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구
광안동
광안동(廣安洞)에는 언제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동래부지(1740)』에 보면, 광안리의 기록은 없고 ''남문외리는 부에서 10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남촌면 축산동에 속하던 지역이다. 1903년에는 동래부 남상면 광안리라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수영중학교 부근을 장대골이라 하는데 이곳은 조선시대 군사시설의 하나인 장대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곳이라 한다. 또한 성분도치과 병원부근을 범바위골이라 하였다. 범의 형상을 닮은 큰 바위가 있었는데, 어느날 저녁무렵 이곳을 지나가던 나그네가 이 바위를 보고 범이 나타난줄 알고 혼비백산 기절하여 온 마을이 떠들썩했다. 이후부터 이곳을 범바위라 불러 지명으로 전래된 듯하다. 그러나 이 지명은 지금의 광안동 전체를 일컫는 것은 아니고 일부지역을 지칭하는 지명으로 보인다. 일제시기 구획정리로 수영동이 수영성을 중심으로 구획되자 나머지 지역의 덕명(德名)으로 지었는데, 광안동 지역은 해안과 모래벌을 가진 곳이라 넓은 해안이란 뜻의 광안(廣岸)이라 이름 짓는 것이 옳으나 풍수상으로 보아 광안(廣安)이라 명명하게 되었다 한다. 이곳은 경상좌도의 수군들이 바다를 방어하던 곳으로 바다가 널리 평안하다는 뜻에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하고 있다. 1975년 10월 광안1,2동으로 분동되었고, 1979년 8월 광안1동이 광안1,3동으로, 1982년 9월 광안2동이 광안2,4동으로 분동되었다. 자연마을로는 장대골마을, 호암마을, 강계진마을이 있었다.
남천동
남천동(南川洞)은 금련산에서 발원하여 수영만으로 유입되는 내(川)인 남천에서 비롯된 지명이다.『동래부지(1740)』의 산천조에는 남천이 없으나, 각면각리원근정도(各面各里遠近程道)조에는 "남촌의 1동 15리중에 남천리가 있으며 동래성으로부터 20리가량 떨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동래부지』산천조에는 남천포가 보이는데 "동래부 남쪽 20리에 위치하며 어장이 있다"고 한다. 이 어장의 일대를 남천만이라고 불렀던 까닭은 남천동은 남천만과 대연동사이의 모든 해안을 통칭하여 실제로는 대단위 광역의 지역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금련산에서 지금의 부경대학교 대연캠퍼스쪽으로 흘러내리는 내가 남천이다. 이 남천의 동쪽에 형성된 마을로, 지금의 남천동 아파트단지가 되기 전에는 바다는 남천포였다. 古老들에 의하면, 남천동에 마을이 형성된 것은 약 400년 전이었다고 한다. 마을 뒷산인 금련산 기슭의 가장골에 언제부터 있어왔는지 모르지만 동제당이 있었는데 일제시기 없어졌다가 최근에 다시 수리하여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다. 1953년 부산진구 대연출장소에 속했다가 1975년 10월 남구승격으로 남구에 속하게 되었다. 1983년 대단위 아파트단지 조성으로 남천1,2동으로 분동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남칭이마을, 일패마을, 이패마을, 삼패마을, 사패마을 등이 있었다.
망미동
망미동(望美洞)은『동래부지(1740)』에 동래부 남촌면의 북문외리· 서부리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이 일대는 넓게 보아 수영지역에 포함되나 수영동의 설치에 따라 배산(盃山)주변은 망미동으로 칭하게 되었다. 망미동이란 지명은 배산에서 유래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배산은『동래부지』산천조에 척산(尺山) 또는 배산(盃山, 또는 盈山)이라고 불리며, 산 위에는 김겸효(金謙孝)가 살았다는 겸효대(謙孝臺)가 있다고 전한다. 배산의 연산동 기슭에는 배미산신을 모시는 성황당이 있어 지금도 주민들은 이 산을 배미산(盃美山) 또는 잘미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수영동과 망미동 사이에 잇는 산을 망산(望山)이라 하는데 망미동은 망산의 망(望)과 배미산의 미(美)자가 합쳐서 된 동명으로 보인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망미동은 동래부의 고읍성(古邑城)이 있던 자리로 좌수영성의 북문 밖에 위치하며, 좌수영의 수사(水使)가 초하루와 보름에 망배(望拜)를 올렸는데서 임금을 사모한다는 뜻의 망미인(望美人)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1979년 1월 수영동에서 분동하여 망미동이라는 동이 생겼으며, 1982년 9월 신흥주택지의 조성으로 망미1,2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무덕동마을, 북외동마을, 홍정마을, 구락리마을이 있었다.
민락동
민락동(民樂洞)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 정확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인근 수영동에 경상좌도수군절제사영(慶尙左道水軍節制使營)이 설치된 조선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동래부지(1740)』나 그 이후의 다른『읍지』에도 민락이란 지명은 보이지 않는다. 일제시기 구획정리로 수영동이 수영성을 중심으로 구획되자, 이때 덕명(德名)으로 붙여진 지명이다. 따라서 민락(民樂)은 여민동락(輿民同樂) 여민해락(輿民偕樂)의 준말로 임금은 즐거움을 홀로 차지하지 않고 백성과 함께 즐긴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한다. 수영의 진산(鎭山, 지금은 백산이라는 산으로 추측된다) 앞의 동리이며 수영강의 어귀를 점한 유상처였던 까닭에 여러 사람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경치라는 데서 붙여진 동명으로 풀이된다. 또는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의 수사가 수졸을 호령할 때 진산(백산)에서 군악을 연주했는데 동네의 고로들은 이 군악이 연주된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나 이것이 옳다고 하기에는 그 의미가 부족하다. 1957년 1월 동래구 수영출장소 민락동이었다가 1975년 남구의 승격으로 남구에 소속되었다. 1995년 수영구 분구로 수영구에 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널구지마을, 보리전마을, 광기전마을, 백산마을이 있었다.
수영동
수영동(水營洞)은 조선시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있었다. 수영이란 이름은 수군절도사영의 약칭으로 관아명(官衙名)이 동리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된 것이다. 경상좌수영은『동국여지승람(1481)』이나『문헌비고(1770)』를 고찰해 볼 때 조선 태종 이전에는 부산의 감만포에 있었으나 태종 때 이를 울산 태현면(太峴面)의 개운포로 이전하였고, 이후 다시 동래 해운포는 오늘의 좌수영의 구성지(舊城址)가 있는 곳으로 옮겼다. 그러나 당시 사천(絲川)의 홍수로 말미암아 수로가 매몰되어 병선의 출입과 정박이 불편하여 인조 때에 다시 감만이포로 옮겼으나, 효종 3년(1652)에 다시 오늘의 좌수영에 옮겨 고종 32년까지 약 250년간 존치하였다. 수영에는 주위 1193보, 높이 13척의 수영성이 쌓여져 이 성의 내부만을 수영동이라고 하였다가 점차 확대되었다. 지금의 수영동에는 조선시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있었다. 그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을 줄여서 ''좌수영'' 또는 ''수영''이라 했다. 일반적으로 수군진영을 줄여서 말할 때는 ''좌수영''이라 했고, 지명을 말할 때는 ''수영''이라 했다. 1957년 구제 실시로 동래구 수영출장소 수영동이었다가, 1973년 3월 부산진구 대연출장소에 속하였고, 1975년 남구에 속하게 되었다. 1982년 5월 광안3동 일부를 수영동에 편입하였고, 1995년 3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남구에서 분구되어 수영구가 신설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남수마을, 모리진마을이 있었다.