 양자인 후량의 아들이다.
[현종개수실록]에는 화친을 주장한 부친과 관련한 두 아들의 일화가 전하는데, 최후상은 과거에 급제한 뒤 그를 음해하고자 하는 자가 강화도 시절의 일을 가지고 계속적으로 모함을 하자 원통한 마음을 품고 벼슬길에 나가려는 뜻을 끊어 버렸다. 최후량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 장수를 찾아가 자신이 최명길의 아들임을 밝히고 가족의 안위를 지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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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이라 지칭한 실록의 졸기
최명길의 묘소(좌)와 신도비(우).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 앞에 세워두는 것으로, 숙종 28년(1702)에 세워졌다.
비문은 박세당이 짓고 최창대가 글씨를 썼으며, 1980년 비의 보호를 위해 비각을 세웠다.
충북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 소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59호.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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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가면 최명길 선생의 묘소와 신도비를 볼 수 있음.
한시대를 풍미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후세에 역사가 말해주는 것...실리냐 대의명분이냐...보는 관점에 따라 각인각색...
영의정 남구만이 쓴 호패비는 도끼로 쳐 조각이 난 것을 쇠로 보호대를 해서 서있었는데 그 분의 글씨는 개성이 너무 강하더군.. 그래도 영상인데.. 아마 안진경체로 기억이 나던데..목베고 밥 먹나 ?실리를 취한 것은 잘 한일이지. 노론이 잘한 것이 있겠지만 지금 평가로는 글쎄다 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호란은 없었겠지 않았을까!
잘 읽었네 419 516 다 병자호란 상황의 인물들의 역사 아닌가 518도 같은 맥락
역사는 이긴자의 기록이고 산자의 명분 아니던가 사천재훈 글자 키우 라고 돋보기도 잘 안보인다 건강해라 한가할 때 한바람하자
회덕송공 석균교감 고정칼람 하나 맞게나? 대문의 이름을 지어 이곳에 답을 쓰게 ,삼일 이내에 댓글이 안 오르면 내가 작명하여 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